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14> 김호귀
“깨달음은 허물벗듯 새로운 자신에 눈뜨는 것”
|
사진설명: 깨달음은 중생적 삶의 표면에 싸인 탐진치의 껍질을 벗고 ‘본래 부처’로서의 자기자신에 눈뜨는 행위다. 그것은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사진은 애벌레가 매미로 다시 태어나는 ‘전환의 순간’을 포착한 장면. |
명상의 목적이 마음의 안정이라면 선의 목적은 몸과 마음을 통한 지혜의 터득이다. 지혜의 터득은 지혜의 실현으로서 곧 자신을 깨치는 것이다. 자신을 깨치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다. 이전의 자신을 잊고 새로운 자신에 눈뜨는 행위이다. 그래서 깨침은 반드시 자각이 필요하다. 자각 자체가 곧 깨침을 의미하는 스스로의 깨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깨침은 그 말속에 이미 행위가 들어 있다. 곧 깨우치는 것의 완성이다.
일반적으로 언어에서 명사는 동사에서 출발한다. 동사가 명사로 진행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 형용사이고 부사이다. 동사가 전제되지 않는 명사는 없다. 선은 그 자체에 ‘선을 하다[修禪]’ ‘선의 행위를 하다[禪修行]’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깨침은 깨다.깨치다.깨뜨리다.깨우치다.깨다.깨치다.깨뜨리다.깨우치다의 말가름이다. 고정적인 사고형식의 틀을 깨고 그릇을 깨며 잠을 깨고 몸을 깨는 행위이다. 동시에 남에게도 그렇게 되게끔 하는 행위이다. 인과법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痴]을 열고[開] 지혜를 터득하지 못한 어리석음[愚]을 여는[開] 행위이다. 구름이 개이고 햇살이 드러나듯이 우치(愚癡)가 개이고 지혜가 드러나는 행위이다. 햇살은 본래부터 거기에 있었다. 또한 이것을 동시에 타인에게도 그렇게 만드는 작용이다.
이와 같은 깨침을 겨냥하는 행위가 선이다. 그래서 선은 깨침의 종교이다. 불교의 많은 수행 가운데 다른 어느 수행보다도 선수행은 강하게 깨침을 강조한다. 그만큼 선수행은 깨침을 목표로 하는 수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불교 전반에서는 그 기저에 깨침을 목표로 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부처님이 출가한 근본적인 동기가 그랬다. 그래서 이후 출가는 곧 깨침을 향한 첫걸음으로 간주되었다. 출가가 깨침의 시작이라면 깨침은 출가의 궁극이다. 궁극은 다시 처음으로 통한다. 그래서 깨침은 출가의 본분사(本分事)를 실현하는 기점이다. 그것이 깨침의 실현이다. 깨침이 자신의 실현이라면 깨침의 실현은 깨침의 사회화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수행이 비로소 안과 밖으로 삼투되고 투여되는 내외명철(內外明徹)한 작용이 되는 이치이다. 따라서 깨침은 그 자체의 작용이 없어서는 안된다. 자체의 작용이 없는 깨침은 한낱 이론이요 철학에 불과하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단련하는 좌선이 최적의 수행법
지속적.보편적 깨침위해 본수.묘수 반드시 있어야
그래서 깨침이 필수적으로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노력 곧 작수(作修 : 熏修)를 수반하듯이 깨친 이후에는 반드시 그 자체의 작용 곧 본수(本修 : 妙修)가 필요하다. 본수(本修) 곧 묘수(妙修)가 없는 깨침은 죽은 깨침이요, 독각의 깨침이며, 성문의 깨침이다. 본수(本修) 곧 묘수(妙修)가 없는 깨침은 순간적이고 편협적이며 부분적이다. 지속적이고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깨침이 아니면 안된다. 깨침은 깨우침이다. 자신을 깨우치고 타인을 깨우치는 행위이다. 이것은 깨침의 속성이다. 깨침은 한 속에 한 순간에 한 부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깨침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나 차별없이 평등하게 실현되고 보편적으로 영원지속적으로 실현된다. 곧 깨침은 청정과 평등을 그 속성과 작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청정은 집착이 없는 것이다. 한 부분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고착화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나타나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그래서 깨침은 항상 열려 있는 문이다. 문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지만 그것을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열려 있는 문이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본수(本修)이고 묘수(妙修)이다. 이것이 깨침의 평등성으로서 그 자체의 실현인 사회화이다.
깨침은 단순히 원리를 터득하는 이치상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몸과 행위와 마음으로 드러나고 작용되며 터득되는 행위이다. 마음으로만 터득되는 행위라면 명상이요 철학이다. 작용으로만 터득되는 행위라면 기계이고 자연이다. 몸으로만 터득되는 행위라면 예술이요 스포츠이다. 이와는 달리 선은 개별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선이 반드시 몸으로의 수행[作修.熏修]을 필요로 하는 의의이고, 마음으로의 터득(깨침)을 겨냥하는 가치이며, 남에게 전해지는 작용으로의 교화[妙修.本修]를 지향하는 바탕이다.
