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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혼
죄에서 벗어나는 길과 혼 생명
- 죄에서 벗어나는 길 -
로마서 6장은 믿는 이들이 죄로부터 해방받는 것의 기초이다. 이러한 해방은 개개인 믿는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이것을 얻을 수 없다. 한 가지 우리가 얻을 수 없다.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로마서 6장의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죄인이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그 순간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거나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이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는 이가 된 지 오랜 후에 다시 로마서 6장의 복음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들은 복음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들은 복음이 온전하지 않았거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것은 새로 태어난 믿는 이가 공유하는 축복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복습해 보기로 하자.
로마서 6장의 시작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라는 것이 아니라 회고하라는 것이다. 즉 과거에 우리가 얻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6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실직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다음 세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 '죄'(원문에서는 단수임)
2) '옛사람'
3) '몸'(죄의 몸)
이 세 가지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데 특히 범죄하는 일에 있어서의 그 역할이 각각 다르다. 이 '죄'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죄의 뿌리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전에 '죄'의 종이었다고 말한 것은 '죄'가 주인노릇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일에 있어서 ,첫째로 우리는 '죄'에게 능력이 있고 우리로 종노릇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죄'는 쉬지 않고 그 능력을 발하여 '옛사람'으로 순종케 하고 범죄케 한다. 이 옛사람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옛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새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새사람 이외의 모든 것이 '옛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새사람은 바로 거듭날 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새로이 얻은 그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우리의 인격이요 모든 낡은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옛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죄'를 좋아하고'죄'의 능력에 굴복하기를 좋아한다.
'죄의 몸'은 우리의 육신이다. 범죄할 때 육신은 죄의 꼭두각시 노릇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물질에 속한 부분이다. 이것을 '죄의 몸'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 안에서 '죄'의 능력 아래 굴복하기 때문이요, '죄'의 정욕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죄'는 이 육신을 통해 표현된다. 그렇지 않을 때 '죄'는 보이지 않는 능력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죄'는 우리가 범죄하도록 우리를 끄는 힘이고, '옛사람'은 아담으로부터 우리가 얻은 정신적인 부분이며, '죄'의 몸'은 아담으로부터 우리가 얻은 물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범죄의 체험에서 불때, 첫째는 죄이고 둘째는 옛사람이며 셋째는 몸이다. 죄는 그 능력을 발하여 범죄하도록 사람을 유혹하고 강요한다. 엣사람은 죄를 좋아하고 죄에 찬성하며 죄에게 쏠리기 때문에 몸으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주도한다. 몸은 밖의 꼭두긱시로서 죄를 범하는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매번 사람의 범죄는 이 세 가지의 동역의 결과이다. 모든 범죄에는 죄의 능력이 압박과 옛사람의 성향과 몸의 실행이 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사람의 이상과 이상적인 체험들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은 죄로부터 모든 악이 시작되기 때문에 죄를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근절시켜야 한다'는 이론을 발명하였다. 그들은 죄를 범하지 않게 되고 거룩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범죄를 실행하는 부분이 몸이기 때문에 죄를 이기려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교회 가운데 여러 방법으로 자기를 억제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금욕주의자들이 생겼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로마서 6장 6절은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거나 밖의 몸을 제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있는 옛사람을 처리하신다.
- 하나님의 사실 -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실 때 그분은 우리 죄를 그곳에 가져가셨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가져가셨다. 우리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힘"은 원문에서 완전 과거 시제의 동사로써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영 단번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이미 완성된 사실인 것같이 우리 옛사람이(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이미 완성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빅히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면, 왜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의심하는가?
많은 믿는 이들은 '함께 죽었다'는 진리를 들은 후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거나 믿음이 결여된 이유로 자기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힘껏 자기를 못 박으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죄를 벗을 능력이 없고 어떤 방법을 써도 옛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매우 큰 과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못 박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못 박으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못 박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 옛사람을 이미 못 박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다른 구절을 볼 필요없이 로마서 6장 6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구절에는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못 박아야 한다거나 이 못 박은 일이 장래 일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 이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이 이미 완성된 사실임을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가장 보배로운 한 마디가 낳은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오르실 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올라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여!
