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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1편 1-7절
여호와께 피하는 자 그의 얼굴을 뵈오리라
시편 11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의 앞선 내용들을 살펴보았지만 표제를 통해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시편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대부분 사울과 관련하여, 혹은 압살롬과 관련하여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는 의인을 향한 악인의 그릇된 충고와 그런 악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의를 드러내실 것이라는 확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여기 보면 다윗 자신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 졌을 때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한 문장으로 짧게 고백된 내용이지만 다윗의 이런 고백은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8편 2절을 통해 고백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의 반석이시요, 요새시요, 피할 바위요, 방패요, 구원의 뿔이요, 산성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물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게 됩니다. 때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을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자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혹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지할만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성도는 어떤 자냐? 그런 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것을 아는 자요, 변하는 것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함없는 하나님, 한번 약속하시면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만이 성도들의 의지의 대상이요, 때문에 어려움 가운데 놓이게 될 때 유일하게 찾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고백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는 어떤 말을 하는가?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문맥상 다윗 자신은 여호와께 피하였지만 주위에서 하는 말은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다윗에게는 답답함으로 있는 겁니다. “어찌함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여호와께 피하였다는 것과는 반대적인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만을 피난처로 삼지 말고,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것도 의지해 보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에 대하여 반드시 악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려움 가운데 있고, 그런 어려움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을 때 그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그를 위한다고 하는 자들이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윗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그 위하는 성격이 주께로 피하기보다는 주님과 상관없는 곳으로 피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도의 삶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주변에서 이런, 저런 말들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좋은 피난처는 없다는 것이 답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로한다는 것이 하나님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귀결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분명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건넨 말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또 다른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처럼 있더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가깝다는 이유로 무조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대하여 주의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분별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의 말이 우리로 하여금 주를 더 가까이 하도록 하느냐? 아니면 그의 말로 인하여 주를 더 멀리 하느냐? 이 분별을 갖추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주를 가까이 하는 쪽입니다. 물론 주를 가까이 하도록 하는 말을 하지만 듣는 자가 주를 멀리 한다면 분명 듣는 자에게 안타까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주께로 피하려고 하는 자에게 현실의 안타까움 때문에 주가 아닌 다른 곳을 피난처로 삼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이 오히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이들, 즉 다윗을 따르며 다윗을 위한다고 하는 자들이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다가옵니다. 2절을 보시면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지금 당장 산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 가운데 있기 때문에 빨리 도망하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서처럼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즉 이미 악인이 득세하기 때문에 의인이 무엇을 하려고 해도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께로부터 멀어지는 것,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는 모든 것은 거짓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급박해도, 아무리 터가 무너져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성도는 주님께만 피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절에서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을 다윗을 따르는 자들, 다윗을 위하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의 말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대적자들이 이 말을 한다고 할 때는 결코 다윗을 위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조롱에 가깝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네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어떠하냐?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는 것이 맞느냐?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시편 3편의 내용을 확인한 바 있지만, 시편 3편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하나님께로 피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하는데, 지금 네 상황은 그렇지 못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때문에 새가 산으로 도망하는 것처럼 너도 하나님이 아닌 곳, 그러나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도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오늘 본문의 경우 다윗을 따르는 자로 해석하든, 아니면 다윗을 대적하는 자로 해석하든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멀어지게끔 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윗 자신은 이미 여호와께로 피했다고 말하지만, 그런 다윗의 마음을 들쑤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위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위로한답시고, 그리고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다윗의 마음을 들쑤시는 것이고,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은 그런 다윗을 조롱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들쑤시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성도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성도조차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피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어쩌면 다윗의 첫 고백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의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 혹은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어제 도서관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사서 추천하는 책들을 봤습니다. 책에 대한 간략한 내용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이 오늘날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의 글을 잠시 읽었습니다. 비판의 내용인즉 오늘날 시대는 소위 말하는 흙수저가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를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한 가지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현실에 대한 비판의 글이지만 결국 흙수저에서 금수저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이란 뭐냐? 흙수저가 아니라 금수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모으는 것, 그래서 물질만능주의인 겁니다.
