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 / 1974년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동료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이 조사해 신문에 발표했던 2년 전 도청 사건과 그러한 사실의 은폐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이른바 '워터 게이트 사건' 이라 불리는 일이었으며, 정확히 40년 전의 일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 1994년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신입생 '삼천포'(등장인물의 별명)에게 제일 먼저 닥친 난관은 하숙집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촌놈에게 지하철은 그렇다 하더라도,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한 택시마저 이 촌놈을 무자비하게 조롱한다. 목적지가 코 앞이었음에도, 택시 기사는 서울 시내를 유람하듯 태우고 돌며 게이지 요금 이만천원을 천연덕스럽게 요구했다. 어리둥절한 '삼천포'에게는 반박의 여지가 전무했다. 모두가 <문민정부>라 들떴던 20년 전의 서울 모습이다. 비록 방송작가의 픽션일지라도 수긍하기에 어렵지 않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 2014년 1월 12일 오후 6시30분 '영화의 전당'. 시사회를 마치고 관객에게 인사하는 배우 '박철민'의 인사 말은 겸손해서 좋았다. "이 영화가 여러분의 눈에는 '잘 된 영화'가 아니라 생각되시더라도 우리가 열심히 만들었으므로 그냥 '좋은 영화'라고 애기 좀 많이 해 주세요." 나는 그러자고 속으로 약속하였고, 무대 위에 선 감독과 배우들을 향해 '희망의 비행기'를 날렸다. '시사회'의 세리모니였다. 영화의 내용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근로자들과 그러한 근로 환경을 은폐하려는 재벌 기업의 뻔뻔함에 관한 이야기였다.
20년 간격의 순서대로 나열된 이 이야기들은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모두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거짓은 결국 심판 받는다는 희망의 이야기이며, 거짓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서글픈 시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여전히 진실 앞에는 불가항력의 거짓이 골리앗처럼 버티고 있다는 절망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하나는 몇 달간 줄기차게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며, 다른 하나는 뒤늦게 재미를 붙인 재방송 드라마이고, 마지막은 어제 초대받은 미개봉 영화 시사회에서의 느낌인데,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뜬금없이 겹쳐지기도 하는 지금의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워터게이트'와 '닉슨'의 퇴진이 그때마다 세간의 경종으로 거론되는 것은, 정치인의 거짓이 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데에 있다. 굳이 명심보감 식으로 윗물 아랫물 운운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경험이 우리 주변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거론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가 지나온 시절의 진실은 궁극에 가서는 이유 불문하고 경제, 국방, 치안, 공동체 이익 등의 말로 대체되어 잠시 잠시 잠재워지곤 하였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갈망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어서그 응어리가 얼마의 세월을 지나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이었으며, 그 때마다 우리는 지난 시절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단죄에 열을 올리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더 큰 휴유증이 폭풍처럼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음을 상기해야 한다. 1960년의 마산, 1979년의 부산, 1980년의 광주, 1987년의 서울.....그 이후의 고통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얼마든지 충분히 따져야 되는 것이다. '워터게이트'와 '닉슨'의 잦은 등장은 곧 바로메타 이다.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이더라도.
도둑질과 거짓은 환골탈퇴 되지 않아도 용서되는 것인가? 같은 이유로..... 20년 전, 거짓으로 이만원을 더 벌어 이룬 택시 기사의 부가 얼마나 탄탄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 또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한 잘 못 시작된 내성에 의하여 길러져온 사회, 학교, 직장은.........작게는 개인의 일기장에서 썩게 되거나 가족을 향한 최후의 유언에 의하여 사라질 것이더라도, 그 참을 수 없는 허약함에 대한 토로는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여기서 생각의 범위를 더 넓히면 영화에서와 같은 접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노사분규가 없는 최고의 회사, 나라를 먹여 살렸던 세계적 기업에 대한 우리의 무한 갈채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만나게 될 접점이란 마치 사상누각이 일시에 허물어지듯 순간적이고 나약한 것은 아닌가. 그것을 우리는 부흥이라 부르고 있었건만.....
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실시간으로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무려 10회 분의 재방송을 연속하여 보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놀랍게도 그 드라마의 등장인물 모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소재로 잠시 등장한 택시 기사와 같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그러므로 진실의 반대편에 거짓이 있으며, 그 거짓이 치열하게 진실과 대척되어야만 한다는 일반적인 드라마의 공식을 깬 드라마는 성공적이었다. 내게도 좋은 드라마였다. 마치 동화를 읽거나 동요를 부르듯이 깔깔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참된 것의 밝은 속성이다.
그렇다고 하여, 진실과 거짓이 첨예하게 대척점을 이루는 이 영화가 모자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는 투쟁적이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영화 '변호인'만큼이나 세간의 파동을 일으킬만 하다. 설령 영화의 목표가 문화의 궁극인 순수에 있지 않게 보이더라도 용서되어야 한다. 문화의 목표 중의 하나가 진리를 찾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건 영화의 탓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탓이므로.....예컨데, 우리 사회가 참과 대척된 거짓에 대하여 여전히 관대하고 그러한 관대함을 요구하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들이 정치, 문화, 경제의 구석구석에 포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시민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경기나 한류 열풍보다 더 참되고 바르다.
기실 우리가 추구하려던 사회도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거짓이 대치되지 않은 진실은 빛이 좀체 나질 않았다. 진실은 더 극적이어야 했으며 그 틈을 타서 거짓은 더욱 교묘해졌다. 그게 우리의 불행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불행에서 연유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조급함 또한 있을만 하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가 흥행하지 못한다면, 그건 여전히 거짓으로 이룬 것들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시대의 미성숙이나 편견의 탓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 '박철민'이 우려하듯이 '잘 된 영화' '좋은 영화'에 대한 걱정은 접었으면 한다. 내 생각으로는 그 이전에 꼭 보아야할 영화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블로그'나 '트위터'에 올려 선전 많이 해 달라." 부탁하던 시사회장에서 그와의 약속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이 블로그를 찾는 몇몇 블로거들이 기꺼이 읽어주고 댓글을 달아 준다면 애쓴 제작자나 배우들이 좋아할 것 같다. 여기서 댓글이란, 출처도 없이 전방위로 살포되는 거짓 댓글이 아니라 진실된 댓글을 말한다.
深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