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최초 명칭은 미추홀(彌鄒忽)이다.
백제: 미추홀
고구려: 매소홀
통일신라: 소성현
고려- 숙종:경원군
인종:인주
공양왕:경원부
조선-태조:인주
태종:인천군
미추홀(백제)→매소홀(고구려)→소성현(통일 신라 경덕왕)→경원군(고려 숙종)→인주(고려 인종)→경원부(고려 공양왕)→인주(조선 태조)→인천(조선 태종13년, 1413)
인천의 옛 지명은 「미추홀」이란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원삼국시대 백제 초기의 인천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매소홀현(買召忽縣」을 일명 「미추홀(彌鄒忽」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삼국시대 고구려가 이곳에 「매소홀현」을 두었을 때, 이미 「미추홀」이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천은 원래 「미추홀」로 불려 오다가 그 후 고구려 시대에 「매소홀」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미추홀(彌鄒忽」은 「인천(仁川)」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미추홀」이곧 「인천」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가 된다. 즉 「미추홀」은 백제 초기 비류가 건국한 비류백제의 도읍지이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건국설화에 의하면 주몽에게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형 비류는 현 인천에 비류백제(미추홀국)를 세웠고, 동생 온조는 현「하남시(하남 위례성」에 백제(십제)를 세운 것이다. 당시 비류백제의 수도는 현재의 문학산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나 흔적은 소멸되고 없다. 다만 문학산성 일대를 옛날부터 「산성리」라고 불러왔고, 비류의 능이라고 전해져 오던 왕능과 같은 큰 무덤이 청학동 일대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온조의 백제(십제국)는 날로 번성하고 백성들이 잘 살았으나 인천지역에 도읍한 비류백제(미추홀국)는 땅이 척박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기에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므로 비류가 세워서 다스리던 비류백제(미추홀국)는 뒤에 하남 위례성의 온조 백제와 합하게 되어(십제국을 백제라 하게 되었다고 함)이때부터 미추홀 백성들은 백제의 백성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인천은 소래산을 비롯한 여러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큰 평지가 없다. 문헌에는 "산과 골짜기마다 갯물로 되어 땅이 거칠고 물이 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매소홀」이 "거치른 물의 고장"이란 뜻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추」와 「매소」는 한문 표기만 다르고 뜻은 같아서, 이 두 지명은 같은 뜻을 가진 토박이 말의 동음이자(同音異字)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토박이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미추홀의 '미(彌)'와 매소홀의 '매(買)'가, 대개 물[水]·내[川]·하천[泉]·강[江]등의 뜻으로 해석됨을 알 뿐이다.
또한 「미추홀」혹은 「매소홀」은 '바탕골'이란 뜻으로 한 나라의 도읍지임을 말해준다. 신라의 옛 도읍이 「서라벌」이었듯이 「미추홀」이 비류 백제의 수도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졸본(홀본-본홀-본골-바탕골)」도 「밑골」의 이두식 표현으로 추측된다. 이두란 신라 시대에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서, 한문을 우리말식으로 적어 쓰던 문자를 말하는 것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는 토박이 말로 되어 있던 지명들을 한자로 바꾸었는데, 이 때부터 인천을 「소성현(邵城縣)」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처럼 경덕왕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써서 신라의 제도와 관직 등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토박이 말로 되어있던 지명을 모두 한자어로 바꾸고 9주 5소경 117군 293현을 정비하였는데, 이 때 「매소홀현」이 「소성현」으로 바뀐 것이다. 소성은 문학산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소(邵)'의 뜻은 "높다"로 산, 언덕, 혹은 황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산성의 위치가 높아서 '소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는 독립된 군·현이 아니라 율진군, 즉 안산에 딸린 고을이었고 현종 9년(1018년)부터는 수주 즉 부평에 딸린 고을이었다. 이와 같이 「소성」은 인천 역대 지명 중에 가장 치욕적인 지명으로 수령도 없이 이웃 고을에 얹혀 있던 때의 이름인 것이다. 거칠 소(邵)와 고을 성(城)이 합쳐진 「소성」은 거칠고 초라한 마을이란 뜻이 되므로 통일 신라 시대에 인천이 크게 융성하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려 귀족정치 시대에는 여러 벌족들이 등장하여 서로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최대의 벌족이 인주 이씨였고, 인주 이씨의 본거지가 인주 즉 인천이었기 때문에 인천은 몇차례 승격과 개칭을 겪게 된다.
