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 수상작] 오태환
■수상작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1 외 6편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1
―우리가 불가역적 계약, 혹은 불가역적 사건이라 믿는 것들에 대해①
모래로 된 개무릇 모래로 된 가자미새끼 모래로 된 풀쐐기 모래로 된 개구리밥 모래로 된 장구애비 아니면, 모래로 된 혼천의渾天儀 모래로 된 한데 똥
모래처럼 수북한 인종들이 지하철 4호선 플랫폼으로 모래처럼 엎질러진다 모래비가 오려나 봐 수십억 년 황폐해진 모래의 비계飛階, 또는 모래의 비상구 모래바퀴를 단 역세권의 1톤 픽업이 아무데서나, 가망 없이 모래처럼 주저앉고, 모래 문신을 한 모래인종 하나가 그 옆에서 식은 모래의 식은 순대국밥을 뜨고 있다 세금 탈루범과 앵벌이 들이 모래처럼 잠입하는 남태령역, 모래의 골목 쯧쯧 모래비가 올 것 같다니까 모래비가 곧 올 것 같지? 어디선가 모래인종들의 혀와 입술이, 입술과 혀가 모래처럼 서로 스며들다가 모래처럼 흩어지며 무산되는 어슬녘
모래가 모래끼리 모여 모래의 월식月蝕을 바라본다 하기야, 어차피, 과연 캄브리아기紀나 그 이전부터 자행된 모래의 접선, 또는 모래의 내통
모래로 된 외륜선 모래로 된 짚신벌레 아니면, 모래로 된 미분과 적분 모래로 된 화훼花卉 모래로 된 접시저울 모래로 된 중력방정식 모래로 된 트럼펫
『포지션』 2017 여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2
―귀신고래가 있다
귀신고래는 있다 은허殷墟의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안에도 이도백하二道白河의 푸르게 망가진 객잔客棧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귀신고래는 있다 거품벌레가 문득 풀썩 무심히 뛰어오르는 게성운과 그믐 사이의 얕은 체적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그대의 붕괴된 홍채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자동차보험료영수필증에도 영등포구청의 공무원복무규정집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나 사랑해?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열중熱中하는 애인들의 손길에도, 손길의 모호한 떨림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분명히 귀신고래는 있다 마카로니웨스턴 영화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등자鐙子에도, 명랑한 시거연기에도, 총알이 뚫고 지나기 전부터 자꾸 삐뚤어지며 증발하는 창백한 과녁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그러니까 울산 세죽리 조개무지의 고요와 소란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문풍지처럼 얇고 시리게 밤을 앓는 누군가의 소주잔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얄궂은 노릇이지만 부인否認할 수 없는 곳에도 귀신고래는 있고, 더욱 부인否認할 수 없는 곳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명왕성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모퉁이마다 질그릇처럼 조그맣게 얼어터진 미신고 행려병자의 시체와 벽돌담장 위에서 캄캄하게 흥건한 봄꽃, 귀신고래가 있다
『포지션』 2017 여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3
