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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연구> 제12집 2호(2002년 11월)에 실린 글입니다.
1. 머리말
왕정복고로 시끄러웠던 한 해가 지난 후 밀턴은 의도적으로 남의 눈을 피해가며 살았다. 밀턴은 자주 집을 옮겨 다녀야 했고, 재정마저 고갈되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안은 있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충실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왕정복고 직후에는 그의 투옥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했고, 위험할 때는 그를 도피시켜 주었으며, 앞 못 보는 밀턴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었다. 필요할 때 마다 늘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밀턴 곁에는 자신을 위해 대신 읽어주고 글을 써줄 친구나 학생, 또는 필생(筆生)들이 있었다.
밀턴의 도피 기간 중 헤어졌던 딸들은 1661년 초 다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밀턴이 <실낙원> 등의 저작을 집필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우리는 흔히 앞 못 보는 시인 밀턴이 딸들의 도움을 받아 서사시를 구술하는 목가적인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일반인의 막연한 추정과는 달리 그의 딸들은 아버지의 재능이나 지적 기질을 전혀 이어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딸들은 아버지의 천재성과 드높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아버지와의 생활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불만을 터뜨렸고, 밀턴은 딸들의 반항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밀턴은 1663년 2월 24일 엘리자베스 민셜(Elizabeth Minshull)과의 세 번째 결혼으로 안정된 생활과 가정적 위안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딸들은 계모와 아버지에게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밀턴과 세 딸들의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 무렵의 밀턴 가정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시간적 선후 관계도 불분명하고 단편적인 것이어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시시콜콜 파헤쳐 들어가면 가족 구성원 간의 내밀하고도 구차스런 이야기도 더러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불화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평가할 만큼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의 밀턴에 관한 이야기들은 제법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신뢰성에 의문이 들지만 다른 일부는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이야기들 중 상당수는 기억이 불완전한 사람들이나 밀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는 밀턴의 생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찾는 전기 작가들에게 주목 받고 싶어 한 밀턴의 딸들이나 손녀들에 의해, 오랜 시일이 흐른 후 진술되었다. 이 시기의 밀턴에 관한 믿을만한 증인으로는 밀턴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민셜, 외조카 에드워드 필립스(Edward Phillips),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시리액 스키너(Cyriack Skinner) 등을 꼽을 수 있다.
2. 방문객과 필생(筆生)들
왕정복고로 시끄러웠던 한 해가 지난 후 밀턴은 의도적으로 남의 눈을 피했다. 그는 찰스 2세의 새로운 체제가 수행한 잉글랜드 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덕을 보았다. 잉글랜드인들은 새로이 시작된 시대의 흥미로운 사건들에 몰두한 나머지 밀턴에게 별다른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변함없이 밀턴에게 충실했고,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낯선 외국인들이 이따금 런던의 밀턴 자택을 방문했다. 1660년 9월 도피 생활에서 벗어나자마자 빌려 쓰기 시작했던 홀본(Holborn)의 주택은 정원이 없어서 운동 삼아 정원 산책을 즐기던 밀턴에게는 적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밀턴은 1661년 초 세인트 자일즈 크리플게이트(St. Giles Cripplegate) 교구 레드 크로스 가(Red Cross Street) 부근 제윈 가(Jewin Street)로 거처를 옮겼다.
