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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에프 러시아 (Kievan Russia)
<키에프 러시아의 영역>
기독교 세력이 발트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발트해의 동부 지역에는 또 다른 기독교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들 세력은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이었으며 과거 키에프 러시아의 후예들이기도 했습니다.
키에프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은 기독교를 믿기는 했으나 신봉하는 교리는 카톨릭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교 신앙을 믿고 있던 슬라브 족은 988년 키에프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의 통치 하에 동방정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키에프 러시아는 성(聖) 블라디미르 대공과 그의 뒤를 이은 야로슬라프 대공의 통치 하에 황금시대를 맞이했으나, 야로슬라프의 사후 명확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수많은 공국들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1054년과 1224년 사이에 키예프 러시아는 최소한 64개 이상의 크고 작은 공국들로 나뉘어졌고 293명의 대공들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며 83번의 내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의 남부 스텝 지역에 투르크 계 유목민족인 폴로베츠 족(= 쿠만 족)이 들어오면서, 약 150년 동안 러시아의 공국들은 그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쿠만 족의 발흥으로 남쪽 지역의 교역로가 위협 받아 경제적인 지장이 초래되었고, 게다가 분열된 러시아의 각 공국들과 쿠만 족과의 합종연횡은 이 지역의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쿠만 족에 패배한 러시아 군대 – 이고리 원정기의 한 장면의 묘사>
한편 키에프 러시아는 발트 지역의 이교도들과는 습지와 황무지로 인하여 지리적, 종족적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전쟁과 교역, 동맹 등으로 그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13세기 초반에는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의 동부지역에 키에프 러시아 공국들의 속령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속령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 자극을 주어 통치체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단적인 예로 통치자를 뜻하는 리투아니아어 발디미에라스(valdymieras)의 어원은 다름아닌 키에프의 대공, 성(聖) 블라디미르(Vladimir)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3세기의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키에프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은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237년부터 1240년까지 가공할만한 몽골 족의 침입은 러시아의 중심지를 강타하여 황폐화 시켰으며, 그 이후 남쪽의 초원지역에 눌러 앉아 슬라브 족에게 타타르의 멍에를 씌웠던 것입니다.
<몽골 기병 –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노브고로드나 민스크와 같은 북서부 러시아의 일부 지역은 몽골 족의 침입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스로 살아남은 러시아의 동방정교도들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고, 키에프를 상실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던 구심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강력한 공국들은 거의 사라져버리거나 약화되었고, 몽골 족의 위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약화된 옛 키에프 러시아의 생존자들은 서쪽으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에도 직면해야 했습니다.
민스크를 비롯한 현 벨라루스 지역의 서쪽에서는 새로운 강자, 이교도 리투아니아 인들이 민다우가스(Mindaugas) 대공의 지도 하에 뭉쳤습니다. 리투아니아의 통합은 튜턴 기사단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모기티아가 아니라 러시아 공국들과 접경한 아우크스타이티아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것은 그 이교도 팽창주의자들의 야심이 서쪽보다는 동쪽으로 분출되기가 더 쉬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당장 1220년부터 뜸해졌던 리투아니아 인들의 습격은 1238년부터 다시 늘어나게 되는데, 그 대부분이 러시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불완전한 통합이 야기한 그들의 혼란스러운 내부 정세와, 튜턴 기사단으로부터 가해지는 광신적인 위협 만이 리투아니아 인들의 야욕을 지연시킬 수 있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항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향후 약 2세기 동안 러시아를 겨냥하여 이루어지는 그들의 확장은 지연은 될 수 있었지만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1240년의 시점에서 리투아니아의 야망은 수면 위로 빙산의 일각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전성기 (15세기) - 튜턴 기사단에게 침략당하면서도 2세기 동안 러시아 영토를 집어삼킨 결과가 저렇다.>
