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작품상(11회)-시-한영채, 「신화마을」
-산문-김미경「스무 살의 0순위」(70호)
진정한 신화가 구현되는 장소를 염원하며
송명희(부경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한영채 시인은 경주에서 태어나 2006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이래 시집 『모량시편』(2012)을 발간했다. 한영채의 시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경주나 현재 살고 있는 울산이라는 장소를 시적 대상으로 삼으며, 이 장소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강하게 표출한다. 첫 시집인 『모량시편』의 ‘모량’은 그의 고향마을 이름이고, 올해의 작품상 대상작인 「신화마을」은 울산의 장생포 벽화마을의 이름이다. 한영채는 자신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냈던 모량뿐만 아니라 현재 정주하고 있는 울산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며 강한 친밀감을 나타낸다. 이 친밀감은 일종의 장소애, 즉 토포필리아(topophilia)라고 할 수 있다.
토포필리아는 인간과 장소 사이의 정서적 유대와 결속을 지칭하는 말이다. 유년시절의 아름답고 행복한 고향에 대한 애착이나 그리움의 정서 같은 것을 지칭하는 토포필리아는 회고나 기억의 방식으로 장소감을 표현한다. 즉 특정한 장소가 기억과 회상을 촉발시키는 동시에 애착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자 근원적인 욕망이 된다. 중국 출신의 미국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에 의하면 토포필리아는 인간의 구체적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장소에 대한 애착은 개인의 기억과 학습에 의해 형성되고 획득된다. 이는 유아가 행동의 반경을 넓혀가면서 주변 환경을 탐색하여 낯설고 위협적인 공간(space)을 친숙하고 안전한 장소(place)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장소에 대한 애착이 최초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러한 장소 사랑의 본능적 뿌리내림은 자기가 속한 장소에 대한 의미와 가치 부여를 통해서 토포필리아로 완성된다.
고래가 가파르게 날숨을 뿜는다
신화로부터 멀리 와버린
여기,
어디쯤인가
관절마다 뙤약볕이 욱신거린다
화첩처럼 펼쳐진 골목 고래들 벽면을 오른다
벽화 속 등대 같은 해바라기, 바람이 불어도 미동이 없다
어제 오늘의 경계가 없는 지금
흑등고래가 헤엄치는지
신화 속으로 골목이 파도처럼 일어난다
등뼈 굵은 황소 지나고
창문 아래 나팔꽃도 핏빛으로 피어나고
늙은 아버지, 고래를 기다리다
뱃고동 소리로 돌아올 때, 마을은 또 다른 신화가 된다
맑은 눈빛이 내려다보는
정낭 창문에 턱을 괸 누렁이 졸고 있는 사이
벽화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릴 때
들숨을 뿜은 나도 벽화가 된다
평화구판장엔 막걸리 사발이 오고 가고
관절 식힐 먹구름이 신화의 언덕을 오르는
나는 고래타고 산마을 내려간다
-「신화마을」
한영채가 시 「신화마을」을 통해서 추구하는 삶은 무엇일까? 장생포의 신화마을은 1960년대 석유화학단지가 형성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단 이주민촌으로, 울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이다. 현재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여느 달동네와 마찬가지로 언덕배기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을 이름이 신화마을인 것은 새로운 신(新)자와 화합할 화(和)자를 써서 신화인데, 새롭게 모인 주민들끼리 화목하게 잘 살아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인은 ‘신화(新和)’를 ‘신화(神話)’로 의도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시적 발상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이 마을을 ‘신화로부터 멀리 와버린’ 곳으로 규정한다. 그곳은 신들이 살고 있는 신성한 장소가 아니라 ‘관절마다 뙤약볕이 욱신거린다’에서 볼 수 있듯이 오르내리기에도 힘이 드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산동네인 것이다. 이 마을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0년 <고래를 찾는 자전거>라는 영화에서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고래를 제작팀이 벽에 그려 넣으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달동네 신화마을은 관광명소로 변신했다. 벽에 고래, 해바라기, 황소, 나팔꽃 등을 그려 넣어 벽화마을이 된 그곳은 ‘어제 오늘의 경계가 없는 지금’에서 보듯이 시간이 실종되었다. 즉 21C에도 발전이 정체된 채 여전히 1960년대의 마을풍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달동네의 영세함을 감추는 벽화의 신화적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에 대해 예리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시인은 벽화에 대한 시각적 묘사에 주력할 뿐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극도로 절제한다.
캐나다의 인문지리학자인 에드워드 렐프(Relph, Edward)는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 애착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선사하며 유명해진 신화마을 주민들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신화적 애착과 친밀감이 과연 존재할까? 산업화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원래 살던 삶의 터전으로부터 추방되어 집단 이주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대화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그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신화마을을 과연 마음으로부터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로 느끼며, 애착과 친밀감을 갖고 있을까?
