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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답 컨닝>의 줄거리:
아담의 범죄 후 인간에게 생긴 체질적인 죄의 습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 중에 좋은 것을 정해놓고 추구하는 더러움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컨닝입니다. 매 순간 매 상황에서 행동의 답을 컨닝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위한 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불행은 이런 컨닝을 통해 얻은 답이 모두 오답이라는 것이지요.
오답 컨닝
(눅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오답 커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분명히 있구나 싶어서 엄마가 아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봅니다.
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음악시험을 빵점을 맞았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맨 마지막 한 문제를 모르겠어서 마음에 당황하고 있다가 앞의 아이의 답안지를 보고 답을 썼답니다.
그런데 그걸 선생님이 본 거예요.
엄마가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선생님 말씀이 ‘너 남의 것 봤어, 안 봤어?’ 했더니 아이가 벌벌 떨면서 마지막 문제를 봤다고 얘기를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참 싱겁게 끝났죠.
선생님은 언뜻 보니까 본 것 같아서 불러냈는데, 얘가 너무 겁에 질려서 그렇게 얘기하니까 ‘너 이거 빵점이야’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죄송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으로서는 좀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아이가 너무 떨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데 나중에 선생님 말씀이 보고 쓴 답이 틀렸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리지널 답안지가 틀린 거였지요.
틀린 답을 써놓고 하나도 효과도 없었던 것을, 선생님은 그 문제가 맞았더라도 틀리게 하려고 했는데 아예 틀렸으니까,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고, 집에서도 엄마 아빠가 야단을 치고 ‘그러면 넌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점수는 제대로 주셨더라고요.
여러분, 목숨 걸고 커닝을 했는데 오답입니다.
이거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인간에게 정말 씻을 수 없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죄적인 체질이 생겼습니다.
그 체질이 두 가지 속성을 띠게 되는데, 첫 번째 속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 한분으로만이 채워질 수 있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 한분으로만이 온전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 마음이 하나님과 등지고 나서는 이 세상 안에서 마음을 채울 것들을 정해놓고 그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체질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등진 채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마음을 돈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건강, 승진, 결혼, 애인, 자식, 이런 것들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 체질의 첫 번째요, 두 번째 죄적 체질의 속성은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이 세상 안에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인간이려는 피조물 안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세워두신 것이에요.
하나님과 만나서 인간의 마음 안에 영이신 하나님이 가득 차게 되면, 거기에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게 됩니다.
그 하나님으로 만족해서 어느 것도 더 필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행동만이 정답일 수 있다는 거예요.
내 모든 행동의 정답은 하나님으로 온전한 만족을 이룰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은 단순히 음식처럼 채우는 것만 해주시는 게 아니라, 인격자이십니다.
그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대단한 바다와 산과 하늘만 지으신 게 아니라, 내 머리카락에까지도 관심을 가지시면서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관심 속에서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 내가 그로 인해 행복해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행동해야 될 모든 답은 그 인격자이시고 내 삶에 대해서 머리카락까지도 관심을 두고 계시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다 나오게 돼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면서 내 마음을 채울 행복의 원천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행동의 답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없음으로써 행동에 답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답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커닝이라는 거예요.
내게는 답이 없을 때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는 게 커닝 아닙니까?
오직 답은 내가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 들였을 때에 그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과 결별하면서 내게 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커닝하려고 합니다.
그 커닝하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대표적으로 책을 읽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독을 권합니다.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라고 얘기합니다.
아니에요, 책은 커닝페이퍼입니다.
공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무슨 뜻입니까?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거기에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나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
이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내 행동의 답을 얻으려는 것은 커닝입니다.
그것도 오답을 커닝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부흥이 막 되는 교회에 들어가서 어떻게 이 교회가 부흥이 되었는가? 들여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큰 부흥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이 쓴 책을 반드시 사서 읽습니다.
그 목사님들이 강사로 오시는 세미나에 반드시 참석을 하십니다.
다 커닝입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를 어떤 전문가도 대답해줄 수 없고, 동계 업종에 종사하는 어떤 사람들도 대답해줄 수 없고, 태초 이후에 지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의 답은 하나님 한분만이 알고 계십니다.
내일? 모레? 그때 또 그 행동은 어제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는 전문성입니다.
경험에서부터 답을 얻으려는 것도 커닝입니다.
절대로 경험에서부터 지금 내가 여기서 해야 될 행동의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건 오답을 커닝하는 것입니다.
