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시장에서
김귀선
왁자한 입구를 들어섰다.
이곳은 풋내기 주부 시절, 오년 동안 들락거렸던 시장이다. 어느 한 곳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뭉글거리던 감정이 세포마다 빠져나오는지 허공을 걷는 기분이다. 어깨나 옆구리를 부딪치며 지나가는 사람들까지도 정겹다.
천천히 걸었다. 맛 좀 보고 가라는 남자의 걸쭉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만두가게다. 맞은편에서는 ‘한번 먹어보이소’라며 족발가게 아줌마가 내 몸을 돌려세운다. 낯설지만 누릿한 튀김 기름 냄새도 그저 반갑다. 이곳을 다시 드나들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 아니던가.
며칠 전 동대구시장 바로 옆으로 이사를 왔고, 짐 정리가 대충 끝난 오늘 무던히도 궁금하던 시장을 와보게 된 것이다. 부지런히 물건들을 구경하지만 머릿속은 기억을 헤집기에 바쁘다. 수십 년의 세월에도 오롯이 남아 있을 곳이 어딘가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바구니에 담긴 오이, 부추, 가지 등이 둘러앉은 채소 전, 목욕탕 의자에 펑퍼짐한 궁둥이를 얹은 아줌마가 열무를 다듬는다. 그 손놀림이 재바르다.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에 대한 선택을 손끝으로 감지한다. 현실의 무게는 싱싱한 푸른 잎에 있으니, 누런 잎은 속절없이 떨어져 나간다. 마치 시간의 껍질처럼. 채소전 옆 가게는 통닭집이다. 잘 튀겨진 통닭 너 댓 마리가 진열대 위에 누워 값진 공양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정확히 이십육 년 만에 와 본 시장이다. 물이 고인 울퉁불퉁한 흙길도 포장을 드리운 지붕 낮은 가게도 사라진지 오래인 듯하다. 잘 정비된 시장과 반듯한 가게 앞에서 나는 왜 들쑥날쑥했던 옛 가게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지. 어딘가 고여 있을 지난 시간, 과거의 막을 툭 터트리기만 하면 주루룩 추억이 쏟아질 것만 같다.
떡뽁이 가게를 지나며 떡뽁이 국물을 볼 때다. 미옥이 엄마 생각이 쑥 나선다. 시어머니의 야멸찬 꾸중에 밤새 울었다는 그녀를 달래어 시장 구경이나 가자며 왔다가 처음으로 술꾼처럼 파전에 막걸리를 시켜 마셨던 곳, 그 가게 출입문으로 드리워져 있었던 포장이 불그레한 떡뽁이 국물 색이었다는 것이 새삼 떠오른다. 막걸리에 취한 두 여자가 횡설수설 수다를 떨었던 그 허름한 막걸리집은 어디쯤일까. 짐작이 가는 신발전 부근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뒷집 새댁네 문간방에 모여 뜨개질하던 날들이 몰려온다. 뜨개질 삯을 받던 날, 앞집 은지 엄마와 시장 어물전에 쪼그리고 앉아 어설픈 흥정으로 멍게를 샀던 일도 생각난다. 시장 구석마다 촉수를 뻗어 더듬어보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로 저만큼 물러나 있다. 현실과 과거의 산맥 사이에서 내 감정만 안개처럼 둥둥 떠 있을 뿐이다.
돼지국밥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옛날 그 주인일까. 둘째 딸아이를 임신했을 때 구수한 돼지국밥 냄새가 좋아 자주 찾아왔던 곳이다. 먹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던 돼지국밥이었다. 빠듯한 살림이라 혼자 외식하는 일에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 마음 편히 먹을 수 없었던 것을 눈치챘던 것일까. 가게 주인은 비워져가는 고동색 툭수바리에 말없이 국물 한 국자를 부어주었다.
시끌한 음색 속에서 어디선가 ‘선영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성은이’인 딸아이의 이름을 ‘대현동 아지매’는 발음하기 쉬운 ‘선영이’로 불렀다. ‘대현동 아지매’는 내가 세 든 집의 주인이었다. 금방이라도 그 모습이 나설 것 같아 괜히 두리번거려진다.
튀김집을 막 지났을 때다. 멍해진 얼굴로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오뎅 가게의 뭉근한 육수 냄새를 깊숙이 코로 빨아들이는 순간,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너무도 익숙한 모습을 본 것이다.
20대 후반의 단발머리 여자와 오십대 중반의 키 크고 후덕한 모습의 여자다. 중년의 여자는 갈색 안경을 꼈다. 썬글라스처럼 멋있게 보인다. 포대기 끈을 어깨에 걸쳐 맨 젊은 여자 등에는 돌배기의 여자아이가 업혀있다. 분수처럼 묶인 돌배기의 머리카락이 귀엽다. 중년 여자는 너댓살 정도의 여자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외발로 뛰며 나불대는 아이를 잡은 손을 흔들어 제지하면서도 연방 웃는다. 친정엄마와 딸네 사이인 것 같다. 그들은 채소전에서 가지와 감자 한소쿠리를 샀다. 고개를 빼고 늘어뜨린 돌배기가 침을 흘리자 중년의 여자가 손에 쥔 손수건으로 침을 닦아준다. 건어물 상에서 그들은 멸치를 샀다. 한발로 폴짝거리던 아이의 손짓을 따라 그들은 오뎅 가게 리어커 앞에 선다. 중년의 여자가 포대기속의 아이를 뽑아 안는다. 빈포대기를 허리에 감아쥔 젊은 여자는 국물을 흘려가며 오뎅을 집어 먹는다. 후후 불며 국물도 마신다. 어서 먹으라는 듯 중년의 여자는 연이어 턱짓을 한다. 돌배기의 발짓에 빨간색 쪽바가지가 엎질러진다. 오뎅 국물은 포대기를 타고 발등으로 떨어진다.
발등이 뜨끔했다. 정신이 번쩍 든다.
‘대현동 아지매’와 많이도 다녔던 동대구시장이다. 내가 여기 온 것을 알고 하늘나라에서 오신 걸까. 우리를 모녀 사인 줄 알았다던 가게주인들도 있었다. 사실을 알고는 ‘아이구 그러십니까. 보기가 좋습니다.’라며 호탕하게 웃어넘기던 건어물 가게 아저씨의 그 음성도 들리는 듯하다. 왁자한 사람들 속에 서 있자니 온갖 추억들이 뒹굴며 몰려온다. 아니 시장 전체가 추억으로 묻어있다.
파전 두 넙데기와 막걸리 두 병을 산다. 어묵 한 그릇과 떡볶이, 순대도 산다. 주렁주렁 손에 걸린 검은 봉지들을 본다. 푸짐하다. 그 시절의 난간이라도 잡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물건보다 더 많은 기분을 살 수 있는 곳, 해거름이 내리는 시장을 돌아 나오는데 가게마다 걸린 불빛이 지금의 내 마음인 양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