한편 노브고로드를 중심으로 한 북부 러시아의 서쪽에서는 십자가를 앞세운 카톨릭 세력이 점진적으로 동진하고 있었습니다. 핀란드 방면에서는 스웨덴 인들이, 에스토니아 방면에서는 덴마크인들과 독일인들이 종교적, 정치적, 상업적인 이해관계에 있어서 러시아 인들과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1238년 초 때이른 해동으로 인하여 몽골 족의 침입을 간신히 모면했던 노브고로드는, 그 대신 서쪽에서 진격하는 이들 서구 세력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1240년 네바 강의 전투부터 1242년의 페이푸스 호수의 전투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분쟁은, 새로운 영웅의 등장과 함께 앞으로 러시아 인들의 자부심을 고양시켜주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주게 되었습니다.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포스터>
그렇다면 이 어려운 시기에 발트 십자군과 맞서 싸우게 된 노브고로드는 과연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2) 위대한 노브고로드 (Veliky Novgorod)
신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브고로드는 동 슬라브 족이 세운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였으니 그 기원은 9~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러시아 북서부의 침엽수림과 습지대 속의 볼코프(Bolkhov) 강변에 세워진 이 도시는 옛 루스 족의 교역거점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기후와 토질 상 농업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대신 배후지에는 밀랍, 꿀, 생선, 아마포, 모피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산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도시는 발트해에 인접하고 있었고 내륙으로 이어지는 수로에 연결된 위치였으므로 상업을 위한 입지조건으로서는 매우 좋은 편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의 시장(市場)>
노브고로드는 원래 키에프 러시아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첫 번째 대공은 다름아닌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Vladimir the Great)였으며, 그가 러시아의 대권을 차지한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현명한’ 야로슬라프(Yaroslav the Wise)에게 노브고로드의 대공 직을 물려주었습니다. 이후 12세기 중반까지는 루릭 혈통의 대공들이 노브고로드를 통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2세기 중반, 노브고로드 대공이었던 프세볼로드 므스티슬라비치(Vsevolod Mstislavich)에 이르러 변화하게 됩니다.
그는 1117년 키에프 대공으로 즉위한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브고로드의 대공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주변의 핀 족들과 싸웠고, 한편으로는 도시 안팎에 여러 교회들을 건설했으며 러시아 최초의 상인 길드를 인가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통치하였으나, 그의 입지는 1132년에 키에프 대공이 사망하면서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페레슬라블(Pereslavl)로 가서 대공위에 올랐는데, 그는 예전에 노브고로드에서 죽겠다고 서약한 적이 있었으므로 노브고로드 인들에게 배신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1133년, 그는 노브고로드 군대를 이끌고 에스토니아를 공격하여 유례프(Yuryev, = 타르바타, 타르투, 도르팟)를 차지하였지만, 1134년 블라디미르-수즈달(Vladimir-Suzdal) 공국을 상대로 한 군사행동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노브고로드 인들에게는 이 실패가 그의 우유부단함 탓으로 비쳐졌습니다.
대공의 권위 하락과 함께 이런저런 약점들이 두드러지게 되자 마침내 노브고로드 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1136년 5월 28일, 그는 가족들과 함께 노브고로드의 크레믈린 안뜰에 유폐되었으며 이후 도시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노브고로드는 일종의 특수한 공화정으로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프세볼로드 므스티슬라비치 – 노브고로드에서 추방된 후 프스코프에서 대공으로 모셔졌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국정은 베체(Veche)라고 하는 민회와, 이 민회에 의해 임명되는 포사드니크(Posadnik)라 불리는 시장, 트이샤츠키(Tysyatsky)라 불리는 민병사령관 겸 사법 및 상업 관리, 주요 귀족들과 노브고로드의 대 주교로 이루어진 위원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민회인 베체는 노브고로드 시민이면 누구나 성 소피아 성당의 종을 쳐서 소집할 수 있었습니다. 베체가 소집되면 귀족(Boyar, 보야르)들과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하는 노브고로드 시민 전체가 모여 국정을 논의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찬성이냐 반대냐를 놓고 외치는 소리가 마치 싸우는 소리같이 들렸다고 합니다. 베체에서는 노브고로드 시의 관리들을 선임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노브고로드의 대공직까지 승인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체가 시(市)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의 권한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프스코프 시에서 열린 베체>
