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1일. 세계일주 항해 2일차 오전 9시.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리나 기저귀를 갈고, 빨래를 햇살 잘 비치는 쪽으로 옮기고, 어제 촬영한 데이터를 컴퓨터로 옮기고, 시동스위치 커버를 고정했다. 배에서의 하루는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난다. 아드리아해는 호수로 변했다. 바람도 파도도 없다. 아내는 스턴에 앉아 마늘을 깐다. 오트란토에 도착하면 닭백숙을 해 준다니 기대되네.
오전 내내 노고존이다. 바람은 8~9노트, 이번 항해는 완전히 기주항해 구간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바리 근방을 지나니 주변에 큰 배들이 많다. 견시를 게을리 할 수 없다. 아내는 어제 찍은 별 사진을 자랑한다. 밤이라 흔들리기는 했어도 누가 봐도 별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아내의 인생 추억이 된 것 같아 나도 만족스럽다. 햇살이 좋아 뱃전에 널은 리나의 내복빨래가 잘 마른다. 리나는 안전 줄 때문에 행동이 제약되어 불만인 것 같다. 바다에 안 빠질 만큼 길게 했더니 콕핏에 와 이것저것 눌러댄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안전 줄을 더 줄인다. 신기할 정도로 대상을 바꾸어 가며 말썽이다. 호기심이 많으니 좋은 요티가 되겠다. 할 수 없이 다시 뽀로로다. 필요악이다.
큰 배가 하나 지나가더니 낚시 어선이 보인다. 하늘엔 비행기가 쉴 새 없이 지나간다. 빠르다. 오래전의 나도 늘 저렇게 비행기를 타고 빠르게 살았다. 욕망을 쫒아, 왜 어디로 가는지, 뭐가 진짜 행복인지 모르고 달렸다. 이제 돛단배에 올라, 5.3 노트, 시속 10Km로 세상을 주유한다. 과거를 회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진 않는다. 이탈리아 도시 바리에서 30해리 떨어진 바다라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우리 배는 고립무원 외딴섬이 되었다.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가족끼리 아웅다웅 시간을 보낸다.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받지 않는 우리들만의 세상이다.
오트란토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한다. 빨래 세제를 사야한다. 바닷물로 세탁하고 상수로 헹군다는 계획. 레이마린 C80 기술자를 찾아 경고음이 나게 세팅 또는 수리해야 한다. 그래도 소리 말고는 기능이 잘되며 게인(Gain)만 잘 조정하면 위험물이나 다른 배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새것이나 최신형으로 바꾸자고 하는데, 가격은 70~80만원이지만 물건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을 거다. 다행이 그곳에 레이마린 대리점이 있다면 일은 수월하다. 아니면 계속 불면의 밤에 노심초사 항해하며 로마처럼 대형 마리나로 가야만 할 거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일은 없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있으니 조금 덜 고생하기를 소망한다.
오후 4시 30분. 아까부터 엔진을 끄고 범주를 하고 있다. 바람이 좌현 40도에서 클로스홀드로 들어온다. 풍속 12노트, 배속도 5.2노트. 나쁘지 않다. 15도 정도 좌현으로 틀어 육지와의 거리를 넓히고 싶지만 바람방향을 내 맘대로 하는 건 아니니 이대로 몇 시간 가보자. 문제는 전기다. 지금까지 마리나에서 육전 마음대로 쓰면서 배터리를 100% 충전 했었다. 이 배엔 1.5 Kw 인버터가 설치되어 있다. 바람이 맞지 않아서 메인 세일만 펴고1,200Rpm으로 기주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 700W 전자레인지를 돌려 음식을 데웠다. 그리고 전기담요를 밤새 켜서 잠을 잤다. 오전 8시에 전자레인지를 돌리니 인버터가 정지한다. 전자레인지 파워를 250W까지 낮추자 간신히 밥을 데울 수 있는 정도다.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 오후 3시경 바람이 좋아, 엔진을 끄니 배터리 파워가 70%다. 오전 내내 엔진을 돌렸는데, 충전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오토파일럿 시스템, 레이다, 무전기, 카메라 3대. 각종 전자 장비를 켜고, 핸드폰 2대, 위성전화기, 삼성 패드 등을 충전한다. 냉장고 두 대를 가동 중이다. 배터리에서 인버터 전기를 빼서 쓴다는 것은 무리 같다. 만약 바람이 좋아 엔진만으로 운항을 한다면 배터리는 얼마나 버텨 줄 것인가? 바람이 좋을 때를 가정해서 하루 8시간씩 1,400 RPM 미만으로 가동하면 경유 소모량이 시간당 2.1리터니까 대략 30일도 갈 수 있다는 계산이 틀려지고 있다. 배의 추진력이 문제가 아니라, 배터리 충전 때문에 엔진을 더 많이 켜야 한단 거고, 10일 이상 장거리 항해 시엔 배의 전력에 문제가 발생 할 수 있다는 거다. 젠장! 이다.