실제로 성경이 인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정확하게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은 대부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로 고민합니다. 마치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된 듯 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더욱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만 생기면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의지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고, 또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 물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의지하는 것도 버려야 하고,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같은 것을 의지하는 것도 다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는 것을 많이 훈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 속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주체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성도의 유일한 피난처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확고히 했을 때, 주변에서 들리는 많은 소리들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그 마음을 지키는 훈련도 하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해 놓고 주변 사람의 말 때문에 마치 그것을 부정하는 자로 있다면 어떻게 그의 고백이 참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사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주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만큼 연약한 것이 인생입니다. 아예 넘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는다고 했을 때 더더욱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살펴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하도록 부지런히 말씀에 착념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구하면서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말씀에 더욱 착념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말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마음을 괴롭혔던 말들처럼 그런 말들이 마음을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끝내는 그 말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2절과 3절로 오시면, 앞서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에 대하여 다윗을 따르는 자, 다윗을 위하는 자를 입장에서 2절과 3절을 보았다면 대적자들 입장에서 조롱조로 이렇게 말한다고 했을 때 2절은 다윗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1절에서 대적자들은 다윗을 새로 표현하면서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했다면, 다윗은 그런 저들의 말에 대하여 자신의 처지를 동일한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냥꾼이 새를 잡기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고, 또 은밀히 준비한 것처럼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활을 당기었고, 언제든지 활시위를 놓아 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숨긴 채 그렇게 할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해하면서도 자신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숨길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은밀히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악인 마음대로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것도 수포(水泡)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은밀히 그 일을 진행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서 그 일을 실행해도 자기를 숨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자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신다면 얼마든지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성도는 더더욱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할 수 있는 겁니다.
3절도 보시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터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몇몇 주석을 참고해 볼 때 터란 사회와 국가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법, 정의, 도덕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런 법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법입니다. 터가 무너졌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법이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올바로 시행되지 못할 정도로 악인이 득세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단지 하나님의 법이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결과, 다시 말해 지금 다윗이 악인들의 말, 즉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와 같은 말이나, 그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 마치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놓아 언제든지 쏠 수 있는 그런 상황 자체가 터가 무너진 것으로 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마음이 바른 자’라는 표현이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진 자가 오히려 그렇지 못한 자들에 의해 어려움과 고통당하는 현실이 터가 무너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박국 1장 2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1:2-4) 시편 7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73:1-3) 특히 4절에서 시인은 그들이 죽을 때조차 고통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5절에서는 고난, 재앙과 같은 일이 그들에게는 없다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악인들의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난다는 말까지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는 것처럼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73편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는 저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종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때에 가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든 공의가 시행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73:22-26)
하박국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합2:4). 비록 저들의 마음이 교만하고 또한 그 속에 정직함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들을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성격을 어떻게까지 고백하느냐?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고 할 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의 이 마지막 고백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외에 또 다른 것에 내 발을 걸쳐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라고 했을 때 의인이 저들의 악행, 저들의 불의함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다윗의 경우 사울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추격하고 또 추격했을 때 다윗은 그를 죽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그가 먼저 나서서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아비새의 경우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인 사울을 당신 손에 넘기셨다고 말하면서 죽일 것을 권했을 때도(삼상26:8) 다윗은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는 도망자 신세로 있어서 힘든 여정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그분의 마음을 아는 자로서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계시며 또한 때때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기도 하십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성도는 여호와께로만 피할 수 있는 겁니다. 여호와만을 의지하며 여호와께만 모든 소망을 둘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4절로 오시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감찰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현실 자체는 터가 무너진 상황입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상황, 의인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상황, 악인에 의해 의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에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구약에서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임재 해 계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단지 지상에 있는 그런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높이 계시다는 의미로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 3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높다는 의미도 있지만,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행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란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다윗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비록 현실은 터가 무너져 악인이 활개를 치는 듯 보이지만, 그래서 의인이 어려움과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며, 바로 그런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는 일 자체는 땅에서 일어나지만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만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의 해석처럼 다윗을 따르는 자의 충고도 있을 수 있고, 혹은 다윗의 원수와 같은 자들의 조롱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만을 바라보는 자들이 아닙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악인이 의인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데 어떻게 그들을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그것만 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것을 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잠시 잠깐이요,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 다음과 같은 권면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특별히 칼빈의 주석을 보면 4절과 관련해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된다는 의미로서 말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비참하고 혼란한 일을 만나 불안해지고 궁지에 몰리게 되면, 이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을 마음에 간직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은 땅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태는 더 없이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빠졌지만 그런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하여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통해 행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늘에 거하신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말하자면 왕궁에서 통치하시며 자신의 심판대를 그곳에 두고 계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악인들을 심판대 앞으로 소환하여 그들을 벌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누구도 아닌 악인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인생을 주시하십니다. 