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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연구 23.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3~20)
관찰 및 묵상:
1.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해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① 세례요한-이는 헤롯도 그렇게 생각한 바다.[1]
② 엘리야-이는 실제로는 세례요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2]
③ 예레미야- 그에 대한 예언이 있었던가?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로 간주되었다.
2. 시몬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① 그리스도의 의미[3]
김세윤 교수의 설명: 그리스도(메시아)란 말은 보통으로는 머리에 기름부음 받는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자를 뜻하여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왕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었고, 심지어는 유다를 바빌론으로부터 해방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도 적용되었다(사 45:1[4]). 그러나 이른 바 제2성전시대의 유대교(신약시대 전후의 유대교)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실 구원자를 뜻하는 하나의 칭호로서 고유명사와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 뜻은 예수가 종말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실현하실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시어 유대 백성이 기다리던 종말의 구원자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종말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구원자다. 사도들이 이렇게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종말의 구원자로서의 행위라고 선포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복음을 선포하였다.
②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
김세윤 교수의 설명: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상속자라는 의미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받은 이, 신적 능력과 신적 지혜와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상속받아서 하나님 대신 통치를 대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옛날 근동의 궁중의식으로 말하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라는 말이다. 요새 언어로 하면 부왕 副王 vicegerent(왕에 버금가는 왕이라는 뜻으로 왕세자를 일컫는 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 것이다.
사무엘하 7:12~14의 나단 신탁의 전승이 구약의 여러 곳에서 재해석 되고 재적용되고 있는데 가령 시편 2편, 89편, 134편, 이사야 2장, 9장, 11장 등, 그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아들)를 일으켜 다윗의 왕좌에 앉히고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교의 메시아적 대망의 가장 중요한 뿌리였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유대 백성이 계속 짐승 감은 이방 왕조들(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통치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씨/순/아들을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시고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통치 민족이 되게 하시리라는 메시아적 대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 중요한 메시아적 칭호들이 된 것이다. 이 대망이 유대 민족이 주전 168년 경 시리아 셀루키드 왕조의 혹독한 통치(유대교 말살정책) 아래 고생할 때 다니엘 7장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짐승 같은 이방 왕조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키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단 7:18~24), 즉,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표현된 것이다. 예수가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바로 다니엘 7:13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다니엘의 환상 중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 받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3. 예수님의 자기 인식은 이미 그리스도 곧 종말의 구원자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계셨음에 틀림없다.
① 그래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이는 다니엘의 예언으로부터 온 것으로 종말에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 받아 세상을 통치하실 분이라는 말이다.
② 백부장이 예수님의 권세에 관해 고백할 때 그의 믿음을 크다고 인정하신 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세를 알아본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이로 보건대 유독 이방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③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리시고자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죄사함을 천명하셨다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떤 권세를 가지신 분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충분히 자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물은 이유는 무엇일까?
① 많은 기적을 보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드디어 드러내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다. 사실 기적은 표적(sign)이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곧 예수께서 오시리라 하던 그 분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
②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처음 소개한 빌립은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많은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하였다(요 1:45[5]). 이 말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라 시던 그 예언을 가리킨다(신 18:15[6]). 그러므로 빌립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고백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할 때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고백한 것이 아닐까?(요 14:8) 제자들 중에는 아직 예수님이 정확하게 메시아신지를 잘 모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할 때 그것은 선도적인 고백이었으며 칭찬 받아 마땅한 고백이었다. 실로 예수님을 잘 드러낸 고백이다.
③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예수를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조롱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는 일이다. 그러다가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네가 그리스도냐고. 예수께서는 대답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그 장로들이 일제히 예수님께 여쭈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한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시인하셨다. 그리고 재판은 유죄로 선언하고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사형죄목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로 나뉜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고백자(순교자)[7]의 고백이다.
5.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무엇이었을까?
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로마 황제가 우리의 주가 아니다.
② 고린도후서 4: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③ 황제 숭배에 관련한 글 소개-폴리갑 이야기
주후156년 서머나의 감독이자 사도 요한에게서 직접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폴리갑(Polycarp)에게 큰 시련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의 나이가 이미 86세가 되어 있었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로마 당국의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 평소 그를 존경하던 관리 두 명이 찾아와 폴리갑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 관리들은 나이 많은 폴리갑을 살리고 싶어서 가이사(Caesar) 숭배령에 순응하라고 설득을 했던 것이다.