선의 깨침은 몸으로의 수행이기 때문에 한평생 혹은 여러 생에 걸쳐 고심참담(苦心慘憺)하게 자기를 잊고 부단하게 정진하는 것을 예사로 여긴다. 그래도 깨침을 얻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제대로 수행을 하고 깨침을 얻는 일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선은 마음으로의 터득을 중시한다. 제아무리 기계적으로 몸을 단련한다 한들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할 내용이 들어차지 않으면 말짱 허깨비다. 몸으로는 평생 앉아 수행을 해도 인생과 자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때문에 혜가(慧可)는 달마대사에게서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고, 대통신수(大通神秀)는 깨침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으나 육조혜능에게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참으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마음의 깨침에 있다. 마음으로 마음을 깨치는 것이다. 몸의 단련을 통해서 마음이 가다듬어지면 그 마음으로 다시 몸을 추스르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단련은 따로일 수가 없다. 몸이 단련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몸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신심불이(身心不二)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먼저가 아니다. 몸과 마음은 동시동간(同時同間)에서 작용한다. 몸이 마음의 그릇이라면 마음은 몸의 내용물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완전하지 않으면 제대로의 기능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대로 앉는 것은 제대로 깨치는 것이고, 제대로 깨치는 것은 제대로 앉아 있는 것이다. 좌증불이(坐證不二)이고 좌증일치(坐證一致)이다. 비유하면 마치 등불과 불빛의 관계와 같다. 등불 없는 빛이 있을 수 없고 불빛 이 없는 등불은 소용이 없다. 등불 있는 곳에 불 빛이 있고 불빛 있는 곳에 또한 반드시 등불이 있다.
또한 선의 깨침은 남에게 전해지는 작용으로서의 교화를 지향한다. 깨침의 바탕에는 반드시 회향하는 맛이 풍겨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선이 깨침이고 그 깨침이 깨침으로서의 풍모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깨침이 남에게 겉으로 드러나고 전해지는 도리가 없이는 한낱 백일몽이고 과대망상일 뿐이다. 선이 깨침을 지향하는 종교인 이상 깨침에 안주해 있어서는 안된다. 깨침은 그 속성이 깨침에 갇혀 있지 않고 역사와 지역에 두루 통해 있는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보편성이 없는 깨침은 자기기만이고 자신감이 없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래서 깨침은 어디에나 두루 드러나 있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깨침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이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 누가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렇게 법이연(法爾然)하게 존재해 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깨침의 맛이란 몸과 마음으로 함께 온다.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것이므로 어느 한 가지로 누구의 입맛에 맞게끔 규정할 수가 없다. 저절로 드러나 있는 것을 몸과 마음의 단련을 통해서 느낀다. 느껴진 것은 이미 자기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자기에게로 전해진 것은 더 이상 자기만의 것이 아니다. 이전에 자기에게 구속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깨침은 평등하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듯이 일체중생실유공안(一切衆生悉有公案)이다. 모든 존재가 낱낱이 본래부터 깨침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깨침의 과정이다.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 깨침의 작용이다. 깨침의 작용은 더 이상 수행의 굴레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래서 임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납자들이여, 불법은 애써 노력할 필요[用功]가 없다. 다만 평소에 무사(無事)하여 똥 누고 오줌 싸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잘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고인이 말했다.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 그대들은 이미 수처작주(隨處作主)하고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경계를 맞이하여 회피하지 말라.”
이 경지쯤 이르고 보면 수행한다고 해서 깨침이 오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깨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깨침은 수행(修行)과 불수행(不修行)에 관계치 않는다. 그것을 초월해 있다. 단지 인간이 인간의 깜냥으로 수행합네 깨쳤네 하는 언설과 인식에 불과하다. 깨침의 그 초월은 다름아닌 깨침의 언설과 그 인식과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 깨침은 바로 청정을 속성으로 한다. 깨침의 청정은 집착이 없다는 말이다. 곧 공하다는 말이다. 공하여 집착이 없기에 차별적인 분별상이 없다. 차별적인 분별상이 없으므로 굳이 무엇이다 하는 고정적인 실체로 소유하려는 구원(救願)이 필요없다. 때문에 구하는 것마다 밟아가는 곳마다 모두가 참으로 진리의 자리[實地]가 된다. 그래서 특별히 구하고자 하는 고통이 없다. 고통이 없으므로 다시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특별한 능소(能所)가 없다. 아예 능소(能所)가 생기지 않는다. 나아가서 능소가 본래부터 없다. 여기에서 일체개공의 도리가 현현한다. 그래서 깨침은 자신이 자신을 깨치는 것이라는 인식과 그 언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깨침은 자유이다.
김호귀/ 동국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52호/ 7월31일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머물다 갑니다.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