머리로 이해한 진리는 결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여기에 절대로 성령의 계시가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게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의 계시하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하는 것은 사람의 머리의 이해가 아닌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때 이 진리가 사람 속에서 능력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사람은 믿는 능력도 소유하게 된다. 믿음은 계시로부터 온 것이다. 계시가 없으면 믿음도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믿음이 없는 이유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자.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목적은 무엇인가? '죄의 몸으로 실직케 하기 위한' 것이다(원문 참조). 개역 성경에서 '죄의 몸이 멸하여'라고 번역된 것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죄의 몸이 실직하여' 또는 '못쓰게 되어' 로 번역해야 한다.
'죄'가 격동할 때 우리 '옛사람'은 이것에 대해 메아리치며 결국 '몸'은 범죄를 시행하게 된다. 이제는 죄가 전과 같이 격동하고 그 능력으로 압박을 가해도 '옛사람'이 이미 못 박혔고 새사람이 옛사람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가 다시는 이 사람을 시험할 수 없다. 이는 그가 새사람이 되었고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옛사람'은 다시 '죄'에 찬성하여 '몸'으로 범죄케 하는 일을 주도하지 않게 된다. 바로 '옛사람'이 이미 못박혔기 때문에 죄의 '몸'은 실직하여 할 일이 없게 되었다. '몸'의 직업은 본래 죄를 짓는 일이었디. 이제 범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실직한 것이다. 주님을 찬양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바이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 옛사람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몸으로 실직케 하였는가? 그분의 목적은 바로 우리로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모든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고 죄의 압제를 당할 필요도 없으며 죄의 능력에 매일 필요도 없다. 죄가 다시는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 할렐루야! 이것은 참으로 우리가 찬미해야할 한 가지 일이다.
- 두 방면의 조건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축복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이를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11절 말씀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13).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셨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산 자로 여기는 것' 이다.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을 산 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김'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옛사람이 이미 못 박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옛사람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산 자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자신을 산 자로 여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실패는 바로 무언가를 느끼고 보고 체험하려고 할 뿐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데 있다.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체험한 후에야 그의 옛사람이 못 박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된 것으로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이 이루신 것을 사실로 여기기만 하면 그분의 성령은 우리에게 체험을 주신다. 그분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흘러 오게 하신다.
또 한 가지는 13절 말씀이다.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에게 아직 버리기 아까운 것이 있고 하나님께서 버리라는 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죄는 여전히 우리 몸에서 권세를 잡게 된다. 또 우리가 '여긴 것'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거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하실 때,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소극적인 면에서 무엇을 포기하기를 꺼려하거나 적극적인 면에서 무엇을 반대한다면 죄는 다시 권세를 잡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여길 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여기지 않고 당신의 믿음을 멈춘다면, 비록 당신의 위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생활은 - 요한복음 15장의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처럼 -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곧 당신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 사실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주 예수를 구주로 진지하게 영접한 것같이 이 여김과 헌신에 대해 서로 진지해야 한다. 만일 생각 안에서만 이해하고 전일한 믿음과 전일한 헌신이 없다면 이 생활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든지 실패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실패한 것이아니면 우리의 순종이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 두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에게 실패가 있다면 이 두 가지 일에서 문제가 생겼거나 그중 하나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 밖에서 자신을 생각하지 말며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한다. 매일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실을 참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의 헌신을 보존해야 한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남겨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어려운 것이든 우리 마음속으로 그것을 원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대가도 큰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를 배우라
만일 우리가 이렇게 여기고 헌신한다면 그 결과는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분명하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말한다.
- 죄와 몸의 관계 -
믿는 이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두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죄에서 벗어난 체험을 가진후에 매우 위험한 시기에 떨어질 수 있다. 만일 이때에 그가 좋은 지침을 받아 성령을의지하여 십자가로 말미암은 더 깊은 일들로 전진한다면, 그는 온전히 영에 속한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그가 자족하여 죄를 이기는 생활로 생각하고 십자가에 의해 그의 혼 생명이 처리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혼의 한계에 머물면서 혼적인 체험을 영적인 체험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의 옛사람은 이미 처리되었지만 그의 생명은 아직 십자가에 의해 처리되지 않았다. 이로써 이 생명의 의지와 생각과 감정은 아무 고려 없이 활동하게 되고 결국 믿는 이의 체험은 여전히 육체에 속한 것이 된다.
