과거 우리 직장에 계셨고, 지금은 갓 일흔이 넘은 K씨가 대구 주변에서 전화를 했다. 기초생활보조금으로 나온 돈 40만원을 모아 통장에 넣었는데 ‘지급정지’로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내 돈 40만원이 우애 모은 돈인데…”라며 울먹였다. 그이는 지급정지된 통장에 그 돈을 입금한 것이다. K씨는 그의 아들이 방탕한 생활로 빚을져, 그 빚을 갚느라 가진 재산 다 없앴다. 또 위암 수술 후유증으로 몸무게가 36키로 정도이다.
K씨는 나에게 해당 금융기관이 있는 안동에 함께 가서, 담당자에게 한번 사정해보자고 한다. 우리는 여신채권단 사무실에서 담당자를 만나 ‘돈 40만원’을 찾을 수 있도록 애걸복걸했다. 기초생활증명서와 장애인카드를 제출하겠으니 형편을 살펴 ‘선처’를 해 달라고. 허나 담당자는 현 제도상 다른 해결방안이 없다며,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다.
우리는 힘없이 안동 시장골목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금융기관 담당자가 우리를 보자고 했다. 그 담당자는 현금지급기에서 40만원을 빼어 가지고 왔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가 안동식혜 3잔을 주문하여 함께 마셨다. 그는 “아저씨, 저한테는 40만원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아저씨한테는 큰 돈인데, 워낙 아저씨 형편이 안타까워 제 개인돈 40만원을 방금 마련했어요. 희망을 잃지 말고 건강하게 사세요!”라며 현금봉투를 내놓는다.
나는 식혜를 마시던 식당에서, 아주머니 틈에 끼여 새알 마흔개를 비볐다. 새알은 우리 경상도 북부지역에서는 생알 또는 동글래미라고도 한다. 새알은 하늘을 나는 새의 알처럼 희고, 귀여워서 음식요리에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생알은 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이고, 동글래미는 동그라미 형상이어서 사투리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가 한다.
K씨는 “안동이 양반동네라더니 진짜 사람사는 마을이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일이 있나~”라며 절뚝이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나는 새알 한개씩을 둥글게 비비며 40의 의미를 생각했다. 인생이란 ‘사과 한개’를 보면서도 여인의 붉은 볼을 떠올리는 등 옛 추억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고, 새알심 40개와 같은 40만원을 찾으려고 마른 몰골로 삼백리길을 달려와 허둥버둥대는 K씨의 생애가 있음을.
올 여름도 끝물인가보다. 아니 벌써 가을 초입에 들어섰나보다.
추석 20일 전인 어제는 벌초 행렬로 고속도로가 밤 늦게까지 정체되었다고, TV 아나운서는 걱정스레 알린다. 다가오는 추석에는 동글래미를 내 손으로 빚어 맛있게 미역국(갱)을 끓여 하늘에 계신 분들께 올려야지.
또 맑고 투명한 정치기탁금 모금과 후원금 조성을 위하여, 생알 한알 만들고 모으듯이 추석연휴가 끝나면 거리에서 홍보를 하고, 단체와 이웃을 방문해야지. 1만원의 기부가 정치인의, 정당인의 입에 새알심 한개를 넣어주는 것처럼 격려가 되겠지. 또 10만원까지는 세액공제로 되돌려받는다 하지. 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은 이 돈으로 훌륭한 정책을 개발하여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보다 안온하게 만들어 줄거야. 내년 6월 2일 제5회 동시지방선거가 ‘새알처럼 맑고, 생알처럼 투명한’ 그러한 선거가 되기를 기대한다.
다가오는 추석은 직장 선배인 K씨가 ‘몸이 더 늘어나고, 새 통장에 자유로히 40만원이 적립되기를’ 한가배 보름달님께 앞당겨 빌어본다. 어렵사리 살아가는 K씨와 이러한 분들을 보듬어야할 정치인들 모두가 ‘기쁘고 떳떳하게’ 함께 손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대보름달 영상에 환하게 비친다.