밀턴은 정돈된 집안 분위기를 좋아했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시력을 잃은 후 그는 겨울에는 새벽 5시에, 다른 계절에는 새벽 4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에는 책을 읽어주기 위해 필생 한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읽는 책은 히브리어 구약성서였다. 성경 낭독은 평상시에는 대개 4시 30분까지 진행되었다. 밀턴은 침상에 누운 채로 위로와 지혜와 영감을 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상당한 시간을 명상에 할애했다. 아침 7시가 되면 필생이 다시 와서 점심때까지 책을 읽어주고 밀턴이 구술하는 글을 받아 적었다. 그는 아침 시간이면 시상(詩想)이 떠올라 이를 구술하고 싶어 했으므로, 혹 필생이 늦게 도착하기라도 하면 “나는 젖을 짜내고 싶단 말이야” 하고 투덜거리곤 했다. 이렇듯 아침 시간은 전적으로 구술하는데, 또는 큰소리로 낭독하는 것을 듣는데 할애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정오가 되면 그는 정원에 나가 산책을 즐겼다. 산책은 그가 가장 즐기는 운동이었다. 시각장애자임에도 그는 날씨가 좋으면 하루에 서너 시간씩 산책을 했다. 밖에 나갈 수 없으면 그네타기로 운동을 대신했는데, 이 그네는 도르래를 이용해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밀턴은 오르간 연주와 바스 비올(첼로의 전신인 현악기) 연주를 즐기기도 했다. 저녁이 되면 그는 선별된 시를 낭독시켜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친구가 오면 공부를 주제로 유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은 대개 저녁 6시에서 8시 사이였다. 그 다음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가벼운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는 파이프를 피워 물고 물을 한잔 마셨다. 그는 대개 9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책을 읽어주거나 구술을 받아 적을 임무를 맡은 정해진 필생이 없을 경우에도 그의 주변에는 밀턴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턴의 친구들은 자녀들을 그에게 보냈다. 아이들이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도 밀턴을 즐거운 마음으로 도왔다. 그들은 밀턴을 돕는 동안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그와의 수준 높은 대화를 즐겼던 것이다. 밀턴은 예의 “젖을 짜내고 싶다”는 농담과 함께 그들을 반갑게 맞곤 했으며, 안락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다리를 팔걸이 위에 쭉 뻗은 채 구술을 시작했다. 그는 기억력이 비범해서, 어떤 때는 집필하고 있던 서사시를 단숨에 40행이나 불러 받아쓰게 한 다음, 그 자리에서 행수(行數)를 절반으로 줄이곤 했다. 아침 시간에는 침대에 누운 채 시를 짓기도 했다.
구체적인 방문 기록은 없지만 제윈 가의 자택을 찾아 밀턴에게 도움을 주고 존경을 표하고자 했던 친구와 동료들이 누구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밀턴은 제자들이 장성한 다음에도 친구로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만년에 들어서도 주변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앤드루 마벨(Andrew Marvell), 에드워드 필립스, 시리액 스키너, 토머스 엘우드(Thomas Ellwood), 새뮤얼 파커(Samuel Parker), 대니얼 스키너(Daniel Skinner, 시리액의 조카) 등이 여기에 속한다. 라넬라 부인(Lady Ranelagh), 그리고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네이선 파저트(Dr Nathan Paget) 등도 이 시기의 방문객들이었다. 동생인 크리스토퍼 밀턴은 1660년 11월 25일 이너 템플(Inner Temple)의 재판관에 임명되었고, 그 후 형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아들들을 형의 필생으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밀턴의 손위 처남인 토머스 아가(Thomas Agar)도 수시로 밀턴을 찾았을 것이다.
열렬한 밀턴 찬양자이자 ‘각별한 친분’을 누렸던 극작가 써 로버트 호워드(Sir Robert Howard)는 이 무렵 밀턴을 만나 “무엇 때문에 공화파를 지지했느냐”고 물었다. 밀턴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화주의자들의 정부가 가장 검소한 정부였기 때문이죠. 군주국가의 장식물만 갖고서도 번듯한 공화국을 하나 만들 수 있거든요.” 농담 같은 말이지만 공화정에 대한 밀턴의 변함없는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밀턴 전기 작가인 존 톨런드(John Toland, 1670-1722)에 의하면, 밀턴은 언제나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경의를 표했으며, 친구들에게 “선, 정의, 자비 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이야말로, 개인적 이익 추구라든가 인간의 수월성 및 완전성에 대한 찬양과 존경 이상으로, 인간 행동의 적절한 규범”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그는 “지배권에 대한 애착이나 박해하고자 하는 성향은 교황파(Popery)의 특징으로서, 모든 교회들이 갖고 있는 불가피한 속성”이라고 신랄하게 평가했다. 