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4:24-46, 요나단과 사울의 차이, 24.4.3, 박홍섭 목사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종교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믿고 따르는 가장 큰 동력으로 작동했다면, 타락 이후 사람들은 종교성으로 자신을 위한 우상을 만듭니다. 이렇게 타락한 종교성이 만드는 행위와 믿음을 구분하지 못하면 종교성이 믿음의 행세를 하는 심각한 위험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보이는 반응을 보십시오.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행동하고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한 종교성으로 행동합니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이 전쟁은 사람의 수나 무기에 달려 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믿음으로 블레셋의 진영을 부관과 함께 쳐들어가서 백성들을 살리고 있다면, 사울은 지치고 피곤한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으니 먹지 말라는 이상한 명령을 내림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지금 이 명령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명령입니까? 사울이 블레셋의 대군 앞에서 겁을 먹고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로 물러나 있을 때, 아들 요나단이 믿음으로 부관과 함께 적진을 기어 올라가 큰 전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의 믿음을 사용해서 승리를 주시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사울이 숟가락을 얹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저녁에 나의 원수를 보복할 때까지는 누구라도 어떤 음식도 먹지 말라” 이 이상한 명령 때문에 군사들은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벌집이 눈앞에 있는데도 먹지 못하고 심히 피곤하고 배고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24절에 “백성이 피곤하였으니”라고 했죠. 28절도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31절도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사울은 백성을 심히 피곤하게 하는 이런 이상한 명령을 내렸을까요? 본문이 직접적인 이유를 밝히지는 않지만,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도 먹지 말라”라는 24절의 말과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이 전쟁의 승리가 아들 요나단의 믿음이 아니라, 금식을 선포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의지한 자신의 믿음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자기 증명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그 동기입니다. 이런 사울의 명령으로 요나단과 군사들은 매우 큰 고통과 곤란을 겪게 됩니다. 사울의 명령을 듣지 못한 요나단은 벌집의 꿀을 찍어 먹음으로 저주를 받고 죽어야 할 위기를 맞습니다. 백성들도 탈취한 짐승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을 때 너무 지치고 배가 고픈 나머지 피를 대충 빼고 피 채 고기를 먹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어떤 음식도 먹지 말라는 사울의 명령을 지키느라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 사울의 처사는 더욱 이상합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요나단은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군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백성들의 죄는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명령을 어긴 아들은 무겁게 대함으로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말을 더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께 단을 쌓은 후 사울은 이기고 있을 때 더욱 확실하게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을 다 죽이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고 말합니다(36).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유하자, 사울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칠 것인가를 묻지만 하나님은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이에 사울은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음식을 먹은 백성들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요나단이 걸리자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백성들이 말립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사울은 자신의 금식 명령을 어기고 꿀을 찍어 먹은 요나단을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요나단이야말로 하나님과 동역하면서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루었으니 그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요나단을 지켰습니다. 이런 결과를 통해 하나님은 죽어야 할 죄를 범한 사람은 꿀을 찍어 먹은 요나단이 아니라 바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명령을 내려 백성들을 고통하게 한 ‘사울’ 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사울이 보이는 행동이 요나단처럼 믿음의 동기가 아니라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타락한 종교성의 발로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는 이 전쟁의 승리가 요나단의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들이라도 승리의 공을 차지하면 견디지 못하는 시기와 이기심이 금식이라는 가장 종교적인 모습과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하게 했습니다. 사울이 금식을 선포하면서 누구든 음식을 먹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맹세를 시킨 것은 일종의 법 선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야 할 위치이지 자신이 법을 제정할 지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마치 자신이 신앙의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양 전쟁 중인 백성에게 금식의 법을 만들어서 순종할 것을 강요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사울이 선포한 이 법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배가 고파서 고기를 피 채 먹는 죄를 범했고 죄 없는 요나단이 죽어야 할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무엇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경고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원하는 왕은 너희를 행복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기보다는 너희를 압박하고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할 것이니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8:10-22). 그런데도 그 경고를 어기고 기어이 왕을 세웠습니다. 그 왕이 사울입니다. 그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대로 말도 안 되는 법으로 백성들을 고통과 불행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들 요나단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입을 통해 요나단이 아니라 자의적인 명령을 내려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한 사울을 죄 있는 자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사람 요나단이 억울하게 죽을 뻔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성에 기인한 그릇된 믿음이 참된 믿음을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자신을 던져 전쟁을 수행한 요나단을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신앙적인 행위를 동원한 사울이 핍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부각할 수 있다면 아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사울의 모습이 섬뜩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타락한 종교성의 발로가 이처럼 위험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근거합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종교성에 기인합니까?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보셔서 참된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