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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북카프카즈 수피즘 사상 및 역사
<19세기 북카프카즈 수피즘 사상 및 역사>
● 19세기 전반기 북카프카즈 수피즘의 반러시아적 경향
북카프카즈 지역의 대부분은 오늘날, 러시아 연방에 속해있다. 18세기 이래 이 지역은 제정러시아에 복속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러시아에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가 18세기 이래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을 시도하면서 북카프카즈 지역은 제정러시아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북카프카즈는 전통적으로 이슬람을 신봉하던 지역이었다. 키예프 루시 이래로 슬라브인들은 러시아정교를 신봉하였지만, 러시아남부의 북카프카즈는 전통적으로 이슬람을 수용하였다.
이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지역은 다게스탄이었다. 북카프카즈에 이슬람이 전파된 시기는 7세기 이후부터였다. 북카프카즈 에서는 이슬람이 점진적으로 전파되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매우 늦게 이슬람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체츠냐 에는 17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이슬람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북카프카즈의 이슬람 종파는 기본적으로 순니였지만, 14세기부터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즈 지역에 전파되던 수피즘은 19세기에 이 지역에서 강력히 정착되기 시작했다. 북카프카즈 수피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820년에 순니파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수피즘이 이 지역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 배경은 시대적 상황을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는 제정러시아가 북카프카즈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국가적 상황에서 수피즘이 다게스탄과 체츠냐 등에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수피즘은 상기에 언급한 대로, 이슬람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대변하고 있는 이념이다. 그런데, 북카프카즈 수피즘은 제정러시아의 제국주의 통치 과정에서 유입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대 러시아 저항 정신으로 발전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북카프카즈 수피즘의 이념적, 정치적 경향을 분석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러시아와 서방의 문헌에서 수피즘은 1820년대에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었지만, 일부 문헌에서 수피즘은 이미 몇 세기 전에 전파되었으며, 특히 18세기에 체츠냐의 이맘 만수르를 중심으로 수피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783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정복하였다. 흑해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의 확보와 흑해로의 출구인 북카프카즈 복속이 당시 제정러시아 대외전략의 목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첸의 지도자인 쉐이크(шейх) 만수르가 등장하는데, 그는 외부세력인 러시아의 공격에 대항하여 당시 북카프카즈 산악 민족들의 민족적 연대를 주장하고 대 러시아 저항에 나섰던 것이다. 쉐이크는 이슬람 지도자 및 스승, 학자 등으로 해석된다.
그는 일종의 ‘가자바트’, 즉 지하드(聖戰)를 주창하였다. 만수르는 1791년 오스만터키의 항구인 ‘아나파’에서 러시아 군대에 체포될 때까지 대 러시아 투쟁을 위하여 종교적 수장인 이맘의 역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정적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소유하면서 대 러시아 전투를 직접 지휘하였고, 여러 번의 패배를 러시아 군대에 안겼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만수르를 북카프카즈의 무슬림들에게 저항의식을 일깨워준 수피즘 ‘낙쉬반디야’ 종단의 쉐이크로 묘사하였다(Alexandre Bennigsen and Enders Wimbush 1985: 32). 만수르는 수피로서 진리 완성이라는 종교적 이념 보다는 현실적 상황, 즉 대 러시아 항쟁이라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1817년에 제정러시아의 예르몰로프 북카프카즈 총독이 북카프카즈 민족에 대한 완전한 복속을 시도함으로써, 러시아와 북카프카즈 산악 민족들 간에 카프카즈 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1859년 제 3대 이맘 샤밀이 러시아 군대에 항복함으로써 종결되었는데, 거의 반세기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다. 카프카즈 전쟁의 원인으로는 학자들 간에 다양한 이견이 있지만, 제정러시아의 영토 확장 야욕도 카프카즈 전쟁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카프카즈 전쟁의 이해에는 종교적 요소, 즉 이슬람 요소가 매우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제 1 대 이맘으로부터 제 3대 이맘인 샤밀 까지 카프카즈 전쟁의 와중에 수피즘은 대 러시아 저항의 이념으로 기능하였고, 분열되어 있던 산악 민족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이념적 단일성을 제공해 주었다. 예르몰로프의 통치 시기에 북카프카즈 민족들, 즉 소위 산악민족들의 투쟁은 매우 격렬하였다. 이들의 투쟁은 종교적-정치적 운동인 무리디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러시아 학자들은 이러한 운동을 ‘종교적 극단주의’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산악민족들의 입장에서 무리디즘 운동은 특별히 러시아 민족을 향한 투쟁이었고, 이는 민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특히 무리디즘은 북카프카즈 지역 중에서 다게스탄과 체츠냐 등에서 매우 강력히 정착되면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토대 하에서 1834년에서 1859년까지 이슬람 신정국가가 이 지역에 탄생되었던 것이다. 1834년에 샤밀은 북카프카즈에서 특별히 정부 수반의 역할을 동시에 소유하던 이맘의 위치에 올랐다.