톨런드는 “밀턴은 초년에는 청교도를 지지했고, 중년에는 독립파와 재세례파를 지지”했지만, “만년에 들어서는 어떤 특정 기독교 교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교파 집회에도 출석하지 않았으며, 가정에서 특정 교파의 의식을 거행하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밀턴은 어떤 분파도 따르지 않으며 오직 성경만을 고수한다고 천명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건 비속한 사람이건 특정 교회 출석을 강요당하거나 억지로 떼밀려 대중 예배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개개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인도, 성령의 빛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 권력은 개인에게 종교적 일치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밀턴의 믿음이었고 그는 이 믿음을 실천했다. 그러므로 프랜시스 펙(Francis Peck, 1692-1743)은 만년의 밀턴의 종교적 태도가 “무엇보다도 퀘이커교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밀턴이 퀘이커교도들과는 달리 전쟁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 무렵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의사 퍼저트는 밀턴 곁에 상주하며 라틴어를 읽어줄 사람을 하나 천거했다. 토머스 엘우드라는 퀘이커교도 청년이었다. 엘우드는 20대 초반의 진지한 청년으로서 자신의 어린 시절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라틴어 지식을 보충할 길을 찾았으나 전문가의 지도 없이는 그러한 노력이 무위로 끝나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퀘이커교가 복음 전도에서 인간적인 학문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문을 경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1662년 3월 또는 4월에 퍼저트는 이 젊은이를 밀턴에게 데려갔다. 엘우드는 밀턴의 극진한 환대에 감명 받았다. 그는 밀턴이 평판이 높은 학자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한편 앞 못 보는 학자는 엘우드에게 공부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앞으로 친밀한 관계가 될 것으로 전망하며 기쁨을 표명했다. 그는 밀턴이 그에게 가르침을 베푼다는 조건 아래,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밀턴에게 와서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이 날 이후 엘우드는 밀턴 자택 가까운 곳에 거처를 정하고 날마다 오후에 밀턴을 방문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밀턴의 자택 식당이었다. 시간은 오후였다. 맨 처음 밀턴은 엘우드가 전에 배운 발음을 다 잊고 새로운 발음을 익히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엘우드로서는 당혹스러운 주문이었다. 밀턴은 “만일 라틴어의 이점을 충분히 누리고자 한다면, 독해 능력은 물론이고,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대륙(이탈리아)식 발음을 익혀야만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즉각 젊은 퀘이커교도에게 모음 발음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자음 ‘c’가 ‘e’와 ‘i’ 앞에서 ‘ch’로, ‘sc’가 ‘i’ 앞에서 ‘sh’로 발음된다고 가르쳤다.
밀턴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엘우드는 의미 파악은 못해도 라틴어를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있으리라고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 어린아이처럼 서툴게 발음을 익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존경하는 스승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지식을 늘리기를 간절히 원했다. 매일 아침이면 엘우드는 밀턴 자택 부근에 마련한 거처에서 자기 책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오후 그는 자신의 실력이 향상되었음을 입증하길 바라며 제윈 가의 밀턴 자택으로 향했다. 밀턴은 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격려와 도움을 베풀었다. 밀턴은 귀가 예민해서 엘우드의 발음만을 듣고도 ‘제대로 알고 읽는지 모르고 읽는지’를 분간해냈다. 그러므로 종종 엘우드가 읽는 도중 끼어들어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시험하고 난해한 문구를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6주간의 수업이 끝난 후 엘우드는 자신의 학업에 큰 진전이 있음을 스스로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 그만 건강이 나빠졌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상당 기간 병에 시달렸으며 요양을 위해 시골로 갔다고 회고했다. 병이 나은 뒤 그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밀턴의 친절한 영접을 받았다. 밀턴은 그가 돌아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으로 보인다. 엘우드는 이 위대한 인물이 자신을 좋게 생각하고 있으며 대화하길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두 사람은 예전의 공부 방법으로 돌아가, 젊은 엘우드가 큰 소리로 읽으면 밀턴은 필요할 때마다 설명을 해주었다.
