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별 임태수 교수 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편,『제2종교개혁과 민중신학』(한들출판사, 2007),
469-485에 수록.
믿음과 행함, 그 역사적 재해석:
‘2006년 칭의(義化)에 관한 에큐메니칼 공동신학선언’(가톨릭교회.루터교회.감리교회)의 신학적 의미
김홍기
(한국웨슬리학회 회장/감신대 교수)
들어가는 말
1999년 10월 31일에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공동 발표한 "칭의(義化)에 대한 공동선언“(JDDJ)(이하 ”공동선언”이라고 표기함)은 의화, 성화, 믿음, 그리고 선행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아주 에큐메니칼적인 연대를 이룬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2002년 5월 한국교회사학회에 필자가 건의하여 심포지움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06년 7월 23일 감리교회와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대표들이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 에큐메니칼 예배‘에서 ’칭의(義化) 교리에 대한 합의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이번 공동선언문은 1999년의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의 합의에 감리교회가 참여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이날 서명식에는 로마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의장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추기경,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 선데이 음방 감독, 조지 프리먼 총무, 루터교회 세계연맹의 사무총장 이스마엘 노코(Ismael Noko) 박사가 참석하였으며, 한국가톨릭교회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등이 서명하였다.
이 에큐메니칼 예배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사무엘 코비 총무(Samuel Kobia), 세계성공회협의회 케네스 키론(Kenneth Kearon) 사무총장, 한국 가톨릭교회 최창무 광주대교구장, 교회일치와 교회간의 대화위원장 김희중 주교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국민일보>는 이 합의로 인하여 향후 교회의 일치연합운동이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 에큐메니칼 신학선언에 공식서명을 함과 동시에 세계감리교회는 별도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은 칭의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에 관한 일반적 이해가 감리교회 교리에 부합함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감리교회 주간지 <기독교타임즈> 2006년 7월 29일자 5면에는 감리교회 감독들(신경하 감독회장, 김충식 감독, 이규학 감독)과 가톨릭 감독들(카스퍼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상호관심사를 논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공동선언이 얼마나 역사적,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이 논문에서 필자는 강조하려고 한다.
몸말
I. 1999년 칭의(의화)에 대한 공동선언(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
첫째로, 칭의(의화)는 선행으로 이루어짐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 이루어짐을 공동 고백한 것이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1999년 ”공동선언” 제19조(4장 칭의에 대한 공동이해의 진술, 1절 칭의에 직면한 인간의 불가능성과 죄)에서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고백한다.
인간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즉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으며, 따라서 어떤 공로도 치를 수 없으며, 자기 고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칭의는 은혜로부터만 일어난다.
이러한 인간의 공로를 배제시키는 “은총에 의한 칭의”의 사상은 일찍이 어거스틴이 강조하였고 루터와 칼빈이 발전시켜 프로테스탄트신학의 중심을 형성한 사상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입장을 로마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둘째로, 더욱 나아가서 로마가톨릭교회가 루터의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화)”의 사상을 수용한 것도 괄목할만하다. 칼빈과 웨슬리도 바로 이점에서 루터가 강조했던 신뢰하는 믿음(fiducia)에 의한 의롭다하심을 칭의의 핵심으로 수용한다. 그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는 “공동고백” 제25조(4장3절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함께 고백한다:...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사랑 안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행위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인간 안에서 믿음의 자유로운 선물에 앞서가고 뒤따르는 모든 것은 의화에 대한 근거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의화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아예 공로를 치루고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로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면서도 이 25조에서도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함을 강조한다.