물론 이제부터 전기담요도, 인버터도, 육전 공급되는 마리나에서만 사용하겠지만, 때로 무전기도 끄고, 최대한 전기 사용량을 줄여야 한다. 오트란토 마리나에 도착하면 서비스 배터리와 전기 충전 및 전기 사용량 등도 면밀하게 점검해야겠다. 배의 발전기를 사용하면 기름을 얼마나 먹고, 얼마 만에 배터리를 완충하는지도 확인해야한다. 시동을 끄고 발전기를 사용하면서 배터리를 충전한다면 디젤유를 얼마나 절약할 수 있을까? 배터리 때문에 오토파일럿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진짜 곤란하다. 가능하다면 하루에 몇 시간 씩 발전기로 충전하고 이때 요리 등도 하는 방법을 고려해 본다. 지금은 범주중이고 배터리 충전을 위해 중립기어로 엔진가동중이다. 장거리 항해는 여러 가지 변수가 많다. 마음이 무겁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엔진을 켠다.
오후 5시 5분. 해가 이탈리아의 육지 쪽으로 지고 있다. 커다란 카고선이 0.5마일 곁으로 스쳐 지나간다. 옅은 구름이 있지만 오늘 밤도 별들의 향연이 계속 될 것 같다. 배터리가 100%로 표시된다. 믿어도 될까? 과연 100% 일까?
오전 4시 2분. 바람은 없다. 배 속도는 5.2 노트, 오트란토 마리나까지는 4시간 30분 남았다. 배들이 많다. 대부분 대형 카고들이고, 호화 여객선도 온통 휘황하게 불을 밝힌 채 지나간다. 기온은 6도. 상당히 쌀쌀하다. 요트복을 입고 담요를 둘러도 춥다. 아내가 야간에 4시간 넘게 견시를 해 주었다. 밤에 아내와 잠시 대화해 보니, 아내는 상당한 두려움을 참고 견시를 하는 거다. 일단 망망대해의 밤은 무섭다. 레이더로 전방에 배가 나타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 배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는 건지. 우리 배는 기다려야 하는 건지, 피해야 하는 건지. 판단할 수 없다. 급하면 남편을 찾는 거다. 고마운 일이다. 아내는 추위와 두려움을 참고 나를 쉬게 해주려는 거다. 나는 최대한 찬찬히 설명을 한다. 이러면서 노련한 뱃사람이 되어가는 거지. 첫 항해에 파도가 높지 않아 아무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약간의 적응 시간을 가지는 건 좋은 거다. 아내는 나보다 300% 더 바다와 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참 대단해요.
뭐가?
이번 항해를 당신은 가족과 함께 하잖아요,
한 밤중에 아내가 툭! 던진 한마디가 화두가 되어 나와 가족에 대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오전 6시 30분. 오트란토 도착 2시간 전, 항해 셋째 날의 해가 떠오른다. 바람 방향이 맞아 세일을 모두 편다. 엔진을 끄자, 서비스 배터리는 74%라고 나타난다. 교체가 필요할 것 같네.바람 9노트에 배 속도 6.5노트,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조류 때문인가, 배의 성능 때문인가? 기가 막히게 잘 나간다. 포트 쪽 전동윈치가 동작하지 않는다. 릴레이는 딸깍 거리는데 작동하지 않는다. 오버로드 걸린 모양인데 항구 도착하면 시스템 전원을 껐다 켜보자. 아니면 뭔가 또 수리가 필요하겠지. 일단 마리나스베바를 떠났으니 배의 모든 일들은 이젠 내 책임이다.
오트란토에 도착하면 풍랑을 피해 며칠 쉰다. 배를 잘 점검하고, 문제 부분을 수리하면, 드디어 지중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