“‘가이사가 주(主)이시다’라고 말하고서 향을 피우고 … 그로써 목숨을 건지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말입니까?”하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는 86년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 왔는데, 그분이 내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소. 나를 구원하신 내 왕을 어찌 모독할 수 있겠소?”
결국 폴리갑은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에 처해져 순교하고 말았다.
이렇게 한 때는 누구를 “주”라 부르느냐에 따라 신앙인들의 생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하는 시절이 있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이라면 과연 폴리갑처럼 생명을 내던지고서라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주(主)가 없다고 말하며 황제를 향해 “주”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께서 주(主) 되신 다는 것.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는 처음에 믿은 사람이 “예수는 주시다”라고 고백을 하면 곧 바로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라는 말씀을 근거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말씀도 적용이 된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로 시인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와 직결이 되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실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다음의 말씀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8:4b-6
…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오직 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신다는 것이다.
6. 신앙고백의 변천
① 예수님의 사역 시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② 예수님 승천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퀴리오스)이십니다.
③ 계시록의 신앙고백: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나중[8], 다윗의 뿌리, 죽임 당한 어린 양, 충성된 증인 등.
④ 의미: 예수님의 사역 중에는 유대교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되었다. 이 말은 유대교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으신 분이요, 종말의 구원자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분께서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셨고 장차 심판하실 분이라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믿고 따른다. 그리고 그 고백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교회는 이제 유대교 공동체가 아닌 로마의 식민지배 속에서 생존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온 세상의 통치자가 로마 황제라고 그를 주로 섬기라고 강요 받는 시대가 된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매매도 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는 시대가 된다. 그 시대에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은 곧 황제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요 이는 로마의 공공의 적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자요 고백자가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고백의 내용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와 예수님 승천 이후의 상황 사이에서 변화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은 오직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고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공통으로 나오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다.
⑤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예수께서 오늘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고백을 드려야 할까?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 여기에 나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묶어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담아내려면 이 두 고백 사이의 공통점과 우리 시대를 둘 다 살펴야 한다. 사도 시대의 신앙고백이 로마의 황제숭배령 아래서 드려진 고백이었기에 주님이 강조된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즉,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내가 목숨을 바쳐서 고백하고 따라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늘 나에게 필요한 신앙고백을 생각할 때다. 그리고 그 목숨을 건 고백 위에 교회는 세워진다. 그리고 그 고백자들에게 천국의 열쇠가 주어진다.
7. 드디어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소개하고 싶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가 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
①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창조자시고 그것을 재창조하실 분이시다. 예수님의 통치 아래 온 세계는 있으며, 그 통치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창조의 목적이 달성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며 관리의 대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 주인이시다. 그리고 그 주인은 이 세계를 깨어진 데서 다시 회복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창조하셨으므로 다시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인도를 받을 때 이 세계를 온전히 창조의 목적에 따라 다스릴 수 있다.
②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분이요, 본래 창조 질서를 회복하실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고 그 삶을 가리켜 우리는 영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는 영생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인간이 사는 세계가 어떤 문제로 말미암아 제 기능과 목적을 상실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아름답게 지어진 피조세계는 죄와 전쟁, 그리고 다툼과 죄악으로 가득한 곳이 되어 사람마다 가정마다 나라마다 온 피조세계가 신음하며 고통 속에 있다. 인간은 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서로를 더 적게 이해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툼과 소모적인 토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 많은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으며 곳곳에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생활 수준은 높아졌지만 행복지수는 낮아지고 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흉악범죄는 더욱 늘어간다. 자연의 훼손도 커지고 오염도 국제적으로 유려할 수준에 이르러 국가마다 분담금을 지불할 것을 명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회복하실 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이 곧 사망임을 알고 계시며 그 사망을 이기고 생명을 공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고 그 화목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점점 행복한 곳으로,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곳으로 변화될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돕고, 서로 사랑하며, 가난한 자를 돕는 이들이 많아지고,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쁨과 웃음이 온 땅에 가득하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삶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고 영생을 누린다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누리게 하시고 깨어진 피조세계를 회복하시는 분이시다.