우리가 죄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전 존재에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만 이미 처리된 것과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죄’가 특별히 우리의 몸과 관계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육체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철학자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죄’가 다스리는 영역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6절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몸을 ‘죄의 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본다. 이는 우리가 십자가의 처리를 받기 전에 곧 우리의 지체를 아직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우리의 몸이 ’죄의 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죄‘는 우리 몸을 점유했었고 우리 몸에서 주인 노릇을 했었다. 우리의 몸은 ’죄‘의 요새요, 도구요, 수비대였다. 그러므로 ’죄의 몸‘이라는 것보다 더 적절한 칭호는 없다.
만일 우리가 성경 안에서 죄로부터 해방받는 것에 관한 성경 말씀(롬6장~8장)을 자세히 읽어 본다면 몸과 ’죄‘와의 관계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 몸을 ’죄‘의 모든 일들과 죄를 섬기는 데에서 건져 내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본다.
“죄의 몸이 멸하여”(6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절)“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절)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13절).
"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7장에서 하나님은 사도로 말미암아 또한 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우리 지체 속에 역사하여”(5절)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밥을 보는도다(23절)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23절)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절)
8장에 와서 성령의 음성은 더욱 분명하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10절)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
“우리 몸의 구속”(23절)
이 구절들을 읽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몸을 주의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몸이 특별히 ‘죄’가 활동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 노예가 되는 이유는 사람의 몸이 ‘죄’의 꼭두각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몸이 ‘죄’에 대하여 실직자가 될 때 사람은 ‘죄’의 종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이 ‘죄’로 부터 해방을 받는 것은 바로 그의 몸이 ‘죄의 능력과 권세로부터 해방받는 것임을 본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말한다. 옛 사람이 못 박힌 목적은 몸으로 하여금 ’죄‘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옛사람 - ’죄‘의 동역자 - 은 이미 못 박혔다. 새사람이 과거 옛사람이 점유했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비록 죄가 여전히 존재해도 몸에 대한 죄의 능력은 이미 깨뜨려진 것이다. 옛사람의 못 박힘은 ‘죄’로 하여금 몸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엣사람의 동역이 없어졌기 때문에 ‘죄’는 직접적으로 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 부터 해방받는 것은 우리 몸이 해방받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라(완전한 구속과 죄의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장래의 일이다). 우리가 의지하여 사는 천연적인 생명 - 혼 생명 - 은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죄를 이기는 생활을 최고의 생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몸의 ‘시들어 없어짐’을 최고의 생활올 삼는 것이며 우리에게 죄의 몸 외에도 천연적인 혼과 혼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혼 생명도 몸과 같이 처리될 필요가 있다. 만일 믿는 이로서 몸이 ‘실직한 것’(이것은 매우 기묘한 것임)만 알고 혼 생명을 부인할 줄 모른다면, 그의 영적인 체험은 그리 깊지 않고 아주 얕은 것이다.