나는 정성스레 말린 문경오미자 한 봉지를 대구 근교 K씨 사글세 방으로, 남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발목에 묶어 보낸다. 오미자 한 알이 새알 한 알처럼, 동글래미처럼 맛있게, 또 물결쳐 번져나가기를 바라면서.
내년 6월 2일 제5회 동시지방선거가 ‘새알처럼 맑고, 생알처럼 투명한’ 그러한 선거가 되기를 기대한다.
영신 숲에 대한 명상...
2009. 08.07(금) 14:18
문경시 선거관리위원회 안장수 사무국장,
‘영신이 지명이냐, 인명이냐?' 영순을 영신이라 부르는 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영신도령과 꺽지낭자’가 전설인 지, 근래의 스토리텔링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30여년전 점촌에서 일곱달동안 직장 첫 근무를 했을 때이다. 당시 내가 살던 자취방 윗채에는 문경종고(현 공고)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치던 정선생 가족이 생활하고 계셨다. 어느날 정선생님 가족이 나를 초대하여 영신유원지로 데려가 비빔밥을 사주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외식이라곤 몰랐던 직장 초년생인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혀끝에 달콤하게 살아온다.
그 당시 비빔밥을 먹었던 식당은 천변 초가집으로, 지금 매운탕식당 두어채 중의 한 곳인 듯 한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 7년만에 다시 점촌에 오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 같은 여름 어느날이다. 지금은 대학졸업반이지만 그때는 서너살박인인 딸애와 유원지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다 물청빛 슬리퍼가 물살에 벗겨저 민돛단배로 떠내려갔다.
자전거를 타고 영순교다리 밑에서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원양어선이 되어 지금도 대양 어디인가를 유영하거나 심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딸애 졸업식에는 그때 그 샌달을 선물하고 싶다. 그 몇년 후 단오날이다. 아낙네들이 영신숲에서 플라타너스 가지에 그네를 매고 하늘높이 솟아오르다 급강하한다. 속치마를 꽃닢처럼 펼치며 바람을 차고, 창공으로 오르는 점핑에 현기증을 느꼈다.
창포향기로 그날의 단오절이 청정하게 느껴졌다. 아마 요즘 단오절에 그네뛰기를 하지 않는 것은 나무를 시달리게하지 않게 하기위해서이리라.
상신기에 사시던 큰외삼촌은 때로 영신숲 방둑에서 피리낚시를 하시곤 했다. 외삼촌 말씀에 의하면, 예전에는 오늘의 세멘트다리가 없었고 섶다리가 두군데 있었다고. 섶다리는 장마에 떠내려가버리곤 한다고. 또 가뭄이 들때에는 버스가 영강천을 건너다녔다고, 말씀하신다.
영신은 영신(永新)이다. 영신들판, 영신 숲이다. 개성고씨인 흥운은 선조때 문과로 군수를 지낸 분으로 영신 숲을 조성하였다. 중시조인 말로공의 증손인 양경공 영신(令臣)을 기리기 위하여 영신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영신숲 초입에는 영강시인의 시비(‘道路考’)만 외로이 있을 뿐 영신숲을 조성한 ‘영신’이나 ‘흥운’ 같은 분의 치적을 기록한 비문하나 있으면 좋을텐데, 라고 되내어 본다.
