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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부분은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부분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지난주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것에 대하여 살폈지만 그 내용이 세상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오늘날 말하는 물질이 없어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난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혼의 가난, 즉 자기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고 또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유지할 수도 없지만,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 그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애통이라는 말을 달리 번역하면 슬퍼한다는 것인데, 모든 슬픔에 대하여 성경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예로 물질이 한 순간 없어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답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슬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 5장 4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모든 슬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것 역시 영적인 문제, 영혼의 문제로 말미암은 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애통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살핀 첫 번째 내용과 맞물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애통, 영혼의 문제와 관계된 애통, 성경은 그것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영혼과 관련된 모든 것이 아니라 약간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면 죄에 대한 애통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애통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생각하기에 앞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시느냐 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고 계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바로 그런 자에게 위로를 주시지만, 모든 성도는 팔복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위로를 받은 자로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먼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로서 우리가 받은 위로는 무엇인가부터 좀 살펴보고, 그런 뒤 애통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팔복 서론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도에게 있어 위로란 무엇인가 했을 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에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나 죽으나(롬14:7-9)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고전6:19-20)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전3:23, 딛2:14).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벧전1:18-19, 요일1:7-9, 2:2)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요8:34-36, 히2:14-15, 요일3:1-11),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마10:29-31, 눅21:16-18)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요6:39-40, 10:27-30, 살후3:3, 벧전1:5),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롬8:28),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롬8:15-16, 고후1:21-22, 5:5, 엡1:13-14),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롬8:1-17).
여기 보면 위로의 골자로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며 또한 그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리하여 그가 우리를 영원토록 구원하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본래는 어떤 자들인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 성경의 또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가 본래 우리의 모습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의 경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창조가 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로서 창조가 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죄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런 죄는 비참함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드렸지만 죄책과 전 본성의 부패를 가지고 태어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부패성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모든 비참함, 그리고 우리에게 있을 죽음 자체,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영원한 지옥의 고통은 바로 이런 비참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진노를 행하시는가? 최종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형벌을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시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9장이나 에베소서 1장과 같은 데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이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작정(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택과 유기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로마서 9장만 봐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몇 부분만 확인하자면, 먼저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태어나기도 전에, 또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시는 겁니다.
13절에서는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5절과 16절도 동일한 교리를 가르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니까 긍휼이 여길만한 것이 있고 불쌍히 여길만한 것이 있어서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곧 공로로 이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나오는 말씀이 뭐냐 하면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원인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22절과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선택과 유기의 또 다른 표현으로 여기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또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을, 긍휼의 그릇을 통해서는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분명 선택과 유기를 말합니다. 때문에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진노를 행하시는가? 최종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형벌을 내리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지만, 이미 죄를 짓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셨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불변하신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런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도 변경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느냐? 이미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자기 백성들을 택하셨기 때문에(엡1:4) 구약이든 신약이든 바로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하십니다(엡1:7). 시편 103편 말씀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아니하십니다(시103:10).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지는 그런 복을 받게 하십니다(시32: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했을 때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는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신 것,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 이것보다 더 큰 위로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내용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죄와 비참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상, 즉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나뉘게 되는데, 바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위로가 있지 않은 곳, 영원한 고통만 있는 곳, 바로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통에서 건져주신 것, 다시 말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요, 가장 큰 위로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 이것만 위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도 분명 위로이지만,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도 위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뭐냐?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 주셨는데, 아들과 함께 다른 것을 아까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롬8:32). 그래서 반드시 의와 거룩의 자리에 이르게 하십니다. 마지막에는 영화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서 어떤 역사를 펼치시는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십니다(롬8:28). 일하시되 누구를 위하여 일하시는가? 바로 나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시는 겁니다.
나아가 이런 확신들 때문에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는데, 지난주 말씀과 함께 이해하자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열심까지 품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받은 자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도 위로를 받지만, 죽을 때조차 위로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몸과 영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를 씻음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 그리고 이 땅에서 견인의 은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생에 대한 확실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위로와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로의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통해 알리고 있는 것이 뭐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요,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신데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견고한 위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성경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고 또한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게 하셨다고 말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의 모습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완전 성화의 단계로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부패성을 가지고 있어 죄를 짓기 때문에 애통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십시오. 분명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죄 문제로 말미암아 종종 애통하는 내용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즉 그의 죄가 드러났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그러나 고백만 한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마26:34) 닭 울 기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대로 하자면 처음에는 부인을 하고, 그 다음에는 맹세하여 부인을 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부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는데, 7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물론 비교해서 보자면 가룟 유다 역시 애통하는 모습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에 보면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여기 보면 스스로 뉘우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단어적으로 보자면 애통과 다를 바 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애통과 베드로의 애통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애통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그 열매가 있는 것이라면, 가룟 유다의 경우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행11:18 참조)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즉 성도로서 합당한 열매가 아닌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애통했다, 혹은 슬퍼했다, 뉘우쳤다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마태복음 5장 4절이 말하는 애통은 아닌 것입니다.