고려 숙종 10년(1105년)부터는 「경원군(慶源郡」으로 불려졌다. 「경원군」은 경사의 근원이 되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통일 신라가 끝날 무렵 바다를 끼고 활동했던 인주 이시는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왕건은 인천, 강화 일대의 해상 세력에 힘입어 고려를 세웠으므로 고려 건국 후 인천은 크게 발전하였는데, 게다가 고려 왕실과 7대에 걸쳐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더욱 융성해진다. 인주 이씨가 왕실과 혼인을 맺은 것은 이자연 때의 일인데, 그의 세 딸이 차례로 문종 임금의 왕비가 되었다. 맏딸인 인예 순덕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의 세 임금과 대각국사 의천을 낳은 분이기도 하다. 인천은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순덕태후의 친정고을이었기 때문에 왕비의 친정이라는 이유로 「경원군」으로 높여 불리게 되었던 것이며, 숙종은 수주에 속해 있던 소성을 독립시키고 부근의 땅까지 떼어서 인천을 큰 고을로 만들어 주었다.
그 뒤 인종조(1122-1146)에 이르러 경원군은 다시 인주로 낮춰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인천이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씨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순덕왕후는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의 줄째 딸로 예종 비가 되어 인종을 낳았다. 예종 9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예종 1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경태후 추존되었다. 그러나 이자겸이 자기의 외손자이며 동시에 사위이기도 한 인종을 폐하고 왕이 되려고 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하여 인주 이씨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역사적으로는 이 사건을 이자겸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주 이씨의 몰락과 함께 번성해 가던 인천의 영화도 잠시 접어두게 된다.
그러나 고려 공양왕 2년(1390년)부터 고려가 명망하기까지, 인천은 다시 「경원부」로 승격되어 불려지게 된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태자비를 인주 이씩 가문에서 맞아들이면서 사돈접인 인주(인천) 이씨 가문을 높여 부르기 위한 것이었다. 공양왕은 인천에서 7안, 즉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 왕의 외가였고,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5대 왕비의 친정이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조상을 승상하는 의미에서 인천은 읍호를 경원부로 승격시켜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가 높여 놓았던 「경원부」를 다시 「인주」로 낮춰 부르게 한다. 조선왕조와 인천은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태조 이후 「인주」로 불려져 오게 되었다. 그러다 태종 13년(14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군」이나 「현」에 들어있는「주(州)」를「산(山)」이나「천(川)」으로 고쳤는데, 이 때 「군」의 격을 가지던 「인주」는 비로소 「인천(仁川)」이라 읍호를 갖게 된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는데 목사가 수령인 고을과 군수 또는 현감이 수령인 고을에 모두 '주(州)'가 붙어 있어서 고을의 등급을 알기에 혼란스러워 읍호의 정비를 하게 되었을 때, 인주의 주가천으로 바뀌게 되어 인천으로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천군은 세조 6년(1460년)에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고 남양부에 속해 있던 덕적과 대부등까지 인천에 포함되게 된다. 이것은 인천이 세조의 어머니이며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진 외가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진 외가는 아버지의 외가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숙종 14년(1688년)에 인천 태생의 일개 중이 반역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인천도호부는 「인천현」으로 낮춰져 불려지게 된다. 여환 등 11인의 증이 양주를 무대로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신령이라 칭하고 반역을 꾀하다가 잡혀 죽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인천」은 왕조와의 관련성이나 가문의 번성 여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조선말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그 후 1883년 인천항이 열리면서 조선말까지 인천의 변두리였던 조용한 포구 제물포는 점차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변하게 된다. 또한 1914년에 일제가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제물포 포구, 즉 지금의 동인천 일대만을 인천부라 부르고 다른 지역은 새로 만든 부천군에 편입시킴으로써, 한일 합방 이후 옛 인천 도호부와 부평 도호부 일부분을 흡수하면서 넓어졌다. 1981년에 직할시가 되었고 1989년에 계양면과 용유도, 영종도 등이 인천에 포함되었다.그 후 서해안 시대를 맞아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개편되면서 강화군, 검단, 옹진군 등에 속했던 여러 섬들이 합쳐져 한국 제일의 넓은 도시를 형성, 21세기에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다.
