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금융의 낙후성
한국 금융산업은 자산 규모나 건물, 임직원의 보수와 구직자 선호도 등 외형적 모습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 들어다보면 다음과 같이 여러 면에서 낙후되어 있고 국민경제에도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첫째, 금융의 기본 기능인 자금융통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돈이 절실히 필요한 영세업자, 창업자, 저신용자 등은 담보가 없으면 제도권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다 보니 돈이 없는 사람은 창업이나 사업 확장이 매우 어렵다. 영세사업자나 서민은 고리 사채업자의 약탈적 금융의 피해 대상자가 되기 쉬운 상황이다. 자금 융통이 절실한 창업자나 저용자 등이 제도권 금융을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느냐가 금융이 제 기능을 잘 하고 있느냐의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둘째, 금융 부문은 전기, 자동차 등 실물부문과 달리 은행, 증권, 보험, 신용카드 등 어떤 종류의 금융기관도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신한, 국민 등은 규모로 세계 50위권이지만 국제 금융계에서 어린애와 같은 수준이다. 삼성생명은 국내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 15위 정도의 보험회사이지만 국제 보험시장에서의 역할은 거의 없다. 증권회사(금융투자회사)는 주식중개, 펀드판매 등의 업무에만 매달려 M&A, 파생금융상품 개발 등 핵심 투자은행 업무의 경우 국내시장마저 외국계가 주도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 등이 해외에 대규모 투자나 합작사업, 공사 수주 등에 필요한 금융을 한국 금융기관들은 잘 제공하지 못한다. 여기에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같은 금융 불안 시기에는 한국 금융기관은 외화자금 조달 기능을 거의 수행하지 못하고, 국제금융 환경 악화 시 오히려 국민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셋째, 금융기관들은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 즉, 고객에 대한 기본 책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최근만 해도 동양증권의 CP 등 사기판매, 은행과 신용카드사의 어마어마한 개인정보 유출, 상호저축은행의 후순위채 불완전판매 등 고객에게 부당한 피해를 준 사례는 아주 많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7~2008년 중소수출업체에게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인 KIKO(Knock In, Knock Out Option)를 팔아 멀쩡한 기업을 수없이 파산시켰으며, 2002~2003년에는 소득이 없는 학생이나 무직자 등에 신용카드를 남발해 수백만 명을 신용불량자로 만들기도 했다.
넷째, 한국은 금융부문의 고용 효과도 취약하다. 한국은 은행, 신협, 새마을금고 등 서민금융기관과 증권회사 등에 근무하는 직원은 총 20만 명 정도이다. 반면 독일은 은행원(독일은 증권업도 은행업에 포함) 수가 70만 명에 이른다. 독일이 인구 대비 2배 이상이 많다. 독일은 제조업 강국이기도 하지만 금융산업도 도이치방크처럼 세계적인 은행과 함께 협동조합은행, 저축은행 등 다양한 금융기관도 같이 발전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금융은 실물 부문을 지원하는 부문으로서도 또 자신이 하나의 산업으로서도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 금융이 제 역할을 잘 했다면 창업이 활발하고 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발전하기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한국 기업의 해외사업도 좀 더 경쟁력이 높아지고 실패도 적었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자리가 많이 늘고 경제 성장도 더 커졌을 것이다. 또한 금융산업 자체에서도 괜찮은 일자리가 적어도 10~20만 개는 더 생겼을 수도 있다.
한국 금융이 이렇게 문제가 많고 제 역할을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얼마 전까지는 한국 금융기관들이 규모가 작아서 경쟁력이 없고 국제화도 못한다는 주장이 많았었다. 소위 말하는 ‘메가뱅크론’으로 은행 간 합병을 통해 은행을 대형화시키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은행은 경쟁력이 없어서 규모를 키우지 못하는 것이다. 규모가 작아서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몸무게만 늘린다고 뛰어난 역도 선수가 되지 못하고, 키만 크다고 잘 하는 농구선수가 되지 않는 것처럼 덩치만 키운다고 저절로 경쟁력 있는 은행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세계적인 대형은행은 혹독한 국제 경쟁에서 경쟁력을 키우고 살아남은 은행들이다. 이러한 대형은행은 자신이 잘하는 전문 분야가 있고 그러면서도 사업의 다각화와 국제화가 잘 이루어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은행들은 덩치가 작은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의 대형은행은 해외영업이 거의 없이 국내 영업만 갖고도 세계 50위권에 들고 있다. 2005년 4월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제일은행을 인수할 때 자산규모가 당시 국민은행의 자산규모 보다 작고 신한은행과 비슷했다. 한국의 은행들이 덩치가 작아 국제화를 못하고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더욱이 경쟁력이 없는 은행들이 합병 등으로 덩치만 키우다가 부실화되면, 신용경색 등의 문제 때문에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구제해 주어야 한다. 공적자금 투입 등의 부담은 국제화 안 된 은행이 더 크다. 부실화 위험이 고스란히 국내에 남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일본의 은행산업이다. 당시 세계 10대 은행의 절반 정도가 일본계 은행이었다. 특히, 1990년에는 세계 1-3위를 포함 10대 은행 중 6개가 일본 은행이었다. 