전에 우리는 개략적으로 ‘자아’가 하나님의 일 안에서 활도한다는 것을 언급했었다. 실로 몸이 완전히 시들었다 하더라도 전체 혼 생명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을 수 있다. 이 생명은 자아를 의지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외면적인 표현들을 갖고 있다. 이는 혼 생명 안에 적어도 생각과 의지와 감정의 세 부분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혼 생명을 좇아 살 때에 어떤 사람은 의지에 기울고, 어떤 사람은 생각에, 어떤 사람은 감정에 기울게 된다. 비록 외면적인 나타남이 크게 다를지라도 - 생각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과 감정에 속한 것의 차이점으로 인해 혼에 속한다는 면에서는 똑같다. 의지에 가울어진 사람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애호를 중심 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생각에 기울어진 사람은 자기의 지혜로 자기 길을 결정하며 안정된 가운데 직감 안에서의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에 기울어진 사람은 감정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이것을 최상의 생활로 생각한다. 믿는 이가 어떤 면으로 기울어졌든 만일 그것이 혼 생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면, 그가 자아의 능력을 의지하여 산다는 면에서 똑같은 것이다. 자아의 능력에 속한 타고난 재주나 구변이나 총명이나 매력이나 열성들은 모두 주님을 믿기 전에 믿는 이들이 천연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이다. 혼 생명을 좇아 행하는 믿는 이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다음 사항들이 있다. (1) 원칙적으로 혼 생명은 바로 자아의 천연적인 능력이다. (2) 표현에 있어서 혼 생명은 외면적으로 세 가지 다른 생활을 가지고 있다. 혹 완강하여 복종하지 않거나 스스로 지혜 있다 하거나 감각적인 쾌락을 구하는 것이다. 만일 믿는 이가 혼 생명으로 산다면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이 세 가지 외적인 표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때 믿는 이가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기는 데까지 전진하지 못한다면, ‘자아의 생명’을 키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잃게 하는 것이다.
- 혼은 곧 생명임 -
우리는 혼이 본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본 바있다. 그 생명은 우리를 살리고 유기적이게 하며 생존(육신의 방면을 말함)할 능력을 준다. 우리의 혼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창세기 1장 21절~24절에 있는 ‘생물’은 원문에서 다 ‘혼’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혼은 우리 사람과 기타 동물들이 공유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본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다. 거듭나기 전 우리는 모두 이 생명을 의지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이 생명은 모두 인간에게 있는 생명이다. 헬라어로 이 혼은 ‘프쉬케’로써 즉 ‘동물의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혼 생명은 천연적인 것이다. 이 생명은 다 죄악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옛사람이 주님과 함께 못 박힘으로 많은 이들이 죄를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명이 사람이 생명이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다. 당신이 ‘사람’답게 살고 온전한‘사람’의 삻을 살기 원하고 이 생명이 선하고 사랑스러우며 겸손한 생명일지라도 ‘인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명은 거듭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나 우리의 생명은 창조된 것이다. 또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초자연적인 생명이나 우리의 생명은 타고난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조에’ 의 생명이나 우리의 생명은 ‘프쉬케’의 생명이다.
생명은 행위릁 통해 표현된다. 생명은 사람의 온몸의 지체로 활동하게 하는 내적능력이다. 사람의 활동은 이 생명의 외적 모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활동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바로 이 생명 안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의 천연적인 ‘어떠함’이다. 이 생명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생명이 우리의 혼 생명이다.
- 혼과 죄 -
혼 생명은 무엇이든지 명령받은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영이 다스릴 때 혼 생명은 영의 지시를 받아 의지를 사용해서 영의 명령을 지킬 것을 결정한다. 몸 안에서 죄가 다스릴 때 혼 생명은 죄에게 유혹되어 죄가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의지를 사용하여 결정한다. 혼 생명은 그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에 다만 모든 명령을 집행하는 책임을 진다. 타락 전에 인간의 혼 생명은 영의 지시에 따라 필요한 힘을 제공했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의 혼 생명은 죄의 몸의 지시를 따라 온전히 듣게 되었다. 사람이 육체에 속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몸 안에서 사람을 다스렸던 죄는 사람의 성품이 되었다. 결국 이 죄는 사람의 혼을 노예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히 죄를 좇아 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죄는 사람의 성품이 되었고 혼은 사람의 생명이 돠었다. 종종 생명과 성품을 언급할 때 우리는 생명과 성품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지면, 생명과 성품 사이에는 그분이 있다. 생명은 비교적 큰 것이고 성품은 비교적 작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은 각기 그 생명에 따른 성품을 갖고 있다. 성품은 생명의 자연적인 원칙으로써 사람의 취향과 애호를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생명은 혼이었고 우리의 성품은 죄였다. 우리가 혼에 의해 살 때, 우리 생활의 모든 취향과 애호는 죄를 좇아 행하는 것이 된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것이 죄이고, 그러한 결정에 따라 행하도록 능력을 제공해주는 것이 혼이다. 죄의 성품은 발동을 걸고 혼의 생명은 동력을 제공한다.죄는 발원하고 혼은 이를 집행한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의 상태이다.