③ 예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다. 이 세상의 왜곡과 타락,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과 불순종하는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의 구속 사역과 대속 사역을 보고도 믿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대신에 짐승을 경배하는 이들은 장차 환난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이루어가는 이 세상의 회복을 주님의 재림의 날에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바야흐로 낙원으로 천국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어 다시는 죽음도 없고 눈물도 없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부분적으로 누리는 영생을 완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을 가리켜 재림의 날 또는 주님의 날이라고 하며 우리는 그 완전하게 회복될 날을 기다린다.
8. 추가적인 묵상(목회자들의 설교 토론 후)
① 예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리라던 그 반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개신교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기에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인가?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지는 특별함을 생각해 보자.
②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죄목과 동일하다. 예수님도 같은 것을 시인하다가 죽음에 넘겨지셨다. 그러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며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도 있는 목숨을 건 신앙고백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그 고백을 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을 아셨다. 아마 베드로도 그런 고백이 가져올 파장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대제사장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들은 출교하기로 한 상태였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그리고 다른 구절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l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 10:32~33)
l 요한1서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l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③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그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출교나 죽음의 위험이다. 그런 이유로 예수를 선지자라고 시인하는 경우에는 이런 해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경우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승천 이후 교회 시대 때 로마의 황제 숭배령 곧 가이사가 하나님(주, 퀴리오스)이라는 우상숭배를 강요받던 시절에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경우에는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신앙고백이었다.
④
⑤ 인정교회를 섬기던 박지호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금식을 하던 중에 응답을 받고 교회를 세우게 된다. 예수를 위해 망해보자는 각오로 예배당을 건립한다. 예수를 위해 죽으리라는 고백이 있다면 교회는 세워질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과 결단 위에 교회는 세워진다. 그런 고백이 없는 곳에는 교회는 세워지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리고 주님 스스로 죽음으로써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오는 우리들에게 약속하신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죽음으로써 충성하는 곳에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⑥ 우리 모두는 이런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신앙고백자들이 된다. 이런 고백자들은 주님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주님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고백은 나이를 초월하며 직분을 초월한다. 주님과는 못 바꿉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고백이다. 다음의 찬송은 이런 신앙고백을 잘 보여준다:
⑦ 이 찬송은 유제헌 목사님이 작사한 것이다. 6.25 때 공산군에 끌려가 순교하신 유 목사님은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설립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깨우던 분이셨다. 나는 이 찬송 중에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는 못 바꾸네라는 가사에서 큰 감동을 받는다. 이것이 진정 신앙고백이다. 주님과 바꿀 수 없다. 여기에서 헌신도 교회 사랑하는 마음도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도 생기는 법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진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이 있겠는가? 이런 신앙고백을 가진 사람 위에 아니 이런 신앙고백이 있다면 교회는 세워질 것이고 이런 고백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 어디에도 교회는 세워질 수 없다. 광야와 같고 강원도 두메산골 같은 곳이라도 이런 일사각오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는 세워진다.
⑧ 15살 학생도 존경하는 체육선생님의 권고를 뿌리치고 계속 밤에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열정이 바로 신앙고백이다. 그 신앙고백이 교회를 세운다. 나아가 그 고백은 주님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신다. (간증 시작)이것은 저의 이야깁니다. 저의 고향 전남 완도군 신지면 월부리. 교회는 중학교 바로 곁에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섬마을에 청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섬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배들이 떠난 다음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설교할 사람은 중1학년생입니다. 그 때 교회는 목요일 밤에 모여 어린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주일 아침에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예배와 공과가 주요한 시간이라면, 목요일 밤은 찬양, 설교, 동화, 소창(消暢, 우울하거나 갑갑한 마음을 풀어 시원하게 함, recreation)으로 이어져 좀 더 풍성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한 설교는 풍랑을 만난 바울 사도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 주님께서 그를 위로하시던 설교가 처음으로 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나면 동화, 그리고 소창입니다. 소창은 레크레이션과 같은 것으로 늘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즐거운 시합을 합니다. 그렇게 뛰고 놀다가 밤 9시쯤 되면 돌아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다 돌려 보내고 나면 문을 닫고 교회당을 나옵니다. 그러다가 어둔 길에서 누군가가 서 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그렇게 존경하던 오상렬 체육선생님이셨습니다. 이렇게 밤 늦은 시간에 반장이 돌아다녀도 되는 것이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나는 유구무언입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책은 없습니다. 다만 나의 마음에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 누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쉬웠다면 나는 교회 주일학교 교사직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마음에 이를 내려놔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3을 마칠 때까지 나의 교사직은 계속되었습니다. 한 권 있던 다 낡은 공과책을 가지고 나보다 한 살 어린 학생들부터 유치부 아이들까지 가르쳤던 그 시절, 나에게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주님을 지금도 사랑합니다.