이들 은행은 1990년 후반 2000년대 초에 대부분 부실화 되어 일본경제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 이러한 일본의 대형은행들의 부실화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한국 금융산업이 낙후된 원인은 규모가 작아서가 아니라 은행 등 금융산업의 과보호, 신협 등 서민금융기관 위축, 기형적인 금융 감독체계, 규제의 불투명성과 자의성 등 4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한국의 금융산업은 엄격한 진입규제로 기존 금융기관을 보호해주고 있어 경쟁력 강화나 해외진출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상황이다. 은행은 1993년 이후 신규 설립이 없었으며 신협, 새마을금고 등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20년 이상 은행 등의 신규 설립을 해주지 않은 나라는 선진국은 물론 제대로 된 나라 중에는 한국뿐일 것이다. 신규 진입이 없는 시장의 경쟁은 허울뿐이고 경쟁이 없는 곳에서 경쟁력 있는 은행이 나올 수 없다. 한국의 은행들은 겉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동통신사 등과 비슷하게 비슷비슷한 상품을 갖고 시장을 적당히 나누어 갖고 있다. 은행들은 어렵고 힘든 창업자나 영세업자에 대한 대출, 해외진출 등을 하지 않고도 주택담보대출 우량기업대출 등을 통해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신협 등 서민금융기관이 정책 당국의 무관심과 역차별, 정책 실패 그리고 은행과의 경쟁에서 밀려 계속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민 금융은 소액이 많아 취급 비용이 크고, 신용도가 낮아 위험도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런데도 정책당국은 신협, 새마을금고 등 서민금융기관에 대해 취급업무 제한, 지점설치 제한 등의 역차별을 하고 있다. 여기에다 서민금융기관의 하나인 상호저축은행에 대해선 서민금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거액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스(PF) 대출을 허용하여 부실화시켰다. 많은 상호저축은행의 도산으로 영세중소기업 등 신용도가 떨어지는 기업이나 개인의 대출 이용기회가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은행은 1997넌 IMF 금융위기 이후 기업금융보다 소매금융 부문에 주력함으로써 가계대출 등에서 서민금융기관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이렇게 나빠진 환경 속에서 서민금융기관들도 살아남기 위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영업을 담보대출 위주로 보수화하였다. 정책 당국은 서민금융기관을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되는 기관으로 보고 있다. 결국 신협 등 서민금융기관들은 신용도가 떨어지고 담보가 부족하지만 미래 상환 능력이 괜찮은 차입자를 골라 대출하는 서민 금융기관 본래의 기능을 더욱 더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셋째는 한국의 금융감독당국은 기형적인 조직 체계와 잘못 된 운영으로 책임성, 전문성 등이 크게 부족하여 금융산업 발전을 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감독 조직은 업무의 중요도에 따라 공무원 조직인 금융위원회와 공공기관인 금융감독원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형태로 관료조직이 금융감독 업무가 주는 이권을 가져가기 위해서 억지로 만든 조직 구조이다. 중요하고 정책적인 업무는 금융위원회가, 실무적인 업무는 금융감독원이 담당하는데 업무의 경계가 모호하여 서로 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이권을 나누어 갖고 책임은 서로 미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임성, 전문성이 부족하고 이권만 챙기는 감독 당국으로서는 국민경제에 대한 기여나 금융산업의 발전보다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감독 당국 입장에서는 현재의 과보호 상태를 유지하여 금융기관들이 수익을 많이 내야 금융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퇴임 후 가는 자리의 보수 등 자신들의 이권이 커진다. 금융기관의 신규 설립을 허용하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금융기관의 경쟁력이 커지는 반면 일부 금융기관의 수익 감소나 부실화 가능성이 있어 감독 당국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넷째, 규제의 불투명성과 자의성 문제는 한국 경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금융산업이 더 심하다. 위험하고 불안정한 금융산업의 특성 상 규제가 많이 필요하고, 개별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 한국은 규제나 검사가 너무 강한 것이 금융산업의 발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규제와 검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다.
한국의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는 사전적 업무 규제가 대부분이며 불투명하고 자의적이어서 예측하기 어렵다. 외국금융기관들이 한국에서 영업할 때 가장 불편해 하는 부분이다. 뛰어난 변호사들의 자문을 받아 거래를 해도 감독당국이 아니라고 하면 잘못된 거래가 되는 것이다. 대형 금융거래가 불안하고 어려워지는 것이다. 대형 금융거래는 한국이 아닌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에서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검사도 건전성 검사보다도 법규 위반 검사에 치중되어 있다. 선진국에서 법규위반 검사는 우선 금융기관 자체의 준법 감시 조직이 담당하는 분야이고 감독당국은 금융기관의 부실화 가능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한국의 감독당국은 법규위반 검사를 통해 금융기관에 대한 영향력 강화, 즉 관치가 일차적 관심 대상이다. 그래야 이권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 금융산업은 계속 낙후되어있고 국민경제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정말 공감합니다. 감독기관과 관련해서는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콕콕 찍어서 말씀하셨네요! 저도 제가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