엘우드의 종교 문제가 아니었더라면 둘 사이의 관계는 서로 유익하게 계속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매주 일요일 밀턴이 자택에서 자기 방식으로 예배를 보는 동안 엘우드는 퀘이커 집회 장소에 계속 참석했는데, 1662년 10월 26일 엘우드와 다른 31명이 그곳에서 체포, 투옥되었던 것이다. 엘우드는 1663년 2월 초가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그는 즉시 출옥 밀턴을 방문했고, 잠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가진 후 다시 책읽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되지 못했다. 엘우드가 옛 친구인 페닝턴 집안의 설득으로 그 집의 세 자녀들을 맡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밀턴에게 가르침을 받은 모든 청년들이 그와의 돈독한 유대를 일생 지속했던 것은 아니다. 1662년과 1663년에 밀턴을 수시로 방문했던 사람 중에 새뮤얼 파커(Samuel Parker, 1640-88)라는 이름의, 엘우드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 있었다. 파커는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은 경건한 장로교도였다. 그는 밀턴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밀턴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조언을 얻고자 했다. 그는 특히 왕정복고 이후 부활된 주교제 하에서 자신이 어떤 진로를 취해야 할 것인지 밀턴에게 조언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종교적 입장을 바꿔 국교를 받아들였고 만년에는 국교회의 옥스퍼드 주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1673년 파커는 마벨을 겨냥한 풍자문에서 한때 친분을 유지했던 밀턴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마벨은 이에 답하여, “파커는 존 밀턴의 집을 날마다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밀턴에게 조언을 얻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더니, 이제는 마치 유다처럼 배신하여 밀턴을 공격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3. 밀턴의 딸들
밀턴과 헤어져 있던 딸들이 아버지와 다시 합친 것은 1661년 초 제윈 가로 거처를 옮긴 무렵이었다. 그들은 밀턴이 도피해 있는 동안 다른 사람―전기 작가 파커(W. R. Parker)의 추측대로라면 외할머니 파월(Powell, 밀턴의 첫 번째 아내 메리의 친정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1661년 초 맏딸 앤(Anne)은 다리가 불편한 신체장애자이자 언어장애자였으며 14세였다. 둘째딸 메리(Mary)는 12세, 그리고 막내딸 드보라(Deborah)는 8세였다.
밀턴의 집에는 세 딸과 하녀 한 명, 딸들을 가르칠 여교사 한 명이 있었다. 그밖에도 집안에 상주 또는 비상주하는 여러 사람들이 밀턴의 집안일을 도왔을 것이다. 밀턴과 두 번째 부인인 캐서린Catherine Woodcock) 사이에 15개월 남짓한 결혼생활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이 기간을 제외하면 그들은 가장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어머니 없이 10년이란 세월을 지내야 했다. 홀로된 아버지는 다른 업무가 너무나 바쁜 나머지 그들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파월 외할머니가 이따금 방문하고, 아이들 양육은 대부분 하녀들이 맡았을 것이다.
딸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드보라가 만년에 들려준 이야기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세 딸은 모두 집에서 여자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밀턴은 자신이 어린 시절 이런 방식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므로 이것이 딸들에게도 적합하다고 간주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매우 많은 비용이 드는 교육 방식이었다. 나중에 딸들의 교육 결과에 실망하고 딸들의 불친절에 마음이 상하자, 밀턴은 “재산의 가장 많은 부분을 딸들을 키우는데 투자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밀턴은 딸들에게 아낌없이 투자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교육은 밀턴이 은신 또는 구금 상태에 있던 1661년에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밀턴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세 딸들은 탁월한 학자이자 시인인 아버지의 지적 소질을 거의 물려받지 못했다.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딸들은 얻은 바가 거의 없었다. 아마도 학습 능력에 문제가 있었거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턴의 외조카이자 세 딸들과 이종사촌 간이었던 에드워드 필립스는 밀턴의 딸들이 모두 글을 읽을 줄은 알았다고 말한다. 특히 메리와 드보라는 여덟 가지 언어―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는 물론, 히브리어, 그리스어 같이, 알파벳이 전혀 다른 언어까지―를 밀턴에게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줄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은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언어는, 읽기는 하면서도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드보라는 훗날 자신들이 다양한 어학을 배우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밀턴은 “여자는 한 가지 언어만 알면 충분”하며 “여자는 읽고 쓰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그들이 듣는 데서 종종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드보라는 종종 호메로스, 이사야, 오비디우스의 ꡔ변신ꡕ 등의 첫 부분을 원어(즉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암송함으로써 방문객들을 놀라게 했다. 이점은 딸들이 이들 시구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발음하는 법을 교육받았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필립스에 의하면 맏딸인 앤은 신체장애 및 발음장애 때문에 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에서 면제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문서를 작성하거나 서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둘째인 메리는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었고 아마 글도 쓸 줄 알았을 것이다. 