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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판소리의 고장에 왔으니 판소리에 관해서도 알아보고 갈까요?
고창읍성 입구에는 ‘동리국악당’ 있다. 이곳은 그동안 계통 없이 멋대로 불러 오던 광대소리의 가사를 정리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판소리사설문학을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고 국악계승과 발전을 위해 1988년에 건립하였다.
또한 고창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판소리박물관이 있는데 이러한 노력들이 합한 결과, 판소리는 우리 역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우리 문화의 정수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약칭 ‘세계무형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강릉단오제 등과 함께 지정되었다.
판소리는 백성들의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짓눌린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새로운 사회와 시대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두루 즐기는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이다.
판소리를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서로의 생각을 조절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조절과 통합의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판소리는 다양한 전통 예술로부터 필요한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종합하는 개방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말의 표현 가능성을 최대치로 발휘한 민족적인 표현방식으로 인류 보편의 문제점에 접근하는 예술로 승화시켜 민족문화의 전통 계승과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창), 아니리(말), 너름새(몸짓)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소리’는 ‘음악’을 말하고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도, 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전승되어 지역적 특징에 따른 소리제를 형성하고 있다.
영화 ‘서편제’를 통해서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히 알려져 있듯이 전라도 동북지역의 소리제를 동편제(東便制)라 하고, 전라도 서남지역의 소리제를 서편제(西便制)라 하며, 경기도와 충청도의 소리제를 중고제(中古制)라 한다. (자료참조:http://www.cha.go.kr ‘문화재정보센타’에서 부분발췌) |
고창 상갑리 고인돌군
고인돌이란 말은 ‘굄돌을 가지고 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인돌과 일반 돌을 일차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 선조들은 거석에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정령을 숭배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인돌을 만들었다.
고인돌은 한 곳에 수 십 기가 무리지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상갑리 고인돌군이다.
이곳 고인돌군은 약 2500여 년 전부터 500여 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 묘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선산이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혈연으로 이어지는 집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혈연으로 형성된 집단은 조상숭배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조상 숭배는 생명력과 불멸의 의미가 있는 고인돌을 통해 나타냈다고 본다. 오늘날에는 고인돌의 기능을 보다 다양하게 보고 있다. 고인돌은 대부분 혈연집단의 무덤이지만, 혈연집단의 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도 보고 있다.
고인돌은 드물게는 산의 높은 위치에 자리하기도 하나 주로 해안이나 강을 따라 그 옆 또는 약간 높은 구릉위에 놓여 있다. 고인돌이 가장 밀집하여 분포되어 있는 전라도지방의 경우 대체로 해안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해안가에 자리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보다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온 지역의 하천 등을 따라 분포한다.
전북지방의 경우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고창, 부안, 김제, 군산 등에 비교적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고 동부 산간지역인 남원, 정읍, 장수, 무주 등지에도 고인돌이 분포한다.
이처럼 도내 거의 전지역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나 분포의 중심은 고창군이다. 특히 전라북도내 다른 지역과 달리 고창군의 고인돌은 군집을 이루는 경향이 강하며 그 군집의 규모도 10여기에서부터 죽림리 일대에서 파악되는 바와 같이 수백 기에 이른다.
상갑리 고인돌군의 분포된 입지를 살펴보면 고창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내에 분포되어 있다.
매산 마을은 화실봉(표고400m)의 봉우리로부터 서남을 향하여 활 모양으로 뻗어 내리는 산 지맥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주진강 상류인 고창천이 가로 흐르고 있으며, 마을 뒷산은 말안장 모양의 지형으로 그 서방은 섬틀봉(표고158.6m)이라는 삼국시대의 산성이 있는 봉우리가 있다.
죽림리 및 상갑리 일대의 고인돌은 1965년 국립박물관에 의해서 3기가 발굴 조사된 이래 1990년 전라북도와 원광대학교의 주관으로 3개월에 걸친 현지조사에 의해 447기가 조사되었으며, 파괴 매몰된 108기를 합하면 550여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사이전의 파괴된 기수를 합하면 대략 1,000여기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인돌을 살펴보면 탁자형 고인돌 3기, 바둑판형 250기, 지상 석곽형 45기 등 무려 447기의 고인돌이 다채롭게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의 모양도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해서 고인돌의 변천사는 물론 그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토록 가치가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라 뭔가 큰 기대를 가지고 간다면, 어쩌면 조금은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평범해 보이는 논밭 한가운데,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드문드문 박혀있는 커다란 돌들.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그 풍경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상상력이 아닐까.
선사시대의 부족들이 그들의 족장을 추모하며 그 거대한 돌을 옮겨 세우고 있다고 잠시 상상해보라~ 그 엄숙함과 그 땀방울을. 그렇게 신성한 역사의 현장이 지금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신비롭고 으슥한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크기 또한 1m 미만에서 최대 5.8m에 이르는 것까지 다양하다. 변변한 도구도 없었을 시대에 이 커다란 돌을 움직이기 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알 수 없는 역사의 수수께끼 앞에서 그저 묘한 기분으로 거대한 돌 위에 손을 얹어보니 왠지 모를 미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오래 머문 햇살의 흔적일까, 이 또한 상상력의 힘일까. (내용은 http://culture.gochang.go.kr에서 부분 발췌)
고창 선운사(禪雲寺)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자리하고 있다. 도솔산을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그 위세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선운사는 여전히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자리매김 된다. 다시 말해 앞서 우리가 갔던 개암사와 내소사 모두가 선운사의 말사이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한다. |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운사의 중심전각인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 때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 1613년(광해군 5)에 중수한 것이다. 편액에 ‘大雄寶殿’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형식 맞배지붕 건물로서, 측면에 공포가 없는 대신 기둥 두 개를 높이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 뒤 폭은 오히려 좁아서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편액과는 달리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협시로 모시고 있다. 역시 원칙대로라면 지혜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기 때문에 ‘대적광전’이라 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여전히‘대웅보전’이다.
건물 뒤쪽의 처마는 간략하게 처리되어 앞뒤 처마의 모습이 다르며 벽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널빤지 벽이다.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고 단청벽화가 매우 아름답다. 조선 중기의 건축답게 섬세하고 장식적인 구성과 빗살여닫이문이 화려한 건물이다.
이밖에도 선운사에는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이 있고, 영산전목조삼존불상ㆍ육층석탑ㆍ범종ㆍ만세루ㆍ백파율사비를 비롯하여 석씨원류ㆍ선운사 사적기 등이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ㆍ장사송ㆍ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