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의 거울처럼-165년 역경을 이겨낸 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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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나치 독일의 동부 도시 예나에 독일 광학기업 칼 자이스(Carl Zeiss)의 핵심 인력을 실어나르기 위해서 미군 트럭 수십 대가 나타났다. 나치 독일에 잠망경과 쌍안경 같은 군수품을 공급하고, 미소(美蘇) 연합국도 칼 자이스 렌즈가 들어간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최고의 광학 기술을 인정받고 있었던 칼 자이스, 이런 칼 자이스를 공산진영에 통째로 내줄 수 없었던 연합군은 주요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서쪽으로 이주된 칼자이스 기술자들은 소도시 오버코헨에서 새로운 칼 자이스를 세우고 현미경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소련은 예나의 칼 자이스를 국영기업으로 접수하고 사업을 이어갔다.
두 개의 독일과 두 개의 칼 자이스. 분단(分斷)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운명 앞에 하나의 기업이 둘로 쪼개졌고, 1991년 통합을 선언하기 전까지 공존하며 |
경쟁했지만, 동서독 통합 이후 정부는 물론 칼 자이스 구성원 대부분이 통합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서로의 차이보다 공통점에 집중했다.
마이클 카슈케(Kaschke·54) 칼 자이스 CEO는 "어느 지역이 어떤 분야의 ‘브레인(brain)'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만이 우리의 관심이었다"고 한다. 칼 자이스는 90년대 중반부터 강점을 지닌 기술력을 기준으로 동서독 사업부문을 재배치하였다. 렌즈 제조 기술을 발전시켜 온 예나는 기초 분야인 현미경 사업부와 의료기기 사업부를, 본사가 있는 오버코헨은 주력 분야인 반도체 사업부와 산업 측정기 부문을 맡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통합이후 동서독 마르크화 교환 비율이 1대 1로 정해지면서 치솟은 동독 지역 노동 비용을 감당할 회사는 없었던 예나 칼 자이스는 살아남기 위해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6만명의 노동자 중에 3000명만 남았다.
의지할 것은 역시 기술력이었다. 직장을 떠난 직원들의 자구 노력이 칼 자이스 부활에 큰 힘이 되었다. 전직 직원들은 공장 안에 비영리의 기술 재교육 회사를 차리고 교육을 진행했고, 회사 측은 일자리를 주선했으며, 예나 칼 자이스 전직 직원 중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새로 창업하거나 광학 관련 중소기업에 취직하고 우리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00년은 예나 칼 자이스가 통합 이후 첫 흑자(1000만 마르크)를 기록하였고, 2009~10년 칼 자이스의 매출은 29억8100만유로. 1990~91년 통합 무렵 매출(11억3700만유로)보다 약 2.6배 증가했다. 직원 수(2만4000명)도 2배 이상 늘었다. 반도체 계측 기기 분야에서 매출과 시장점유율(80%) 모두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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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경쟁력에 따른 역할 분담 |
일찍부터 산업국가로 발전한 독일에는 100년 이상된 지멘스, 보쉬, 그리고 300년이 훌쩍 넘은 머크라는 제약·화학 회사도 있다. 하지만 칼 자이스처럼 독일 분단과 통합의 역사를 빼닮은 기업은 없다.
동서독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시기의 두 칼 자이스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고, 상표권 분쟁도 치열했지만, 그들에게는 공통분모는 있었다. 통합에 대한 당위성을 시작으로 차이에 대한 토론보다 공통점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기술력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으로 칼 자이스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요소에 포커스를 맞췄다.
소련의 크루즈미사일 부품부터 일반 망원경까지 공산권 시장에 고품질 광학 제품을 공급하며 기술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예나 칼 자이스이지만, 통일 무렵 동독 노동자의 생산성은 서독의 30%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직원이 6만명이던 예나 칼 자이스 역시 살아남기 위한 정리해고가 불가피했다.
