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성은 의미의 창조를 요구한다
아퀴나스의 학설에서 말하는 지향성은 의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생각 대신에 의미를 창조할 행동을 요구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와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1908-1961), J.J 깁슨(Gibson)(1904-1979)과 같은 철학자들과 실용주의자들도 이 관점을 공유한다.
앞에 어떤 물건이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 물건과 어떤 목적에 즉시적으로,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코를 킁킁거리고 눈을 움직이고, 귀를 쫑긋하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 물건을 만져 본다.
메를로 퐁티는 이런 역동적인 행동을 '최대한의 이해력 추구'라고 불렀다.
우리의 감각수용기들이 그 물건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자아와 이 세상의 관계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퐁티의 이 개념은 아퀴나스의 동화와 비슷하다.
존 듀이(John Dewey)는 그런 과정을,
'자극을 부를 행동을 하면서 미래의 행동을 위하여 그 물건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 물건에 단순히 반응하는 것과는 명백히 구별된다.
장 피아제가 심리발달을 분석하는 작업의 바탕으로 삼은 개념은 이런 것이었다.
즉 유아들은 아주 초기 단계에 능동적인 탐험을 통하여 자신의 신체와 환경에 대해 배운다는 것이다.
그것을 피아제는 "행동, 동화, 적응의 사이클'이라고 불렀다.
피아제가 '감각운동' 단계라고 부른, 어린 시절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의 유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며 감각들을 많이 받아들인다.
깁슨은 대상들의 '어포던스'(affordance)를 강조했다.
깁슨이 처음 사용한 이 표현은 '어떤 대상이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의 목적에 기여하는 쓰임새'를 뜻한다.
그는 각각의 대상 안에는 그것이 어떻게 쓰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보가 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 정보가 지각자의 마음에 닿을 때, 뇌가 뇌 체계들 안에서 일어나는 '공명'(resonance)을 통하여 그 정보와 같은 정보를 끌어 낸다.
그의 개념 또한 동화나 마찬가지이다.
깁슨이 '공명'과 같은 기술적인 표현을 쓴 이유는 신경계의 메커니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들은 유한한 인간 존재가 무한한 이 우주를 대할 때 거기에는 지각의 단일 방향성이 작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전하고 있다.
이런 철학적 통찰이야말로 동물들의 지각에 나타나는 신경 메커니즘들에 관한 실험에서 내가 관찰한 내용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실용주의는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에서 무대의 중심에 서는 일에 거듭 실패했다.
그 이유는 실용주의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마음들이 이 세상을 향한 행동이라면, 그 행동들은 어떤 식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물질주의자와 인지주의자의 관점에 따르면, 행동은 종국적으로 자극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
실험쥐의 경우에는 어떤 자극이 주어질 때까지 무기력하게 앉아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컴퓨터 터미널도 유저의 지시가 올 때가지 기다렸다가 작동에 들어간다.
그러나 야생동물과 어린이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환경을 건드린다.
어떤 기대와 속셈을 가지고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다.
타고나는 것 같이 보이는 이런 추구와 관찰의 행동은 뇌의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뇌는 그 행동들을 어떤 식으로 탄생시킬까?
물질주의자와 이상주의자들은 수 세기 동안, 아니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움직이는 외부의 힘이라는 통념에 기대어 왔다.
태양이나 달빛, 빅뱅, 우주의 정보 저장소(universal databanks), 아이콘, 토템, 신령, 동양인들이 말하는 기(氣), 빌헬름 라이히(Wihelm Reich)의 오르곤(orgone), 성소에 심은 나무들을 통해 이뤄지는 영적 세계와의 연결 등이 그런 외부의 힘들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이런 호소력 강한 에너지의 은유들을 대체할 만한 것으로 무엇을 갖고 있을까?
그들은 '자기조직'(self organization)이라는 이론을 갖고 있다.
자아가 스스로를 조직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자신을 움직인단 말인가?
그렇다.
하지만 신경동역학이 어떻게 해야 합리성을 강조한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영혼들을 사로잡을만큼 자기조직의 과정을 측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보다 단순한 생물체에서 진화했다.
이들 초기의 생명체들이 오늘날 인간이 보이는 다양한 지향적 행동의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는 인간에게 다른 생명체들의 의도를 규명하기도 전에 그것을 탐지해내는 능력을 부여했다.
이런 경우가 그 예이다.
우리를 향한 행동은 그것을 보는 즉시 알아차린다.
어떤 대상과 조우할 때, 우리는 그것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잡으려 들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를 공격할 것인지 달아날 것인지를 자문한다.
만약에 그 대상이 꼼짝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보고 있는지 묻게 된다.
만약에 그 대상이 움직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움직임이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현대세계에서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지능기계의 행동과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계획적인 동물의 행동을 구분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동물학 관련 분야의 책들을 보면, 인간 외의 다른 척추동물들도 지능적인 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들이 무수히 많다.
낙지와 꿀벌, 가재와 같은 무척추 동물에서도 그런 행동이 보인다.
찰스 다윈(Chales Darwin)은 지렁이에서도 지향적인 행동의 증거를 발견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박테리아까지도 그런 행동을 보인다고 믿는다.
나의 접근법은 인간보다 더 단순한 척추동물들의 뇌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 척추동물들이 단순하다고는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으며 인간과 지나칠 정도로 다르지도 않다.
