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신문 2012년6월19일
제정례 작가의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찾아서

동곡서당의 맥을 따라서
佳緣가연
結新緣賀賓一路連
결신연하빈일로연
頌稱聞遠巷談笑動華筵
송칭문원항담소동화연
淑行加孟母胤敎效韋賢況
숙행가맹모윤교효위현황
又秋天碧更祈未盡宣
우추천벽갱기미진선
계자에 새 인연을 맺으니
하례손님이 한 길에 이어졌도다.
칭송함은 먼 거리까지 들리고
담소는 화려한 자리의 움이네
행동은 맹모보다 더 정숙했고
자손을 맞아 효를 가르침이 위현을 본 받았네
더불어 가을하늘 푸른데
다시 기원하고 다 베풀지 못했도다.
생의 가장 화려한 자리라 할 수 있는 화촉을 밝히는 자리
그 자리에서 느끼는 부모의 심경과 정경을 담은 아버지의 한시(漢詩) 가연(佳緣)의 내용을 담아 보았다. 위의 한시는 대한민국 독립문화상 수상작이다.
미지의 세계인 결혼 생활을 향해 나아가는 신랑과 신부가 한 쌍의 원앙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칭송하며 나누는 이야기꽃을 ‘움’으로 피워내셨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움으로 시작하여 자랐다. 신랑과 신부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제 막 돋아나는 새 봄의 어여쁜 움처럼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때가 되면 꽃이 피듯 자녀들이 태어나고 새 생명이 열어주는 경이로운 그 세계를 걸어가며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어 바람 불면 바람을 막아 주고 해 뜨거우면 그늘이 되어 주겠지. 그 무한한 축복 속에 내리사랑을 체험하며, 자신을 길러서 그 자리에 서게 하신 부모님의 은덕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리라. 그렇게 더 성숙해 가는 삶의 여로에서 각기 다른 저마다의 삶의 목표를 성취하였을 그것이 바로 창조가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후대의 거울이 아닐까한다.
인생에 단맛만 있다면 진미가 있을까. 오미자의 맛처럼 달고, 쓰고, 맵고, 시고, 떫은맛이 어우러져 인생의 참맛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 속의 단 맛을 오래 간직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일 것이다.
결혼 생활이란 자칫 책임은 두 배로 늘고 권리는 반으로 줄어든다고 느끼기 쉬운 결혼생활의 단면을, 일심동체가 되어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며 지혜를 모아 결혼 생활의 전면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의 연속선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한시(漢詩)가연(佳緣) 에서도 화촉자리의 ‘움’인 칭송함의 담소에 이어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효와 후대에 관한 교육으로 연결하여 언급하셨다.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 그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의 문제는 곧 삶의 질과 연결된다. 가정이 행복하면 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더 큰 단위인 사회도 행복해질 확률이 높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했을 것이다.
시대를 따라 가치관은 변해왔고 또 변해가지만 그 근본 틀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계에서 때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와 가정은 사랑으로 굴러가는 수레라는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 순간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외쳤다는 말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라고 풀이하지만 여기서 ‘나’는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개개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이 유아독존(唯我獨尊)하니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진리이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결혼 한 후에 항상 시댁의 안부를 먼저 물으셨다. 부모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앞으로도 나는 부모님의 그 사랑하시는 방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뜻을 따라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위는 동곡서당 건립시에 아버지께서 손수 액자를 만드시고글씨를 쓰셔서 서각하신 정검실(靜儉室) 현판이다.
이곳에 들른 사람들이 고요한 가운데 검소하게 살기를 기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다. 현판 앞에 서면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에 검소하게 살아 유사시에 서로 힘이 되라”시던
말씀과 한 시 가연의 한구절인 “칭송함은 먼 거리까지 들리고 담소는 화려한 자리의 움이네”라는 음률 속에 담긴 의미가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로 떠나신 후 더욱 내 마음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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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 하성재님의 함재명(涵齎名) -할아버지의 호를 함재로 짓게 된 내력
하성재님은 민족문화추진회 [ 民族文化推進會 ]의 기틀을 다지신 분이다.
-1965년 서울에서 조직된 문교부 산하 고전국역단체. 민족문화의 전승과 계발을 추진하여 문화 진흥에 이바지 함을 목적으로, 처음에는 학 · 예술계 원로 50명이 중심이 되어 사회단체로 출발하였다. 초대회장은 박종화(朴鍾和), 부회장은 이병도(李丙燾) · 최현배(崔鉉培)이었으며, 김동리(金東里) · 손재형(孫在馨) · 신석호(申奭鎬) · 이은상(李殷相) · 조연현(趙演鉉) · 홍이섭(洪以燮)이 이사로, 김두종(金斗鍾) · 김윤경(金允經) · 성낙훈(成樂熏) · 이숭녕(李崇寧) · 이희승(李熙昇) · 한갑수(韓甲洙)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회가 창립된 1960년대 중반기는 근대 개화기 이후 국권상실과 남북분단 등 혼란으로 거듭되던 정치 · 경제 · 사회상황이 안정기반에 접어들면서, 민족주체성과 정통성의 회복 및 연계(連繫)가 강력히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에 민족문화추진회는 “학문과 예술로 민족얼을 부흥시켜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게 하는 과정을 밟으면서 크게 민족문화를 앙양시킨다.” 는 취지 아래 발족하여, 문화시설의 확충, 문화활동 지원, 문화행정의 일원화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 중략=
국역사업과 국역자 양성사업에는 성낙훈 · 조규철(曺圭喆) · 하성재(河性在) · 신호열(辛鎬烈) · 이병도 · 양주동(梁住東) · 조지훈(趙芝薰) · 윤남한(尹南漢) 등 원로들이 초기부터 참여하여 기틀을 다져놓았다.