1400년대
1413. 10. 15조선 태종 13년 「仁州」에서 「仁川郡」으로 변경
1800년대
1883. 開港되면서 부내(府內), 먼우금(遠又爾), 주안(朱雁), 남촌(南村),
조동(鳥洞), 신현(新峴), 황등천(黃等川), 전반(田反), 이포(梨浦),
다소(多少)의 10개면을 통합하여 仁川을 이룸
1895. 05. 2623府制 실시에 따라 仁川府 설치
1910년대
1914. 04. 01仁川府의 일부와 부평군을 병합하여 부천군 설치
1914. 09. 01월미도를 仁川府에 편입
1936. 10. 01부천군 다주면 일부와 문학면 일부가 仁川府에 편입
1940년대
1940. 04. 01부천군 문학(文鶴), 남동(南洞), 부내(富內), 서곶(西串) 등 4개면이
仁川府에 편입
1949. 08. 15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仁川府를 仁川市로 개칭
1960년대
1963. 01. 01부천군 작약도를 인천시에 편입
1968. 01. 01區制 실시로 4개區 설치(중구, 남구, 동구, 북구)
・중부출장소에 북부출장소 관할 송월동을 편입하여 中區 설치
・북부출장소와 동부출장소를 통합하여 東區 설치
・남부, 주안, 문학, 남동 4개의 출장소를 통합하여 南區 설치
・부평출장소와 서곶출장소를 통합하여 北區 설치
남동출장소, 서곶출장소 및 7개 행정동 설치
《4區 2出張所 66개洞》
1970년대
1973. 07. 01동구 월미도를 중구에 편입
1980년대
1981. 07. 01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정부직할시로 승격(仁川直轄市)
1988. 01. 012개구 설치《6區 94개洞》
・南區(1출장소 40개동) → 南區(27개동), 南洞區(13개동)로 분구
・北區(1출장소 29개동) → 北區(19개동), 西區(10개동)로 분구
1989. 01. 01경기도 3개면을 仁川直轄市에 편입
・경기도 옹진군 永宗面, 龍遊面 → 인천직할시 중구
・경기도 김포군 桂陽面 → 인천직할시 북구
・3개 행정동(영종동, 용유동, 계양동) 설치《6區 97개洞》
1990년대
1995. 01. 01인천직할시에서 인천광역시로 명칭변경
1995. 03. 012개 自治區 설치
・北區(32개동) → 富平區(21개동), 桂陽區(11개동)로 분구
・南區(31개동) → 南區(23개동), 延壽區(8개동)로 분구
1995. 03. 01市·道間 경계조정
・북구 서운동 일부 → 경기도 부천시로 편입
・경기도 江華郡(1읍 12면), 甕津郡(7면), 金浦郡 黔丹面
인천광역시에 편입
《2郡 8區, 1邑 19面 124개洞》
1998. 10. 10과소동 통폐합 (1邑 19面 116개洞으로 축소)
~ 11. 10
2000
2001. 12. 28서구 검단동이 검단1동 , 검단2동으로 분동
2003. 03. 01연수구 옥련동이 옥련1동, 옥련2동으로 분동
계양구 계산3동이 계산3동,계산4동으로 분동
2005. 08. 12서구 검단1동, 검단2동이 검단1동, 검단2동, 검단3동으로 분동
2005. 12. 30부평구 삼산동이 삼산1동, 삼산2동으로 분동
2006. 09. 01서구 검단1동이 검단1동, 검단4동으로 분동
2006. 11. 26중구·동구간 관할구역 변경
・중구 전동, 인현동 일부 → 동구 화평동에 편입
・중구 인현동 일부 → 동구 송현동에 편입
2007. 01. 01연수구 동춘2동이 동춘2동, 송도동으로 분동
2009. 02. 01남구 소규모동 통폐합
・숭의1동·숭의3동 → 숭의1·3동
・용현1동·용현4동 → 용현1·4동
