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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1월12일(日)晴
▲낙동정맥종주16구간(시티재~한무당재)*사진50컷
해봉(25명)
제16구간 : 경북 영천시, 경주시
♠참 고
▶영천시[永川市]
고경면[古鏡面]
면적 120.55㎢, 인구 7,753명(2001)이다.
동쪽으로 경주시, 남쪽으로 경주시 및 북안면(北安面),
서쪽으로 동부동(東部洞), 북쪽으로 임고면(臨皐面)에 접한다.
30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 전역이 태백산맥의 말맥(末脈)으로 둘러싸여 산지가 대부분이고,
면 중앙부를 동서로 흘러 금호강(琴湖江)에 합류하는 고촌천(古村川)의
하곡부에 좁은 저지가 분포한다.
경지율은 낮은 편이며, 쌀·보리의 주곡작물 외에 고촌천 연변의 범람원을
중심으로 사과재배가 활발하다.
교통은 의성~포항 간 국도가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질러 대구광역시· 포항시·
경주시 방면으로 연결된다.
남동쪽의 덕정리(德井里)에 있는 황수탕약수는 위장장애 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문화재로는 전금강성장군 황보능장묘(경북기념물 51), 금강산성(金剛山城),
대의리 성지 (大儀里城址), 손덕심묘(孫德沈墓), 파계리 봉수(巴溪里烽燧) 등이 있다.
朝鮮時代에는 현재의 고경면 소재지 해선리를 중심으로 동북부지역의 古村面과
서남부지 역의 追谷面이 있었고 1914년 3월1일 부령 제11호(1913.12,29공포)의 府郡面
직제의 폐합 등에 따라 고촌면에 전사리와 북안면의 차당리 등이 일부 병합하면서
淸境面이 1934년 4월 1일 古村面과 淸境面이 통폐합하면서"古" 字와 "境"字를 합쳐서
古境面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것으로 알고 있다.
▶안강읍[安康邑]
♧산행코스 (16차)
10시05분 시티재
10시43분 호국봉
11시25분 철조망 갈림길
12시24분 야수골 네거리
13시04분 송전철탑
13시40분 어림산
14시38분 마치재
15시13분 남사봉
15시45분 한무당재
총5시간40분
♧사진은 오 지호 대원이 촬영했습니다.
♧참여 대원(25명)
대장 : 김성수, 하종관(후미담당)
김윤근, 김두호, 김 신, 남상기, 신철호, 오지호, 윤말순,
이승우, 이혜년, 이종원, 이진복, 조성철, 조숙희, 최철식,
최금영. *강형태, 김형태, 이미경, 그 친구, 임경애, 회장부인
권무길, 김영철,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넘고 지나가는 산과 재, 마을의
지명유래를 알고자 하는 건 옛 조상님들의 정과 한스러운 삶을
되돌아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발 전에 문헌과 국립지리원의 도움을 받는데 그게 여의치
못하면 해당 지방행 정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의를 합니다.
이번에도 경주시청과 영천시청 홈페이지를 찾아 문의, 영천시청은
고경면에 계시는 최상 진님, 경주시청은 현곡면의 김영조님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히고 특히 최상진님의 친절 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 들어 첫 낙동정맥(16차) 종주, 맑고 따뜻한 날씨. 그래도 무릎보호대
를 하고 스틱 과 겨울장비를 챙겨 바쁘게 집을 나섭니다.
새로 취임한 조회장님의 산악회의 밑거름이 되겠다는 의욕적인
새해인사와 같이 봉사하 는 마음의 각오가 대단해 부부가 참여했고,
부회장 강 형태님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뜻밖에 그동안 뜸했든
R대원이 먼저 승차해 앉아있습니다.
영락공원 입구에서 고정멤버 네 대원이 승차하고
부산T/G에서 귀고리 이 미경대원의 친 구 분이
처음으로 승차, 모두 25명,
김 대장의 산행안내방송을 마치고 지난 15차 산행 시 촬영한
비디오를 보며 달리다 언양휴게소에 들렸다 백암산에 간다는
이 정호 대장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하 군에게 여분의 캠코더를 인계하면서
만약을 생각해 마치재에서
촬영하라고 당부합니 다.
경주I/C에서 7번 국도를 빠져 달리다 28번 국도의
옛날 소달구지가 넘든 시티재,
이젠 콘크리트 마당으로 변한
안강휴게소에 도착한 게
9시57분, 간이 배낭에 먹거리와 아이젠,
오리털 조끼를 넣고 하차합니다.
