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허리에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명소가 있다. 적어도 최근 30여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경남 하동군 삼정마을 옆 설산습지. 설산(雪山)에 습지라니! 국토의 명산, 지리산의 신비에 탄복하며 설산습지를 찾던 날 촉촉한 가을비가 내렸다.
비밀의 숲을 가다
지리산 끝 마을 삼정마을로 향하는 길에 가을비는 후둑거려도 청량감은 가득했다.
대한민국에서 공기가 가장 깨끗하다는 의신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설산습지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설산습지까지 약 1km. 단풍 숲길과 청아한 계곡물 덕분에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30여 분 오르다 보면, 마치 신선들이 심어놓은 듯 고풍스러운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지리산국립공원 해발 750~760m 설산습지로 안내하는 길잡이 나무다.
탐방로에 들어서면 약 3000m²크기의 설산습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탐방로가 습지보다 높아서 전체를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이다. 길 따라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곳곳에서 동화 같은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나지막한 물소리는 저음이 되고 습지 사방팔방에서 들리는 새소리는 높은 음을 맡아 조금 전 만났던 신선들의 놀이터에 슬그머니 끼어든 느낌이다. 그저 신비롭다 말할 수밖에!
지리산의 여섯 번째 습지인 설산습지는 희귀한 식물 생태계는 물론, 멸종 위기 2급 곤충 ‘꼬마잠자리’ 등 평소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감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곳 탐방로는 나무 데크로 꾸며서 걷기에 편하고, 큰 습지뿐 아니라 작은 웅덩이 같은 습지들도 볼 수 있다. 동전 크기의 앙증맞은 꼬마잠자리까지 만난다면 대~박이다.
설산습지가 형성되기까지
설산습지라는 이름은 지금은 사라진 ‘설산마을’에서 따왔다. 설산(雪山)은 히말라야 산맥처럼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있는 만년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곳은 눈을 구경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설산이 되었을까?
양민호 생태해설사는 “부처님이 수행하신 곳이 히말라야 산맥이었어요. 고려시대 당시 숭불정책을 펼쳐 스님들의 지위가 아주 높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아마도 지금의 의신마을 주변에는 수백 개의 암자와 사찰이 세워져 있었고, 그 스님들이 모여 마을 이름을 정했을 거예요. 부처님이 히말라야 설산에서 수행하셨으니,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수행하자라는 뜻으로 설산마을이라고 지었을 거라고 추정하죠. 그리고 그 설산마을 바로 옆에 습지가 있어 설산습지라고 붙여졌죠”라며 유래를 설명했다.
습지로 가는 길에 곳곳에 보였던 평평한 터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아마 그 시절 사찰이나 암자 등에 살던 스님이나 절 살림을 살던 사람들의 농토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이런 텃밭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빗물에 쓸려온 토사와 물이 고이면서 습지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이 만든 대형 맨홀처럼 생성된 습지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키움으로써 하나의 독립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설산습지에는 421여 종의 동물과 824여 종의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과 어린 치어들이 상생하고 외부로부터 공격에서 벗어나 산란의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또 가뭄과 홍수를 조절하는 자연적 스폰지 역할도 하고 있다.
양 생태해설사는 “이렇듯 물의 라이프 사이클을 통한 생식 환경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 그리고 연구나 교육의 장으로 널리 활용될 수 있기에 개발보다는 보존의 가치가 더욱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라며 습지 보호를 강조했다.
내년부터 ‘산소 샤워 힐링 여행’ 시작
하동군은 지난 8월 개방 때부터 설산습지의 환경보호의 가치를 알리는 데 집중해 왔다. 설산습지의 자연스런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수명이 긴 나무로 바닥을 깔아 탐방로를 만들었다.
내년부터는 ‘산소 샤워 힐링 여행’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최근 경상남도 대표 생태관광지로 지정된 탄소 없는 마을(목통, 범왕, 오송, 단천, 의신마을) 가운데 의신마을에서 설산습지(산소샤워길·3.5km)까지 걷기와 칠불사 템플스테이, 섬진강변 걷기, 힐링푸드 체험 등을 마련했다.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 시범운영에서는 관광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닫혀 있던 설산습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생태계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귀중한 천연자산이다. 설산습지가 주는 혜택만큼 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책임도 무거워졌다.
글 배해귀 기자 사진 이윤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