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기술 발달만이 중세 전성기 농업 혁명의 유일한 이유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술 혁신과 더불어 경작지의 확대, 그리고 개간지에 대한 집약 농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 사람들은 비옥한 북유럽의 평야에서 농경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들은 대체로 농사짓기 쉬운 땅만을 골라 개간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농업 거주지들은 광대한 삼림·늪지·황무지에 에워싸인 채 마치 수많은 작은 섬들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미미한 규모로 간헐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분산된 채 진행되던 개간 활동은, 1150년경에 이르러 한층 더 왕성하고 협동적으로 이루어졌다. 곡물 등의 주요 작물 경작지의 개간이 이루어진 결정적 시기는 1100년에서 1150년 사이였다. 꽃가루 화석에서 추출된 밀의 꽃가루 함량이 12세기 전반기에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 분야를 화분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간 활동으로 인해 북유럽의 지세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평화와 안정이 정착되자, 먼저 북프랑스와 서부 독일의 농민들은 섬과 같은 모양의 농업 거주지 바깥쪽을 야금야금 개간하며 경작지를 확대해 갔다. 맨 처음 그들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족 영주의 소유지를 몰래 침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귀족 영주들이 자진해서 개간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이제 개간 활동에 대해 그들의 지분을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삼림 개간과 늪지 배수 작업은 더욱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12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섬처럼 고립되었던 경작지들은 확장을 거듭하여 서로 맞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둘 점은, 새로운 농경지들이란 대개의 경우 옛날 농경지의 확장을 통해 얻어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황무지와 목초지 부근에 있는 “숲 속 빈터의 점진적 확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화전에 의한 개간으로 관목지대는 줄어들었으나, 큰 나무가 많은 산림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원인으로 먼저 개간도구가 빈약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세의 중요한 개간 도구는 큰 도끼가 아니라 손도끼였던 것이다. 귀족 영주들도 자신들의 사냥터를 보호하고 싶어 했고, 촌락공동체 역시 중세 경제에 매우 긴요했던 산림 자원을 지나치게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다.
늪지를 건조시키고 간척지를 매립함으로써 새로운 농경지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일찍이 비약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1100년경 곳곳에 작은 방파제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방식의 토지 정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간혹 전혀 새로운 토지가 개간을 통해 획득되었고, 그곳에 새로운 촌락이 건설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 북부, 특히 독일 동부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끝으로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 농민들은 좀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개간된 농토를 좀더 효율적이고 집약적인 방법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쟁기질 후에 써레질을 하거나, 호미로 자주 잡초를 뽑아 주고, 해마다 두벌갈이를 해 주었다. 이런 활동은 지력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