노브고로드는 실제로는 공화정체이면서도 필요하면 군주를 모신다는 특이한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괴이한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노브고로드 대공을 선택하고 폐위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노브고로드 대공은 노브고로드의 시장, 즉 한 명의 포사드니크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브고로드의 실권은 주로 상인 귀족들로 이루어진 시장단(市長團, Posadniks ”포사드니크들”)과 집행위원회가 쥐고 있었고 노브고로드 대공이 폐위되는 일도 잦았기 때문에, 노브고로드 대공의 역할은 일단 ‘전시(展示)된 후 폐위’였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대공의 권력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노브고로드 인들이 대공 자격으로 모셔오는 귀족들은 키에프 러시아에서 주도권을 잡고 위세를 떨치는 대공이나 그들의 자제였습니다. 노브고로드 대공직은 그때그때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의 정치적 동향에 따라 주의 깊게 선정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노브고로드 인들은 대공의 강력한 권위 아래에서 보호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전시된 후 폐위되는 역할치고는 사법적, 군사적 권한도 무시 못할 정도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가문이 노브고로드의 대공 직을 지속적으로 세습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으며, 일단 노브고로드 시민들의 눈 밖에서 벗어나면 대공직위를 반납하고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독재자는 물러가라!” – 추방당하는 노브고로드 대공과 그의 일가족.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대공의 정체는…>
어쨌거나 노브고로드 대공의 역할은 공화국의 얼굴 마담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들은 키에프 러시아의 시조인 루릭(Rurik) 혈통의 귀족 권위로써 여러 분쟁들의 사법적 중재와 해결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외부적으로도 공화국의 안정적인 외교관계 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노브고로드 대공에게는 특히 중요한 역할이 한 가지 기대되었는데, 그 것은 바로 군사 지도자로서의 임무 수행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 대공과 그를 수행하는 드루지나(Druzhina)들은 공화국 군대에 유능하고 숙련된 지휘관을 제공해 주었고, 그들 자체만으로도 유용한 군대였습니다. 노브고로드의 대공은 공화국 군대의 총 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시민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수 있는 그런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3)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확장과 스웨덴과의 분쟁
이러한 체제 아래 노브고로드의 세력은 점차 확장되어갔습니다. 중심지인 노브고로드 시는 인구 3만명의 상업 거점으로서 번창하였으며, 스타라야 루싸(Staraya Russa), 라도가(Ladoga), 토르조크(Torzhok), 오레셰크(Oreshek)와 같은 도시들이 공화국 영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그 남쪽에는 노브고로드의 형제 도시이면서 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프스코프(Pskov) 시가 있었습니다.
노브고로드의 서쪽에는 호전적인 발트 민족들이 있었고 남쪽에는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이 있었으나 북쪽과 동쪽으로는 핀-우그르 계열의 수렵민들이 흩어져 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의 대담하고 돈에 굶주린 상인들은 특산품들, 특히 이득이 많이 남는 모피의 산지를 찾아서 미 개척의 침엽수림 지대를 누비고 다녔으며, 특산품을 구할 수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노브고로드의 상업거점이 건설되었습니다.
<키에프 러시아의 여러 나라들 – 노브고로드 공화국(Republic of Novgorod)의 영역이 붉게 표시되어 있다.>
그 결과,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향력은 서쪽으로는 발트해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우랄산맥 부근까지 뻗어갔으며 북쪽으로는 북극해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영역은 현대 시대의 영토개념과는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으며, 실제로는 노브고로드의 영향력이 느슨하게 미치는 일련의 거점들이 드문드문 흩어진 상업 네트워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의 점진적인 확장에는 동방정교의 포교가 수반되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지역들에 대한 슬라브 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외국으로 나가는 노브고로드의 선단 - 이반 빌리빈의 일러스트>
순조롭게 확장되어가는 듯이 보였던 노브고로드의 거대한 상업제국은 12세기 중반 경 동진해 오고 있던 스웨덴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1142년, 발트해상에서 노브고로드의 상인들이 탄 선박이 스웨덴 군선들의 공격을 받아 15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164년에는 스웨덴 함대가 라도가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노브고로드 인들도 카렐리아(Karelia)의 핀 족들과 연합하여 스웨덴 본토에 대한 일련의 해상습격을 감행하고 시그투나(Sigtua) 시를 파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13세기가 되면서 스웨덴 인들은 아직 내부적으로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여 정세가 불안정한 상태였으나 그 와중에서도 발트해 동부로의 진출 시도는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발트해 북부 연안에서는 노브고로드 인들과 스웨덴 인들 사이에 간간히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고, 보다 남쪽에서는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발트 십자군 운동에 발맞추어 에스토니아 지역에 개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노브고로드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주요 장소는 핀란드와 그 연해였습니다. 12세기 중반경부터 시작된 스웨덴의 핀란드 진출은 13세기에 들어서도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들 스웨덴 세력은 카렐리아에서 발진하여 서진을 시도하는 동방정교 노브고로드의 세력과 부딪혔던 것입니다.