믿는 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게 그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은혜만을 받아들이고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을 이미 그의 속에 넣으셨고 그의 영을 살리셨다. 이 새 생명은 그분의 새 성품과 함께 온다. 이때부터 믿는이 속에는 두 개의 생명 - 영의 생명과 혼의 생명 - 과 두 가지의 성품 - 죄의 성품 - 죄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 - 이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성품은 서로 다르고 타협할 수 없으며 서로 섞일 수도 없다. 새 것과 낡은 것은 날마다 서로 싸우면서 우리 온 존재를 다스리려고 한다. 이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이고 육에 속한 자이다. 이때 그의 체험은 가장 비정상적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즉 성공과 실패로 점철된 것이다. 나중에 그가 십자가의 구원을 알고 믿음으로써 그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여길 때, 그는 몸을 죽은 자같이 시들게 한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옛사람이 이미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그는 죄를 이기는 능력을 갖게 되고, 체험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는 약속이 응하게 될 것이다.
이때 믿는 이는 죄가 그들 발아래 있고 모든 육체의 정과 욕심이 더 이상 그들을 유혹하지 못하는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 있는 믿는 이들 중 대부분은 현재 주를 믿었으나 아직 죄에 매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서 그는 자신이 온전히 신령한 경지 곧 완전한 절정에 이르렀고 가장 깊은 영적 생명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실지와 다르고, 그는 그의 위치가 여전히 혼에 속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
이것은 왜 그런가? 이는 십자가의 일에 의해 믿는 이의 죄스런 성품이 이미 처리되었으나 그의 혼 생명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범죄가 죄의 본성에서 나오고, 혼은 그것의 명령을 따르고 힘만을 제공하지만 사람의 혼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러운 것이 아닐 수 있으나 아담의 타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이것은 천연적인 것에 속하며 하나님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 믿는 이들 속의 더러운 옛사람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혼은 여전히 그의 생활의 능력이다. 비록 그가 죄의 본성에서는 벗어났으나 자아의 생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혼에 속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비록 옛 사람이 더 이상 혼을 주장하지 않게 되었지만 혼은 여전히 사람의 생활 능력이다. 이제 하나님의 성품이 죄의 성품을 대치하였기 때문에 그의 모든 취향과 애호와 주장은 다 선하고 전과 같이 더러운 것은 아니나 이 새성품을 집행하는 주장과 애호는 전의 혼 생명과 다를 바가 없다.
혼을 의지하는 이 생명으로 영의 주장을 집행하는 것은 자연적인(세상적인) 힘으로 초자연적인(하나님께 속한) 선을 이루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자아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믿는 이의 상태로는 이미 죄를 이겼지만(소극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어리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과 어림과 쓸모없음을 진심으로 시인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사람의 본성은 스스로 능력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겸손해지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령을 의지하여 의를 행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또한 자아(혼)의 능력으로 과거의 거의 모든 행위를 개선하려고 한다. 이때의 위험은 바로 성령의 능력 주심으로 새 성품의 분부를 집행하려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데 있다. 사실상 이때에 그의 영적 생명은 아직 성장하지 않은 갓난아이같이 하나님의 성품의 미덕들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기다림과 겸손과 의뢰하는 마음이 결여됨으로 자신의 소행이(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천연적이고 혼에 속한 능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그분의 자녀에 대한 모든 요구 조건을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소행과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 속한 것의 혼합이다. 이는 하늘의 소원을 땅에 속한 능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믿는 이의 소행은 여전히 영에 속하지 않고 혼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은 혼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사실 간단히 말해서 혼 생명은 다름이 아닌 보통 우리가 말하는 자아 생명이다. 많은 믿는 이들은 죄와 자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죄와 자아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나 영적인 체험에서나 죄와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모른다. 죄는 더럽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완전히 악한 것인 반면에 자아는 꼭 더러운 것이 아닐 수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악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도리어 많은 경우에 자아는 아주 아름답고 하나님을 도우며 아주 사랑스러운 것이다. 예컨데 성경을 읽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경을 읽을 때 자아의 소행으로 가득할 수가 있다. 