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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담겨있는 마 24장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한 주 전의 일로써, 제자들에게,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와, 성전을 보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질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질문거리를 던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재빨리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예루살렘 성전이 언제 무너지겠습니까? 또, 주님은 언제 임하시며,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데로, 제자들의 생각이 잘 따라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준비하신 답을 들려주시는 데, 그 내용이 4절 - 41절까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답을 들려주시면서, 31절까지는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들려주십니다. 마치, 제자들 마음에 종말에 관한 영화 한 편을 기록하듯 생생하게 들려주십니다. 그리고는, 32 - 41절까지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는 데, 여름에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연해지는 것을 통해서 들려주는 비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종말을 준비케 하는 지혜를 주시고, 노아홍수 때의 상황들을 통해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서 종말을 준비케 하는 지혜를 주시고, 맷돌질하는 여인들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삶의 터전에서 바쁘게 일하는 상황 속에서 벌어질 종말의 현상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종말에 대한 설명을 입체적으로,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하신 것은, 제자들이나 이 본문을 대하는 오늘의 우리들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점인 종말을 대비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할까?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세상을 향한 기독교인의 의무는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때요? 참 딱딱하죠? 멀리서 오시느라, 일찍부터 서둘러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시작부터 딱딱하죠? 그래서, 종말을 준비하는 본문의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가 품는 의문점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은 아주 간단명료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본문에 나오는 “깨어 있으라”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깨어 있으라”로 잡았습니다. 이제, 매듭이 풀리셨죠?
깨어있다는 것은, “머물러 경계하거나, 잠을 자지않고 보초를 선다”는 의미입니다. 예화는 항상 신선한 것, 따끈따끈한 것으로 해야하는 데, 저는 가끔 유치찬란한 것도 사용합니다. 그것은, 주객전도가 될까봐 그렇습니다. 설교보다 예화에 대한 기억력이 발달하실까봐 그렇습니다.
몇 년전, 임진강가에서 밤에 보초를 서던 초병이 긴급하게 상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임진강 물이 급하게 불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알아보니, 북에서 우리에게 통보도 없이 댐을 방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초병이 만약, 잠들었으면 임진강 주변에 커다란 수재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외국에 파견했던 기업체에 현지인이 몰래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기업체 금고에 현금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잠든 사이에 잠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당직을 서던 말단직원이 깨어있어서 그와 난투극을 벌이면서 금고에 보관된 현금을 지켰다고 합니다.
막 13: 36을 보시면,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이는, 뜻밖으로 갑작스럽게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는 데, 이 때 예수님께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감람산에서 일찍이 아셨습니다. 제자들과 하루종일 지역을 순례하고, 밤에는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실 때 몇몇 제자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이 기도로 돕지는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 같으면, 제자들이 한 마디 더 했을 것입니다. “기도는 짧게 하시고, 주무시지. 저러다가 피로가 쌓여서 병 나시겠다. 우리도 빨리 가서 자야하는데...” 이러한 제자들을 향해 마 26: 42을 보시면, 예수님은 사랑으로 가득찬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왜 깨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만 자느냐? 잠 잘려고 따라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몸이 피곤한 것을 예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예수님이 곁에 계실 때이고, 제자들은 철부지 같으니, 사랑으로 봐 주셨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강조합니다. 벧전 4: 7을 보시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는 것의 첫 단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하루하루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힘이 되고, 권능이 됩니다.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만능키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일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시절과 지금을 비교합니다. 왜? 초기에는, 전도의 바람이 불고, 부흥이 일었나? 그 당시는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도 집에서도, 어디에서도 핍박이 있었고, 성경들고 교회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서 신문지에 싸서 다녔다는 데, 그 때는 어떻게 뜨거울 수 있을까?
거기에 비해, 오늘날은 찬양집회, 열린예배 등 많은 예배 프로그램들이 있는 데, 부흥의 소식보다는 여기저기서 신앙의 바벨탑을 쌓는 소리만 들리고, 교회의 아름다운 소리보다는 부정적인 소리가 들리고, 교회성장이 정지되었다는 소리만 들리니 왜? 그럴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자료들을 수집해 보았는데, 눈에 띠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철야예배라면, 밤 11시에 모여서, 일찍이는 10시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예배 마치면 간증하고, 그리고 새벽시간까지 개인기도하였습니다. 또, 지금은 막혔지만 북한산 능력봉. 삼각산이라고 하죠? 거기서는 1년 내내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끊이지 않는 기도자들의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이단들의 형태도 보면, 기도에 의한 기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잠시 섬기던 행당동의 교회에서는, 그 교회 원로목사님께서 목회하실 때, 청년들을 갑자기 한 밤 중에 교회로 소집해서는 청계산으로 데리고 가서 산 기도를 시키셨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불길이 사그러졌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지만, 기도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망설입니다. 이제 다시 기도를 통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는 것의 둘째 단계는,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으려는 우리는,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은 그냥 맥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도둑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인처럼 예민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집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리하나에도 귀를 기울이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도둑이 침입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둑을 막고자 깨어있었지만, 도둑이 늦게 왔는지, 새벽에 왔는지 주인은 그 때까지 깨어서 지키지 못했기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렸습니다.
