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금북정맥 02차(배티고개~유랑리고개)
산 행 일 : 2014. 02. 07. ~ 08.(토)
산행코스 : 배티고개~서운산~엽돈재~부수문이고개~성거산~걸미고개~태조산~유랑리고개
(산행거리 23km)
산행참가 : 16명.
<산행코스> (지도의 차수와 날짜에 오류가 있다!)
요즘은 겨울 산행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비'예보가 많다. 지난 산행에 이어 이번 산행에도 비 예보가 있었으나, 다행히 이틀을 앞두고 눈으로 바뀌더니 양도 1mm 미만으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지난해에는 충청 서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렸는데, 올해는 강릉 쪽이 난리가 아니다. 엇그제부터 내린 적설량이 60cm에 달하고 토욜까지는 1m가 넘게 내릴 것이라 하니, 눈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일지 몰라도 영동지역에 사는 분들은 참으로 힘든 날들이 될듯하다. 그렇게 한 곳에만 내릴게 아니라 우리가 산행하는 충청도 지역에도 눈을 좀 나눠 내려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버스가 눈길에 심하게 미끄러지고 있다는 느낌에 눈을 떴으나, 창밖은 깜깜해서 보이지를 않고 그저 오늘 눈이 온다고 했으니 지금쯤 내리고 있으려니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가 시간이 되어 일어나 보니, 아직도 눈은 오지 않고 있었고, 지난밤 버스가 미끄러진 것은 일부 구간 도로가 결빙된 곳이 있어서 그런 듯하다고 한다. 은근히 하얀 눈산행을 기대했는데...
배티고개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마치고,
진천군 백곡면에서 설치한 표지석의 '生居진천'을 보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부터 서운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신장로처럼 널찍하게 이어진다.
무명순교자 6인묘 갈림길을 지나,
<배티성지> 배티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이어지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골짜기로, 1830년을 전후로 교우촌(비밀신앙공동체)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66년 즈음에는 교우촌이 16곳에 이르렀던 곳이다, 또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마을이고,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1821~1861)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교리서인 '천주가사'가 탄생되었던 곳이다. 배티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그중 29명은 교회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이름 없는 묘소로 산재해 있다.(펌)
배티성지 갈림길.
석남사 갈림길1.
<석남사(石南寺)> 서운산 석남사는 680년(문무왕 20)에 고승 담화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석선(奭善)이 개산 하면서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후 876년(문성왕 18) 염거대사가 폐허가된 석남사를 중수했고, 고려 광종(光宗)의 왕사였던 혜거국사가 중창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 조선 초기에 숭유억불 정책의 하나로, 전국에 있는 사찰들을 통폐합할 때 안성군을 대표하는 자복사찰로 선정될 만큼 전국적인 명찰이었으며, 세조가 친필 교지를 내려 승려들의 부역을 면제해준 사찰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으나 효종 때(재위 1649∼1659) 석왕사의 해원이 중수하여 사세를 확장했으며, 1732년(영조 8)에 다시 중수했다. 문화재로는 석남사 대웅전(경기유형문화재 108)을 비롯하여 석남사 영산전(보물 823), 석남사 마애여래입상(경기유형문화재 109) 등이 있다.(펌) 석남사 갈림길2.
석남사 갈림길3. 거의 5분여 동안에 석남사 갈림길 이정표를 세 개나 지난다.
서운산(547m) 정상. 산불감시카메라와 삼각점이 있는 이곳이 실제 서운산 정상이고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또 다른 정상은 안성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등산객들을 위해 그리 배려해 놓았다는 예기도 있다.
서운산 갈림길. 어둠 속에서도 상서로운 구름에 쌓여 있다는 서운산을 향한다.
서운산 갈림길 이정표.
서운산 정상부.
서운산성 안내문.
<서운산(瑞雲山 547m)> 경기도의 최남단인 안성시 서운면과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의 경계로, 상스러운(瑞) 구름(雲)이 서려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안성시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다. 아담하고 바위가 거의 없는 유순한 산세를 하고 있으며, 4월초가 되면 계곡과 능선에 진달래가 피고 5월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룬다. 청룡사, 석남사 등의 산사와 청룡사 대웅전(보물 제824호), 청룡사 삼층석탑, 명부전, 관음전 및 조선 현종 때 주조한 무게 약 5톤의 동종 등의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년)에 명본국사가 대장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로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중건하면서 '청룡이 서운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하여 산 이름은 서운산, 절 이름은 청룡사로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 때에 홍계남이 수축하여 방어전을 전개하였던 산성이 있는데, 반면식 토축산성으로 서쪽 능선에서 남쪽 방향으로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까지 펼쳐져 있다.(펌)
서운산 정상 전망데크에서 보는 안성시내 야경이 서울처럼 넓게 펼쳐진데 놀란다.