자기 총명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죄는 아니나 자아의 소행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계획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자기 방법으로 일하는 것은 자아가 충만한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영적 생명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죄가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추구도 혈기의 자아에서 비롯 된 것일 수 있다. 혹은 남보다 뒤떨어지가 싫어서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영적 상태의 진보가 어느 정도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자신으로 무엇인가를 얻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선을 행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선행 속에도 자아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이 행한 선은 개인의 천연적인 선일 뿐 거듭날 때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부터 자상하고 참을성 있으며 온유한 것과 같다. 그의 자상함과 인내와 온유는 천연적인 것이고 혈기에 속하고 자아에 속한 것이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자상하고 인내하며 온유한 반면에 범죄하지 않고 그것들이 죄가 아닐지라도 자아 생명의 행위가 그 안에 충만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행해진 선은 의지할 데 없어서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를 간구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의지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죄와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간단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영적 노정에서 더 진보했다면, 많은 일에 끼어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아가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상 자아는 가장 거룩한 일과 가장 영적인 생활에도 섞여 있을 수 있다. 믿는 이가 죄로부터 해방받는 체험을 한 후에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위험 요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옛사람은 이미 ‘죄’ 에 대하여 죽었고 ‘죄’의 몸은 시들어졌지만 ‘죄’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모른다. ‘죄’는 이제 왕위를 잃은 왕같이 모든기회를 사용하여 힘써 자기 자리를 복구하려고 한다. 이것은 믿는 이가 ‘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계속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온전하여졌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그가 계속적으로 처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주 안에 있는 한 무리의 믿는 이들이 ‘성결’ - 죄에서 벗어남 - 을 추구하여 그것을 얻을 때에 그들 자신이 거룩하여졌다고 착각하는 이 점이다. 그들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승리 생활의 제일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죄를 이기는 것은 하나의 문이고 영 단번에 들어가는 것이나 자아를 이기는 것은 우리가 일생 동안 걷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죄를 이긴 후에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를 이기도록 날마다 우리를 부르신다. 이 자아는 많은 경우에 가장 좋은 자아와 가장 열심이 있는 자아이고 가장 하나님을 섬기는 자아이다.
만일 믿는 이가 죄로부터 해방만 알고 ‘지아를 부인하는 것’과 ’혼 생명을 잃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다음의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 즉 자아의 능력 곧 우리가 말하는 혼 생명을 의지하여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는 죄 외에도 그 안에 두 가지 곧 영의 능력과 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영의 능력은 거듭날 때 그가 얻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혼의 능력은 바료 자아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바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명이고 거듭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천연적인 능력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의 안에 있는 두 가지 능력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모른다. 만일 그가 혼의 능력을 거절하고 전적으로 영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혼의 능력을 사용하거나 영의 능력에다 혼의 능력을 겸하여 사용한다면, 그는 혼에 속한 사람 - 육에 속한 사람 - 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속한 것과 우리의 어떠함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여 살고 매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만일 믿는 이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생활은 혼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에 지나지 않고 자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혼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영 안에서 성령께서 운행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의 영 안에는 성령께서 인격으로 계신다. 그는 성령께서 주신 생명으로 그의 모든 행함의 능력이 되게 한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취하여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다. 이 땅에 살 때 그는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자기 총명으로 무엇을 계힉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의 생활 원칙은 더 이상 감정의 지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용히 영 안에서 사는 것이다.