・도화2동·도화3동 → 도화2·3동
2009. 07. 20남동구 논현고잔동이 논현동, 논현고잔동으로 분동
2010. 06. 10서구 청라동 설치
・경서동,연희동,원창동 일부 → 청라동
2011. 05. 20남동구 논현동이 논현1동으로 명칭 변경
논현고잔동이 논현2동, 논현고잔동으로 분동
2012. 01. 01연수구 송도동이 송도1동,송도2동으로 분동
중구 영종동이 영종동,운서동으로 분동
(2군 8구, 1읍 19면 125개동)
▶ 만수동
옛 부터 인천은 장수하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현종 원년, 인천에 100세 노인이 있던 기록이 있다. 당시의 평균 연령이 40여세인 것에 비하면 이는 약 보통 사람의 두배 반을 산 것이다.
특히 만수동과 장수동 지역이다. 장수로 유명하다. 그래서 동명에 오랜 삶을 나타내는 '수'자가 들어있는 것 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동의 명칭도 '만수동'으로 붙여지게 되었다.
만수동은 20여년 전만해도 띄엄띄엄 형성된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도시 근교농업을 하던 곳이었는데, 1970년대의 인천시의 시세 확장으로 크게 발전한 곳이다.
남동구청의 이전에 구의 중심지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된 주거 중심지로서 많은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만수동의 옛날 이름에는 새말, 구룡골, 산밑말, 담뱅이말, 장승배기, 새골, 비리고개, 돌골, 쇠판 등이 있다.
▶ 새골
원래는 풀이 많아 '초곡'이었는데 '조곡'으로 오기되었다고 한다. 조곡은 '조동'으로 불리우게 되고 조동은 남동구 명칭의 근원이 되었다. 새말은 지도상에 '새골'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은 지대가 낮고 습하여 풀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이루고 있다.
새골의 남쪽으로는 '반줏골', 서쪽으로는 '산박골'이 있는데 이 두 고을 사이에 끼있서 이 새골의 한자 표기에는 여러 가지로 표기된다. 날아 다니는 새의 뜻을 가진 '조'(鳥), 억새풀의 뜻을 가진 '새'(草), 사이의 준말인 '새'(間)로 표현하여 조곡(鳥谷), 초곡(草谷), 간동(間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 관한 지명은 인천의 땅이름 노래에도 등장한다.
▶ 담뱅이말(담방이말)
본래 이름은 '벌담방이'이다. 담뱅이말 앞 들은 장수천에 만수천이 합류하여 소래포구로 흘러드는 곳이다. 따라서 만조시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에 담방담방 넘어들려고 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담뱅이말이다. 이곳에 관한 지명은 새골처럼 인천의 땅이름 노래에도 등장한다.
▶ 장수동
장수동은 인천부 조동면 소속의 '장자리', '만의리', '수월리'였는데, 1914년 남동면 소속의 장수리가 되었다. 장수리는 장자리의 '장'과 수월리의 '수'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0년 장수정이 되었다가 1946년 장수동으로 불리게 디었다.