셋째로, 그러나 ‘행위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 돋보인다. 이 점은 로마 가톨릭적 요소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 “공동선언”은 지극히 에큐메니칼적이다. 이러한 가톨릭적 영성을 개신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물론 루터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열매로써 따라옴을 강조한다. 그러나 루터는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절하하였다. 오히려 웨슬리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고,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이다. 웨슬리가 야고보서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행함으로 성숙하여 지는 믿음을 루터보다 더욱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해석하기를, 로마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믿음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그 후 25년 후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의 행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말하는 의인화는 로마서가 말하는 의인화와 다르다고 해석한다. 로마서의 의인화는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것, 곧 객관적으로, 수동적으로, 법정적으로 전가되는 의인화(義認化: imputation)를 말하고, 야고보서의 의인화는 실제로, 본성적으로, 주관적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의인화(義人化: impartation)를 말한다고 야고보서 2장 주석에서 웨슬리는 분명하게 강조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은 그의 선행에 앞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즉,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 accounted righteousness). 야고보의 의미에서는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에 뒤따르는 선행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즉, 義人이 되는: made righteous)
여기서 웨슬리가 어떻게 의인화와 성화의 관계를 해석하는지 몇 가지로 분석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웨슬리는 감리교 역사와 교리를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의인화와 성화를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큰 축복이란, 그들이 칭의에 대해서 그것이 성화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처럼, 성화에 대해서도 그것이 칭의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은 점입니다. 감리교인들은 전자와 후자를 똑같이 강조하면서 각각에 그 위치를 유지시키는데 유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둘을 함께 맺어 주셨지만, 인간이 그것들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리교인들은 동등한 열성과 부지런함을 품고, 한편에서는 자유롭고, 충분하며, 즉각적인 칭의의 교리를 옹호함과 아울러,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과 삶에 있어서의 전적인 성화의 교리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 신비주의자처럼 내적인 성결을(inner holiness) 고집하면서도 바리새인처럼 외적인 성결도(external holiness) 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은 의인화와 성화의 양면을 갖고 있다. 그런데 믿음에 의한 의인화는 구원의 초기단계라면, 성화는 구원의 성숙단계라고 강조한다. 웨슬리에게있어서 회개는 종교의 현관(porch)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door)이라면 성화는 종교자체(religion itself)이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포도원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신앙의인화에 대하여 강조를 한 반면에 사랑과 선행에 의한 성화를 무관심하고, 로마천주교회는 사랑과 선행에 의한 성화에 강조를 한 반면에 신앙에 의한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하면서 감리교도들이 이 둘을 가장 잘 조화시킴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동선언”은 지극히 웨슬리적이다.
선행에 관하여는 “공동고백” 제37조(4장7절 의롭게 된 자의 선행)에서도 계속 취급되고 있다. 곧 선행은 칭의를 뒤따르는 칭의의 열매라고 본다. 동시에 선행은 칭의를 얻은 성도들의 평생의 의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고백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가 표현된 제38조에서는 “공로성“(die Verdienstichkeit)을 강조하고, 루터교회의 이해가 표현된 제39조에서는 공로성을 부정한다. 믿은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만 표현한다. 그럼에도 신자의 성장과 그리스도의 의에로의 본성적 참여를 위해서 선행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루터교 교인들도 은혜의 보존과 은혜와 믿음에 있어서의 성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나님에 의한 받아들임으로서의 의(imputation)와 그리스도 의에의 참여로서의 의(impartation)라고 하는 것은 항상 완전하다는 것을 그들은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차이는 웨슬리 안에서 극복될 수 있다. 웨슬리에게있어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의 명령이기에 선행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인간행위에 대한 자유의지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책임적 행위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런데 ”공동선언“ 로마가톨릭적 입장 제38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러한 웨슬리적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
가톨릭교인 들이 선행이 갖고 있는 ”공로성“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이 행위가 성서적 증언에 따라 하늘에서의 보상이 약속되어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이것은 다만 가톨릭교인 들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명시하고자 함인 것으로써 그들은 선행이 갖고 있는 은사적 성격을 문제시하거나 칭의 그 자체가 항상 공로의 대가를 치르고 획득할 수 없는 은사로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넷째로, 성화에 있어서 은총의 양면성 곧 의로움이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것과 의로운 사람으로 실제로 변화되는 것의 양면성을 이 공동고백은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고 용서하며 용납하시는 수동적 객관적 의(imputation)와 그리스도 의 의에로 실제적으로 변화되는 참여적 의(impartation)는 “공동선언” 제 28조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다. 객관적으로 법정적으로 전가되는 의로움(objective, forensic and imputed righteousness: imputation)을 넘어서서 “공동선언”은 주관적으로 실제로 변화되는 의로움(subjective, real and imparted righteousness: impartation)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루터교회에서 양보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물론 루터도 그의 설교 “두 종류의 의”에서 법정적 의와 실제적 의의 양면성을 말한다.
