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초당동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정붙이고 살 동네 없이 도회지 속에서
이곳저곳 떠돈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살고 싶은 동네, 이상적인
마을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상상 속에만 있을 수 있는 그
야말로 ʻ이상향(理想鄕)ʼ일 것이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가본 동네
에서 집을 짓고 살고 싶은 장소는 예외 없이 무덤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은퇴하면 가서 살고 싶은 도시는 있다. 하나는 동해안에 있는
강릉이요 또하나는 남해안에 있는 통영이다. 둘 다 별로 크지 않
고 산과 바다가 잘 어우러진 곳이다. 굳이 그 둘 중 하나를 택하
라면 형편상 서울에서 가까운 강릉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
다면 강릉에서 거처를 정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될 것 아닌가?
강릉에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 하나 있다. 초당동이 바로 그곳이
다. 시내 중심가에서 별로 멀지 않은데도 아직 소나무들이 많이
살고 있고, 저 유명한 초당두부가 있는 곳이다. 바닷바람도 불고
산바람도 부는 곳이다. 그리고 허난설헌의 생가라고 알려진 옛집
도 있는 곳이다. 그 집보다는 못하겠지만 나이 지긋한 집을 하나
구해 수리해서 살고 싶다. 가능하다면 나처럼 은퇴한 친구 한둘
과 이웃하고 싶다. 강릉에는 대학도 큰 것이 둘이나 있으니 그곳
선생 몇몇과 친교를 맺어도 될 것이다.
아니, 그 동네 사람들과 새로 사귈 것이다. 초당두부집 가운데
도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침례교회 옆에 있는 집은 주인이 기독교
인이라 술을 팔지 않는다. 두부를 못 팔면 못 팔았지 술을 팔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마시고 싶으면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음식점
수입엔 술값 수입이 괜찮다던데. 여하튼 그런 고집이 있는 동네
사람을 이웃으로 가지고 싶다.
강원도 집들은 다른 곳과는 달리 도시 속에서도 대개 마당이
넉넉하다. 초당의 집들도 그렇다. 허난설헌 생가에서 만나본 능
소화를 비롯하여 몇몇 꽃을 골라 심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친구
와 이웃에게는 다른 꽃을 권해 서로 돌아가며 완상하고 싶다. 심
심하면 허난설헌 생가의 뒷동산에 올라가 바로 앞에 펼쳐진 경포
호를 정신없이 바라볼 것이다. 참 그 동산엔 감나무가 많고 이상
하리만치 무덤이 없다. 친구를 불러 경월소주를 미리 사들고 가
서 초당두부를 안주로 한잔하고 언덕에 오를 것이다. 경포호가
싫증나면 호수 오른쪽으로 한없이 펼쳐져 있는 동해바다를 볼 것
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때와 같은 가을이면 딸 사람이
없어 황금 덩어리들을 주렁주렁 달고 서 있는 환상적으로 아름다
운 감나무들을 볼 것이다. 그런데 그 동네 초입에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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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 ․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
평안남도 숙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졸업(문학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58년《현대문학》에 시〈10월〉,〈동백나무〉,〈즐거운 편지〉등을 추천받아 문
단에 데뷔했다. 이후〈한밤으로〉,〈겨울의 노래〉,〈얼음의 비밀〉 등의 역작을 발
표했으며, 이러한 초기 시들은 첫 번째 시집 《어떤 개인 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어 두 번째 시집 《비가(悲歌)》, 3인 시집《평균율》을 간행하였고《사계(四季)》
의 동인으로 활약했다. 그 밖의 시집으로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 진다》,《풍장(風葬)》 등이 있다. 1968년 현대문학신인상, 1980년
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