인원파악과 상견 례를 마치고
10시5분, 도로 건너편으로 출발하는데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위험한 건너기는 예상 밖입니다.
영천시 고경면 경계 간판,
4차선 고속국도에 좌우로 쌩쌩 소리를 내며
꼬리를 물며 각종 차량이 질주하는데
대원들이 마치 백사장의 게 떼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2차선도로를 건너고 1m가 넘는 중앙분리대를 넘고
다시 오른편을 살펴 2차선을 건너는 걸
촬영하는 나도 어쩔 수 없이 한 무리가 되어
위험을 감수합니다.
앞으로 수많은 낙동정맥 종주자가
이 코스를 건너야 하는데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촬영하며 시그널이 붙어있는 7,80cm 높이의 옹벽을 넘어
오, 하 대원과 왼편으로 비스듬 히 올라가는데
그 사이 앞사람은 보이지 않고 마냥 걸어가다
길이 수상해 되돌아 나옵니다.
오른편으로 꺾어져 올라가는
시그널을 살피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고 보니 뒤따라 도착해 출발하든
대구 종주대가 우리 후미를 앞질러 간 샘입니다.
10시17분, 묘지를 지나 계속 낙엽 덮인 완만한 오름에
10시24분, 작은 바위 길을 지나칩니다.
다시 무덤을 지나 내리막길,
나뭇잎이 살랑이는 남실바람이 불어
산행하기에 알맞은 날씹니다.
10시28분, ‘한국통신 송신중계'철탑과 마주칩니다.
왼편으로 돌아가니
오른편으로 좁은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보입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6.25때 치열한 동족상잔의 전투시에
산화한 영령을 모신 영천호국원 (총6710기 안장)의 현충탑과 영천대첩비탑이 보입니다.
(영천호국원을 클릭하면 들어가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낙동정맥 종주자가 지나쳤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빽!!"
소리만 남긴,
이, 한 맺힌 이들의
넋을 위로했을까요?
오늘의 이만한 물질적인 풍요와 자유도
이들의 값진 희생의 산물인데...
필자도 그냥 탑이 있느니 하며 나뭇가지사이로 촬영만 했을 터인데
영주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지명유래를 문의하면서 알게 된
고경면(古境面)에 계시는 최상진님의 친절한 설명으로 겨우 알게 되었고
좀 후에 넘게 될 호국봉의 지명도
어느 뜻있는 분이 적절하게 명명했다고 여겨집니다.
10시43분, 작은 말뚝에 하얀 페인트를 정성들여 칠해
‘護國峰’
다른 면에는
‘海拔三四0m'라고 써놓았습니다.
작지만 경건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촬영하고
사방이 잡목으로 가려 답답한 조망처럼
아직도 뼈아픈 역사, 그들의 소중한 목숨의 대가를 못 받고
상흔이 아물기는커녕 북쪽의 자살 핵을 무기로 위협하는
새로운 위기감속에 설마와 불안이 꿈틀 되는
우리현실을 절감,
허공에 떠돌 영령들을 위로하며
그 자리를 떠납니다.
10시45분, 묘지를 거쳐
오른편 2시 방향으로 고경저수지가 길게 보입니다.
완만한 오르막 끝에
10시48분, 정성스럽게 쌓아놓은 383봉 돌탑에
10여개의 시그널이 전시회를 연 듯
울긋 불긋하게 매달려 있는 작은 봉우리에서
잠시 뿌연 공기 속에 주변을 시원하게 조망하다
오른편으로 꺾어져
가파른 내리막을 타며
앞으로 지나갈 능선과 멀리
넘어갈 어림산을 촬영합니다.
10시57분, 잘록이에 내려
잡목 숲 속 길을 가다
특이한 삼지 참나무를 발견하고
완만한 오름을 탔다가
좌로 꺾어져 내림을 타고 무덤을 지나
11시2분, 오름의 턱에서 급 내리막을 타는데
오른편 잡목가지사이로
고경저수지가 보다 가깝게 보입니다.
가장자리가 얼었는지
아이들이 썰매 타며 놀고 있는 모습을
캠코더의 줌렌즈로 촬영하고
낙엽 덮인 8부 능선의
등산로를 따라 내려갑니다.
11시15분, 가벼운 오르막에서
갑자기 하 군이 재킷을 도중에 두고 왔다며
배낭을 벗어놓고 찾아오겠다며
먼저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의 체력과 등산력을 알기 때문에
부담 없이 천천히 오르막을 올라갑니다.
11시18분, 된비알의 오름 끝에
272봉을 올라 오른편으로 꺾어지고
잡목 숲 속의 내리막 을 탑니다.