주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 심사하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본문 2절에 나타난 것처럼 자신들이 은밀하게 행하기만 하면 아무도 모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마음까지 다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감추어져 이는 동기까지 다 아시며, 바로 그런 모든 것을 심사하여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다만 모든 이들을 감찰하시되 의인과 악인에 대한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오늘 본문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의인과 악인을 대조로 본다고 할 때 의인을 감찰하신다는 것은 악인을 미워하시는 것과는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의인을 감찰하시되 그들을 좋아하시며 그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2절의 말씀을 다윗의 대적자가 아니라 다윗을 따르는 자라고 할 때는, 그런 그들의 자세를 기뻐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과 같은 자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아 그분에게만 피하는 자, 그들을 좋아하시며 기뻐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이미 동일한 의미에서 표현되고 있는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미워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 앞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혹 그분의 심판을 잠시잠깐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을지라도, 아니 그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듯 보일지라도, 아니 우리가 이 땅에서 그런 하나님의 공의를 전혀 보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도록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이고, 혹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를 조롱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조롱하는 자를 하늘에서 비웃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자로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악인에 대하여 미워하신다고 할 때 미워하시는 결과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우리 한글 번역에서는 ‘그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받는다고 한다면 그물을 던진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빠져나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악인들의 피할 길을 사방으로 봉쇄하시고 그들을 단단히 묶어 놓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비를 내리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떤 비냐?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과 같은 비입니다. 특히 불과 유황이라고 할 때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장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24절과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말씀하시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처럼 그렇게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의 역사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어떤 악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들의 잔의 소득은 많은 노력과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소득은 하나님의 심판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의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7절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의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의인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본다고 할 때 이런 결과는 당연히 따라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인을 ‘정직한 자’로서도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정직이란 무엇이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의로운 일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로 하자면 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즉 우리의 의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여호와께 피하는 의입니다. 좀 더 분명한 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런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없는 의를 생각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그 이상의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일보다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의라고 할 때 정직을 빼 놓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십니다. 저들을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화평과 화목함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받으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신다고 할 때 의로운 일이란 어떤 행위 이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전제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런 전제를 두고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의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특별히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 다윗의 인생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악에 대하여 악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 그런 자를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7절은 이런 종합적인 의미에서 생각해야 될 말씀입니다. 어느 하나도 놓쳐선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의를 말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할 때 칭의만 말하고 성화는 말하지 않는 것도 우리는 배척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물론 성화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이 교훈의 성격으로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을 통하여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한다는 의미에서 성화에 대한 권면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삶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오늘 예배 전 요리문답을 공부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칼빈에 의하면 율법의 기능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죄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억제의 기능, 그리고 세 번째로 삶의 규범으로서의 기능입니다. 정죄는 우리를 죄인으로 고발합니다. 너 스스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며, 너 스스로 안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찾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찾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정죄가 아닌 자유함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 말씀처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 율법 앞에서 우리 마음에 찔림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찔린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곧 정죄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의 정죄는 없습니다. 다만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목적이 율법과 맞물려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수준이란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찔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찔림이 정죄의 기능을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마음의 찔림으로 인하여 회개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율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기독교강요, 1536, Ⅰ. 33)
요약하면, 율법은 신자들에 대한 권면이다. 그것은 저주로 신자들의 마음을 구속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권고에 의해 그들이 나태를 떨쳐버리게 하며, 그들의 불완전에 대해 항상 깨어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이러한 해방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있어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말했다.
율법이 신자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더 이상 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자들에 대해 이전과 같은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서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겁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의를 행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뵈옵는 결과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마지막 자리에서 뚜렷하게 증거 될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주를 뵈옵는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일는 불가능합니다. 마지막 때도 하나님을 뵈옵는다고 할 때 어떤 의미로서 뵙는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 말하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13:12 )라고 말하기 때문에 거짓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 안에서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때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마지막 때와 같은 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미하게만 볼 뿐입니다. 다만 희미할지라도 분명하게 본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본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를 계시하셨기 때문에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그러나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의인을 향하여 그 얼굴을 돌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우리를 주시하시며,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그리고 답답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늘에서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그 얼굴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감찰하시되, 특별히 우리를 향하여 은혜 베푸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더더욱 인내함으로서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느냐? 주께서 그분의 공의를 시행하실 때까지입니다. 그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공의를 시행하실 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면서 무엇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만 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답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답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터가 무너진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이 무너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의인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너진 것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앞에서 숨을 수 없습니다. 외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까지도 그러합니다.
특별히 악인들의 경우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지한 자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시지만 그렇게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식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얼마든지 숨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숨을 뜻을 사람들만 모르면 안전하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그런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비록 현실은 종종 하나님의 공의를 보지 못하는 듯한 모습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누구만을 의지해야 하느냐?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는 결국 그의 얼굴을 뵈올 뿐 아니라 이미 그렇게 피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이 있어 넘어지는 일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에게서, 자기 백성에게서 그 얼굴을 돌리시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여기에 위로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비록 이 땅에서의 생활이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주께만 피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