당시 샤밀은 행정, 군사, 정치, 종교적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북카프카즈 지역에서 러시아는 막대한 인명적, 경제적 손실을 겪게 되었지만, 결국 카프카즈 전쟁을 승리하면서 북카프카즈 지역을 완전히 복속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오스만터키와 페르시아에 맞설 수 있는 완충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피즘의 원래의 관점인 신비주의를 생각한다면, 수피즘의 역할과 기능은 19세기 북카프카즈 사회에서는 매우 투쟁적인 관점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피즘 자체의 본질과 이념적 특성을 본다면, 이러한 관점은 북카프카즈 사회에서 매우 특이한 상황적 요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매우 중요한 사상적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카프카즈 전쟁의 전후에 수피즘의 본질에 대한 북카프카즈 사회의 논쟁은 치열하였다.
북카프카즈 사회에서 종교지도자들은 수피즘이 현실적 상황에 참여하여 대 러시아 저항적 정신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룹이 있었지만, 또 다른 지도자그룹에서는 저항이 아니라 신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에 카프카즈 전쟁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기하였는데, 카프카즈 지역 학자들은 카프카즈 전쟁의 핵심적 역할은 수피즘의 저항 정신을 강조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지역의 수피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종교지도자가 군사적 투쟁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북카프카즈 사회에서 이러한 역할을 가장 강력히 선도하였던 지도자는 샤밀이었다. 샤밀이 이맘이 되기 이전인 1824년에는 다게스탄의 종교 지도자인 ‘물라 무하마드’ 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대 러시아 저항을 위해 카프카즈 민족을 인도하는 사명이 있음을 선포하였다. 저명한 체첸의 종교지도자인 ‘베이불라트 타이마조프’는 체츠냐 지역의 군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이 두 지도자는 북카프카즈의 카바르딘, 쿠믹, 오세티아, 체츠냐, 다게스탄 민족들을 대 러시아 투쟁으로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1820년대에 다게스탄에 다른 종교 지도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카프카즈 전쟁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가지 무하메드’였다. 그는 북카프카즈에서 무리드의 정치적 의미를 강력히 제창한 이맘이었다. 무리드는 이슬람 지식을 추구하는 구도자인데, 북카프카즈 에서는 수피즘의 종교 추종자로 대 러시아 저항적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
그는 자신을 북카프카즈 사회에서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역할을 동시에 보유한 첫 번째 이맘으로 선포하였다. 가지 무하메드는 낙쉬반디야 종단 중에서도 대 러시아 항쟁을 강력히 주장한 ‘자말 아딘 알-가지’의 추종자이며 제자였다. 영적 합리성과 샤리아에 명문화된 이슬람의 대중적 요구를 동시에 채우는 것이 낙쉬반디야의 수피 전통에 부합되는 행동이었다. 수피 종단 중에서 낙쉬반디야는 가장 정통적인 그룹으로 간주되며, 가장 행동적이고 실천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종단은 아랍 중동을 제외하면, 무슬림 세계의 유라시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가지 무하마드의 첫 번째 행동이 바로 성전(聖戰) 선포였다. 그는 이교도 러시아인을 향한 성전 선포와 산악 민족들의 비 이슬람 행동과 관습과의 투쟁을 주창하였다. 