이분들 중에 하성재님과의 교분의 단면은 위의 함재명을 통하여 잠시 살펴 보았고 조규철님과의 교분은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글을 통해 다음에 얘기하겠다.
고전의 국역 · 편찬과 국역자 양성 - 국역작업은 《국역 연려실기술》을 필두로 고전국역총서가 1966년부터 출간되어 현재 진행중인 조선왕조실록(연산군~철종) 등 문화 · 역사 · 철학 전반에 걸쳐 330여책이, 한국고전총서는 《교감 삼국유사》 등 3책이 간행 1970국역자 양성사업 착수 1974국역연수원을 개원하여 연수부 3년과 연구부 2년 과정을 두고 사서오경 • 한국한문선 • 국사강독 등 기본과목과 한국 및 중국의 중요고전을 연수 - 1975년 이후 학술지 《민족문화》를 창간하고 매년 1회씩 발간하면서 고전정리 및 연구와 국학연구논문을 싣고 있음. 고전 이해의 저변확대를 위하여 민족문화연구를 간행하고 고전읽기 운동을 전개. 1986한국문집을 총정리하여 한국문집 총간으로 간행하는 사업에 착수하는 주요활동을 하셨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나도 내가 다녔던 대흥 초등학교에서 위에 언급한 고전 읽기 운동에 참여하여 삼국사기와 심구유사 등의 역사서들을 열심히 읽던 기억이 새롭다.
#동고서당의 건립 당시를 오라버니께서 회고하시다
동곡서당은 1950년 말경 고성군 하일면 학동 최씨 고가내에 소재하던 기존의 서당을 매입했다. 매입 당시의 규모는 본채(본관, 동무(동쪽의 사랑채)), 서무(서쪽의 학생들 공부방), 서실(서고), 관리실 등 제대로 격식을 갖춘 서당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당시 학동에 거주하셨던 최석근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 향토사학자 최상석씨도 얼마 전에 서당에 다녀가시며 당시를 회고하였다.
당시는 시대적 배경( 변란으로 인한 고초 벌목)으로 인해 건물의 신축은 허가 자체가 어려웠다. 산림보호 차원에서 기존의 하일면 학동 최씨 고가내의 서당 건물을 헐어 수 십리 길을 건너 동곡서당까지 가져왔던 것이다. 그 당시에 학동에서 동곡서당의 입구 신작로까지는 소규모 트럭으로 건축 자제를 운반했다.
동곡서당 입구에서 서당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길이 좁아 인력으로 자제를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흥초등학교 상급생들이 방과 후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기와를 한 장씩 운반하며 서당의 건립을 돕기도 하였는데 아주머니들께서는 따뜻한 국밥으로 어린이들의 손길에 보답하였다. (그 어린이들 중에는 나중에 아버님께 수학한 분들도 계시다.)
또 대흥 초등학교 교사 몇 분이 함재 할아버지께 수학한 관계로 서당의 건립에 무척이나 도움을 주셨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김동수 선생님, 최상림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올립니다.)
서당건립에 많은 기여를 하신 할아버지의 제자, 이웃, 친척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현재 경상남도 도의원으로 재직 중이신 제정훈 당숙부님의 아버지이신 송암 복근 종조부께서는 함재 할아버지의 막내아우로서 서당 건립에 시종일관 참여하시며 서당을 준공 하셨습니다. 복근 종조부께서는 생전에 통일주체대의원을 역임하셨습니다.
동곡서당의 건립 후 상급학교에 진급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한문의 기초인 사자소학, 명심보감, 맹자, 대학 등을 익히느라 밤낮으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훈장은 아버님이셨다.
매년 음력 삼월 열이렛날이면 함재 할아버지의 유계인 락신계가 동곡서당에서 할아버지의 제자, 그리고 이웃 친척의 주선과 참여로 할아버지를 추모하고 학덕을 기리며 이루어졌다.
지금도 이 고을을 지나치시거나 상면하는 분들은 함재, 금계 선생의 집안이라고 우리 집안을 거론하니 생각 컨데 긴 세월에 걸쳐 흘러온 이 내력은 가솔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언행의 조심, 지행일치 하려는 노력, 사랑의 마음, 이 모든 것들의 결정체라 본다.
(지난 세월 한 때는 전국각지에서 할아버지의 학덕을 기리어 방문코자 연일 찾아오시는 손님맞이에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힘써 오신 할머니과 어머니의 영전에도 고마운 마음을 올립니다.)
동곡서당은 서당의 역할 외에도 인근 광산 노무자, 방랑 유랑인 숙소로, 집 없는 사람들의 가족 거주지 등 다양한 씀씀이로 교육 문화 거주 등 삶의 애환이 묻은 참으로 우리의 인생사와 유사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서당 건립 당시 내력을 생각하면서 정검실(靜검실) 현판을 바라본다. 현판은 시대의 격변기를 거치신 아버지께서 심사숙고 끝에 이 모토면 적합하다고 생각하셔서 그 당시에 걸어두신 그 위치에 그대로 걸려 있으면서 “앞날을 알 수 없는 인생에 검소하게 살면서, 유사시에 고요한 가운데 힘닿는 서로 힘이 되라”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그 말씀이 우리 가족관계에 국한 되어 있지 않고 이웃과 사회를 포함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알기에 오늘도 마음을 가다듬고 나 자신부터 추스르며 다시 한 번 그 뜻을 마음에 새겨본다.
첫댓글 오늘도 즐거운 기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