막내인 드보라는 글을 제법 잘 쓸 줄 알았으며, 나중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드보라가 글을 쓸 줄 알았다는 사실은, 훗날 드보라의 딸들이 했던 증언, 즉 밀턴이 “여자는 읽고 쓰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딸들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밀턴과 딸들의 관계에 대한 현존하는 여러 이야기들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밀턴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증언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전반에 회자(膾炙)된 밀턴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은 주로 밀턴의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셋째 딸 드보라, 그리고 드보라의 딸인 엘리자베스 포스터(Elizabeth Foster)등에게서 나왔다. 많은 편집자와 전기 작가들이 밀턴 생애의 세세한 이야기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찾아왔고, 이들은 때로 유족들에게 돈을 증여하거나 물질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연히 밀턴의 유족들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여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밀턴이 단순히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딸들에게 공부를 안 시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편견 때문이라면 딸들을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가정교사를 채용할 리 만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에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자란 딸들이 학습 능력 부진으로 인해 공부에 진전이 없었다면, 밀턴은 아마 남성중심의 전통 사회에서 흔히 하는,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어”라는 말을 되뇌며 딸들을 너그러이 공부에서 면제해 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드보라는 생전의 아버지에게서 늘 듣던 이 말을 자신의 딸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면서, 이모들(앤과 메리)이 글을 전혀 쓸 수 없거나 잘 쓸 줄 몰랐던 이유를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밀턴은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Kristina) 여왕의 찬미자이자, 라넬라 부인 같은 학식 있는 여성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밀턴은 결코 여성의 무지를 옹호한 인물은 아니었다. 딸들 중 어느 하나라도 책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만 했다면 밀턴은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르월스키(Lewalski)는 밀턴이 메리와 드보라에게 라틴어 초보 과정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간 노력을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밀턴의 이런 노력 덕분에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 앞서 말한 것처럼 손님들 앞에서 드보라가 호메로스 등의 문학 텍스트를 암송할 수 있었으리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밀턴은 딸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둘째인 메리가 심했는데, 아마도 자매들 중 손위―맏딸 앤은 장애자였으므로 제외―여서 책을 읽을 때면 가장 먼저 불려갔기 때문일 것이다.
딸들이 저항한 이유는 쉽사리 상상할 수 있다. 그런 공부를 해봤자 아버지인 밀턴에게만 도움이 될 뿐, 지적 관심이 없는 자신들로서는 얻을 것이 없었다. 또한 딸들은 밀턴이 왕정복고로 인해 입은 불명예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누릴 수 있었던 지위, 재정적 안정, 지참금, 결혼 기회 등을 상실한데 대해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앞 못 보는 아버지의 요청에 끌려 끝없이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필립스는 그들의 결함이 성격상 결점에 기인한 것인지 그들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대단한 인물의 딸들이 아버지의 학식을 어느 정도 이어받았다면 실로 행운일 것이나, 운명은 달리 정해졌다”는 것이다.
딸들은 아버지의 천재성과 드높은 이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밀턴은 늘 바빠서 그들에게 충분한 관심이나 사랑을 베풀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밀턴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남긴 글이나 그에 대한 어떤 증언에서도 그가 딸들에 대해 애틋한 사랑으로 언급한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딸들과 늘 상당한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가지 이채로운 점은, 밀턴 전기 작가인 파커(W. R. Parker)와 르월스키(Barbara K. Lewalski) 두 사람 모두 밀턴과 딸들 중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가운데, 여성 학자인 르월스키만이 “아무리 힘든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밀턴은 딸들에게 좀더 큰 사랑과 배려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밀턴의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듯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밀턴은 더 나은 대안이 없을 경우 딸들에게 기계적 낭독자로서의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종류의 읽기는 양측에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밀턴은 1662년 엘우드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서도 그의 발음에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티가 조금만 나도 책읽기를 즉시 중단시킬 정도로 예민한 귀의 소유자였다. 그런 밀턴이 딸들의 낭독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딸들로서도 분명 이런 일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고, 밀턴 역시 딸들이 이 일에 짜증을 내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움이 절실했고, 그 시대에는 부모에 대한 복종이 여전히 하나의 미덕이었다.