―우주의 복도를 지나기 위한 사소한 질문②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접경의 알프스 산중에서 발견되었다 5,300년 동안 빙하 속에서 썩지 못한 채 버텨 온 그는 갈색 눈의 인도유럽인종으로 밝혀졌다 그의 이름 외치Ötzi The Ice Man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역명에서 유래한다 그는 곰가죽 모자를 쓰고 풀잎망토를 걸쳤으며, 염소가죽을 묶은 정강이보호대를 했다 어깨에 박힌 돌화살촉과 피부 따위에 묻은 여러 사람의 혈흔으로 보아, 다른 부족과 교전하던 중 계곡으로 추락해 사망한 듯하다 구리도끼와 화살통, 주목朱木을 깎은 화살이 함께 발견되었다 그는 라임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었을 뿐 아니라, 편충 같은 기생충에도 감염된 상태였다 죽기 두 시간 전쯤 섭취한 것은 아이벡스의 육포와 소맥小麥이었다
*
쇄골 근처에서 별빛들이 흘러내렸다 별빛들의 흐린 깊이에 느리게 감긴 채, 그는 양젖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조심조심 숨을 기울여 털어내고 있었다 폭설과 얼음의 별빛들이 천칭자리와 안드로메다은하와 춘분점의 어둠을 비껴, 가파른 속도로 떠나갔다 어떤 별빛들은 횡경막과 충수돌기를 시침질하듯이 더듬었고, 어떤 별빛들은 회색늑대와 눈표범처럼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가 양젖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전 중량을 기울여 마지막으로 숨을 털어내며,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알프스의 빙하 속에서 자신의 전 중량을, 5,300년 내내 바로 저 캄캄한 별빛들로 염습을 하며, 5,300년 내내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미네르바』 2017 여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5
―죄가 깊다 내가 주섬주섬 이슬을 저지르며
내가 너에게 가는 동안 뿔뿔이 맺힌 이슬을 짓밟으며, 마당귀에 빨랫줄에 햇빛의 시렁에 맺힌 이슬을 짓밟으며, 차마 짓밟으며 가는 동안 이슬이 이슬끼리 들키고 말 듯이, 내가 허파 속까지 맑게 들키며 남모르게 들키며 너에게 가는 동안
내가 너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너를 탕진하는 동안 수유동의 아침마다 수유동의 아침이 이슬을 생각하면서 이슬을 탕진하듯이, 내가 너를 탕진하고 말 때까지
나는 이슬의 푸른 맨발 나는 이슬의 푸른 무덤 죄가 깊다 내가 주섬주섬 이슬을 저지르며
『발견』 2017 여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6
―500년 된 잉카의 소녀미라를 위한 아가雅歌
내게 입 맞추기를 바라니 네 사랑이 석류石榴 속 잇바디보다 붉게 젖었구나 나는 자면서도 톡! 톡! 네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예루살렘의 딸아 피부가 흑요석처럼 검고 아름다워서 나는 은하수가 은성殷盛한 한 채의 밤, 송곳니가 자개처럼 굳고 아름다워서 나는 갈기를 세운 한 채의 늑대 보아라 너와 내가 쉴 침대의 지평선에 저렇게 인주印朱빛 초승달이 뜨고 광야가 뜨고 얕은 새들이 뜨고 낚시미늘 같은 대상隊商 두어 떼가 뜨고 있다
내 누이 내 신부新婦야 청혼 전부터 네 혀에는 수금水禽이 노는 갈릴리호수가 있고, 밀화와 법랑의 목덜미에는 흰 창포와 흰 박하와 흰 침향목이 자란다 네 소란한 머리칼은 청금과 흑금의 이슬밭을 둘렀다 드디어 네 젖가슴과 젖꼭지는 백합의 알뿌리처럼 밝고, 잔디를 디디는 어린 사슴의 발굽처럼 향기롭다 네 허리는 탄식하듯이 느리고 가늘다 네 강의 하구河口가 레바논의 상아망루처럼 부풀다가 어느새 바빌론시市의 우기雨期처럼 범람하는구나