이는 일종의 종교적 ‘문화 전쟁’ 선포이며, 수피로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주장한 그의 교의는 이맘 샤밀 시대에 이르러 가장 강력한 이념적 완성으로 뿌리내렸으며, 샤밀 시대에 신정국가는 이슬람의 투쟁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카프카즈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모든 수피즘 신봉자들이 전투적, 혹은 군사적 이슬람의 형태인 19세기 전반기의 투쟁적 수피즘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투쟁의 교의로서가 아니라, 신비적 관념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한 일단의 종교 그룹에서는 정치적 주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 19세기 후반기 수피즘 - 까디리야 종단과 신비주의 관념
일반적으로 수피즘의 신비주의 정신과 대 러시아 저항 이념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평행선과 같다. 그것은 종교적 절대성인 진리 추구와 군사 봉기라는 양 극단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피 이슬람은 북카프카즈 에서 단일한 힘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다게스탄과 체첸 지역에서는 종단의 분화가 일어났다. 19세기 러시아 역사 자료의 용어인 ‘무리디즘’ (대 러시아 저항 정신으로서의 무슬림 제자 운동)은 전반기에는 다게스탄에서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19세기 후반기 들어 낙쉬반디야 종단은 다게스탄에서, 까디리야 종단은 체츠냐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권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가장 중요한 수피 종단의 인물은 ‘쿤타 하지’였는데, 체츠냐의 까디리야 종단에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었고, 그는 러시아에 비저항적인 입장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소위 ‘까디리야-쿤타 하지’ 종단은 체츠냐와 잉구세티아에 폭넓게 퍼져있었다. 까디리야 종단은 원래 가장 존경받는 4개의 수피 종단 중의 하나였으며, 무슬림 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한 추종자를 가지고 있다.
1859년 샤밀이 러시아 군대에 항복한 이후로 북카프카즈의 서부 지역에서 약 5년간의 저항이 지속된 이후 1864년에 카프카즈 전쟁은 종식되었다. 종교가 정치적 수단으로 북카프카즈 사회에 정착되었던지 간에, 수피즘은 19세기 전반기에 북카프카즈 사회의 대중에게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종교적 이념이었다. 수피즘은 북카프카즈의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변천의 과정을 거쳐 존재하였지만, 19세기 후반기의 수피즘의 양상은 다르게 흘러갔다.
이 시기에 이슬람 학자들은 전통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수피즘 이론을 강조하였으며, 진리추구와 자기완성의 수피즘 이념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19세기 후반기 수피즘의 흐름은 전반기와는 확연히 다른 경향을 보였다. 19세기 전반기 낙쉬반디야 종단의 중심적 활동이 대 러시아 항쟁이었다고 한다면, 19세기 후반기에는 체츠냐의 까디리야 종단의 세력이 우위를 차지하면서 비저항 정신이 강조되었다. ‘쿤타 하지’는 낙쉬반디야 종단의 가자바트(聖戰) 와 대비되는 가장 경건한 형태의 이슬람을 설파하였고, 세속적 일의 참여 보다는 진리의 가르침에 순종하라고 주장하였다. 즉 쿤타 하지라는 인물은 러시아와의 화해를 추구한 전형적 이맘이다.
까디리야 종단의 교의 중 가장 중요한 예배 형태는 ‘디크르’ (зикризм) 이다. 즉 북카프카즈 지역에서의 쿤타 하지의 의미는 ‘디크르’와 밀접하게 연결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교의는 1860년대 초에 시작되었고, 바로 이 시점은 러시아와 격렬한 전쟁을 치렀던 산악민족 들에게 전쟁이 끝난 휴지기였고, 평화적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즈 전쟁의 종식 이후 쿤타 하지는 메카 순례를 마치고 고향인 체츠냐의 ‘엘리스한-유르트’로 돌아왔다.