이 장수동은 거마산, 관모산으로 둘러싸인 산지이며, 옛 부터 만수동과 더불어 장수하는 마을로 주로 도시 근교농업을 하던 곳이었다. 현재 장수동에는 관모산 기슭에 인천대공원이 조성되어 식물원, 등산로, 체력단력장, 야영장, 테마공원 등 많은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고, 많은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장사골(장자골)
'장사가 많이 나온 부락'이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모두 여덟명의 장사가 태어났다 전한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장자리'라 불리웠다 한다. 장수동은 특히 장자, 장자골, 장터골, 장자구리, 장골 등 '장'자가 붙은 마을 이름이 많이 나온다.
이는 이곳이 장수하는 마을, 또 건강하여 힘이 센 사람이 자주 태어나는 고장임을 나타낸다.
▶ 서창동
조선시대에는 농촌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가까운 창고에 저장했다 배를 이용하여 서울에 있는 경창으로 운반했다.
인천의 '남촌면'과 '조동면' 마을 사람들은 추수 후 나라에 내는 곡식(세금)과 국가로부터 빌려쓴 곡식의 원리(빌려쓴 곡식과 이자를 합한 것)로 농가당 약 15섬씩이나 되는 벼를 20여리나 떨어진 북창이나 동창에 내야했다.
그런데 그 벼를 운반할 길이 좁아 우마차가 잘 다닐 수가 없어 현물세를 내러 가는 길이 큰일이었다.
이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이 지역에 창고가 설치되었는데, 이 창고 이름이 서창이다. 서창에 간한 또 다른 이야기는 서해 바닷물이 이 곳까지 드나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배를 모아 서해에서 창성하다는 뜻으로 배를 서창호, 마을도 서창이라 하였다 한다.
▶ 장자골
서창동 남단에 위치한 장아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장자골은 '장골'이라고도 하여 한자로는 '장곡', '장아동'으로 통한다. 옛날에 황해도 재령에서 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곳으로 피난와서 살면서 '자기를 숨겨준 마을'이란 뜻으로 장아동이라 표현한 것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뒷산은 아직도 장아산이다.
장작골은 인천지방 유일한 '땅이름 노래'에 등장하는데 만수동의 샛골과 담방이, 운연동의 음실과 더불어 등장한다. 그 노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샛골에서 새를 잡아
장작골에서 장작 피워
당방이에서 담방 담그어
음실에서 음실 음실 먹자
이 노래는 옛날의 마을 이름을 엮어 민요조로 부르던 노래인데 여기서 '담방 담근다'든지 '음실 음실 먹는다' 등의 말은 본래의 뜻보다는 그 말의 느낌에서 나오는 의태어로 우리말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 운연동
운연동은 원래 인천부 조동면 음실과 연락골 등의 지역으로 1903년 상음리, 하음리, 연락리로 나눠졌다. 다시 1906년 '연악리'로 단일화 된 후 1914년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부천군에 편입 되었다. 1914년 남촌면과 조동면이 통합하여 남동면이 되니 그 관할이 되었고 1914년 '운연리'로 개칭되었다.
'운연'이란 음실의 뜻에서 오는 구름의 '운'과 연악의 '연'자를 따서 지은 마을 이름이다. 이 운연동은 옛날 숲이 우거지고 나무가 많아 각종 새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사시사철 지저귀고 구름도 한숨 쉬어가는 곳인데, 수원 인천간 산업도로(42번국도)가 뚫리고, 제2경인고속국도가 지나면서 개발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곳이다.
▶ 음실(陰室)
음실은 인천광역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조금 못미쳐 남쪽으로 난 내리막길의 작은 언덕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동쪽에는 '이여발장군'의 묘가 있고, 서쪽에는 '도당재'가 있다. 음실 뜻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리(音)가 나는 집', 또 다른 하나는 '구름같이 높은 집'이란 뜻을 지녔다고 한다.
