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 해석은 변하고 삶은 계속된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13XX66800003
선택은 실천적인 문제이다. 이는 하루하루 우리가 영위해가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항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즉 구체적인 ‘선택상황’이 전제되는 것이다. 선택상황은 외부에서 나에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우도 있고, 내가 나의 욕구와 소망에 따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회의가 온다면, 혹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방식 자체에 불만과 회의가 생긴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택상황을 만들어 낸다.
어떤 중요한 선택상황에서 무엇을, 왜,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지만, 각 선택상황의 독특하고 복잡한 몇 가지 특성들 때문에 특히 중요한 문제일수록 판단은 늘 쉽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선택을 위해선 선택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들을 명료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서류나 자료들을 쌓아 놓고 있을 때보다 카테고리별로 분류하고 정리해 놓으면 업무를 쉽게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것과 같은 일상 속의 사소한 문제들이 아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 우리는 무척 고민스런 선택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선택 환경은 우리에게 선택을 하는 주체인 ‘나’와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요구한다.
‘선택’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할 문제는 바로 선택의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상황구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상황을 세계-내-존재라는 도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현실상황에서 육체와 정신, 즉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흐물거리는 살로 된 ‘몸’을 가진 존재로 살아간다. 삶은 육체와 정신 모두를 포괄한 살아 있는 ‘몸의 삶’이다. 몸이 선택의 주관적 측면을 이룬다면,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전체 가 선택의 객관적 측면을 이룬다.
주관적 선택은 객관적 선택상황에 의존하고, 객관적 상황은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의 주관적 상황과 나를 둘러싼 객관적인 외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서는 선택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선택의 주관적인 요소들과 객관적인 요소들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선택 구조의 논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인 인생의 시간을 놓고 보면, 어떤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단기적으로 좋은 선택이 장기적으로도 최선의 선택인지도 우리는 거의 알 수 없다. 현재 순간이 가진 객관적 의미는 현재가 아니라 먼 미래에 가서야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좋은 선택을 추구하는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또 선택의 상황 논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선택의 구조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선택의 주관적 측면에서는 선택을 하는 주체인 인간의 마음 구조와 마음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즉 선택의 기준이 되는 신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심리적 메커니즘과 좋은 의사 결정을 위한 모델에 대한 이해이다.
야수파 대표화가 앙리 마티스는 1941년 십이지장암 수술 이후 이젤 앞에 서 있는 게 힘들어지자, 자리에 앉아 혹은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색종이 오리기 작업을 시작한다. 더 이상의 작업을 포기하는 선택과 다른 가능한 작업을 시작하는 선택 사이에서 마티스는 후자를 택한다.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선택들은 시간적 제약 속에서 직관적인 판단과 선호에 따라 결정된다. 이번 주말에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 새 여행가방이나 구두를 사야 하는데 어떤 걸 살 것인가, 올 여름 휴가는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들까지 선택의 주관적인 측면과 선택 환경 전체를 분석적으로 탐색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일상적인 선택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을 돕기 위해 스펜서 존슨은 『선택』이란 책에서 좋은 선택을 위한 몇 가지 소박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선택에 관해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으며,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완벽한 결정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선택의 주관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분하고 정말로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새 차를 구입한다고 할 때, 내 욕심으로는 가장 좋은 차를 원하지만, 그 차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차는 아닐 수도 있다. 현재의 재정상태나 일에 비추어 필요한 차를 따지자면, 작고 소박한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러면 공연한 욕심이나 허영심으로 큰 차를 사서 고생하다 후회하지 않고 작은 경차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것이야말로 좋은 선택의 출발이다.
이와 더불어 필요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정직해진다는 것은, 욕망과 필요, 상황에 대한 주관적인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 선택상황 속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선택 대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여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 경차를 사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경차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각 경차들이 갖는 장점과 단점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더 좋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원함과 필요의 구분, 보다 정확한 정보의 수집을 요구하는 이런 선택 기준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유용한 선택의 기술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가 직면한 선택상황은 쇼핑이나 식사 메뉴 같은 소소한 상황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때로는 필요한 것의 기준이 아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의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 때도 많다. 보다 중요한 삶의 문제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할 때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필요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학원이 굳이 필요하진 않지만, 보다 깊은 공부를 하고 싶어 진학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선택의 주관적 측면에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들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우리는 선택 문제의 객관적인 측면들이 안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부분들을 간과하기 쉽다.
