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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부산의 경제] 6·25 전쟁은 부산 경제의 전개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우선 6·25 전쟁에서 부산은 유일하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도시였다. 게다가 부산은 3년 가까운 임시 수도로서 한국 경제 정책의 중심지였고,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과 자본이 이동해온 곳이었다. 아울러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부산은 급속히 팽창하였다. 이들은 다른 도시에 비해 부산의 경제 회복을 유리하게 하는 조건들이었다. 해방 당시 28만 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1949년에 47만 명으로 늘어났고, 휴전이 되고 2년이 지난 1955년에 부산은 인구 1백만 명이 넘는 도시가 되었다. 해방 후 10년 사이에 인구가 거의 4배로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도시 계획보다 먼저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도시가 기형적으로 성장해 갔지만 풍부한 노동력은 공업 투자의 좋은 유인이 되었다. 또한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부산은 미국 원조 물자의 유입 창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부산은 1950년대 한국의 공업화를 특징지은 3백 산업[설탕, 밀가루, 면화]이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한국 원조는 해방 직후 미군의 진주와 함께 계속되었는데, 특히 6·25 전쟁 종전 후에 대규모 원조가 이루어졌다. 미국의 원조는 주로 긴급 구호를 위한 소비재와 잉여 농산물이었는데, 이는 주요한 공업 원료이기도 하였다.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제면과 제당 그리고 제분의 3백 산업이 잉여 농산물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제일제당이 부산에서 설립된 것도 원조 물자에 의한 것이었다. 6·25 전쟁이 부산 경제에 미친 영향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부산항의 중요성 증가이다. 해방은 일본과의 경제 관계를 단절시키고 홍콩이나 마카오 등 중국과의 교류를 증가시키면서 인천항을 관문으로 다시 등장시키고 있었다. 부산을 대신하여 다시 인천이 한국의 제1 관문이 되는 흐름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키고 다시 부산을 한국의 대표적인 항만으로 올려놓은 것은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이었다. 6·25 전쟁 이후 1950년대를 통해 부산항은 한국 제일의 확고한 무역항으로 교역품의 70%를 전후한 물동량을 처리하였다. 2. 동천 주변에 몰려든 기업들 일제 강점기 부산의 중심은 오늘날 원도심으로 알려진 중구, 동구, 영도구 지역이었다. 해방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공장 설립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입지가 필요하였다. 해방 이후 신발과 섬유 공업을 두 축으로 많은 기업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러한 기업들의 새로운 입지가 된 곳이 동천 인근 지역이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동천은 서면 영광도서 앞과 롯데 호텔 옆 복개 도로를 거쳐 동구 범일 5동의 북항으로 이어지는 긴 하천이다. 이 동천은 6·25 전쟁 후 부산의 많은 기업들이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용지의 부족은 부산의 태생적 한계였는데, 인구의 증가와 공장의 활발한 설립은 동천 주변의 땅에 기업들을 밀집시켰다. 기존 도심과 그리 멀지도 않고 또 부산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평평한 땅이 있는 동천 주변을 기업들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물이 있어 용수를 확보하기 쉬운 것이 좋은 입지의 조건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기업들은 관정(管井)을 뚫어 동천 변의 지하수를 공업용수로 사용하였다. 신진자동차와 락희화학, 대선주조, 동양고무, 흥아타이어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들이 동천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었던 조선방직도 범일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의 규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컸고 또 역사도 오래되다 보니 조선방직이 있던 지역은 오늘날에도 조방앞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방직은 1960년대 후반 경영난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3. LG와 삼성도 부산에서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한 LG와 삼성의 모태도 동천이었다. LG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는 1951년 부산시 서구 대신동에서 출발하였는데, 1955년 연지동으로 옮기면서 최초로 국산 치약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럭키치약이다. 럭키치약은 출시 3년 만에 국내 시장을 석권하였는데, 이후 그룹의 이름을 ‘럭키’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락희화학 자리에는 현재 LG사이언스 홀이 세워져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삼성의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제일제당이 건립된 곳도 동천이었다. 1953년 가을 흰색의 큰 건물이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했던 제당 공장이었다. 전포천과 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 537-9번지 일대에 설립된 제일제당은 당시 중요한 미국 원조 물자였던 원당을 기반으로 급성장하였다. 이후 삼성에서 분리된 CJ그룹의 모태가 되는데 CJ의 이니셜은 바로 제일제당에서 따온 것이다. 제일제당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부산의 대표적인 소주 회사인 대선주조도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세워진 기업으로 범일동에 있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대표적인 장수 기업이다. 오늘날의 신선대 부두 자리로 옮겨가기 전 동명목재도 동천에 있었다. 동천의 지류인 전포천에는 1955년 세워진 신진공업사가 있었는데 이 신진공업사는 훗날 대우버스가 되었다. 신발 기업들도 동천 주변에 많이 자리 잡았다. 1953년 기차표 신발의 동양고무가 초량에 건립되었는데 1963년 부암동으로 옮겨왔다. 범표 신발의 삼화고무가 범천동에 있었고, 1963년에는 진양화학이 설립되었다. 진양화학이 있던 인근 지역은 오늘날에도 진양IC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대상그룹의 모체가 된 미원 간장 공장도 동천의 지류인 당감천의 하천가에 있었다. 이후 동천 주변은 도시화로 인한 주거의 필요성으로 기업들을 몰아내면서 부산 최대의 도심인 서면을 형성하게 되었고, 동천 주변에 몰려있었던 기업들은 사상 공업 지역이 만들어지면서 많이 이전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