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이와 전혀 다르다. 비록 그가 영적인 생명을 가졌지만 그 생명과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그는 여전히 혼을 생명으로 삼고 자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 자기의 소원대로 행하고 마음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일에서 자기의 천연적인 총명으로 많은 지헤로운 안배를 한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감정의 자극의 지배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 두 가지 성품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두 가지 생명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영의 생명과 혼의 생명이 동시에 우리 안에 살고 있다. 영의 생명이 극히 강한 존재이나 혼 생명이 이미 온 존재 안에서 뿌리 깊게 운행하고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그가 혼 생명을 버리고 영의 생명의 운행하심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영의 생명은 발전할 기회를 칮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옛사람의 문제만 주의하고 외면적인 모든 더러운 죄를 이기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전부하고 생각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전진할 기회가 없게 되고 하나님께서(죄와 같이) 미워하시는 혼 안에서 살게 된다. 믿는 이라면 가르침을 받아 죄를 이기는 것 - 이것은 복된 일이다 - 은 모든 믿는 이의 일반적인 수준이지 희귀하고 놀라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하심은 없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었다면 우리는 이미 주 에수와 함께 죽은 사람이다.죽은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죄로부터 해방받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완전한 구원이 이미 예비되었기 때문이다. 믿는 이는 - 비롯 이것이 어렵고 깊더라도 - 마땅히 자아의 생명을 미워하는 완전한 공과에 이르는 단계에까지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얻은 죄의 본성을 미워해야 할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의지하여 살고 있는 천연적인 생명도 부인해야 한다. 육체의 모든 죄를 제거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육체의 - 자아의 생명을 의지하여 얻은 - 선행도 거절해야 한다, 모든 죄악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이 죄의 생명(하나님께서 보실 때)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 참된 성령안에 있는 생명은 범죄치 않을 뿐더러 자아로 사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성령은 오직 그를 의지하여 사는 사람에게만 그 능력을 나타낸다. 우리는 모든 더러움을 벗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모든 천연적인 것을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계속 ‘사람’의 모양대로 -죄인을 따른 것이 아닐 수도 있음 -천연적인 한계 안에서 산다면,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스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고서도 우리의 사상이 여전히 ‘사람’의 사상과 같고 ‘사람‘이 사모하며’ 사람‘같이 살고 행하기만 하고 우리의 생명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령으로 그 능력을 나타내시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혼에 충만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
- 영과 혼이 혼합된 체험 -
우리의 말은 혼에 속한 믿는 이의 모든 체험이 모두 혼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다만 이러한 사람이 많다는 것뿐이다. 비록 혼에 많은 믿는 이들에게도 영적인 체험이 있지만 그의 체험에는 혼적인 체험이 뒤섞여 있다.
그들은 또한 영에 속한 생활의 개략을 알고 성령께서 그들이 영에 속한 생활을 하게 하신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애가 있는 이유는, 많은 때 그들이 여전히 천연적인 생명을 생활에 필요한 능력으로 삼고 자기 혈기로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이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의 욕망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며, 감정적인 쾌락과 생각 속의 지식을 추구하기를 사모한다. 비록 지식에 있어서는 그들이 영적일지 모르나 실재에 있어서 그들은 여전히 혼에 속한다. 비록 그들의 영 안에 성령께서 이미 내주하시고 십자가의 작용에 의해 성령께서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갖게 하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때로는 혼을 좇아 행하다가 때로는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지만, 어떤 사람은 원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행한다. 그들은 자신의 혼 생명을 사랑한다.
사실 영과 혼은 체험에서 구분하기가 아주 용이하다. 영에 속한 생활은 바로 단순히 영 안의 직감의 지시를 따라 행하는 생활이다. 만일 믿는 이가 영을 좇아 행한다면 그는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거나 창시하거나 시작하지 않고 조용히 영 안의 성령이 음성을 듣는 협력자 위치에 서게 된다. 그의 직감의 지시에 순종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인 생활 가운데에서 믿는 이 자신은 시종 찬성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성령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다. 매번 어떤 행동을 취할 때 그는 전일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고, 깊은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을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성령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며 전진한다. 이럴 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그에게 능력을 주신다.
