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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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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권문화 스크랩 구가암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32 12.03.12 10: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구가암(九佳庵)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 579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 579)
건 축 주 :  진성이씨 문중
건축시기 :  1825년(순조 25)
소 유 자 :  이정(관리자 : 이정)
문 화 재 :  봉화군 시도유형문화재 283호, 1993-11-30 지정, 1동

건축 배경
이동표(李東標)의 둘째아들 이제겸(李濟兼:1683∼1742)의 묘소를 지키기 위하여 증손 이한정(李漢挺)을 중심으로 문중 자손들이 1825년(순조 25)에 건립한 재사이다. 문중의 일을 논의하거나 지방 사림의 크고작은 모임, 또는 시회(詩會)를 여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건축 특징
까치구멍은 초가지붕에서 보이는데, 여기서는 기와지붕 속에서 나타난다는데 특징이 있다.

건축 구성
ㄱ자 구조의 평면 구조 건축물

구가암은 ㄱ자를 옆으로 엎어놓은 평면 구조이다. 오른편 끝으로는 1칸 앞으로 튀어나온 여견재가 있고, 그 왼편으로는 1칸 안으로 물러난 구가암 본채가 동·서 축을 바탕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오른편의 1칸 더 튀어나온 여견재 부분에서는 측면 3칸 규모가 된다. 여견재의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누각이다. 누각은 2층의 누대 위에 서 있고, 아래편으로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이고, 그 뒤편으로는 방이 있다. 아궁이는 그 방에 불을 지피기 위한 것이다.

누각은 3면으로 쪽마루가 둘러져 있다. 기둥만큼의 굵기를 갖는 마루틀 사이에 두터운 마룻장이 깔려 있는데, 폭은 두 뼘 정도 된다. 마루 끝의 마루틀은 마룻장보다 조금 높이 배치되어 있다. 난간이 없으므로 이 부분을 걷는 것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인다.

마루는 누각을 ㄷ자로 휘돌아 왼쪽으로 더 뻗어나간다. 왼쪽으로 3칸, 그러니까 왼쪽 건물의 왼쪽으로부터 제 3칸 부분에까지 쪽마루는 같은 폭으로 뻗어 나간다. 누각의 마룻장 높이와 왼쪽 건물채의 마룻장 높이는 왼쪽의 경우가 손가락 두 마디 가량 낮다. 마루는 건물의 오른쪽 측면으로도 뻗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앞으로부터 제 3칸 끝부분까지 마룻장이 나아가는데, 제 3칸에 이르러서는 역시 높이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낮아진다.

건물의 왼쪽 끝 부분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부엌이다. 앞에서 보았을 때 왼편 끝의 1칸은 처마를 반 칸 정도 달아맨 것으로 부엌의 빈 공간과 뒤편으로 광이 배치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의 이전 용도는 지금과는 달랐겠지만, 지금은 부엌 안 수도가 마련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 2칸은 부엌문이 달려 있는 부분이다. 부엌문의 문지방 부분은 상당히 두터운 사각 목재이다. 마치 들보로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목재가 바닥에 깔려 있다. 우리의 일반적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 두께인 셈인데, 구가암에서는 이런 점이 특별히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칸은 주초 부분 1, 대문 부분 4, 위편의 벽 부분 2의 비례로 횡분된다.

벽은 백토로 칠해져 있고, 주초 부분은 대부분의 영역이 예의 굵다란 문지방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문 부분은 중앙에 2짝의 문을 두고 양쪽으로 판자를 수직 방향으로 붙인 것이다. 문짝은 위 아래가 다 나무를 밖으로 덧대어 문짝을 세우는 방식을 썼다. 아랫부분의 양쪽에 댄 나무는 문지방만큼이나 굵은 토막이다. 이 토막의 위쪽으로 홈을 파서 나무문의 양 끝에 만들어진 쐐기 모양의 나무 돌기를 넣어 돌아가게 하는 방식이다. 나무돌기가 들어간 홈에는 또 앞쪽으로 통하는 구멍이 마련되어서 그 안에 물이 들어가거나 흙이 찼을 때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게 하였다. 위쪽의 고정틀은 문틀 전체의 위쪽을 가로지르면서 덧대어져 있다. 그것은 밖으로 3개의 불룩한 곡면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양쪽 곡면 부위에 홈을 파서 문의 위쪽 돌기를 집어넣도록 되어 있다.