9. 이런 고백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누군가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땅히 주님을 삶에 첫자리에 둘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있다. 그 결정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 그의 부모에게도 그 소경에게도 부딪힌 문제였다. 나아가 이것은 제자들과 지나온 모든 세대에 그리고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주님을 향한 고백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성도를 결단하게 하고 성도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한다. 이런 결단이 없는 사람은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어디 교회를 목사 한 사람이 세우는가?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한 결단이다. 그래야 돈 없이도 성경을 읽고 전도를 하고 서로를 돌보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 앞에 그런 고백의 순간이 있다. 주님이 과연 내 삶의 첫자리인가? 내가 모든 것을 잃고도 주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는 주님의 제자의 자격이 없다. 그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사람이 그를 위협하고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고 그를 쫓아내고 그를 죽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예수 때문에 망해 보리라.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나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주님을 따르리라 하는 고백 위에 교회는 세워진다.
10. 그리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주님이 인 치신 자들이요, 주님이 인 치신 증거는 곧 이렇게 주님께 충성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는 주님이 인 치신 사람들이 나온다.
① 계시록 22:3~4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② 계시록 7:1~4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③ 요한계시록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④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⑤ è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을 가리켜 144,000이라 부르며, 일곱 인의 재앙에도 해를 받지 않으며, 어린 양과 함께 거룩한 산 시온에 장차 설 것이다. 그들의 이마에 인이 언제 찍힐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고백을 할 때다. 그들이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면 주님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이마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이 증언할 것이다!
11. 아울러 계시록에는 어린 양의 이름이 아닌 짐승의 인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다음 구절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① 요한계시록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② 요한계시록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③ 계시록 14: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④ è 이것을 흔히 666 곧 짐승의 이름이라고 한다. 짐승의 표를 이마나 오른손에 받으면 그들은 짐승에게 속하게 되며 이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이나 모두에게 받게 한다. 나아가 그들은 주님이 장차 이 세상을 환난으로 치시고 심판하실 때에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고난을 받으리라. 마치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이 순종하는 그 백성들 곧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문의 이마 곧 문설주에 표를 받은 백성들은 제외된 것과 일반이요 오직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다. 언제 그들의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인이 새겨졌을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배반하고 세상과 타협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세상을 선택하고 주님을 부인하면 즉시 그들의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가 새겨질 것이다. 마치 가룟 유다가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렸을 때처럼.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기로 작정하고 거짓말로 베드로를 속였을 때처럼.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이마에 누구의 이름이 새겨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폴리갑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죽으면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대학을 떨어져도 주님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망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고백 위에 교회는 세워진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요 우리의 지혜도 아니요 세상의 부귀도 아니요 사람들의 많고 적음이나 경영도 아니요, 오직 주님을 향한 이런 일사각오의 신앙고백이 있다면 옹달샘교회는 주님이 세우실 것이다. 그런 반석이 지금 있는가? 나는 그런 반석이 될 것인가?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12. 가리사랴 빌립보에서의 추억- 예수께서
by Wayne Blank
Caesarea Philippi was situated near the northern extremity of the land of Israel, about 4 miles / 6 kilometers east of Dan (see Dan to Beersheba), 150 miles / 240 kilometers north of Jerusalem, 50 miles / 80 kilometers southwest of Damascus, and 30 miles / 48 kilometers east of Tyre and The Mediterranean Sea. It had an elevation of about 1,150 feet above sea level, near the foot of Mount Hermon. Located within the eastern source of The Jordan River, with lush trees and grass, it is known today as Banyas.