구조조정이라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재교육, 일자리 알선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도 병행하였다. 예나의 한 공장에 '비영리 자격취득 회사' 사무실을 만들어 전직 직원들을 대상으로 정보통신 관련 기술 재교육을 실시했다. 1991년 7월엔 예나 시(市)당국도 '연구, 혁신, 기술향상을 위한 연합체'를 구성해 지역 내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이러한 혼신의 노력으로 2000년부터 예나 칼 자이스는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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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학(産學) 공생 네트워크 |
카슈케 CEO는 "칼 자이스가 165년 동안 기술력을 유지하며 사업을 확장해 온 비결은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대학·연구기관과의 공생(共生) 네트워크"라고 한다. 칼 자이스 자체가 기업과 대학의 윈-윈 전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나대학 강사였던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1840~1905)와 광학기계 제작소를 운영하던 칼 자이스(1816~1888)와의 협력으로 렌즈와 현미경이 만들어졌던 일이 시초가 되었다.
현재 칼 자이스는 전 세계 45개국에 제조 공장을 두고 있으며, 개별 사업부마다 각 지역의 유명 대학과 연구기관에 자금을 지원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산학(産學) 협력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기업은 언제든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흡수할 수 있는 학자, 전문가 집단, 교육 시스템과 공생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대학과의 협력은 신진 연구 인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래와도 직결돼 있다. 공동 연구 과정에서 잠재력 있는 인재를 스크린 할 수 있고, 적절한 시점에 이들을 채용해 칼 자이스 인력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직원이 직원을 훈련시킨다(Employees train employees)." 카슈케 CEO는 칼 자이스 인재 육성 철학을 이렇게 소개했다. "유능한 인재를 확보한 뒤 교육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데이터 프로세싱, 물리학과 전기전자 분야, 렌즈 광택(polishing), 리더십, 경영학 등 200개의 프로그램이 사내(社內) 대학처럼 운영되고 있다."
경험으로 배운 기술 노하우는 그동안 세계 최초의 플라네타리움(천체투영기·1923년), 미세 수술이 가능한 최초의 수술현미경(1953년), 최초의 고정밀 3차원 좌표 측정기(1973년) 등의 성과를 낳았다. 카슈케 CEO는 "160년 이상 광학 분야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자기만의 비밀을 갖게 되지 않겠나. 칼 자이스에도 많은 비밀들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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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익의 20% 학술 분야에 투자 |
칼 자이스는 비상장기업으로 외부 주주가 없다. '칼 자이스 재단'이 회사 전체 재산을 소유한다. 에른스트 아베는 동업자인 칼 자이스가 사망한 뒤 1889년 동업자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회사 재산을 모두 귀속시켰다. 아베는 재단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올바르게 활용하길 원했다. 일부는 투자 자금으로 기업에 남기고, 일부는 직원들의 임금과 보너스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과학과 기술 발전을 위한 학술 분야에 지원한다는 게 원칙이었다. 현재 연간 순익의 약 20%가 재단으로 들어가 대학, 연구기관, 지역사회를 위해 쓰이고 있다
칼 자이스 재단은 한때 동서독 칼 자이스 사이에 갈등의 소재가 되었지만, 그만큼 재단의 존재는 칼 자이스에서 특별하다. 카슈케 CEO는 "재단은 외부 투자자나 주주보다 안정적이며 회사가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든든한 보호막"이라고 설명했다.
통합 이후 경영 상황이 안정되면서 2002년 예나에 있는 의료 기기 부문 자회사인 칼 자이스 메디텍(Meditec)을 독일 기술주 전문 증시 텍닥스(TecDAX)에 상장했다. 자회사 가운데 첫 상장기업으로, 2004년엔 법률상 주식회사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재단 헌장을 수정했다. 카슈케 CEO는 "해외 시장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표준화된 회사 구조를 갖출 필요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주식회사의 모습을 갖췄지만 재단은 여전히 유일한 주주이다. 단 한 주의 주식도 거래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업 관련 의사결정이 보다 신속하게 이뤄지게 됐고, 실적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00년이 넘은 낡은 소유구조처럼 보이지만 안정적인 주주가 있다는 건 과학과 기술, 학술 분야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칼 자이스는 기술 기반 기업 아닌가" | |
< 발췌 (본문 및 그림) :Chosun Biz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1/2011102101179.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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