그는 소위 ‘디크르’ 종단을 시작하게 되었다. 디크르는 당시 북카프카즈 사회에서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었다. 실제적으로 모든 수피즘의 종단에는 ‘디크르’가 존재하고 있는데, 디크르(зикр)는 신을 향한 찬미로 해석되며, 수피즘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행위였다. 이는 당시 오스만터키로 부터 수용했다는 설이 강력하며, 적어도 쿤타 하지가 메카 순례를 가서 무슬림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폐트루세프스키도 체츠냐에서 행해진 디크르는 대부분의 무슬림 국가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쿤타 하지의 교의는 카프카즈 전쟁으로 지쳐있던 산악 민족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카프카즈 전쟁의 종식 이후에 강조되었고, 사실상 이 시기는 북카프카즈 사회의 독립과 투쟁에 대한 열망이 식어있었던 때였다. 쿤타 하지의 디크르의 교의는 낙쉬반디야 측으로부터의 이념적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이 종단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순응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카프카즈 사회에서 낙쉬반디야의 가르침과 까디리야 종단의 교의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인가? 만약에 산악 민족들이 사회적 ․ 민족적 압박에 대항하는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수단을 모색하였다고 한다면, 낙쉬반디야의 수피즘이 카프카즈 민족 독립 운동의 초기에 대 사회적 투쟁을 위한 정신적이고 이론적인 근간이 된 반면에, 디크르는 샤밀의 신정국가의 패배로 인해 카프카즈 민족이 당면한 최고 위기의 순간인 독립 운동 쇠퇴의 분위기에서 확산된 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정국가인 이마마트(имамат)의 마지막 붕괴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쿤타 하지는 신비주의 관점으로서의 이념적 포교 활동에 돌입하였다. 이맘 샤밀이 북카프카즈 사회의 디크르를 반대한 이유는 이마마트 시대에는 금지하였던 노래, 음악, 춤을 중심으로 하는 수피즘의 신비주의적 행위로 이루어졌다는 측면 보다는 디크르의 이념이 자신들이 추구한 무리디즘과는 근본적으로는 합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쿤타 하지는 1863년에 러시아군에 체포되고 그 직후 사망하였다. 쿤타 하지는 아랍어로 “내가 하지를 행하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즉 메카와 메디나로 경건한 성지순례를 행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로 인해 까디리야 종단의 다양한 하부 종단은 대 러시아 통치에 반발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는 카프카즈 전쟁의 종결 이후에도 산악 민족들에 대한 압박 정책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쿤타 하지의 이념이 가져다 준 영향으로 산악 민족들의 저항은 점진적으로 쇠퇴하였다. 1877-1878년에 산악 민족들의 봉기가 있었지만, 조용하고 안정적인 기조가 유지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1917년 러시아혁명까지 이어졌다.
사실상 쿤타 하지가 까디리야 종단에서 이념적으로 강력한 후계자나 종교 지도자들을 배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체적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쿤타 하지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후계자를 의식적으로 남겨놓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 전반기에는 다게스탄과 체츠냐 지역에서 낙쉬반디야 전통이 더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산악 민족들의 저항도 강력하였다. 이마마트 시대에는 다게스탄과 체츠냐 지역에 신정 국가의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다게스탄에는 7세기에 이미 이슬람이 전파되었지만, 다게스탄에 비해 원시적 형태의 공동체적 민주주의의 전통이 더 강했던 체첸 지역에서는 사실상 점진적으로 이슬람이 포교되었기 때문에 카프카즈 전쟁의 초기에는 다게스탄에서 더 활발한 대 러시아 투쟁이 있었지다. 그러나 이마마트 시대에는 체첸 지역이 신정국가의 지리적 범위에 광범위하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체첸 민족도 매우 강력한 대 러시아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세기 전반기 수피즘의 광범위한 영향력은 낙쉬반디야 종단이 가지고 있었으며, 까디리야 종단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 체츠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9세기 전반기 북카프카즈 사회의 중요 이슬람 지도자와 이맘은 다게스탄 지역에서 배출되었으며, 이맘 샤밀도 아바르 인이었다. 반면 19세기 후반기에는 체츠냐의 쿤타 하지의 이념적 영향력이 더 폭넓게 북카프카즈 사회에서 확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