전문성도 마찬가지에요, 아마 어느 한 분야에 전문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전문가는 느낄 것입니다, 나의 전문성에 엄청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피라미 전문가들이 내가 전문갑네 하고 다니지,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가 쌓아놓은 경험에서부터의 답들이 정답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에요.
이거는 수준 있는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얘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커닝을 합니다.
다 오답입니다.
책, 절대로 많이 읽지 마세요!
책은 어떨 때 읽는 거냐 하면, 하나님으로 만족해서 기쁨이 가득할 때, 그 하나님께서 내게 읽으라는 책을 읽으세요.
그 하나님께서 내게 쓰라고 하는 책을 쓰세요! 아무거나 휴지조각 같은 책들을 쓰지 말고…
자,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오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답을 커닝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라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깊은 데 가서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서 혼자서는 끌어당길 수 없어 옆에 동료들에게 와달라고 해서 겨우겨우 끌어올립니다.
자, 이 본문에서 언뜻 보기에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어요.
첫째, 예수님 때문에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많이 잡힌 정도가 아니라 고기잡이를 한 이후에 이런 대박은 처음입니다.
평생 고기잡이로 산 베드로에게 이렇게 고기가 잡혀본 적이 없을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사업의 최고의 번성을 이룬 것이고, 사업이 대박을 친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 때문에 대박이 난 이때, 왜 예수님을 떠나시라고 합니까?
예수님과 계약을 맺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예수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예수님은 계속 나에게 이렇게 대박을 치도록 해달라는 계약서를 써야 될 때가 아닙니까?그런데 왜 사업의 대박의 순간에 예수님을 떠나시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왜 사업의 대박의 순간에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는 겁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잘되고 형통할 때, 내가 의인 됨, 내가 그래도 뭔가 괜찮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신다고 하는 나 자신의 의인 의식이 같이 증대되는 것이 일반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일이 안 될 때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하지요, 일이 잘될 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괜찮구나 생각하는 게 당연한데,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히게 해서 축복을 해주신 순간에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내가 죄인인 걸 알았으면 왜 또 예수님을 떠나시라고 할까요?
죄인일수록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또 왜 무서워했을까요?
이 말이 기가 막힙니다, 왜 무서워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그러신 걸 보면, 무서워한 것임에 틀림없지 않겠어요?
왜 무서워했을까요?
이 본문이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했더니 ‘아!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그러니까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 이런 본문이 아닙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어디 있는가 하면, 여러분, 4절과 6절 사이에 5절이 왜 끼어있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해석의 키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4절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했으면 5절의 내용이 없이, 혹은 5절이 있으려면,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예하고 갔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말이 너무 많아요, ‘예’ 한 마디만 하고 6절로 넘어가면 돼요, ‘고기를 많이 잡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다 필요 없는 말이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것에서 베드로가 오답을 커닝하는 죄적인 기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분석해보면 이런 겁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아직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존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아직은 그 지혜와 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예수님의 출신은 목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우리들이’라고 말할 때, 그 속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 하면 될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면서 ‘우리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우리들은 이 갈릴리 이 바닷가에서 태어나서 이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고기잡이 하는 걸 보고 배웠고 우리도 평생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목수가 아닙니까?’라는 얘깁니다.
‘목수께서 능력과 지혜의 말씀을 베푸시기에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는 합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선생님께서 지금 우리 어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해서 잡은 것이 없지만…’, 이 얘기는 ‘이 갈릴리 북서부 지역에서 우리가 고기를 못 잡았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여기서 고기를 못 잡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선생님께서 평생을 여기서 고기잡이를 한 우리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못 잡았는데?’
그래서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이 말을 자꾸 오해해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반항하는 겁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니까, 아이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공부? 공부해요, 공부해! 공부한다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예요.
진짜 말씀에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면 ‘예’ 하고 가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예수님!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지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것은 내가 어부로써 갖고 있는 경험에서부터 나오는 그 지식에 의해서 내가 내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리는 것이니까, 내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면 당연히 허탕을 칠 텐데, 허탕이 나올 때 책임은 예수님이 지세요!’라는 얘깁니다.
내 행동의 책임소재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분명히 헛방을 칠 텐데, 왜 헛방이냐 하면 고기 잡는 것에서는 내가 답을 갖고 있는데, 답을 갖고 있는 내가 못 잡았다면 잡을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그런데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것도 평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만큼 대박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무서워합니다.