약간 분별을 한다면 애통은 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애통과 연관되는 열매들을 맺는데, 우리가 살피고 있는 팔복의 내용으로 하자면 애통 이후에 있게 되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성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의에 대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문제에 있어 가장 분명하게 알리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로마서 7장이라고 생각됩니다. 21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여러분, 로마서 7장은 분명 중생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선을 행하길 원하는 것이나, 혹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만 봐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중생자로서 선만 행하길 원하느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으로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하였기 때문에 선을 행하길 원하고 또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또 다른 한편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느냐? “오호로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모두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자들입니다. 구속의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그리고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도 말씀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뭐냐? 여전히 사망의 몸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잔재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요, 그것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애통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앙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만족함만 있느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좀 더 온전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렇게 나아간다는 것이 나아지는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아지지 않는 모습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칼빈은 기독교강요라는 책에서(1559, 1권 1장 2)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말하는 것이 뭐냐?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쪽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최대의 불의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기묘하게 속이던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탈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간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가 알게 되었을 때 이런 모습이라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한다면 단지 신앙의 자라남만 보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라남과 동시에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더욱 확인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가 애통할 수밖에 없느냐?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애통은 팔복의 첫 번째 내용인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입니다. 구속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로 인하여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이 땅을 사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신앙에는 전혀 기쁨이 없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움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하에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살폈지만, 그 구조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가 죄와 비참함에 대한 부분이고, 두 번째가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는 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그 구원에 대한 감사의 부분인데, 이런 구조 속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감사가 넘쳐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와 비참함에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사만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감사가 있지만,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서 자신의 불완전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의 불완전함을 더욱 직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시편 42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시42:11) 일반적으로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혹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서 도망쳐야 했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적자들을 피하는 그런 배경 가운데 쓰여진 시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 있을 때 낙심하게 되고 또 불안해하기까지 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하느냐? 그런 자신에게 꾸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왜 다윗이 자신의 낙망에 대해 꾸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바라봄으로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42편의 배경 가운데 다윗의 죄가 고발되는지는 시편 자체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울을 피하게 되었을 때는 죄 문제가 등장하지 않지만, 알살롬을 피하게 되었을 때는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와의 동침 사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모든 고통의 이면에는 죄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다윗의 어려움 역시 죄의 문제로 생각해 보자면, 지금 그의 낙망은 단순히 어려움에 대한 것도 되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죄로 인한 낙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 이면에 죄가 생각나게 되면서 “아! 그때 그 죄를 짓지만 않았어도...”라고 하면서 슬퍼할 때가 있는데,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시편 42편을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지금 다윗이 그것을 꾸짖고 있다는 것은 오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무조건 죄에 대한 애통만 있으면 되느냐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로 인한 낙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낙망이 마치 시편 42편의 자리까지 오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낙망하되, 불안해하는 그런 지경에 이르는 것은 결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내용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때문에 죄로 인하여 무조건 애통한다고 해서 다 좋은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죄에 대한 인식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너무 지나쳐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애통하는 자여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애통이 너무 지나쳐 낙심하고 불안해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정작 주님의 얼굴을 바라봐야 할 때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있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애통과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할 뿐 아니라, 성경은 다른 사람을 위한 애통함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시대의 죄악 때문에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하나님의 경고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매우 슬퍼했습니다.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119편에서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통하는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로서 애통해야 하는 자가 바로 성도들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애통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애통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되, 반복적으로 짓는 죄를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는 이것, 즉 선을 원하는데 원하는 그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고 있는 것, 즉 죄를 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애통에도 불구하고 좀 더 거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도 애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애통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 받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우리가 도리어 열매가 아닌 죄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우리는 심히 애통해야 합니다. 바른 교리가 세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야 하고, 교회가 너무 세속화 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특히 무형 교회로서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보편 교회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 지체로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음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무형교회가 모인 유형교회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면서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애통해야 합니다. 그저 잘 살게 해 주십사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도록, 그런 공의가 자꾸 땅에 떨어져 버리는 그 일로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애통이 있습니까? 영적인 문제로 인한 애통, 영혼의 문제로 인한 슬픔이 있느냐는 겁니다. 나의 죄 문제 때문에 애통하며,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그런 애통이 있느냐는 겁니다. 혹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신적인 일들로서 애통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더 많은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육신의 일들로서 슬퍼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죽음 혹은 자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슬퍼할 수 있습니다. 혹은 여러 가지 육신의 어려움을 통해서도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혹은 어떤 관계 속에서 서러워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슬픔과 눈물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애통은 거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라면 죄로 인한 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애통한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애통하는 문제도 실제로는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로 여길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러한 빛을 비춰주셔야 합니다. 평소에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로 인식이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일은 다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애통하고 싶다고 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 구원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이라면, 애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애통할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애통 역시 우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으로 억지로 쥐어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위선적이거나 외식적인 애통도 안 됩니다. 오히려 눈물을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게 하시는 바 그 말씀에 대하여 마음을 쏟는 것,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죄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항상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위로함을 주시는데, 원문에서는 시제가 미래형 수동태입니다. 따라서 죄 문제로 애통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 모든 죄가 다 해결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는 죄 문제로 애통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원한 처소인 하늘나라에서는 더 이상 죄 문제로 애통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의 말씀이 성취가 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신학적으로 하자면 죽음을 통해 완전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며, 최후 심판이 있은 뒤 영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는 위로를 전혀 받을 수 없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비록 시제는 미래 시제이지만, 그래서 그 완성은 분명 천국에 가서야 주실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그 맛을 보게 하십니다. 바로 죄에 대하여 애통할 때 죄에 대한 용서를 확신하게 하시며,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의에 대한 열매로서 우리에게 위로를 더해 주시는 겁니다.
물론 좀 더 세밀히 보자면 의에 대한 열매가 온전한 것인가의 문제도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살피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의의 열매라 할지라도 거기에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이요, 따라서 그것 자체로는 분명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에 대한 열매를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은 자로서, 그리고 지금도 위로를 받고 있고, 또 위로를 받을 자들로서 이 땅에서 우리의 존재성이 애통하는 자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기를 지실 때 예수님 자신을 보고 우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위로가 넘친다는 것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달리 말하면 울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를 통해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