1519년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설교에서 ‘낮선 의‘(alien righteousness)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지고 순간적으로 주어지지만, 한 순간에 완성되지는 않고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점진적으로 죽음을 통하여 완성되어진다고 루터는 확신한다. 낮선 의는 또한 우리 속에 속성적 의(proper righteousness)를 생산한다. 우리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이 의가 죄를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와 같이 변화하게 한다. 까닭에 루터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변화(relative change)만을 말하지 않고, 실제적 변화(real change)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의 평생 의 주제는 법정적 의(imputation)이었다.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오시안더(Osiander)를 비롯한 실제적 의를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 양면적 의로움을 강조한 학자가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역시 웨슬리다. 웨슬리는 웨슬리 당시의 칼빈주의자들과 루터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이 양면적 의로움을 강조하였다. 웨슬리에게는 의인화(義認化: imputation)와 의인화(義人化: impartation)의 총체적 이해가 강조된다. 이러한 총체적 이해가 ”공동고백“ 속에서 제28조(4장4절 의롭게 된 자로서의 죄인인 존재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성령은 세례 가운데서 인간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의롭게 하며(imputation) 그 인간을 실제로 새롭게 한다는 것을(impartation)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 그렇지만 의롭게 된 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평생 동안 끊임없이 의존되어 있다..........그에게 거듭 용서가 보장되어 있다.
보통 개신교에서는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롭다하심‘을 칭의(稱義)란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의화(義化)란 용어를 보다 많이 쓴다. 그러나 필자는 웨슬리처럼 의인화(義認化)와 의인화(義人化)로 구별하여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즉 의화(justification)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의인화(義認化: imputation)이지만, 성화(sanctification)는 의로운 사람으로 실제로 변화되는 의인화(義人化: impartation))라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화(義化)는 칭의 곧 의인화(義認化)요,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의화(義化)는 성화 곧 의인화(義人化)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개신교회를 비롯하여 세계개신교회가 의인화(義認化) 곧 칭의(稱義)를 강조하여왔지만 의인화(義人化) 곧 성화(聖化)는 많이 관심을 갖지 못하였다. 웨슬리가 그토록 강조한 의인화(義人化) 곧 성화(聖化)를 한국감리교회가 너무나 강조하여 오지 못한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천주교회는 의인화(義人化) 곧 성화(聖化)를 강조하여 왔지만 의인화(義認化)는 강조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회의 의화(義化)란 용어사용이 이 양면이 잘 드러나는 의미로 사용됨을 평신도들에게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II. 2006년 세계감리교회협의회와 칭의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
2006년 7월 세계감리교회대회에서 1999년의 공동선언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감리교회선언문(Methodist Statement)을 발표하였다(이하 “감리교선언”으로 표기함). “감리교선언” 1조는 16세기의 교회분열의 핵심이었던 칭의교리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가 합의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지적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의 기본적 합의는 16세기에 서방교회 속에 일어난 분열의 중요원인이었던 신학적 논쟁에 관련해서 볼 때 아주 근접한 합의를 이루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감리교회협의회에 소속된 감리교회들은 크게 기쁨으로 환영한다고 ”감리교선언“ 2조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2조에서 ”공동선언“(JDDJ)의 15-17조에서 소개된 일반적 칭의의 이해가 감리교회 교리에 부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감리교선언“ 2조에서 ”공동선언“ 15--17조를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삼위일체의 사역으로서의 구원을 선언한 것을 동의하는 16조를 소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러한 구원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신앙 그 자체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성도의 공동체에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서 일하시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완성으로 이끄시어 삶을 갱신하도록 성도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3조에서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칭의문제에 있어서 각자가 다른 입장에서 표현한 선언(20-21, 23-24, 26-27, 29-30, 32-33, 35-36, 38-39)의 설명을 동의하면서, 칭의에 대한 이런 다양한 강조가 두 교회와 감리교회를 구분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음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4조에 가서 감리교회의 독특한 칭의 교리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다. 