주변에 조금이라도 더 학식 있는 보조자만 있었어도 밀턴은 이런 상황을 결코 인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메리와 드보라는 이런 상황을 ‘꽤 오랜 동안’ 견뎌냈다고 한다. 기계적 낭독을 언제부터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각각 다른 시기에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밀턴의 세 번째 결혼 시점―드보라는 당시 10살이었다―보다 그리 오래 전에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밀턴이 결혼할 무렵 메리가 아버지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다는 증거가 있으며, 그것은 달갑지 않은 어학 교육 진행과 상당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해오는 증언에 의하면, 한 하녀가 메리에게 밀턴이 곧 결혼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자, 메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 결혼이 무슨 뉴스거리겠어. 혹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라면 또 몰라도.” 같은 시기의 다른 증언에 의하면, “딸들이 모의를 해서 하녀에게 시장 보러 갈 때 밀턴을 속여 생활비 일부를 챙길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딸들은 아버지의 책들을 일부 파기하는가 하면 다른 일부 책들을 팔아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의 첫 번째 불복종’에 관한 서사시 ꡔ실낙원ꡕ을 집필하고 있던 밀턴은 아버지에 대한 딸들의 악의와 증오에 관한 보고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녀는 밀턴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662년의 밀턴은 리어왕과 같은 가련한 처지에 놓여 딸들에게 구박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4. 결혼
밀턴은 세 번째 결혼을 고려하고 있었다. 아내 없이 키운 세 딸들에게는 하녀 이외에 돌봐줄 손길이 필요했다. 물론 그는 이 일을 할 수 없었다. 앞을 못 보는 형편인데다가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1663년 2월 들어 앤의 나이는 16세, 메리는 14세였으므로, 그럭저럭 집안 살림을 꾸려나갈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밀턴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밀턴의 재산은 왕정복고로 인해 크게 궁핍해졌다. 결혼에 응해줄 여성을 찾는다 해도 아내를 부양하기에 힘이 부칠 정도였다.
그는 외국어 비서관 시절 봉급을 모아 저축했던 2,000파운드 넘는 돈을 모두 잃었다. 안전과 증식을 위해 한 은행에 돈을 맡겼지만, 공화국 몰락과 더불어 그 은행이 파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카 필립스의 말처럼, “모든 역량과 관심을 그 시대의 중대 현안에 기울인” 탓에 예치 금액을 제때 환수하지 못했고 이때 입은 손실은 그 후로도 회복되지 않았다. 밀턴의 정치적 낙관주의는 호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운영 미숙 또는 전문가 조언 결여’로 인해 또 다른 ‘거액의 돈’을 잃었다고 전한다.
부친은 성공한 금융업자였건만, 그 아들인 밀턴은 돈을 다룰 줄 몰랐다. 게다가 그는 이제 54세의 나이에 앞 못 보는 장애자 신세였다. 그에게 검소한 생활은 필수 요건이었다. 그러나 딸들은 이런 형편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딸들은 어머니가 필요했고 밀턴은 좋은 아내와 주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넉넉지 못한 재산과 상당한 명예, 그리고 따뜻한 마음―그것은 아내 될 사람이 반듯한 여성일 경우에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밀턴의 결혼을 주선한 것은 친구이자 주치의인 파저트였다. 그는 밀턴에게 자신의 종질(從姪, 사촌의 딸)인 엘리자베스 민셜(Elizabeth Minshull)을 소개했다. 24세 나이에 아직 결혼한 적이 없었고, 붉은 머리에 차분하고 상냥한 성품으로, 한 집안의 살림을 능히 꾸려나갈 수 있는 여성이었다. 밀턴은 1663년 2월 11일 결혼 허가를 신청했다. 재미있는 것은 54세의 밀턴이 신청서에 자신의 나이를 ‘약 50세’라고 기재한 것이다.
전에도 종종 그랬지만 밀턴은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를 원했고 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신부의 나이는 ‘약 25세’라고 기록되었다. 결혼식은 1663년 2월 24일 성 올더메리(St. Aldermary) 교회에서 치러졌다. 엘리자베스를 결혼 후에 알게 된 존 오브리(John Aubrey)는 1681년 고인이 된 밀턴의 전기 자료 수집 차 그녀를 방문하고 나서, 그녀를 ‘편안하고 상냥한 성격’을 가진 ‘부드러운 여성’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읽기와 쓰기도 썩 잘 했다고 전한다.
