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武1편..한국의 산성,청야 전술의 결정체
아들아, 한국의 武. 첫째 이야기는 한국의 산성(山城)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려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진주에도 진주성(晋州城)이 있고 너도 많이 봐서 성에 대해
어느정도 익숙할 것이라고 본다.
성(城)이라 함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를 방어하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은
방어시설을 얘기하는 것이란다.
우리나라의 유적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성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성이 많다는 말이고, 그것은 그만큼 전쟁이 많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단다.
온달산성 (충북 단양 영춘면)
아들아, 성은 축조한 위치, 재질이나 형태, 규모, 목적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단다.
큰 분류를 보면 대략 목적에 따라서 도읍과 궁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도성(都城)과
지방의 행정청과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읍성(邑城), 기타 다른 군사적 목적으로
주둔지 역할을 위해 쌓은 주진성(主鎭城)이 있단다.
평양과 부여, 개성의 나성, 서울의 한양도성은 도성의 대표격에 해당하고, 진주성이나
낙안읍성 등은 읍성의 대표격이고, 전남 강진의 전라병영성은 주진성의 대표격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축조한 재질에 따라 흙으로 쌓은 토성, 돌로 쌓은 석성 그리고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형태도 있단다.
부여에서 봤던 부소산성이나 서울의 풍납토성 등은 토성이고, 진주성은 석성,
수원 화성(華城)은 특이하게도 돌과 벽돌을 적절하게 혼합해서 축조한 경우이고,
쌓은 위치에 따른 분류를 보자면 평지에 쌓은 성은 평지성(平地城), 산에 쌓은 성은
산성(山城)이고 평지성과 산성이 섞인 평산성(平山城)이 있단다.
순천의 낙안읍성은 평지성, 보은의 삼년산성은 산성, 진주성과 공주의 공산성은
평산성으로 볼 수 있지.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산성이지.
산성도 크게 두가지, 산 정상을 두른 형태는 머리띠 모양이라 해서 테뫼식 산성,
산의 골짜기를 감싼 형태는 포곡식(抱谷式) 산성으로 구분된단다.
우리 주변국, 중국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해 봐도 우리는 산성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축성법이라 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금성산성 (전남 담양군 금성면)
왜 우리는 산성을 그토록 많이 쌓았을까?
그것은 애초에 성을 쌓는 이유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적인 성격이 있지
않더냐.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지키기 쉽고, 적은 공격해 오기 힘든 곳에
성을 쌓는 것은 당연한 것이란다.
또한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의 70%가 산지이므로 가장 쉽게 성의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산 위에 성을 쌓는 것이었지.
압도적인 병력과 전력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맞아 싸우는데 평지보다는 산에 성을 쌓는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겠느냐.
공격해 온 적은 최대한 힘들고 괴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적은 산을 힘들게 올라야 하니 더욱 고될 것이고, 산을 올라서도 성벽에 또 막히니..
힘들겠지.
우리는 위에서 적을 내려다 보며 돌을 던지거나 굴리기도 하고, 활로 공격하는데
더 잘보며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단다.
이것은 우리의 주력 무기인 활의 강점을 최대화 할 수 있는 또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삼년산성 (충북 보은군 보은읍)
또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지.
아들아, 너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줄여서 청야전술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
이는 오랜 시간..중국대륙에서 온 압도적인 병력과 전력의 적을 상대로 싸우면서
체득한 일종의 전쟁기술이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전략전술(前略戰術)이란다.
그 뜻을 풀어보면 성벽을 굳게 지켜 방어에 주력하는 것은 견벽(堅壁).
청야(淸野)란..들판을 깨끗이 치운다는 뜻으로 외적이 우리 땅에서 취할 수 있는
식량과 군수물자를 모두 없앤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해서..적이 굶주리고 전쟁에 지쳐서 전쟁의지를 꺾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침략해온 군사는 전쟁이 장기간 계속 될 수록 보급선이 길어지고, 보급이
타격을 입을 수록 전쟁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전쟁의 상식에 해당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청야전술은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유격전술과 함께
쓰면 그 효과는 더욱 높아진단다.
굶주리고 지쳐서 전쟁의지를 잃은 적이 물러나게 되면 우리는 적의 후미를 쳐서
큰 타격을 주게되지.
그런데..청야전술은 우리도 그만큼 출혈을 감수해야만 하는 단점도 있어.
오랜 기간 중국대륙의 강적을 상대로 싸우면서 우리 조상들이 체득한 전쟁술이란다.
적이 공격해 오면..우리는 들판의 곡식을 태우고, 마을을 태우고..우물을 메우면서..
식량을 싸들고 산성으로 피신하고, 산성을 배경으로 전투에 임한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전쟁의 모습이었단다.
장기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평소에 곡식과 물자를 비축해야 하고...
물론 성내엔 식수 같은 물이 풍부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조건이 되지.
고구려 백암성 (중국 요령성 등탑현)
우리 역사에서 청야전술의 사례를 보자면..
고구려 신대왕 때의 국상이었던 명림답부(明臨答夫,67~179)가 172년에 대대적으로
침공해온 후한(後漢)의 대군을 상대로 청야전술을 실행하고 철수하는 후한의 대군을
추격해 격파한 좌원의 싸움이 청야전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612년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隨)의 대군과 싸울 때도, 645년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당(唐)의 대군과 전쟁할 때도 청야전술은 그대로 활용되었단다.
645년 제1차 고당전쟁의 승리를 이끈 안시성 전투도 청야전술의 결과였고..
안시성(安市城)은 큰 성은 아니었지만 3면이 가파른 산지로 둘러쌓인 산성이었지.
고려 때에 거란이나 몽골과의 전쟁 때도 역시 그랬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외침에
대한 기본 전략전술이 청야전술이었기 때문에 산성은 끊임없이 축조되고 관리되어져
왔단다.
서양의 역사 속에서 청야전술이 빛을 발한 것은..
1812년 제정 러시아가 당대 최강이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끄는 대군을
혹독한 겨울 추위와 청야전술로 막아내고 타격을 가했던 전쟁이었단다.
아들아,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
그것은 우리의 지형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고,
압도적인 수와 전력의 외적을 상대로 싸우다보니..
자연스럽게 체득한 청야전술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곳곳 산지에 있는 산성..심지어 이제는 다 허물어져 터만 남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돌무지가 아니라..우리 조상의 피와 땀이 배인 것이고,
생존을 위해 치열한 고민을 했던 흔적인 것이고, 그렇게 얻은 지혜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산성, 그 가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란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