서운산 정상(547.4m) 표지목은 안성시에서 만든 것인지, 산림청에서 만든 것인지?
안성시 야경이 제법 그럴듯하여 서울의 야경이라 우겨도 될만하다.
<안성맞춤> 제 짝이 아니었던 것을 갖다 맞출 때 매우 잘 맞음의 비유나, 결혼을 할 때 생전에 보지 못한 사람끼리 부부로 잘 어울린다고 할 때에도 "안성맞춤"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그만큼 어떤 물건이나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릴 때 이런 말을 쓰는데, 안성은 유기제품을 장인정신과 뛰어난 솜씨로 정성껏 만들어, 품질이나 모양 등 기교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안성맞춤'이란 말이 유래될 정도가 된 것이다. 안성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안성의 시장도 발달하여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번성하였다. 안성에서는 시장의 발달과 더불어 각종 수공업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유기제품이었다. 시장에서 일반 서민들을 상대로 하여 파는 놋그릇을 '장내기'라 하였고, 한양의 양반들이 주문하여 특별히 그 모양과 품질을 잘 만든 놋제품을 '모춤'유기라 하였다. 안성모춤 유기는 그 품질이 믿을만하여 '안성모춤'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것이 오늘날 어원의 변화에 따라 '안성맞춤'이라는 일반명사로 쓰이게 된 것이다.(펌) 서운산 정상 인증을 남기고, 서운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금북길을 이어간다.
금방 헬기장 갈림길을 만나 엽돈재 청룡사 방향 좌틀하여 진행한다.
<청룡사(靑龍寺)> 고려 원종 6년(1,256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펌) <안성 남사당패와 바우덕이> 청룡사 안쪽의 불당골은 100여 년 전 나라안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안성 남사당패의 본거지였다. 서민 사회에서 발생한 예인(藝人) 집단인 남사당은 성립 배경이나 연원은 확실치 않으나, 일정한 거처가 없는 독신 남자들 만으로 이루어졌다. 남사당이 펼쳐온 놀이는 풍물, 대접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탈춤, 꼭두각시놀음 이렇게 여섯 가지로, 밥 먹여주고 잠재워 주면 다른 보수 없이도 밤새워 놀곤 했다. 이들의 은거지로는 경기도 안성·진위, 충남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이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안성 서운산 불당골의 팔사당마을을 은거지로 삼았던 안성 남사당패였고, 그 인기의 한가운데엔 드물게도 ‘바우덕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바우덕이에 대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1865년 대원군 시절, 경복궁을 중건할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남사당패 중 안성 남사당패가 인기 있었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춤·줄타기는 일품이어서 넋을 빼앗긴 일꾼들이 빈 지게만 지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대원군은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옥관자(정3품에 해당)를 하사 했다고 한다. 이 지방에 전하는 속요엔 바우덕이의 명성이 잘 드러나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이런 대중적인 사랑에 힘을 얻은 까닭인지 1910년경 안성 남사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대혁신을 한다. 그 후 그녀는 10여 년간 남사당패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기예를 펼치다 아쉽게도 꽃다운 나이 스무세 살에 폐병으로 청룡사에 요양하다가 처녀로 죽은 뒤, 가마니로 둘둘 말린 채 눈속에 묻혔다. 다만 “청룡리 개울가 어딘가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더라”하는 입소문만 간간이 전해질 따름이라나... <바우덕이(1848∼1870 )>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득(金岩德)으로, 그 이름이 바우덕이로 불리어진 내력을 생각하여 볼때에 이름자에 나오는 岩(암)이 바우이므로 <바우 + 德이 = 바우덕이>로 불리어진 듯하다.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이다. 조선시대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했으며, 5세 때 안성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했다. 15세 때 안성남사당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 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펌)
451봉쯤을 지나고,
421봉쯤에서 후미를 기다렸다가 1시 방향으로 진행한다.