음실은 이웃에 연락리가 있는데 연락이란 '연회를 하며 즐긴다'라는 뜻으로 보아 연회에는 항상 음악이 따르고 결국, 음실 역시 음(소리)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도림동
도림동은 옛날부터 복숭아밭이 많아 '복숭아골'이라고 불려 생긴 동명이다.
▶ 도림말
'도림말'은 말 그대로 '복숭아 밭이 많이있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마을 뒤로 가 해발 70m 정도의 동쪽을 향한 낮은 구릉있어 과수원 최적지다. 그러나 지금은 복숭아보다도 배밭이 군데군데 있다.
▶ 여무실(女舞室)
도림동에 있는 마을로 무당촌의 이름이다. 여무실이란 '여자가 춤을 추는 집'이란 뜻이다. 옛날 이 마을에서는 큰 집을 지어놓고 처녀를 뽑아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 또는 무당을 양성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무당이 굿하고 춤추는 집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인천에는 여(女)자가 마을에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여무실이고, 또 하나는 서구에 있는 연희동이다. 연희동은 본래 여희동으로 신라시대에 처녀를 뽑아 베짜기를 가르치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여자와 선자는 불길하고 천하다 하여 '여'자를 다른 자로 고쳐 사용한 것이 연희동이 되었다 한다.
▶ 수산동
수산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사람들이 오래살 수 있는 터전이란 뜻에서 '수산리'로 불렸다. 원래는 인천도호부 시절 남촌면 경신리 지역으로, 바리때처럼 생긴 산이 있어 바리미, 바래티, 배래터, 바렷, 배렷, 또는 발산, 발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아누굴, 황굴, 찬우물, 경신을 병합하여 '발산리'라 했다.
1940년 인천부에 다시 편입되어 일본식으로 '수정'이라 하다 1946년 동명 변경에 의하여 '수산동'이 되었다. 그리고 1977년 도림동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에 속해 있다. 찬우물, 배래터, 능곡동 등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아직도 농업중십의 근교 농업지역이다. 그러나 이제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완공되어 편리해진 교통과 더불어 지역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 찬우물 부락
수산동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경신고개, 찬우물 고개가 나온다. 그 수산동 242번지 일대가 바로 찬우물 부락이다. 이 마을은 100여년전 김씨성을 가진 6가구가 처음 정착하여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안에 있는 공동우물이 유난히 차다고 하여 찬우물 마을이라고 불렸다. 그후 광복 이 후 '냉정부락'이란 한자음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이 마을 지하수는 유난히 차다한다.
▶ 남촌동
남촌동은 원래 자염 즉, 염벗이 많아 인천부 남촌면 염말이라고 불리다 1903년 염촌으로 개칭하였다. 다시 1906년 5월 인천부의 동리명 확정 때 소가 누워있는 모양의 지형이라 해서 '와우리'라 하였다.
그 후1940년 남촌동이 되었다. 남촌동에는 상촌, 하촌, 중촌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 상촌, 하촌, 중촌
남촌동은 전통적인 농업지역인데 마을 이름은 매우 단순하다.'상촌'은 위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고, '하촌'은 아래에 있는 마을,'중촌'은 가운대있는 마을 이란 뜻이다.
▶ 논현동
논현동이란 옛날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어른들이 마을 뒤 망월산의 넓은 공터에 모여 의논을 해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와 고개에 논이 있어 논고개였는데 이것이 한자어로 논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야기하면 넘는 고개라 하여 논현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 고잔동
육지가 바다쪽으로 반도 모양으로 뻗어나간 지형을 '곶'이라 하는데 '곶'은 '고지' 또는 '고잔'이 되었다. 고잔은 인천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안지역으로 인천부 조동면 고잔리로 변동없이 불리워오다가 1914년 고얏말, 돌우물, 갈매를 병합하여 부천군 남동면 고잔리가 되었다
가좌동이 된 가재올
지금의 서구 가좌동을 옛날에는 가재올이라 불렀다. 이 마을에는 하천이 흐르고 연못이 있었는데 가뭄으로 연못이 마르자 거기에서 큰 가재가 한마리 나왔다고 하여 이 마을을 가재올이라 부르게 되었다.