예수님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어떤 현상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말하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며, 제자들로 하여금 깨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본문의 뒤를 보시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세상 종말의 심판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최대한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세상 종말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준비하는 것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또한, 제자들은 이것을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케 하였습니다. 헌데, 아직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초기에는 하늘에 뜬 구름이 조금만 이상하여도 행여나 주님이 이제 오실까?하고 기다렸는데, 또, 일부 종말주의자들이 펼친 예수님 재림에 대한 사건들도 있었지만, 아직도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본문의 주인처럼 기다림에 지쳐서, 잠이 들 수 있습니다. 이 주인이 안 것은, ‘오직 도둑이 올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발생하고, 전쟁이 발생하고, 가짜 예수가 나와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또, 노아시대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무감각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즐기는 현실의 평안함 속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단에 대한 자료들을 수시로 수집합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들의 활동이나 가르침이 성경에서 벗어남이 눈 앞에 그대로 보이는 데, 그것을 따른 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신기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영적 갈급함이 점점 더 깊어지면서, 분별력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으로, 사랑우선주의로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동조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 어머니’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한다는 자체가 유치찬란한 말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남자라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갖는 그 권위, 책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 차별이 아닙니다. 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를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타협하여, 서로 간에 강단을 교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타 종교와는 구별되며, 독자적이고, 배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우상, 형체만 있는 우상과 동등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합니다. 마치, 세상으로 널리 퍼져나가 세상을 다스리며, 세상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기독교는 세상으로 전파되어 복음을 증거하며,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교정책이라하여, 현지인의 종교를 존중한다는 것을 앞세워, 인정하고 함께 교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여 정착했을 때, 그 곳의 주민들과 교류하지 말며, 신앙을 공유하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우상과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합니다. 인본주의만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구별짓는 것, 차별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렇다고하여, 우리의 믿음까지도 타협의 조건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우상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경계를 해야 합니다. 주님 언제 오실는지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혹이나, 우리의 삶이 그 전에 마쳐서, 세상종말에 앞서 주님 앞에 먼저 갈수도 있지만,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재물? 권력? 지위?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비유에 나온 집 주인에게는 집이 소중하고, 재산이 소중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혼이 소중합니다. 세상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지킬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지옥으로 가느냐? 천국으로 가느냐? 예수 믿는다고 모두 천국가지는 않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종착지요, 우리의 본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깨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잘 때나 깰 때나 집에 있을 때나 밖에 있을 때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는 것의 마지막 단계는, 긴장감을 가지고, 주님오실 때까지 우리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45절 이하를 보면,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두 부류가 비교됩니다.
먼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을 보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있어서 주인이 없다고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며, 주인집의 사람들에게 때를 양식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현듯 귀가한 주인이 종의 충실됨을 보고, 칭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을 보면, 주인이 좀더 있다 오시겠지하는 생각에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괴롭히며, 자신과 악한 뜻이 맞는 친구들과는 흥청망청 지내면서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종은, 주인이 불현듯 왔을 때, 주인으로 징계를 받고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종들의 비유는, 종으로서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목회자들을 향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본문의 말씀전개상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되기도 합니다. 목회자로 본다면, 주인은 예수님이고, 주인집 사람들은 성도들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성된 종은 주인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에게, 주의 말씀을 공급해야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목회자로 있으면서 성도들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부족한 것이 있을 시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 땅의 기독교인으로 본다면, 기독교인의 본래 직무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세상을 관리하는 관리자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직무가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을 지키는 관리자였습니다. 에덴의 경비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주신 지상명령이 무엇입니까?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하라 잖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사명입니다. 주변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으면, 지혜롭고 충실한 종이 주인의 가족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것처럼, 그에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하고,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예수믿으라는 말한 번 안하고, 지낸다면, 그 사람이 지옥가는 것에 대한 문책이 반드시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겔 3: 17-19을 보시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된 일, 증거되어진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주 앞에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의 모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는, 종말에 대해,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할까요?에 대해선, 기도로 깨어있음을 살폈습니다.
둘째로는, 종말에 대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에 대해, 우리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상황들을 보며, 우리의 믿음이 혼탁해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깨어있음을 살폈습니다.
셋째로는, 종말에 대해, 우리 기독교인들의 의무는 무엇일까요?에 대해선, 기독교인된 우리는 자신의 직무를 주인이 있든 없든 수행함에 있어서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처럼 우리의 본분인 복음의 증거자로서 충실함을 살폈습니다.
이 말씀들을 기억하시고, 삶 속에서 실천하심으로, 하나님께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