왜 무서워합니까?
베드로, 못 배운 사람입니다, 아무리 못 배웠어도 자기 인생의 의미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갈릴리 지역에서 고기 잡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요, 답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같은 마을의 다른 어부들로부터 배운 경험에서, 내가 직접 체득한 경험으로부터 고기 잡는 것에 대한 답이 있다고 믿었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할 때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라고 하는 이 틀린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확인시켰던 이유는 깊은 데는 경험상 고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는 북쪽의 헬몬 산으로부터 눈이 녹아내려 흘러들어온 물이라 차가워요.
그래서 물이 많이 모인 곳은 너무 차갑기 때문에 고기가 못 삽니다.
그래서 햇빛이 비칠 때, 좀 따뜻한 지역의 얕은 곳에 고기가 주로 있고, 그것도 이런 대낮에는 고기가 이동을 하지 않고, 밤과 새벽에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대낮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한 것은 베드로가 갖고 있는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고기잡이의 정답에 비추어볼 때는 완전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틀린 이야기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대로 고기가 잡힙니다.
이제 베드로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뭡니까?
인생의 근거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내 행동의 답을 알 수 있는 영역이 있을 때라는 것이에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인생의 의미를 느끼는 것은 이 어린아이가 보존되기 위해서 행동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 말합니다.
‘나를 떠나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라는 말은 빗나간다는 뜻이에요.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제사적 의미에서의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 ‘죄인’은 ‘나는 이 인생에 있어서 인간사회가 만들어놓은 영역 중에 그 어느 영역에 대해서도 답을 알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하실 때 예수님의 필요에 적중시킬 수 있는 요소가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영역 그 어느 곳에서도 답을 낼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답을 낸 것으로 예수님을 끌어들입니다, ‘내 답을 이루어주세요!’
그래도 베드로는 생각이 달랐어요, ‘내가 예수님께 도움이 되겠느냐?’
우리는, ‘예수님이 내게 도움이 되겠느냐?’를 묻고 예수님을 찾는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죄인이라고 말한 겁니다.
‘당신이 필요로 하시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나는 답을 낼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필요를 적중시킬 수 없고 빗나갈 수밖에 없는 나를 떠나주세요!’
그리고 베드로가 인생이 휴지가 돼버리는 순간입니다.
왜?
그나마 고기잡이에서는 답을 낼 수 있었다고 믿었는데, 그 고기잡이에 대해서도 자기가 내린 답이 없다고 하면 평생의 어부의 경험이 다 휴지로 돌아가는 판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어떤 영역에서도 답을 낼 수 없는 휴지와 같은 인생으로 자각하는 그 순간에 주님이 베드로를 필요로 하시며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을 취하는 어부가 되게 해주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내게 맡겨진 아이들, 나와 인연을 맺게 된 배우자, 내게 허락하신 직장, 내게 허락하신 전문분야,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답이 없는 사람을 주님은 필요로 하시고, 그 답이 없는 사람을 필요로 하셔서 끌어당기시고 당신의 측근으로 만드셔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때 그 순간 그곳에서 이루어져야 될 내 행동의 답을 하나님이 지금 수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누가 예수님의 측근이 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데오빌로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친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대해 답이 없는 자,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일지라도 나의 전문성을 믿지 않는 자,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전문분야에 대해서 죽고 다시 응애 하고 태어나서 내 전문분야에 대해 갓난아기가 된 상태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채, 그 하나님으로부터 전문성이 다시 시작되는, 그 하루에 20년 전문지식이 새로 거듭나서 주어지는 겁니다,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어제까지 전문가가 오늘 어제에 이어서 오늘 전문가가 아니라, 20년 30년의 전문적 경험 전체가 십자가로 죽은 다음에 태어나서 다 오늘 다시 주어지는 것으로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과 수직으로 답을 얻어내서 사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 가까이 가고 주님의 측근이 될 수 있는 자라는 겁니다.
고기잡이에서조차도 답을 낼 수 없어서 자기 인생을 휴지로 자각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베드로가 첫 번째로 예수님이 부르셔서 곁에 두시는 예수님의 측근이 되었다는 이 사실, 십자가를 통하여 오답 커닝의 체질을 오늘도 죽여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나에게 행동의 답을 요청하는 모든 상황, 모든 대상에 대하여 답이 없는 자로 남아있게 하심으로 진정한 예수님의 측근이 되게 하여 주시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답을 따라서만 행동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