현판
구가암(九佳庵)
구가암은 정면 왼쪽 건물 처마에 남쪽을 바라보고 게시되어 있다.
여견재(如見齋)
여견재는 누각 부분 처마에 동쪽을 바라보고 게시되어 있다.

 

문중 이야기
- 이제겸의 선조들
이우(李?, 1469~1517)는 자가 명중(明仲), 호가 송재(松齋)이다.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판서공 이계양(李繼陽)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모친은 영양김씨 김유용(金有庸)의 딸이다. 형은 진사공 이식(李埴)으로, 퇴계 이황의 부친이다. 이식과 이우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똑같이 지역 선비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이식이 일찍 타계하자 이우는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가르쳤다. 퇴계 이황은 특히 숙부인 이우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이우는 이황을 ‘광상’, 즉 ‘이마가 넓은 아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이황은 만년에 “내가 학문을 성취한 것은 오로지 숙부의 가르치심 덕분”이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우는 조정에 출사하여 용재(容齋) 이행(李荇), 충재(?齋) 최숙생(崔淑生), 음애(陰厓) 이자(李?),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충재(?齋) 권벌(權?) 등과 교유하였으며, 시와 술을 즐겨 하였다.
송재 이우는 24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에는 문과 급제로 출신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부터 벼슬을 시작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에는 류자광(柳子光)을 탄핵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중종반정 때에는 정국공신에 녹훈되고, 청해군에 봉하여졌다. 진주 목사 시절에는 관내에 거주하는 포은 정몽주의 증손녀 정씨를 포상하여 달라는 상소를 올려 실행하기도 하였다. 정씨부인은 갑자사화로 죽은 조지서(趙之瑞)의 아내로 정절이 높고 효행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강원도 관찰사 시절의 시 ?인제남강을 건너면서?는 그가 어떤 벼슬아치였는지를 알게 한다.
일만 마리 소, 땀을 흘려서
사슴 밭을 일궈냈네
힘을 다해도 자신의 것으로는 되지 않느니
모두 다 관청의 차지
세금으로 내고 공물로 바치고
사사로이 쓴 빚도 갚아야 하리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깎여나가고
시궁창에 넘어박혀 죽어나가도 돌아보는 이 없네
아무리 힘써도 잘 먹고 잘 살지 못하는 건
세상에 너 뿐만은 아니지
밭가는 사람 배부르지 않고
누에치는 아낙 따뜻하게 못 입네
만사가 이러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어라
무슨 수 써서라도 5정역사(五丁力士) 불러내어
만 자루 도끼를 쥐어 주고
강을 막고 산을 깎아
뽕밭 삼밭을 일구리라
그런 다음에야 이곳 백성 편히 살 수 있으리니
백성의 곤궁한 삶을 아파하는 목민관의 의식이 이 시에는 잘 갈무리 되어 있다. 시인 송재의 모습은 ?딱따구리?라는 시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날개 환하게 빛나는데
아침 햇살이 그 위에서 부서지누나
한 나무를 다 쪼지도 못하고서
다시 늙은 괴목과 버드나무에 옮겨가 쪼는 구나
버드나무 가지 사이 넘나들며 배를 채우네
나무는 벌레를 없애주니 즐거우리라
그러나 나무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는 법
쪼는 것이 늦었으니 무슨 공이 있겠는가
절묘한 은유 속에 웅변을 묻어두고 있는 시라고 하겠다.
(이상은 진성이씨 송당공파 세보를 인용하였다.)
송재 이우는 49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배위는 정부인 월성이씨이다.
이우의 아들 이수령(李壽?, 1502~1539)의 자는 대년(大年)으로 음사로 찰방을 지냈다. 배위는 의인 은풍신씨이다.
이수령의 장자 이빙(李憑, 1520~1585)의 자는 보경(輔卿), 호는 만취헌(晩翠軒)으로 퇴계 이황에게 수학하였다. 이황이 호를 지어주고 현판을 써 주었다. 은일로 부수 첨정(副率僉正)에 천거되었다. 후에 태복 정이 증직으로 주어졌다. 배위는 숙인이 증직으로 내려진 광주김씨이다.
이수령의 2남 이결(李潔, 1526~1583)은 자가 탁경(濯卿), 호는 도연(道淵)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목사를 지냈다. 상주 도연에 옮겨 살았고, 묘도 도연에 있다. 배위는 숙인 동래정씨이다.
이수령의 3남 이충(李?, 1528~1581)은 자가 사거(思擧), 호는 고암(古庵)이다. 예천 사월리에 옮겨 살았다. 이황에게 수학하였다. 배위는 단인 전의이씨, 후 배위는 단인 예안김씨이다. 이제겸은 이충 계열에 속한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이한기(李漢綺),이중연(李重延),이교영(李敎英)
- 제사 인물