감리교회는 루터나 다른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웨슬리형제들이 이해했던 것처럼 항상 성경적 가르침에 의존하여 왔고, 동서방의 초대교회의 가톨릭적 전통에(the Catholic tradition of the early church both East and West) 속한 칭의 교리를 항상 포용해 왔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서방교회의 전통에서는 강조하지 않고, 동방교회의 전통에서 강조하는 완전성화사상을 수용함을 표현하고 있다. 4조 1항에서는 원죄를 범하여 타락한 인간들에게 찾아오시는 성행은총(prevenient grace)을 언급하고, 4조 2항에서는 죄의 용서(forgiveness of sins) 곧 의인화(義認化: imputation)와 의를 이루는 것(making righteous) 곧 의인화(義人化: impartation)의 깊은 연관성,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의 깊은 연관성이 칭의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감리교회가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 왔음을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칭의는 죄책의식(gult of sin)에서 구원 받는 것이고, 성화는 죄의 능력과 뿌리(power and root of sin)에서 구원받는 것임을 감리교회는 고백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4조 5항에서 웨슬리는 성화의 완성인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또는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살전 5:23 참조)의 교리를 발전시켜 이를 감리교 가르침의 핵심 으로 생각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완전성화는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임을 강조하고, 이 완전 성화는 무지, 실수, 연약함, 유혹에서 해방되는 절대적 완전(absolute perfection)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4조 8항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이 모든 선의 근원이고, 성화와 완전성화를 추구하는 경건의 행위(works of piety)와 사랑의 행위(works of mercy)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선행(good works)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요,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할 수 있고(can),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must)"(설교 ”우리자신의 구원을 이움에 관하여“)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나 사랑 둘 다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인 우리에게 부어짐으로써 나타나는 것임을 4조 4항에서 고백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써 하나님의 동역자가(고전 3:7) 됨을 의미한다고 4항 8조에서 고백한다.
III. 성화(聖化)를 통한 성숙과 성장:
2004년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되었던 금년 부활절연합예배 설교자 옥한흠 목사(사랑의 교회 원로목사)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전도의 문이 막힌 원인이 한국교회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작은 예수가 되지 못함에 있다고 정확하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은 많으나 예수를 본받는 작은 예수가 되어 가는 성도들은 심히 적은 것이 심각한 문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은 많으나 예수처럼 살기 위해 영적으로 성숙해가지 못하고 영적 어린이 상태에 그냥 머물러 있는 성도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쌔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의 담임목사 릭 워렌(Rick Warren)이 쓴 “목적을 지향하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이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 책에서 워렌 목사는 다음과 같이 21세기 기독교인들의 영적 위기를 지적하였다: “슬프게도 수 백만의 기독교인들이 나이는 늙어 가고 있지만 영적으로 성숙해 가지 못한다. 그들은 기저귀와 소아용 발싸게를 착용한 채 영구적인 영적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결코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의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역시 옥 목사의 지적과 동일한 것이다. 한국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세계 크리스천들의 가장 큰 영적 위기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영적으로 자라 가는 작은 예수운동 곧 성화운동의 결여라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화(sanctification)지향적 영성의 부족이라고 우리는 분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성화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의로운 사람으로 본성이 바뀌어가는 의인화(義人化)라고 말할 수 있다. 의인화와 함께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어가는 성인화(聖人化)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20세기까지의 한국교회 부흥회의 주제는 거듭남이었지 성화가 아니었다. 한국교회 부흥회 포스터마다 거듭남은 부흥회 주제로 써왔지만 성화라는 주제를 써 놓은 부흥회 포스터를 필자는 본 적이 없다. 이제 21세기에는 부흥회의 주제가 성화가 되어야한다. 웨슬리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성령의 은사 체험의 사건들이 계속하여 일어났지만, 웨슬리는 은사체험적 오순절적(charismatic pentecostal) 성화체험보다는 인격적 성결(personal holiness)을 추구하는 성화체험을 더욱 사모하고 더욱 강조하였다.