11시26분, 오른편으로 콘크리트 지주의
철조망을 만나는데
곧 아담한 잘록이의 네거리에 내려섭니다.
오래 만에 참여하는 R대원이 힘들어
주저앉는 걸 주위에서 격려합니다.
오른편의 길 끝에 파란 지붕이 보이고
어설픈 철문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녹 쓴
식별이 안되는 경고판이 서있습니다.
철조망은 계속 이어져 올라가고
사유지 경계로 만들어 놓았는가 짐작했는데
뒤에 최상진님으로부터 안일이지만
풍산금속에서 불발탄 처리장으로 활용하면서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11시30분, 뒤돌아보니 고경저수지가 보입니다.
다시 올라가는 등산로,
예비군 훈련용 참호인가
철제 박스가 세워져 흙으로 위장해 덮여있습니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철조망은 왼편으로 꺾어지고
등산로는 철조망을 따라 일분정도 가다
다시 90도로 오른편으로 꺾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캠코더의 테이프가 끝이나 새 테이 프로 교환하면서
뒤따라오지 않는 하 군을 생각하며 은근히 걱정을 합니다.
11시40분, 다시 출발하면서 전면을 조망하며
오른편으로 철조망을 끼고 내려갑니다.
11시47분, 철조망이 끝나면서
뒤돌아 지나온 능선을 촬영하며
잠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했는데
혹시 하면서 걱정을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11시52분, 무명봉에 올라 내리막을 타다
11시54분, ‘李參奉’무덤을 지나 내리막을 타고
또 다른 무덤을 지나칩니다.
12시2분, 오르막 턱에 올라
뒤돌아 지나온 능선을 촬영하면서
뒤따라올 하 군을 살피고
계속 오르막 턱에서 오른편으로 꺾어지고
잡목 숲길에서 다시 좌로 꺾어져
내리막길의 간벌지대를 만납니다.
넘어진 나무들로
길 찾기를 하며 오르다
12시9분, 좌로 꺾어져 완만하게 오르고
12시18분, 무명봉에 올라,
다시 내려가다 무덤을 지나고
12시24분, 아담한 잘록이,
오른편은 논실리, 왼편은 보현사로 내려가는
네거리 갈림길에 내려섭니다.
논실리의 개척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400여년전 처음으로 김녕 김씨가 이 마을에 정착하였고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 권정 장군과 김귀희(金貴希)장군이
이곳에서 거문고와 비파소리로 암호를 정하고
제반 작전을 의논하여 왜군을 크게 무찔렀던 바,
이 마을을 논실(論瑟)이라 하는데
일제 때 일본인들이 강제로 답곡(沓谷)이라 불렀고
광복 이후 이곳 주민들이 동명을 다시 논실동(論瑟洞)으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맞은편 오름의 낙동정맥 종주 길로 올라갑니다.
간벌한 잡목들이 가로누워있어
오름길에 발목을 잡습니다.
12시38분, 호국봉 넘어 가서 재킷을 찾아온다는
하 군이 가픈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 올라와
겨우 안도합니다.
12시44분, 308봉에 올라서서
신라시대에 임금님이 둘러보았다 해서 이름이 지어진
우뚝 솟은 어림산(御臨山)을 바라 보고
오른편으로 꺾어져
능선의 평탄한 길을 가다 내리막을 타고
잡목 숲길을 가다 기이하게 봉분 같이 가볍게 솟은
흙무덤위의 네그루의 나무를 촬영하며 내려갑니다.
13시4분, 어림산 자락의 송전탑 옆을 지나칩니다.
왼편으로 저만큼 또 다른 송전철탑이 보이고
얼마가지 않아 왼쪽으로 꺾어지며
철탑공사 때 만든 운반로 같은 넓은 등산로를
따라가는데 지대가 높아서인가 잔설이 보이고
청미래덩굴이 잎은 모두 떨어지고
빨간 열매만 그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메마른 가지에 매달려있습니다.
열매는 둥글며 지름 1cm 정도이고 9~10월에 붉은색으로 익으며,
명감 또는 망개라고 하며 열매는 식용,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
뿌리를 이뇨, 해독, 거풍 등의 효능이 있어 관절염, 요통, 종기 등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등지 에 분포, 줄기가 곧고
가지가 많으며 잎이 작은 것을 좀청미래(var. microphylla)라고 한답니다.
다시 오른편으로 등산로는 꺾어지는데
이제 어럼산을 오르는 가파른 길에 올라섭니다.