올이란 옛날의 고을의 골이 변한 것으로, 즉 가재가 많이 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가좌동은 가재올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가재리가 가좌리가 되고 그 후 가좌동이 된 것이다.
가좌동에는 건지꼴이라는 마을이 있다. 건지란 연못이 말랐다는 뜻이다.
장수한다고 만수동
옛날 부터 인천은 장수하는 곳이라 이름이 나 있다. 조선 왕조 실록에 의하면 현종 원년에 길주에 199세 된 노인이 있고, 인천에도 100세된 노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아도 인천에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특히 남동, 만수동에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만수동이란 동명이 붙여지게 된 것이며 이 마을 뒷산 이름도 만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산 밑에 백세 노인이 많아서 만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또 인천관내에는 장수를 뜻하는 '수' 자와 '학' 자가 붙은 동명이 많다. 연수동, 만수동, 장수동, 수산동 등이고 송학동, 문학동, 청학동, 선학동 등은 천년을 산다는 '학'자가 붙어 있다. 이들은 모두 인천 지방이 장수하는 고장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곡 만석을 쌓아둔 만석동
조선 시대에는 세금으로 걷은 벼, 콩, 잡곡을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필요할 때 한양으로 운반 하였다. 배를 통해 운반된 세곡은 서해안을 통해 인천을 지나 강화, 김포를 걸쳐 한강으로 올라가 용산에 쌓아 두었다. 인천 지방 농민들이 납부하는 세곡은 용산 창고로 운반되는데 만약 기일을 지키지 않으면 고을 사또가 문책을 당하였다. 먼 거리에 있는 고을에서는 미리 세곡을 운반해 와서 쌓아두었다. 만석동, 영종, 경서동 등지에 쌓아 두었는 데 특히 만석동 포구에는 가장 많이 세곡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한해에 만석을 쌓아 둔다 하여 만석동이 되었다고 한다.
부평 토박이 박씨촌(박촌동)
인천의 토박이 대성은 최씨이고 부평읍 토박이 대성은 박씨라 한다. 부평읍을 중심으로 해서 일대에 살고 있는 박씨는 약 300여 호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박촌동의 유래가 박씨촌이라는 뜻이며, 이들 박씨들은 멀리 고려 때부터 살아왔다. 그러나 이 박씨는 집이 가난해서 30의 나이가 가까워도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부평 박촌마을에는 딸만을 낳고 사는 과부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과부가 처가살이 사위를 구할 때, 마침 이 박씨 총각이 인연이 되어 장가 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박씨의 후손이 번성해서 300여 호가 살게 되었다. 지금도 이 박씨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으며 박촌동에는 그의 선조의 묘지가 많이 있다고 한다.
기타의 지명
석남동: 예전 부평군 석곶면 관할의 고잔리, 번작리(番作里) 지역으로, 석곶면 남쪽에 있다고 해서 석남동이라고 하였음.
연수동: 연수란 목숨이 연장된다는 뜻으로, 이 마을이 건장에 좋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함.
신현동: 1984년 원창동 포리항에 전조창을 짓고 서울로 정부 양곡을 운반하기 위한 새로운 고갯길을 만든 데에서 유래. 새로운(신:新) 고갯길(현:峴)뜻.
부평동: 부평동은 부민동과 같은 어원에서 동명이 유래한다. 보수천 하구 일대는 갈대밭과 풀밭으로 되어 있어서 옛부터 새뛰 또는 샛띠라고 하였다. 새뛰는 초량이라는 뜻인데, 해정리(현재의 동구 초량동)까지를 새뛰라고 불렀다. 현재의 부평동, 부민동에서 초량동까지를 모두 초량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부평동의 '부'는 부산의 옛지명인 부산(富山)의 '부'자와 같은 의미이며, '평'은 '터'라는 뜻으로 새뛰의 '뛰'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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