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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수원교구 역사 |
“교구민과 함께 호흡한 역동의 역사” |
[가톨릭신문 2009-04-05] |
교구 설정과 정착
1960년대 초. 여러 차례의 교구 분할에도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목 관할 구역이 넓은데다가 경기도 남부 지역의 교회 발전이 예상되자 이 지역에서 사목하고 있던 성직자들은 1962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에게 교구 분할을 건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주한 교황 사절 주디체 대주교가 수원을 시찰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63년 10월 7일 마침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수원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돼 한국인 성직자 교구로 설정됐으며 초대 교구장은 당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사무국장이던 윤공희 신부가 임명됐다. 교구는 한국 교회의 열 번째 교구이며 8 15 광복 후 설정된 교구 중 두 번째 방인교구였다. 설정당시 교구 현황은 1개 시와 10개 군, 본당 24개, 공소 205곳, 사제 28명, 신학생 57명, 수도자 44명, 신자 수는 42,548명이었다.
당시 교구는 농촌이 대부분이고 방인 사제로만 구성되어 있어, 외부의 지원이 없고 경제적 자립도 약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를 비롯한 교구민들은 교구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7년 화서동에 교구청사를 신축해 이전했고, 같은 해 12월 28일에는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이 설립됐다. 1969년에는 수원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창립된데 이어 1971년 12월 1일에는 월보 ‘사목’을 창간했다. 동시에 교구는 평신도 교육 3개년(1972년~1974년) 계획을 수립해 실천해 나가는 한편, 1973년에는 각 본당별로 사목 협의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1973년에는 교구 가톨릭농민회가 창설됐고, 미리내성지에서 교구 설정 10주년 행사를 겸한 순교자현양대회도 열렸다.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1973년 11월 7일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됨으로써 대주교로 승품돼 10년간 몸담았던 수원교구를 떠나게 된다.
2003년 10월 19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수원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신앙대회 경축미사에서 주교단이 축복하고 있다.
교구의 안정과 변모
1974년 교구는 제2대 교구장을 맞이한다. 1974년 10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2대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김남수 주교는 같은 해 11월 21일 교구장에 착좌했다. 당시 교구 신자는 67,736명, 본당은 31개였다.
교세 성장에 따라 교구는 1976년 조원동본당을 설립했으며 이듬해 5월 18일에는 조원동 주교좌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1977년 4월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4년 만에 다시 발족됐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구산에 순교 복자 김성우 현양비가 건립되면서 성역화 작업이 추진됐다. 1980년 4월에는 M.E 수원협의회가 창립됐고 12월에는 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가 발족했다. 1981년에는 교구 ‘천지의 모후’ 꼬미시움이 레지아로 승격됐다. 같은 해 6월 24일에는 천진암에서 제1회 한국 천주교회 창립 행사가 열렸다.
1982년 5월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수원교구에 제4 대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교구는 그 해 8월 대신학교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1984년 3월 2일 ‘수원 가톨릭대학교’가 개교했다. 이에 앞서 1983년 9월 4일에는 ‘수원주보’ 창간호가 발간됐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기념하고자 교구는 1984년 9월 미리내에서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경축대회를 개최했다. 1986년 5월 10일에는 전 교구 차원의 성령쇄신대회가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6월 1일에는 교구 성체 현양대회가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각각 개최됐다. 교구 설정 25주년을 맞아 교구는 1988년 10월 9일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빛이 되어’ 주제로 교구 신앙대회를 개최했다.
1990년대 들어 신도시의 발전으로 본당의 관할 구역이 여러 차례 조정됐으며 본당 신설도 활발해졌다. 1993년 3개 본당을 신설한 데 이어 1995년 1월에는 6개 준본당을 본당으로 승격시켰으며 2월 8일에는 8개 본당이, 9월 14일에는 2개 본당이 신설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6년 1월 25일 최덕기 신부가 부주교로 임명되고 2월 22일 주교로 서품됐다.
2001년 1월 17일 수원교구 시노두스 2차 본회의가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교구의 발전과 현재
1996년 3개 본당 신설에 이어 1997년에는 정자동본당을 비롯해 12개 본당이 신설됐다. 같은 해 2월 3일에는 교구청이 화서동에서 정자동 새 청사로 이전되면서 기존 교구청사는 청소년 문화원으로 조성됐다. 1997년 6월 4일 최덕기 주교가 제3대 교구장직을 승계하여 9월 25일 착좌식을 가졌다. 또 7월 29일에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 정자동본당을 주교좌로 설정함에 따라 8월 20일 축성미사가 봉헌됐다.
최덕기 주교는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로 큰 교구로 성장한 교구 사목을 원활히 하고자 본당 신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1998년 12개 본당이 신설됐고 이듬해 1월에 6개 본당이, 2000년에는 9개 본당이 신설됐다. 아울러 각처에 분산돼 있는 순교성지에 전담신부를 임명해 성역화에 힘쓰고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사회복지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002년 10월 3일 최덕기 주교와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소공동체 봉사자대회 파견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특히 교구는 대희년을 한 해 앞둔 1999년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해 보는 교구 시노두스(대의원회의)를 개최했다. 2001년까지 2년간 진행된 시노두스를 통해 교구는 구역·반 공동체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의 두 가지 과제에 대해 교구민 전체가 공동의 합의를 이루어내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뒀다. 시노두스 최종문헌은 두 가지 의안인 ‘구역·반 공동체’와 ‘청소년 신앙생활’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으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시행세칙 또한 제정했다. 교구는 또한 2002년 1월 ‘천주교 수원교구 규정 시행’을 공포하고 사회복음화국과 성소국을 신설하는 등 교구청 편제를 개편했다. 또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2002년 10월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소공동체 봉사자대회’를 개최했다.
2003년 교구는 4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개최했으며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교구 규정집도 발행했다. 앞서 1월에는 수원교구 교회사연구소가 설립됐고 교구 양업시스템도 개통했다. 5월에는 그 해 3월 수원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된 이용훈 주교 서품식이 거행됐다. 2005년 9월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몬시뇰에 임명된 심상태, 변기영, 이정운 몬시뇰의 서임미사가 정자동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됐다.
교구는 2006년 5월 큰 변화를 맞이한다.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교령을 반포하고 교구를 수원·성남·안양·평택·용인·안산대리구 등 6개 대리구로 분할하고 대리구장을 임명했다. 이는 교구 중심 사목체제에서 대리구 중심 사목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사목 환경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2006년 대림 1주일을 맞아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7년도 사목교서를 발표하고 대리구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가정의 성화를 통해 2001년부터 시노두스 문헌을 따라 전개해 온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실현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2013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는 교구는 올해 초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4년 앞으로 다가온 설정 50주년 준비에 본격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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