데이빗 매슨(David Masson)은 제3의 인물인 파저트가 소개했다는 이유에서 두 사람의 결혼이 로맨틱한 결혼은 아니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둘의 결합이 편익을 위해 시작한 것이라 할지라도, 밀턴과 엘리자베스는 결혼 무렵 서로에 대해 상당한 애정과 친밀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밀턴의 딸들은 아버지의 결혼에 대해 격렬하게 분노했다. 새 계모가 그들을 통제할까 하여, 그리고 자신들 대신 계모가 밀턴의 남은 재산을 상속하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밀턴의 세 번째 결혼 및 딸들과의 불화는 대중의 이목을 끌지는 않았고, 그 덕분에 밀턴은 비교적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자신의 삶과 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밀턴의 새 부인은 현명한 여성이었다. 변덕스러운 성격이나 낭비벽도 없었다. 소지주 출신인 그녀는 체셔(Cheshire)의 위스태스턴(Wistaston)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고향에는 모친이 아직 살아 있었고, 친정 오빠 리처드(Richard)는 틀자수 편물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먼 학자의 아내가 되고 세 아이의 계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만한 나이였다. 그녀는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이지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평범치 않은 남편의 생활습관을 재빨리 파악했다. 남편 밀턴은 먹고 마시는 일에 절도가 있었고, 매 끼니 사이에는 포도주를 거의 마시지 않았다. 밀턴은 도수 높은 술도 피했다. 제철 음식과 쉽사리 구할 수 있는 음식을 좋아했다.
밀턴은 아내를 ‘베티’(Betty)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아내를 부를 때마다 “베티에게 하나님의 자비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매우 친절하고 사려가 깊었다. 밀턴은 여러 면에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머리에 떠오른 20행 또는 30행의 시를 받아써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잉글랜드 시인들―베티의 회상에 의하면 코울리(Cowley), 셰익스피어(Shakespeare), 스펜서(Spenser) 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왕정복고기 잉글랜드 문단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예를 들면 그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에 대해 ‘큰일을 할 사람이며 학식이 깊은 인물’이지만 자신은 전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두 사람의 관심과 입장은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제윈 가의 밀턴 집안 살림에 익숙해진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마 그녀가 평생 보아왔던 것보다 더 많은 책이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근검을 미덕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밀턴의 경제생활에는 두 가지 예외가 있었다. 즉 “좋은 책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넉넉하게 도왔다”는 것이다. 집안에는 남편의 오르간을 비롯한 악기들, 그네, 즐겨 쓰는 의자, 거북 껍질로 만든 필갑 따위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그린 두 개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케임브리지 학생 시절의 초상화를 더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그쪽이 실물과 더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밀턴은 1663년 번힐에 살던 무렵 고위 관리의 방문을 받고, 정부를 위해 라틴어 비서관으로 봉사해 줄 것을 요청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제안은 충분히 있었음직한 일이다. 정부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악명 높은 밀턴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는 쾌거인데다, 그의 모든 과거의 주장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밀턴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훗날 밀턴의 미망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국왕은 메시지를 보내 왕실을 위해 글을 써줄 것을 남편에게 요청했지요. 하지만 남편은 그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과거 행동과 크게 모순 되는 것이며, 자신은 양심에 반하여 글을 쓴 적이 결코 없었노라고 답변했어요.”
번힐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지만 1663-65년의 정치 상황에 대한 밀턴의 우려와 실망은 적지 않았다. 그가 볼 때 왕정복고 정국은 악화일로였다. 의회 휴회 중 찰스 2세는 1662년 12월 26일에 통일령(Act of Uniformity)의 일부 규정의 시행을 면제하는 왕령을 선포함으로써, 평화적인 비국교도들로 하여금 각자의 방식대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밀턴은 다른 많은 비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움직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찰스 2세가 로마 가톨릭 교도들에게 문을 열어주려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전거가 확실치는 않지만, 1663년 2월에는 요크 공 제임스(James, Duke of York)가 밀턴을 방문했다. 그는 1649년 사형당한 찰스 1세의 둘째 아들이자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던 찰스 2세의 동생으로서, 장차 제임스 2세(1685-1688 재위)가 될 인물이었다. 어느 날 그는 형인 찰스 2세에게 늙은 밀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국왕은 동생의 호기심을 막을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허락했고, 얼마 후 제임스는 밀턴의 거처를 알아내 개인적인 방문을 했다. 먼저 밀턴이 소개되었고, 다음으로 밀턴은 찾아온 손님이 어떤 신분인지를 소개 받았다. 얼마간 서로 대화를 나누던 중 제임스는 손님답지 않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밀턴의 실명이 그의 저술 활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밀턴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만일 전하께서 여기 우리에게 닥친 재앙을 하늘이 진노하신 징후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부친이신 국왕의 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전제에서라면 하늘은 저보다는 부친께 더 훨씬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국왕은 머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는 이 말에 몹시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궁정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국왕에게 밀턴 같은 악당을 교수형 시키지 않은 것은 큰 실수라고 따졌다. 국왕은 밀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냐고 물었다.