내가 청의를 벗었으니 다시 입겠으며, 내가 유향油香으로 발을 씻었으니 다시 더럽히겠느냐 너는 다만 울 듯이 왼손으로 내 이마를 받아 괴고, 다만 계수桂樹의 꽃향기를 싸서 접듯이 오른팔로 내 허벅지를 안을 뿐이다
여인의 무리 가운데 어엿브구나 내 사랑아 네 몸알의 어엿븐 초분草墳 위에 운석隕石 하나가 빗금을 그으며 내렸다 날이 저물고 돋을볕 서고 또 날이 저물어서, 내가 차라리 몰약沒藥의 작은 언덕과 사향麝香의 작은 언덕으로 간다
『발견』 2017 여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7
―이런 빛깔
이런 분홍을 아시나요 건드리면 은단銀丹처럼 쏟아지는 분홍을 바람도 없이 하잔한 분홍을 분홍의 실화失火 분홍의 재해災害 분홍의 지루한 미제사건 분홍, 하고 속삭이면 외딴 분홍이 또 분홍을 힐끗 누설하지요
이런 분홍을 아시나요 사막의 지평선처럼 저무는 분홍을 우제류偶蹄類의 뿔처럼 돋는 분홍을 분홍끼리 모여 분홍끼리 붐비면서 무릎걸음으로 닳고 있잖아요 저 별빛 모서리까지 닳고 있잖아요 분홍의 위험한 천수답天水畓 그대 가슴의 위험한 천수답天水畓
눈독 들여도 소용 없어요 분홍의 벼랑이 분홍의 벼랑을 밀고 있군요 샅샅이 분홍인 채 밀고 있군요 분홍의 발바닥 사늘한 꿈의 발바닥 발각되고 나서도 여전히 분홍인 광속으로 분홍인
『문학선』 2017 가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8
―이런 음악
폭탄벌레는 폭탄벌레 우엉잎에서도 폭탄벌레 문지방에서도 폭탄벌레 지붕엣 너와처럼 휘인 폭탄벌레 바람이 부나요? 폭탄벌레 폭탄벌레일수록 폭탄벌레 사금파리처럼 금 간 폭탄벌레 10분 전에도 폭탄벌레 그러니까 폭탄벌레 수평선 같은 폭탄벌레 일식日蝕 같은 폭탄벌레 팡! 하게 젖은 폭탄벌레 조리복소니 폭탄벌레 아무리 멀어도 폭탄 벌레 심지만 남은 폭탄벌레 선득선득 폭탄벌레 우두커니 폭탄벌레 하늘염전 너머 폭탄벌레 애꾸눈 폭탄벌레 암달러상 폭탄벌레 우물보다 깊은 폭탄벌레 폭탄벌레도 폭탄벌레 한 냥 서 돈쭝 폭탄벌레
『문학선』 2017 가을
■작가연보
1960. 부평에서 나고, 직후 서울 미아동으로 이사하다. 거기에서 청년기까지 살다.
1984.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계해일기」가, 한국일보에 「최익현」이 당선되면서 등단하다. 그해 고형렬․ 강태형, 양애경, 김백겸, 최문수, 김경미, 고운기, 안도현과 동인 <시힘>을 결성하다.
1985. 시힘 동인시집 1집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다』(청하 간)를 내다.
1986. 박세현․ 원재길․ 이승하․ 윤승천과 <세상읽기>를 결성하다. 동인시집 1집 『세상읽기』(청하 간)를 내다. 첫 시집 『북한산』(청하 간)을 내다.
1987. 세상읽기 2집 『오늘의 빵에 관하여』(청하 간)를 내다. 구광본, 기형도, 안도현, 윤성근, 장정일, 김영승, 조원규 등과 『20대시인 실험시70』(문학사상사 간)을 내다.
1988. 황학주, 안도현, 장정일, 장석주, 김승희, 김용택, 김영승 등과 21인 신작 시집 『따뜻한 꽃』(청하 간)을 내다. 고운기, 이승하, 장정일, 전동균 등과 사화집 『우리들 사랑』(청하 간)을 내다. 시집 『수화(手話)』(문학과 비평사 간)를 내다.
1999. 「한국시사의 공간구조 분석」으로 고려대학교에서 석사.
2005. 「서정주 시의 무속적 상상력 연구」로 고려대학교에서 박사. 시집 『별빛들을 쓰다』(황금알 간)를 내다.
2007. 연구서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황금알 간)를 내다.
2008. 비평집 『경계의 시 읽기』(고대출판부 간)를 내다.
2013. 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시로 여는 세상 간)를 내다.
2017. 제2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