그 이유는 적당히 단순한 뇌들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의 뇌로 발전해간 단계를 적절히 밟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비교신경과학자 찰스 저드슨 헤릭(Charles Judson Herrick)은 범도룡뇽의 뇌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뇌보다도 초기 척추동물의 뇌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했다.
범도룡뇽의 단순한 구조는 우리에게 뇌기능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범도룡뇽의 뇌는 세 개의 주요 부위로 나눠진다.
전뇌에는 반구가 2개 있다.
그리고 중뇌가 있으며, 후뇌에는 미발달의 소뇌가 있다.
중뇌와 후뇌가 뇌간을 이룬다.
뇌간은 전뇌를 척수와 말초신경계로 연결하고, 감각 및 운동 신경들을 골격근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뇌간은 감각 및 운동 신경들을 자율 신경계를 이루는 뉴런덩어리로도 연결시킨다.
전뇌의 반구 각각에 있는 피질은 3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눠진다.
맨 앞부분이 감각의 인풋을 맡는다.
가장 직접적이고 지배적인 감각이 후각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감각(시각, 청각, 미각, 촉각)에서도 뇌간의 중계를 통해 인풋이 온다.
각 반구의 측면(PC)은 육체가 할 행동의 모양을 정하는 운동피질이다.
중간 부분(H)은 연합영역인데, 거기서는 모든 감각에서 들어온 정보들이 서로 결합하여 필드(field,場)로 만들어진다.
이 필드가 시간과 공간의 방향을 제공한다.
지향적인 행동은 내면에서 일어난 목표의 지시를 받으며, 다른 지향적인 존재들과 어울려 사는 세계의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다.
물질주의자와 인지주의자가 이런 시공간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내놓은 표현이 단기기억과 인지지도이다.
실용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용어들은 오도하는 측면이 있다.
그 과정에 이미지의 임시 저장도 전혀 일어나지 않고, 대표적인 지도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실용주위자들이 직면한 문제 하나가 기억, 인지지도, 명령 등의 은유에 생물학적 알맹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기능들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그려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기능들은 범도룡뇽에게 시간과 공간에서 행동을 펼 수 있는 필드를 내 놓는다.
그 필드 덕에 범도룡뇽은 보상이 예상되는 곳으로 가고, 움직이는 먹이를 추적할 수 있다.
범도룡뇽의 뇌에 있는 이 연합영역이 우리 인간의 뇌에 있는 해마의 선조인 셈이다.
이 해마가 학습과 공간 방위와 기억에 탁월한 역할을 맡고 있지 않는가.
감각피질과 운동피질, 연합피질이 서로 합쳐져서 중앙의 작은 지역 주변에 링 모양의 신경섬유띠를 형성한다.
찰스 저드슨 헤릭은 중앙의 그 부위를 '과도적인 지대'(transitional zone)라고 불렀다.
헤릭은 그 부위를, 보다 발달된 뇌에서 새로운 부위, 특히 포유류 동물의 신피질이 출현할 때 성장과 확장이 일어난 곳으로 파악했다.
그럼에도 반구의 세 부분은 각 뇌반구의 줄기 주변에 변연계로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6장에서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연구원들은 많은 척추동물들을 대상으로 질병이나 실험적 수술로 인해 뇌에 손상을 입을 경우에 행동에 어떤 영향이 나타나는지를 연구해 왔다.
실험 대상에는 도룡뇽과 개구리, 개와 인간이 포함되었다.
그 결과, 지각과 대부분 형태의 학습을 포함한 모든 의도적 행동에는 변연계가 필수인 것으로 드러난다.
수술로 뇌간과 반구들 사이의 연결을 끊고 변연계를 고립시켜 보라.
그러면 동물은 지향적인 행동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그 동물은 먹이를 입에 넣어주면 씹고 삼키는 능력과 몇 가지 종류의 걸음걸이로 운동하는 능력, 월터 캐넌(Walter Cannon)이 항상성(homeostasis,생명의 특성 중 하나로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특성을 말함)
이라고 부른 다양한 조절 기능을 하는 능력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그 동물은 지향적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했으며 의도적으로 어떤 곳으로 가지 못한다.
주변 환경을 향한 행동의 방향을 잡아주는 뇌 부위들이 상실된 것이다.
그리고 운동패턴을 실행할 능력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남는다.
이번에는 헤릭이 '과도적인 지대'라고 부른 곳에서 나오는 전뇌의 어느 한 부분 혹은 전부를 수술로 제거해 보라.
그러면 그 동물의 행동은 심각할 정도로 형편없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동물이 듣지를 못하거나, 보지를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마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동만은 분명히 지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척추동물의 경우에는 전뇌가 지향성이 일어나는 중심지이다.
이 세상에 현존하는 생물체 중에서 가장 간단한 예의 하나인 범도룡뇽도 지향성의 탄생에 필요한 3가지 기본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감각피질과 운동피질, 연합피질(해마)이 그것이다.
이 세 부위의 기본적인 구조는 뇌의 진화를 거치면서 포유류 동물과 인간에게는 변연계로 남아 있다.
척추 동물 대부분의 뇌를 보면 이 부위는 후각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뇌에서는 이 부위가 지나칠 정도로 커졌다.
마치 고대 도시가 핵심적인 중요성과 도로계획 같은 것을 전혀 잃지 않은 채 현대적인 교외 때문에 크게 변모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