낙엽이 깔린 된비알은 조금 미끄러지기도하고 턱에 올라서면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다 다시 된비알이 되기도 합니다.
완만과 된비알을 되풀이하다
왼편 자락의 음지에
잔설이 하얗게 깔려있는걸 발견합니다.
13시40분, 임금님의 흔적인가 정상비 대신
뿌리째 뽑혀 나온 측량표지석이 보입니다.
하 군에게 바로 세우게 하고 ‘┼’, 측면에
‘건설부’라고
희미하게 음각한 표지석을 촬영합니다.
어느, 측량에 한이 맺힌 사람의 소행인가.
아니면 치기어린 어느 산꾼의 힘자랑인가.
사방 잡목으로 가려 조망은 별로라
시간이 없어 오른편으로 꺾어져
평탄한 능선 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중간 담당 김 신 총무와 교신을 했다며
하 군이 조회장 내외는 마치재에서 927번
도로를 따라 한무당재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마치 마치재에서 탈출하라는 소리로 들려
고민합니다.
13시44분, 좌우 석주에 큼직한
‘朝鮮孝節閣卨金公之墓’
석비가 서있는 널찍한 무덤에 당도하여
우선 석비 정면과 마멸되어 분명하지 않는
측면 설명문을 촬영하고 하 군과 점심식사를 합니다.
처음으로 앉아 휴식하는 셈인데 선두와 너무 쳐져있어
별로 편하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전 대원을 위해 욕심을 버리기로 하고
하 군에게 촬영의뢰,
뒤에서 앞으로, 정상에서 멘트 촬영기법등을 설명합니다.
14시5분, 이제 본격적인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14시15분, 돌과 바위길 내리막을 거쳐
잘록이를 지나
좌로 산림이 우거져 하늘에 별만 보인다 해서 마을 이름이 됐다는
내태리(來台里) 마을 촬영하며 내려갑니다.
14시26분, 왼편아래에 구비 치며 올라오는 927번 도로를 촬영하며
얼마가지 않아 마치재가 코밑인 걸 느낍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역광으로 희미한 남사봉이 보이고
잡목 숲 속에 간혹 푸른 소나무도 보입니다.
그 중에 단연 시선을 끄는 것은 좀 전에 본,
그 추위 속에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있는
앙증 맞은 빨간 명감(망개)열매,
독야 홍홍 하고 있습니다.
마치재(馬齒)는 황수탕으로 유명한 덕정리 청석(靑石)마을과
경주시 현곡면의 남사리로 연결하는 고개로서
925호 지방도로와 연결된 도로가 있으며,
이곳의 지형이 말의 이빨과 비슷하다 하여 마치라고 한답니다.
또 다른 유래는
마치재(말팃재) - 서쪽으로 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골 북쪽에서 영천군 고경면 덕정리 황물탕으로 넘어가는데
옛날 이 곳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여 서낭재, 당기미 라고도하며,
지형이 말의 형상으로 생겼다고 하여 말티재 또는 馬峴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남사봉(南莎峰)은
남쪽 자락에 있는 남사리(南莎里)마을에서 따온 이름인데
가마들에 잔디가 많았고 마을이 남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여 남사라 했고
이곳은 좌로는 御臨山(510M)이
우측에는 어림산 줄기인 이내산(389m)등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아늑하고
산세가 수려하여 世居之地의 명소라 일컬어 졌으며,
고 박정희 대통령도 퇴임 후 풍광 좋은 이곳에서 살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는 일화도 있고,
동학교주 최재우선생도 남사지 아래 이곳 출신이라고 합니다.
14시38분, 2차선 아스팔트 927호
포장도로 마치재에 내려섭니다.
시티재에서 뒤따라 출발했든 대구 종주대가
도로건너 무덤이 있는 공터에서
콩나물 국밥 을 만들어 한참 먹고 있는데
좀 전에 도착한 R대원이 한 그릇 받아들고
“아저씨! 얻는 김에 젓가락 없지에?”
하자
대구 팀의 장년이
“숟가락 여기 있으니 숟가락 쓰이소!”
합니다.
R대원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든 김윤근 대원이
하 군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지
차량 협조(대구 팀의 승합차)를 얻었다며
R대원과 저 차를 타라고 합니다.
바쁘게 주변을 촬영하고 하 군이 갖고 있는
캠코더를 설명을 하려고 보니
어떻게 된 샘 인지 배터리가 방전되어있습니다.