혼에 속한 생활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혼은 완전히 자기를 중심으로 삼는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자아를 좇아 행한다. 이것은 그의 행위가 자아에서 시작 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사상과 이론과 욕망이 그의 행위의 유일한 지배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속 사람' 안에서 성령께서 말한 소리를 그의 행위의 규범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사상과 이유와 욕망(겉 사람)에 의해 그의 행동이 결정된다. 평상시 기쁠 때에 자신을 위한 쾌락 속에서도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사람의 몸이 혼의 껍질(외곽)이고 혼은 영의 껍질이라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지성소 밖이 성소인 것같이 영의 외곽이 성소인 것같이 영의 외곽은 바로 혼이다. 이로써 우리는 영이 얼마나 쉽게 혼의 영향을 받는지를 볼 수 있다. 그들의 혼과 영은 긴밀히 조성되어 있다. 비록 그들의 혼이 몸이 통제에서 벗어나 더 이상 몸의 정욕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의 영은 아직 혼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몸의 정욕을 이기기 전에 그의 혼이 몸과 결합(한 생명과 한 성품)된 것같이 이제 그의 영도 그의 혼과 결합(하나는 능력을 내고 하나는 주장을 낸다)되었다. 그러므로 혼은 늘 영에 영향을 준다.
영이 혼 안에 매몰된 것 같이 혼에 의해 포위되었기 때문에 늘 생각의 자극의 영향을 받는다. 거듭난 사람은 본래 영 안에 말할수 없는 평강이 있다. 그러나 영과 혼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극을 받아(이것은 혼이 자체의 독립된 욕망과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임)영 안의 평안함과 고요함을 잃게 된다. 때때로 혼에 충만한 기쁨이 그의 영에 영향을 준다. 이때 믿는 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찔림을 받을 때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고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혼에 속한 믿는 이는 자주 이러한 체험을 갖는다.
영과 혼의 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원한다. 그러나 온갖 방법을 사용해 보아도 영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듯하다. 많은 믿는 이들은 영 안에서의 참된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영과 혼을 구분할 줄 모른다. 거기다가 영과 혼이 긴밀히 짜여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영과 혼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혼적인 자신의 체험 - 희락과 이상과 마음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것 등 - 을 최고의 영적인 체험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영적인 체험이 없으면 없다고 할 것이지 왜 혼으로 영을 대치하여 자신에게 손상을 입히는가?
믿는 이의 생활이 온전히 영에 속하지 못할 때 그는 좀전에 우리가 말한 영과 혼이 섞인 체험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있어서 영안의 고요함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감정적인 작용에서 나온 체험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의 생활은 직감의 인도를 따라 행했다가 또 순간적으로 자기의 사상과 이론과 욕망에 따라 행한다. 영과 혼이 섞인 이러한 체험은 믿는 이 안의 두 가지 근원을 나타내준다. 곧 하나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이고, 성령께 속한 것과 자아에 속한 것이다. 하나는 직감애 속한 것이고 하나는 사상에 속한 것이다. 즉 하나는 영에 속한 것이고 하나는 혼에 속한 것이다. 완전한 데 이르기 전에 믿는 이는 이것을 따라 행하다가도 다른 것을 따라 행한다.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의 빛 안에서 스스로 조심스럽게 살핀다면, 자기 속에 두 개의 생명이 있어서 때로는 이 생명을 따라 살고 다른 때에는 다른 생명을 좇아 산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때에는 믿음을 사용할 줄 알고 의뢰하는 마음도 있으며 성령에 의해 살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때에는 자신의 느낌 혹은 소위 영적인 느낌에 근거해 산다. 여기에서 차이점은 이러한 생활에서 혼 안에 있을 때가 영 안에 있을 때보다 많다는 것이다. 믿는 이의 혼에 속한 정도는 영의 생명과 영의 생명으로 하나님과 동역하는 원칙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혼 생명을 좇아 행하고 결정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달렸다. 그 사람의 천연적인 생명이 그의 각 기관에서 얼마나 활동하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혼에 속한 정도를 결정해 준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느낌과 이상의 세계 안에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혼에 의해 살다가도 영을 좇아 산다.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영 안에서 성령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혼에 생명의 가증함을 알 수 없고, 온전히 영 안에 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첫댓글 머리로 이해한 진리는 결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여기에 절대로 성령의 계시가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게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의 계시하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하는 것은 사람의 머리의 이해가 아닌 성령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때 이 진리가 사람 속에서 능력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사람은 믿는 능력도 소유하게 된다. 믿음은 계시로부터 온 것이다. 계시가 없으면 믿음도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믿음이 없는 이유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자.
믿는 이는 지식적 이해와 체험적 이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