<북동유럽의 주요 세력들 (1240년)>
1221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핀란드의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통하여 핀란드의 카톨릭을 위협하는 야만족들에 대한 교역 제제를 인가하였습니다. 당시 서한에는 “야만족”이 대체 누구인가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1229년에 제제 조치가 확장되었을 때에는 특별히 “러시아 인”들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제제 조치는 핀란드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노브고로드 인들이 뤼베크, 비스비, 리가 시에서 교역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교황은 리보니아의 검의 형제단으로 하여금 핀란드의 카톨릭 세력을 수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 반항아들이 교황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는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스웨덴 인들에게 있어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핀란드에서의 스웨덴 권력기반 및 발트해 교역에 대한 경쟁자였습니다. 1221년, 혹은 1229년 노브고로드에 대한 교역 제제 조치는 형식상으로는 핀란드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스웨덴 세력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1240년 스웨덴 함대의 노브고로드 침공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4) 네바 강의 전투 (1240년 7월 15일)
<네바 강의 전투 - 19세기 보리스 초리코프의 삽화>
* 이 전투에 대해서는 왕마귀 님이 본 게시판에서 작성하신 4993번 글에서도 다루고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40년, 스웨덴 인들은 함대를 보내어 발트해로 흘러드는 네바(Neva) 강과 이초라(Izhora) 강의 합류점을 장악한 후 노브고로드의 주요 상업 거점 중 하나인 라도가 시를 점령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라도가 시 (1911년)>
이 소식은 노브고로드의 대공이었던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Alexandr Yaroslavich)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는 블라디미르 공국의 대공인 야로슬라프 2세의 넷째 아들로서 1236년에 노브고로드 대공직에 즉위한 상태였습니다. 1240년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9살이었습니다.
곧바로 노브고로드 대공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라도가의 민병대와 힘을 합쳤고, 1240년 7월 15일 대공이 지휘하는 노브고로드 인들은 스웨덴 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노브고로드 인들은 대략 20여명 정도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스웨덴 측의 피해 규모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휘관과 주교를 포함하여 수 많은 전사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합니다.
네바 강의 전투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이후 스웨덴 인들은 1256년까지 더 이상 노브고로드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스웨덴 본국은 1248년까지 실질적인 내란상태에 있었으므로 추가적인 원정대를 보낼만한 여력은 없었던 것 같으며, 그들은 대신 핀란드의 정복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교회 - 전투지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노브고로드 인들에게 있어서 이 승리는 경축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노브고로드 대공은 오랜 숙적이었던 스웨덴 인들을 격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2년 전 몽골 군의 진격으로 패닉에 빠졌었던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승리의 지휘관,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에게는 그가 승리한 네바 강의 이름을 따서 “네프스키”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이제 그는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네프스키, 줄여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Alexandr Nevsky)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인들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노브고로드의 서쪽에서는 또 다른 강적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독일인과 덴마크인으로 이루어진 발트 십자군의 진격으로 인하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공의 리더십과 노브고로드 인들의 단결력은 다시 한번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타타르의 멍에는... 적어도 모스크바만은 절대적인 예외죠...
오~~ 역쉬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습니다 노고가 대단하십니다 혹시 참고문헌이나 사이트를 아시는지요
참고자료 올렸습니다. 댓글을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역쉬 블라디미르라든지... 네프스키라든지... 이름부터가 약간 포쓰가 풍기는듯...
감사합니다. 왕마귀님의 네바강 전투를 읽고나서 이쪽 역사도 상당히 궁금했더랬습니다. 실은 이쪽에 대한 공상은 로버트 하워드의 "코난'시리즈 때부터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네바강 전투를 읽을 때도 코난이 오버랩되더군요. ^^ 북유럽은 다 좋아요! floyd 님 글의 짜임새가 대단하세요. 첨보다 상당히 자연스러우면서 탄탄해졌었요.
연재글을 쓰는 건 거의 처음인지라 많이 어렵네요.^^ 여기저기서 글을 잘쓰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ㄷㄷ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도 뭐 사실 타타르의 칸에게 굽신굽신 하긴 했지만 ㅡ.ㅡ;
너무나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노보고르드가 공화국이라는것밖에 몰랐는데 이 글 덕분에 정말 많은것을 배우고 가는군요...
Floyd님 발트십자군 시리즈 넘 조아용. 다음편 빨리 나오길 희망해요 ㅋㅋ
노브고로드도 마지막의 쫓겨나고 죽임을 당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