뒤에 안일이지만 시험 삼아 촬영을 하고
정지를 시키지 않아 몇 시간을
계속 촬영되어 방전 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콩나물 국밥을 먹고 있는 하 군에게
내 캠코더를 건네주고
도로변에 기다리 고 있는 승합차 쪽으로
바쁘게 뛰어갑니다.
(지금부터의 종주기는 2분 정도 촬영한 하 군의 비디오와
오 지호님의 디지털 사진을 참고하여 쓴 것이다.)
▶14시55분, 마치재 출발.
14시58분, 중간지점에서
뒤돌아 마치재를 촬영하고
된비알을 올라가다
15시3분, 임도에 내려서고
임도를 따라가다 좌측 비탈의 시그널을 찾아
가파른 오르막을 가픈 숨을 몰아쉬며
15시13분, 잡목으로 조망이 가린
아무른 표지도 없는 남사봉에 올라섭니다.
시간에 쫓기어 잡목과 넝쿨 속으로 하산하면서
잠시 등산로는 180도로 돌아
북쪽으로 내려가다
15시19분, 콘크리트 임도에 내려섭니다.
놀라운 것은 임도 옆 아래에
포크레인 한 대가 광범하게 황토를
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백두대간이 곳곳에 채석과 채토로
한 반도의 혈맥이 망가져간다고 야단인데
낙동정맥도 이렇게 망가져 갈 줄이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공사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지역은 환경단체도 없는 모양입니다.
임도를 지나 종주로는 서북쪽으로 바뀌면서
왼편으로 인내산과
얼마 후에는 작은 저수지 를 발견합니다.
15시45분, 옛날 무당 할미를 모신
서낭당이 있었다고 해서 한무당재,
일명 할미당재, 혹은 근처 골짜기에 靑石이 많고
산적이 출몰했다 해서
청석골재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양 비탈에 옹벽을 쌓은 콘크리트 포장도로
한무당재에 내려섭니다.◀
▶(아래 사진은 오 대원이 약 20분 먼저 출발하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사이 선두는
14시50분에 먼저 도착하여
대형 가스버너에 어묵탕을 준비하여 나누어 먹고
뒤에 내려오는 대원들을 위해
두 번째로 어묵과 가래떡을 넣는데
강 부회장님이 가래 떡 다발을 하나하나 떼어서
넣어야 할 걸 그냥 통째로 넣어버리자
여기저기서
“어이! 어이! 그라믄 대나~!”
하며 다시 꺼내어 떼어서 넣고,
이 관경을 바라보고 있든 귀고리 이 미경 대원의
“아저씨! 얼굴 모습대로 넣네요!”
하는 소리에
모두 박장대소를 합니다.
자연 속에 자연을 접하고 나면 모두 천진스러워져
조그마한 일에도 웃음이 나고 즐거운 것인가.
지나가는 차량들이 간이 용기와 종이컵에 어묵과 가래떡 등을 담아
하얀 김을 후~후~ 불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으나
산해진미가 이렇게 맛이 있을까요?
그 맛은 이런 산행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인데
마치재에서 먼저 내려갔든 조회장님 내외가 뒤늦게 도착하여
청석골 삼거리를 그냥 통과하여 아랫마을까지 갔다 음식점에
들렸다 온다며 그 곳 음식 맛이 괜찮더라고 합니다.
하 군이 별로 촬영할 것도 없고 해서 바쁘게 내려오느라고
1분 정도밖에 촬영 못 했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습니다.
멘 뒤에 내려온 두 대원을 위해 다시 라면을 넣어 끓이고
두 대원이 식사를 마치자 주변을 깨끗이 청소.
14시55분, 부산으로 향해 아곡쪽으로 출발합니다.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하고는 가장 빠른 출발입니다.
도로확장 공사가 진행 중인지
도로 폭이 들쑥날쑥 하는데
왼편으로 가장자리가 언
한없이 마음이 편안한 심곡저수지가 나타납니다.
건너편 기슭에 가창오리 떼가 무리지어 앉아있고
아화를 거쳐 달리면서 목욕은 그냥 부산에서 하기로 합니다.
16시19분, 건천 나들목으로 빠져
경부고속도로에 오릅니다.
50여년 전의 6.25전쟁,
동족간의 총탄, 포탄과 포연속에 처절한 죽음을
주고받았든 현장을 지나온
오늘의 종주 길, 한숨 지었지만
아직도 그 문제의 한풀이, 살풀이를 못하고
살육을 감행한 측에서
오히려 기세등등, 암투만 계속하고 있는 현실에
답답한 마음으로
낙동정맥 16구간을 되돌아보며
16시56분, 부산T/G를 빠져 나왔습니다.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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