어쩌면 신화마을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올라가 본 화자에게 그곳이 ‘신화로부터 멀리 와버린’ 낯선 공간, 다만 벽화 속 그림의 세계 속에서만 신화가 구현된 공간으로 받아들여졌듯이 그곳 주민들에게도 소외된 공간으로 인식되는 곳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랠프의 말처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정서적 유대와 애착을 느끼는 곳이야말로 신화적 장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어디에도 내부자인 마을 주민으로서 느끼는 장소감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외부자의 시선에 비친 신화마을, 그것도 힘겹게 올라가 신화로부터 소외된 마을풍경을 확인한 외부자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내부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배제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곳이 신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소외된 공간, 즉 장소상실 (placelessness)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웅변처럼 말해준다.
시인은 신화마을이 벽화 속의 세계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신화가 구현되는 장소,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삶고 있는 주민들이 벽화 속의 그림처럼 신화적 세계를 구현하는 친밀한 장소가 되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의 작품상-김미경-수필-「스무 살의 0순위」(70호)
아들의 첫사랑에 공감하고 소통하는 마음
송명희(부경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김미경의 수필 「스무 살의 0순위」는 스무 살의 큰아들이 여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는 나의 0순위야.’라고 한 말에 배신감을 느끼는 어머니의 심경을 서사적 흥미로 풀어낸 작품이다. 작가는 ‘스무 해 동안 길러준 제 엄마는 뒷전이고 두어 달 사귄 여자에게 홀딱 빠져서 콩깍지를 뒤집어 쓴 큰놈이 생각할수록 괘씸했다.’라고 고백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큰아들 방에 들어갔다가 서운한 기분으로 나오게 되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종이를 치우다가 여자 친구에게 쓴 연애편지를 읽게 되었다. 무려 네 장이나 되는 종이에 빽빽이 써내려간 20살 청춘의 고백서는 흥미로웠다. 제법 문장이 되네, 라며 시작한 읽기에서 한 여자에게 점점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에서 ‘너는 나의 0순위야.’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아들 다 소용없다.”는 말이 절로 올라오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스무 살의 0순위」 부분
인생에 있어 스무 살의 나이는 에릭슨(Erikson)의 심리사회발달이론에 의하면 제6단계가 시작되는 나이이다. 즉 청소년기를 마감하고 성인 초기에 진입하는 연령이다. 이 단계에는 일과 사랑의 끊임없는 탐색과 도전을 통해 자아발달을 추구해 나간다. 따라서 친밀한 우정, 동료애, 사랑의 형성이 인생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작가의 큰아들은 사춘기 때에도 여학생을 사귀기는커녕 연예인 브로마이드 하나 방안에 걸어둔 적이 없던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여자 친구에게 무려 넉 장이나 되는 절절한 연애편지를 써내려 간 것을 흥미롭게 읽으면서 작가는 아들의 낯선 모습에 당혹감, 섭섭함을 넘어서서 배신감마저 느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아들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의 지난날을 회상해 보기도 하고, 스무 살에 만났던 남편과의 빛나던 연애를 돌이켜보기도 하며 ‘스무 살의 눈부신 청춘에 찾아온 첫사랑은 누가 뭐래도 0순위라고 공감해 주었다.’라고 아들의 첫사랑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공감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느낀다는 의미이다. 결국 공감(共感)이란 ‘아, 그럴 수 있겠다’, ‘이해가 된다’, ‘이심전심’등의 표현에서 보듯이 상대방의 느낌, 감정, 사고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해된 바를 정확하게 상대방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만약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의 첫사랑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 채 자신이 0순위가 되지 못한 데 대한 배신감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면 자녀의 성장을 격려해야 할 부모로서의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공감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 배우자 사이의 유대감과 친밀감을 형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소통에 이르게 만든다.
에릭슨에 의하면 인간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할 존재이며, 이러한 성장과정에서 사회적 영향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이 짧은 수필에서도 아들의 첫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감, 섭섭함, 배신감을 넘어서서 공감과 지지를 보내주는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부모로서 성숙한 자아로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를 진정한 부모로 성장시키는 것, 어머니를 진정한 어머니로 성장시키는 것도 자식이다.
올해 초 스무 살짜리 큰애는 타 지역으로 대학 진학을 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 아들을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날부터 가슴 한 구석에선 학교생활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식탁에 돼지 갈비라도 올리는 날이면 괜히 목이 메기도 했는데 다만 엄마라는 자리의 기우였다고나 할까.
-「스무 살의 0순위」 부분
아들이 타 지역 대학으로 진학한 탓에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며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근심걱정이 한낱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해준 것은 아들이었다. 또한 스무 살의 아들은 더 이상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성인이며, 독립적 주체라는 사실을 작가는 첫사랑을 시작한 아들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즉 아들이 어머니를 성장시키며 진정한 어머니로 만들어 준 것이다.
성인기 초입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녀의 이성교제가 걱정스러운 한편 한 명의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자녀가 대견하기도 한 양가감정을 누구나 다 경험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스무 살의 0순위」는 한 편의 수필로서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스무 살의 0순위’라는 제목도 산뜻하다. 또한 ‘흐음, 당신도 한때는 나의 0순위였느니라.’라는 마지막 구절은 글을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들고 잔잔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스무 살의 자녀를 둔 부모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는 자녀에게 기울이던 애착을 거두어들이고 배우자와 동반자적 사랑을 회복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