그럼 영신도령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영강 김시종선생이 쓴 ‘영신도령’이란 수필이 서울신문(‘84년)에 게재된 바 있다. 그 내용을 양해를 구하고 기억을 되살려 옮겨본다. 돈달산 자락 아래엔 최부자댁이 살고 있었다. 최부자댁에는 장가도 들지못한 머슴살이인 영신도령이 기식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암룡이 나타나 ‘나의 신랑인 숫룡이 다른 암룡과 희희낙락한다. 모일 돈달산에서 다른 암룡을 없애주면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하였고, 깨어보니 이부자리 옆에 칼과 잿물이 놓여 있었다. 영신도령은 돈달산에서 포옹하는 숫룡과 다른 암룡을 보고, 암룡을 칼로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회생하지 못하도록 상처에 잿물을 뿌렸다. 그러고 난 후 꿈에 암룡이 울면서 나타났다. ‘영신도령, 당신이 죽인 것은 다른 암룡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낭군인 숫룡이에요. 우앨까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바는 들어줄께요. 과거 최부자만큼 너른 들판을 가지고 싶어 하지요. 영신들판에 차지하고 싶은 만큼 수숫대깃발을 꽂으세요.’ 깃발을 꽂고 난 후 곧바로 천지개벽할 정도의 우뢰와 폭우가 쏟아져 점촌 앞뜰은 물바다가 되었고, 돈달산 봉우리 하나가 떠내려가 송진쏘 부근의 단봉이 되었다.
영신도령은 영신들판의 주인으로 바뀌었다. 영신도령이 운동하던 바위가 ’턱걸이바위‘로 불리며 오늘날 과선교로 오르는 하신기 왼편 산비탈에 있다. 이상이 도서관에서 본 수필집에 실린 영강선생의 ’영신도령‘ 글에 대한 기억이다. 여기에다 한 장을 보탠다. 영신도령이 영신들판의 주인이되고 영강의 오석속에서 태극무늬 찬란한 큰 꺽지에 반하였다. 그 후 구랑리 오석골에 사는 꺾지아가미 문양을 한 낭자가 찾아와 가정을 이루고 다복하게 살았다고.
영신 숲에서 매아미소리가 ‘째르를를르~’ 이명현상으로 환청인양 들려온다. 이제 ‘산처럼 수려하게’라던 산림조합선거도, ‘영신들판처럼 푸르게’라던 점촌농협장 선거도 끝났다. 대홍수로 산봉우리에 ‘돈 궤짝’을 옮겨 달아 놓았다‘ 해서 ’돈달산‘이라고 한다. 산이 산소와 휴식 뿐만 아니라 볼거리와 먹을 거리로 우리를 살찌우고, 영강수로 빚은 영신들판 쌀이 농민들에게 풍요를 안겨주리라 믿는다.
저기 태촌 고상안 선생의 농가월령(農家月令)이 울려온다. ‘팔월이라 중추(仲秋)되니 백로(白露) 츄분 졀긔로다. ... 면화따는 다래키에 수수 이샥 콩가지요...나뭇꾼 도라올 제 머루 다래 산과(山果)로다.’ 이렇게 산과 강과 들은 조상전래로부터 우리의 핏속에 이어져왔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았던 투표율(산림조합 72,0%, 점촌농협 87.3%)이 입증하듯, 이번 조합장 선거는 대단한 경합을 이루었고, 투표하러온 농촌할아버지의 줄이 뱀꼬리처럼 이어져 시민회관투표소의 경우 중앙도서관 너머까지 뻗었을 정도였다. 이번 선거가 끝난 후에도 당낙간에 화합으로 시민과 조합원들이 상호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냉정하고 진정성있는 평가를 거쳐, 잘못은 바로잡고 잘된 점은 계승하여 내년 6월 2일 제5회 동시지방선거(8가지)에서도 바르고 깨끗한 선거가 되고, 진정한 주민자치의 축제가 되길 기대해본다.
저기 칠월칠석을 일주일 앞둔 오늘, 영신숲에서 영신도령이 꺽지낭자를 안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영강물은 햇볕에 은파의 선율을 연주한다. 아마 영신도령은 김룡리 댓골의 노총각이고 꺽지낭자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여인인 듯 하다. 다문화가정인 이들을 축하하듯 매미소리 다시 ‘째를를르~’하고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