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비판’을 읽고
- 떠오르는 이러저런 생각들-
넓지 않은 책꽂이에 도올 김용옥선생의 책이
상당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란 무엇인가, 루어투어시앙쯔,
절차탁마대기만성, 새츈향뎐, 대화, 중고생을 위한 철학 강의,
노자철학이것이다, 도올세설, 삼국통일과 한국통일, 도올선생 중용강의,
나는 불교 이렇게 본다, 태권도철학의 구성 원리, 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노자와 21세기, 기독교 성서의 이해 등등
조정래선생님의 ‘한강’ 과 ‘태백산맥’을 합친 것보다 더 길고,
이상문학상 작품집보다도 더 넓게 자리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저녁을 먹고 우연히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기 시작하여
새벽녘에 창문사이로 황톳 빛이 뚫고 들어 올 즈음에야
나는 밤을 꼬박 새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읽던 책도
거의 끝부분을 남겨 놓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돌아보니 문학가적 소질이 엿보였는데---^^)
그 이후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틈틈이 읽은 책은
한국문학전집과 한국기독교 교회사(전5권)로 기억된다.
계속하여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계획도 했었지만
아마도 대학입시에 대한 중압감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고
때문에 고등학교 때 겨우 읽은 몇 권과
대학 교양학부 시절에 리포트 제출을 위해 읽었던 책이
청년시절 이전에 읽은 독서량의 전부였다.
그 후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우연히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글을 읽게 되었다.
대만대와 일본 동경대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형님은 고려대의 교수요 누이는 이화여대 교수,
이와 같은 화려한 그의 학력과 가계가 보증된 상태에서
어떤 내용의 글일지라도,
저자에 관한 어떤 의혹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 상황 속에
그 분의 책을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도올, 그분을 더 알고 싶어서
그리고 그 분의 글에 더 심취하고 싶어서
(당시는 김용옥선생이 고려대 교수 재임시절이요
얼마 전에 저토에 초청작가로 오신 고미숙선생님의 박사과정일 듯하다.)
그 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도올선생에 관하여 물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 대부분은 도올선생에 관하여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도올 덕분에 인문학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 오랫동안 잊었던 독서에 관심을 같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서
오히려 도올선생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분들을
설득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도올선생의 다음 저서를 기다리는 마음은
아마도 어린 시절 만화책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애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도올선생의 오십여 권의 저서 중에서 나는 위에 나열한
십여 권의 책에서 중단을 하고 말았다.
뚜렷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리고 또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김상태님의 ‘도올 김용옥 비판’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질 듯하다가 그만 포기한 이유를.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는 그 제목에 부합하는 내용이 없었고,
‘불교 나는 이렇게 본다.’ 에서는 도올이 불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 수 없었으며,
‘여자란 무엇인가’에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음을,
뿐만 아니라 동양고전을 배우고자 했던 마음은 단순한 흥미나
교양습득과는 다른 것이었는데 나는 알게 모르게
도올의 저서는 거의 모든 책들이 상당부분 그의 신변잡기에 관한
내용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에게 어느 정도 인문학에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사실이었으나
도올에게서 평범한 시민들로서는 높은 식견이라 칭찬받을 만하지만
학자로서 자부하는 도올에게서 말도 안 되는 참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서 전북대학교 신방과 교수인 강준만 교수의
“나는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하듯 그의
독설만을 즐겨 읽을 뿐 좀 어려운 이야기로 들어가면 대충 훑어 볼 뿐
아예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대목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오호 통재라’를 외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도올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과는 다르게
‘도올 김용옥비판’에서 저자는
도올이 당시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고전의 번역을 동양학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기존학자들의 불성실과 그들의 번역에 있어서의 무능력을
무자비하게 성토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지금가지 한권의 고전도
번역한 적이 없음에 대한 도올의 비양심적인 면과 무능력을 지적했고
또 책을 통해 토로한 도올의 열등감과 권력욕, 무력감과 자기도취의
열병을 지적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생각해 보니 도올의 책을 전술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그의 학력에 압도되어 내가 도올의 책을 구입한 이유와는
관계없이 무비판적으로 그의 책을 읽었다.
그의 책에는 예외 없이 그의 신변잡기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신변잡기뿐만 아니라 원색적인 욕과 극단적인 용어의 선택에서
오히려 나는 오랫동안 대리만족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로어투어 시앙쯔’라는 책은 그의 아내가 번역한 소설인데
서문에서 2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그의 신변잡기로 채워져 있다.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도 그 책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도올 부모의 회혼례를 중심으로 그의 넓은 인맥을 과시하는 글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나는 점차 그의 책으로부터 그리고 인문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루할 정도로 긴 이 글을 쓰게 된 연유와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인문학에 관한 관심은 오히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회복되었다.
바로 ‘책익는 마을’에서 였다.
이웃(원진호원장님)을 잘 둔 덕분에 ‘책익는 마을’을 소개 받아
가입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책마을에서 선정한 도서 이외에도 여러 권의 인문학도서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8월 13,14 양일간 12명의 국내 소장파 인문학자를 초청하여
한화콘도에서 열린 인문학축제에서
뜻하지 않게 첫날의 사회를 담당했던 나는
누구보다 더 긴장과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덕에 여러 장르의 인문학에 확실하게 입문 할 수 있는
귀 동냥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책익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계시는 안세환 목사님의 말씀 중,
“인문학 도서에 심취하다보면 일반 소설이나 수필집은 싱겁다”라는 말씀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소득이 귀하지 아니 한가? (10. 8. 19)
첫댓글 저는 이 곳에서 많은 배움을 하고 있는데요. 특히나 멋진중년님과 미로샬님의 글에서 "새로운 깊음의 사고"에 대한 것과 엄청난 학습력에서 나오는 말씀들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항상 배움의 자세로 멋진중년님의 글과 말씀을 대합니다.
귀하고 귀하단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 축제에서 저자분들과 어울려 말빚만 풀어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로님의 글을 읽고 나니 오히려 저자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들이 작은 소득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이 알았으니 생각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도올에대한 3가지 추억? 1. 고대다니던 친구가 특강듣다 맨 앞줄에 앉은 여학생(짧은 치마에 다리를 꼬꼬 앉음)에게 도올샘이 욕을 욕을 ㅋㅋ 카리스마 보다는 친구도 욕하더군요 교수를 2. EBS에 강의 했을때 방청갔다가 뒷줄에 앉은 학생이 조니까 욕을 욕을 ㅋㅋ 3. 혜화동에서 우연히 만나서 인사했더니 부드러운 미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