이제겸(李濟兼)
- 이제겸과 그의 후손들
이제겸(李濟兼, 1683~1742)의 부친인 이동표(李東標, 1644~1711)는 자가 군칙(君則)이고 호가 나은(懶隱)이며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진성이씨(眞城李氏) 송당공파(松堂公 派) 세보(世譜)에서는 이 계열을 송재 이우에서 시작되어 나은 이동표로 이어진다고 정리하여 주고 있다. 이동표는 이 계열의 진성이씨 세계(世系)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으로 춘양에 이거하여 살았고 배위는 증 정부인 안동권씨이다.
이동표의 장자는 이회겸(李晦兼, 1677~1724)이다. 자는 명경(明卿)이고, 통덕랑이다. 배위는 공인 안동권씨이다.
이동표의 부친은 이운익(李雲翼, 1612~1664)이다. 자는 자의(子儀), 배위는 순천김씨이다.
이운익의 부친은 이지온(李之?)인데, 자는 덕성(德盛)으로, 1592년(선조 25)에 출생하였으며, 배위는 영해신씨이다.
이지온의 부친은 이장도(李章道)인데, 자는 비숙(斐淑)으로 1572년(선조 5)에 출생하였고, 배위는 예안김씨이다.
이장도는 이충의 3남이다. 이장도의 백형은 이규도(李揆道)이고, 둘째형은 이일도(李逸道)이다. 이제겸은 이우로부터 이동표에게로, 이동표로부터 이충-이장도 계열로 이어 내려온 진성이씨 일문의 세계를 상속하였다.
이제겸의 자는 선경(善慶), 호는 두릉(杜陵), 본관은 진성이다. 나은 이동표의 2남이다. 1714년(숙종 4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별시과거에 참시관이 되었다. 율봉 찰방에 부임한 이듬해 이인좌의 반란으로 청주병사가 살해되고, 이어서 진천·안성이 습격당하는 등 사태가 위태로워졌다.
이제겸은 역마를 민가에 숨겨두고 율봉에서 백 리쯤 떨어진 중약에 숨어 있었는데, 적당이 율봉을 급습하여 역마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이제겸은 어찌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가다가 도원수 조명항(趙命恒)을 만나 적을 토벌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난이 평정되고 나서 임지로 돌아갔는데, 적당 중의 1명인 강필선이 “율봉 찰방 이제겸이 역마를 난군에 제공했다.”는 무고를 하여 죄를 얻게 되었다.
이제겸은 평안도 신천에 유배되었다가 제천으로 배소가 옮겨졌으며, 이듬해 나라에 경사가 있어서 풀려났다. 그때부터 이제겸은 노루골에 숨어서 산수를 벗하며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이제겸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고, 『상례절(喪禮節)』, 『두릉집(杜陵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창랑정사는 이제겸이 머물러 앉아 공부하던 곳이다. 구가암은 이제겸의 후손들이 그의 묘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제겸의 아들은 이중연(李重延, 1711~1794)이다. 자는 희원(希愿), 호는 누실(陋室)이다. 묘는 소천에 있다. 첨추(僉樞)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 풍산류씨이고, 후 배위는 숙부인 진주강씨이다. 아들이 없어서 이중실(李重實)의 아들 이진규(李鎭奎, 1740~1797)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이진규는 자가 치오(稚五), 호가 풍락정(風洛亭)이다. 묘는 분천에 있고,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이진규의 아들은 이한기(李漢綺, 1761~1808)이다. 자는 백원(伯元), 호는 오류헌(梧柳軒)이다.
이교영(李敎英, 1833~1895)은 자가 화여(華汝), 호는 귀은(歸隱)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영해 부사, 청송 부사를 역임하였다. 문집과 『송서요훈(宋書要訓)』을 남겼다. 향산 이만도의 행장이 있으며, 서산 김흥락이 묘갈을 찬하였다. 배위는 숙인 풍산김씨이다.
이교영의 부친 이득노(李得魯, 1808~1873)는 호가 정와(靜窩)이고, 배위는 풍산김씨, 후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이득노의 부친 이의상(1792~1851)은 호가 화남(華南)이다.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그는 이한기와 완산유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이교영의 아들은 이종대(李鍾岱, 1867~1926)인데, 자는 태숙(泰淑), 호는 기포(杞圃)이다. 유고를 남겼고, 배위는 공인 풍산류씨이다. 이종대의 아들은 이갑수(李甲洙)이고, 손자는 현 종손인 이정이다.