지금 우리가 목숨을 걸고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 옛날 신앙의 자유를 위해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면, 그리고 초대교회가 출교나 처형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평화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거룩한 싸움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귀는 우리의 혈과 육을 위협한다. 그래서 옛날에도 지금도 그렇게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다만 옛날에는 물리적인 위협으로 우리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오늘날에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어떻게 잃어버리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 사랑 또는 이 세상에 속한 혈과 육을 즐겁게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죄에의 유혹, 세상 정욕에의 사랑을 교묘히 틈타고 있다. 세상에 죽지 않으면, 이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죽을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관광을 하고 있는 것이며 장난을 하는 셈이다. 죽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자.
말씀과 예배에 목숨을 걸자. 성경과 기도에 목숨을 걸자. 그런 교회만이 살아남는다. 그 외의 것은 관대하자. 남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우리는 오직 주님을 사랑하자.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불편하고 힘들어도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을 찾아 최선을 다해 보자. 예를 들어, 고삼 수험생에게 여름방학 보충수업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래도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수련회에서 보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연고로 우리는 때때로 무모해 보이는 일들에 대하여 결단하는 것이다. 귀한 향수 한 나드Nard, the root-type perfume를 주님의 발에 부어드린 여인의 사랑을 어떤 사람은 허비로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것을 영원히 기억될 미담으로 보는 것을 보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사랑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얻기 위해 목숨을 다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 그런 믿음이 반석이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다.
그 동안 나는 너무 안이한 삶을 살아왔다.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그냥 시류에 따라 형편에 따라 살아왔다. 우리 옹달샘교회라는 배는 표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방향을 바로 잡고 항해를 할 때다. 흉내 내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 헬라어에 이런 말이 있다. 스키니 파스 호 비오스! 이 말은 인생은 전체가 무대다!는 말이다. 우리의 인생을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진짜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세워지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 봉사와 헌신, 순결과 정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채워가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없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이제 이 일에 매진한다는 뜻이다. 이제 그 일에 첫 출발을 할 사람이 여기 있다. 우리가 할 일을 찾았다. 말씀과 기도, 예배와 전도, 봉사와 헌신이 그것이다. 할렐루야! 그것을 이루는 일이라면 어디든 좋다. 무엇이든 좋다. 그리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전심으로.
설교 제목: 목숨을 걸어야 할 일
설교 본문: 마태복음 16: 13~20
주제: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은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따라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 구체적인 삶을 배우고 실천하자!
설교 후 질문:
1.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록하시오.
2.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라는 말이 가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4.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당시에 위험한 고백인 까닭을 설명해 보세요. 참고. 요한복음 9장.
5. 예수님 앞에서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 승천 이후 로마 황제숭배령이 강하게 지배하던 시대에 교회가 한 신앙고백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6. 예수께서 사형 언도를 받으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2장을 참조.
7. 예수님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고백하는 것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서머나의 주교(AD 65~155)로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다가 85세의 나이로 순교한 사도 요한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9. 죽음을 각오하고 대서양을 건너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들Pilgrims은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기 전, “나라는 있어도 왕이 없는 곳, 교회는 있어도 교황이 없는 곳,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곳, 기름진 땅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도록” 기도했고, 그러기 위해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조영엽 칼럼] 감사절의 근대적 유래에서. 그러나 도착 후 2~3개월 안에 절반 가량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숨을 건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들 102명이 타고 간 배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1]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막 6:14~16)
[2]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9:11~13))
[3] 김세윤,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2008, 2010) 19~20쪽.
[4]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7] 고백자(witness)는 순교자(martyr)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로 보면 다음과 같다: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증인 witness; (1) 확고한 사실에 대한 증인; (a) 법률적인 (마 26.65); (b) 일반적으로 어떤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 (롬 1.9); (2)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진 것을 증거하는 사람; (a) 일차적 지식으로부터 (행 1.22) 또는 (b) 체험으로부터 (히 12.1); (3) 믿는 바를 말하는 사람,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지라도, 여기서 나온 말이 증인 witness, 순교자 martyr (행 1.8; 계 17.6)
[8] 김세윤 교수의 설명: 이것은 당시에 만연된 우상숭배자들에 대항해서 유일한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나님. 그 분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배경에서 그 이름이 등장한다. 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배를 받고 있는 짐승에 대해서 오직 경배의 대상은 하나이신(Oneness)이신 하나님(그리스도)만이 경배의 대상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