그러니까 은사체험을 추구하는 오순절적 순복음교회도 웨슬리의 후예고, 인격적 성결을 추구하는 성결교회나 감리교회도 웨슬리의 후예이다. 지금까지 20세기에 한국교회가 전자를 너무나 많이 강조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21세기에는 전자와 후자가 통전적으로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은사를 체험한 능력 있는 성도들이 예수처럼 생각하고 예수처럼 성품이 변화되어가고 예수처럼 사는 모습을 세속사회 속에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세속 불신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지만, 예수께서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지만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성도들을 나는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이러한 크리스천을 형식적 크리스천(Almost Christian)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지난 10년간 한국가톨릭교회는 75%나 교인수가 증가하였지만, 한국개신교회는 1.6%나(14만4천명) 교인수가 감소하였다는 인구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원인은 한국개신교회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많이 강조하였으나 예수를 본받는 것 곧 작은 예수 운동을 강조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필자는 본다. 거기에 비해 한국천주교회는 성화 곧 작은 예수되기를 강조하였기에 더욱 부흥하였다고 필자는 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개신교회가 성화적인 차원에서 한국천주교회를 더욱 본받고 배워야 한다고 본다. 웨슬리는 칭의만 아니라 성화를 그토록 강조하였는데, 이런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그의 성화론을 재발견할 때가 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강조한 웨슬리의 신학이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구원론 대화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그리고 한국천주교회가 사회적 성화에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등 한국 현대사에있어서 어느 교회보다 앞장서 왔다. 한국개신교회도 그런 사회적 성화운동에 많이 참여하여 왔으나 앞으로 더욱 사회적 성화를 강조하여야 한다고 필자는 본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회적 성화도 지극히 웨슬리가 깊이 관심하였던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그는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르고,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내면적 경건과 사회적 개혁, 인격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의 생동감 있는 조화를 그의 [찬송가 서문](Hymns and Sacred Poems(published in 1739))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독한 종교는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거룩한 고독은 ‘거룩한 간음행위’ 이상이 아님을 복음은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 종교(social religion) 아닌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 아닌 성결을 모른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크리스천 완전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하여 준다. 참으로 그의 형제들을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자는 선행들을 열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영혼 속에서 선행들을 실천하기 위해 타오르는 끊임없는 갈망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주님처럼 매사에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웨슬리는 또한 그의 “빛과 소금” 강해에서 기독교를 사회적 종교로 해석하고,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산상수훈강해 VI]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이 지상에서의 은혜의 왕국의 연속성과 완전성 속에서 이어짐을 강조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은 이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기쁘게, 완전하게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나오는 말
이러한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와 감리교회의 신학적 합의는 루터의 책들이 금서목록에 오르고 루터가 이단으로 정죄된 16세기 트렌트공회(Trent)의 신학적 심판 이후, 제2바티칸 회의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형제교단으로 인정된 이후, 처음으로 신학적 합의에 의한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선언으로서 역사적 의미와 의의를 지닌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대학교 성곽 예배당에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였던 이후 482년만의 일이었다(1999년 10월 31일). 그리고 489년 만에 세계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기독교 교단들인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감리교회가 공동신학선언에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남아있는 차이점이 극복되려면 성화론을 칭의론과 함께 취급하여야 한다. 철저한 성화론의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교회가 모두 성숙하여가고 성장하여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