 

봉화 > 법전춘양권 > 눌산리
- 감보개 사람에게 눌려지낸 눌산리 이야기
경상북도 봉화군 눌산리는 남쪽으로는 낙동강, 북쪽으로는 36번 국도, 동쪽으로는 임기, 서쪽으로는 소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한가운데 해발 607m인 월암산을 두고, 그 사방 산록에 자리 잡고 있는 여러 자연 부락들로 이루어진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서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눌산리의 중앙, 월암산의 서쪽 편으로는 눌산고을이 있다. 눌미, 눌매라고도 불린다.
눌산은 두 마을로 나뉜다. 감보개와 눌산이다. 늘 감보개 사람에게 눌려 지냈다 하여 눌산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위쪽의 감보개는 상눌산, 아래쪽의 눌산은 하눌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감보개는 현포라고도 하는데, 눌산리에서 제일 먼저 개척된 고을이다. 눌산고을의 서편으로는 거리늘미가 있다. 눌산고을과 거리늘미는 같은 마을로 이어져 있지만, 둘 사이를 개울이 갈라준다. 거리늘미는 그 서쪽 편 마을이다. 눌미에서 춘양 나가는 길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서 거리늘미이다.
거리늘미의 서쪽으로는 새터가 있다. 소천 쪽에서 눌산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마을이다. 감보개 사람들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면서 새로 만든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 또는 신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의 서편으로는 춘양에서 명호 나가는 35번 도로가 가설되어 있다. 35번 도로는 소천을 지나 명호 쪽으로 오면서 산 위로 상승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명호에 이르기까지 산 위를 달리는 능선길의 모습을 갖춘다. 그 상승의 시작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새터고을이다.
새터고을로부터는 눌산리를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202번 마을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동쪽으로는 노루골에서 영양을 향해 뻗어 내리는 31번 국도와 연결된다. 새터고을의 남쪽으로는 산골짝을 넘어서 호산과 홈재가 있다. 눌미의 남동쪽으로는 마그내고을이 있다. 두천, 또는 농천이라고도 불린다. 마그내는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눌미의 북쪽으로는 고늘미와 마너뫼 고을이 있다. 고늘미는 고눌산, 고눌미라고도 하며, 마을 앞에는 서낭당이 있고 300년 이상 된 당나무가 있다.
눌산 북쪽 멀리로는 마너뫼가 있다. 마너뫼는 매산이라고도 한다. 1796년경에 진씨 성을 가진 선비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마을 산이 말 등같이 생겼다 하여 마너뫼라고 한다. 월암산의 동쪽 아래편에 물알, 위편에 방고개가 있다. 202번 도로의 동쪽 끝, 31번 도로의 동편으로는 부트내와 검상골이 있다. 이 부근의 골짜기 속에는 구가암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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