“늙고 가난했습니다.”
“늙고 가난하다고? 게다가 그는 앞도 못 보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딱정벌레 같은 장님이었습니다.”
“제임스, 그를 교수형 시키길 원하다니, 어찌 그토록 어리석은가? 그를 목매달아 죽이면 그에게 봉사를 하는 셈이야. 불행에서 구해주는 꼴이지. 암, 그리 되어서는 안 되지. 만일 그가 늙고 가난한 장님이라면 그는 분명 충분히 비참한 처지에 있겠군. 그냥 살도록 내버려 두게.”
5. 맺는 글
밀턴은 결혼 및 번힐로 이사한 후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필생에게 시를 받아쓰게 한다. 저녁이면 ‘선별된 시들’을 읽었다. 특히 일요일에는 성경과 최고의 주석서들을 읽었다. 이 무렵 밀턴은 보통 새벽 4시 또는 5시에 일어났다. 그는 맨 먼저 필생에게 히브리어 성경을 읽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명상을 즐겼다. 그는 필생을 7시에 다시 오게 하여 점심때까지 자신을 위해 읽고 쓰도록 했다. 점심 후 그는 서너 시간씩 산보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저녁 9시 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실낙원> 집필 작업을 주로 겨울에 했다. 다른 계절에 시를 쓰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높은 시적 성취를 방해하는 추운 기후에 대해 밀턴이 두려워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뮤즈의 이런 활동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밀턴은 나머지 계절을 <기독교 교리> 집필을 포함한 다른 계획에 할애했다. 밀턴 시의 편집자이자 전기 작가인 토머스 뉴턴(Thomas Newton, 1704-1782)은 밀턴의 저녁 한 때를 마치 자신이 직접 목격이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묘사한다.
“밀턴은 점심 식사 후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리고 스스로 노래를 부르거나 아내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밀턴에 의하면 아내는 목소리는 좋지만 음악적 귀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위층에 올라가 6시까지 공부를 했다. 6시에는 친구들이 그를 방문하여 대략 8시까지 함께 앉아 어울렸다. 그런 다음 내려와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단으로는 대개 올리브 열매를 비롯한 가벼운 음식이 올라왔다. 저녁 식사 후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물을 한 잔 마셨으며, 침대로 갔다. …… 힘든 공부를 한 후,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점심 식사를 한 후,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오르간이나 비올라 다 감바(첼로의 전신)를 연주했다. 악기 연주는 시력을 상실한 후 그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밀턴은 만년은 이런 모든 일들이 어우러진 것이었다. 그러나 밀턴의 일상생활이 이렇듯 올리브 열매를 맛보며 파이프를 입에 문, 슬리퍼 차림의 안온하고도 규칙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일 것이다. 그의 읽기 및 쓰기 프로그램은 사실 질서정연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 못 보는 밀턴이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들이 그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곁에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그는 필요한 능력을 갖춘 친구들의 우연한 방문에 의지해야만 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과 일이 있었고, 늘 밀턴 가까이 있을 수만은 없었다. 1663년 7월 마벨은 칼라일 백작(Earl of Carlisle)―그는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의 신임 대사로 임명되었다―의 비서 자격으로 출국하여 1665년 1월이 되어서야 귀국했다. 에드워드 필립스는 1663년 10월 이후로는 밀턴을 자주 찾지 못했다. 에섹스(Essex) 존 에블린(John Evelyn)의 고향 집에서 그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밀턴의 학생 겸 필생을 맡을 사람도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앞서 엘우드의 경우에서 보듯이 밀턴은 수시로 어려움을 겪었다. 때로는 아내가, 때로는 마지못해 응하는 딸들이 대리로 그 역할을 맡아보았지만, 밀턴의 학문적 필요에 제대로 부응하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밀턴이 이룩한 비범한 업적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많은 물질적 곤란과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룩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