크고 작은 선택상황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 상황과 환경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무엇보다 선택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양 측면에서 좋은 선택을 방해하거나 가로막는, 혹은 제약하는 구성 요소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선택이 갖는 한계와 제약을 정확히 알 때, 더 나은 선택뿐 아니라 삶 전반에 관한 더 나은 이해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객관적 측면에서 선택의 폭을 결정하거나 제약하는 상황들의 특징과 성격, 그리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시간과 우연의 문제들에 대한 이해가 없이 삶과 선택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사실 좋은 선택을 가로막는 세 가지, 즉 주관적인 측면의 객관적인 요소인 무의식과 판단을 왜곡하는 심리적 편향들(주관적 편향들), 나의 바깥에 존재하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인 상황과 현실(선택상황), 그리고 선택의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역시 객관적인 요소인 시간(우연과 운)을 선택의 세 ‘괴물’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왜 괴물인가? 앞으로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그 세 괴물들이 우리의 삶과 선택을 많은 부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와 선택 환경 사이에서 선택 환경이라는 객관적 측면의 선택 압력이 너무 큰 탓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을 내려야 하기도 한다.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선택 상황들도 삶에서는 얼마든지 발생한다. 즉 상황 자체가 다른 선택의 여지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선택과 운명에 대한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을 잘 드러내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예로 들고 싶다. 장면 자체는 희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등장인물에게는 삶 전체가 불행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고 만다. 소설의 여주인공인 테레사의 어머니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는 아홉 명의 구혼자가 있었다. 미남자, 부자, 시인, 음악가, 좋은 가문의 남자 등등 아홉 명의 구혼자들은 마치, 한 처녀에게 상상 가능한 모든 신랑 후보감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아홉 번째 남자를 택했다. 아홉 명 중 가장 남성적으로 보인 남자였다. 하필 아홉 번째 남자를 택한 건 그녀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누면서 그의 귀에 대고 “조심해요, 조심해” 하고 속삭인 순간, 바로 그때 남자는 전혀 조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임신했고, 임신중절을 할 의사를 제때에 찾지 못한 탓에 황급히 그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지만, 결과가 행복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결과가 어떻든 만족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놓친 다른 여덟 명의 구혼자들을 계속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에 불만이 생기고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잃어버린 여덟 가지의 가능성들은 마치 잃어버린 애틋한 첫사랑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또 그런 생각을 할수록, 그녀의 불만은 더욱 반짝거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하기까지 했다. 가장 남성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던 남자는 알고 보니 여러 차례의 착복과 횡령 전과에 두 번이나 이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하나의 착오였을 뿐이라 여겼고, 남자를 증오했으며, 결국 다른 사기꾼 같은 남자를 따라 남편을 떠나고 만다. 그 남자가 남겨 준, 원하지 않는 임신의 결과인 테레사를 데리고. 한 순간의 실수로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 그녀의 삶은 그 한 번의 나쁜 선택으로 나머지 삶 전체가 불행의 종합선물세트가 되고 만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 전체, 운명을 결정지어 버린 전형적인 경우이다.
모든 선택상황 가운데 최악은, 바로 이처럼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하는 선택이다. 그런 상황은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자발성과 능동성, 선택의 자유를 박탈해 버린다. 그런 부자유한 선택은 마치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 받고 감방에 갇히는 것과 같은 불쾌함과 자괴감을 자아낸다.
테레사의 어머니는 구혼자 중 한 명과 자는 것이 예외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이며, 그런 상황은 늘 잠재적인 위험을 포함한다는 선택의 객관적인 측면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설사 그런 상황이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선택상황에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도와는 차원이 다른 객관적 상황 논리가 개입하게 된다. 선택 문제를 고려할 때 상황이나 현실, 시간과 같은 객관적인 측면을 깊이 숙고해야 이유는 객관적 상황이 포함하고 있는 힘과 무게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서 늙은 왕 리어는 효심을 시험하기 위해 세 딸들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세 딸 중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의 멋들어진 대답을 기대했던 리어왕은, 예상과는 달리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코딜리어에게 대노하여 그녀를 내치고 다른 두 딸에게 왕국을 물려준다. 그러나 결국 두 딸들에게 배반당한 채 왕국에서 내쫓기며 막내딸마저도 죽게 되는 비참한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광기에 사로잡혀 후회하지만 때는 늦었다. 선택 문제에는 이토록 가차없는 삶의 아이러니가 작동한다.
모든 객관적 상황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기회와 위험이 그것이다. 그것은 상황이 숨기고 있는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더욱 증폭된다. 우리의 선택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상황에는 개인적인 상황 외에도 특히 객관적인 사회 상황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3포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청년들의 삶의 불안정성 같은 문제가 있다. 오늘날 청년세대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경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나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높은 자살률 같은 문제는 순수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거나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구조적인 문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교통사고가 자주 나는 도로 구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다른 구간보다 유난히 사고가 잦다면 그 구간의 구조적인 문제나 결함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 운전자들의 부주의만 탓할 게 아니라, 도로 구간의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지금 한국처럼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나라는 없다. 이는 학생들의 개인적인 정신 건강 문제 때문이 아니라,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청년들의 자살, 노인들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은 개인적인 몫도 있고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책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자살자들의 유약함을 탓하고 그들에게 그런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개인들이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몫이다.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런 바탕 위에서 합리적인 경쟁이 이루어질 때에만 성패에 대해서 온전히 개인의 몫과 책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 현실과 구조에 책임이 있을 경우 먼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좋은 사회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최소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게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주고 다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사회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회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좋은 삶을 살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선택지를 넓히기 위해서는 시대와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의 개성과 가능성을 더 잘 실현하기 위해서도 이 사회에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 어떤 객관적인 가능성들이 열려 있고 닫혀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를 사고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
출처: 마이크로인문학3-선택 선택의 재발견 | 저자 김운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