3개 벤치 쉼터를 가운데로 지나치고,
<차령산맥(車嶺山脈)> 지도상 지금 통과하는 근처에 큰 글씨로 '차령산맥'이라 표시되어 있다. 사전에 나오는 차령산맥은? 태백산맥의 오대산(五臺山)에서 갈라져서 충북의 북부, 충남의 중앙을 남서 방향으로 뻗은 산맥. 길이 250km, 평균고도 600m, 마식령(馬息嶺)·광주(廣州)·소백(小白)·노령(蘆嶺)산맥 등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생대 말의 습곡산맥으로 편마암과 화강암으로 구성된 구릉성 산지이다. 또 차령산맥은 최한월(最寒月) 평균기온 -3℃의 등온선과 일치하여 한국의 기후구를 남부의 온대와 북부의 냉대로 크게 구분하는 경계가 되고 있다. 산맥 중에는 차령·백운산(白雲山)·만뢰산(萬山)·칠갑산(七甲山)·금계산(金鷄山)·서운산 (瑞雲山) 등이 솟아 있고 금·은·중석 등이 매장되어 있다. 특히 칠갑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경치가 아름다워 1973년 충남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과사전에는 '차령산맥'을 위와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2차 산맥이고, 오대산에서 시작되어 경기도 충청도를 남서 방향으로 뻗어 보령, 서천까지 이어졌다는 거지요. 옛날 지리 시간에 차령산맥이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다 등등을 외운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차령산맥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산맥이다. 우리나라의 산맥 개념은 1903년에 일본인 '고토 분지로'가 망아지 네 마리에 짐을 싣고서 인부 여섯 명과 함께 일년 두달만에 완성한 거라고 한다. 삼천리 우리 강산을 망아지 끌고 일년만에 태백산맥, 소백산맥, 낭림산맥, 차령산맥 등 14개의 산맥이 존재한다고 결론 지었다는 것이다. 1903년이면 일본이 한창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음모를 진행하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차령산맥이란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개념인데, 고토 분지로는 땅속의 지질학적 연속성만 따져 산맥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최근 KBS에서 항공촬영을 한 결과 차령산맥은 치악산을 지나면서 맥이 끊기고, 남한강에 막혀 그 여맥을 다한다는 것을 밝혔다. 또 국토연구원 지리정보시스템 연구센터에서 위성사진을 토대로 연구한 결과도 차령산맥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오늘 구간의 서운산 자락에도 여지없이 차령산맥이란 글자가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차량산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백곡임도 갈림길에서 직진의 엽전치 방향으로 진행한다.
잠시 후 좌회길인 듯한 곳을 지나 묘지 앞쪽에서 능선으로 복귀하는데, 좌측 아래쪽에 히든밸리CC가 있지만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사거리 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면,
390봉 정상에 서면, 우측으로 청룡저수지와 입장면 방향으로 불야성이 펼쳐져 있다.
390봉에서 처음으로 배낭의 물을 꺼내 목을 축이고서 엽돈재를 향한다.
엽돈재 도착.
<엽돈재(323m)>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등 삼도(三道)가 만나는 지점이다. 해발 고도 323m로 34번 국도가 여기를 지나며, 금북정맥(차령산맥)에 걸친 고개로 동쪽은 충북 진천시 이월면, 서쪽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남쪽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이다. 엽돈재를 다른 이름으로 엽전재(葉錢峙), 엽둔재(葉屯峙), 엽둔티, 율둔티 등으로도 불렀다. 고개이름 유래가 확실한 것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옛날 장을 보려고 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숲이 워낙 깊어 장꾼을 노리는 도둑이 많았던 관계로 엽전을 가지고 가던 사람은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 또한 엽돈재는 옛날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항시 군대가 주둔했을 정도로 고개가 험준한 곳이지만,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여 임진왜란 등 많은 전란 시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안성 사람으로는 홍계남이 의병 수천 명을 모군(募軍)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격전을 치른 곳이라 한다.(펌) 엽돈재에서 좌측 진천방향으로 진행하여 우측 절개지 끝부분까지 이동하면, 엽돈재(323m) 2등 삼각수준점이 있고,
'생거진천'표지석 앞쪽으로 엽돈재 들머리가 있다.
이제부터 금북길의 우측은 경기도 안성에서 충남 천안으로 바뀌고, 좌측은 충북 진천에서 충남 천안으로 바뀐다.
엽돈재를 출발하여 잠시 오름길을 오르다가 Y자 갈림길에서, 어느 쪽이나 다시 합류하지만, 좌측 오름길을 따르면 만뢰지맥 분기점봉에 도착한다.
<만뢰지맥> 만뢰지맥은 엽돈재에서 금북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200m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 하면서 만뢰산(612m), 덕유산(412m), 환희산(402m), 취령산/목령산(229m)을 일구고,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 다시 상봉산(196m), 국사봉(196m)을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건넌 뒤 마지막으로 응봉산(175m)을 거쳐 청주시를 바라보며 미호천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9.5km의 산줄기다.(펌) 만뢰지맥 분기점을 지나 어둠 속을 홀로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부소산 정상에 도착하고 잠시 기다리니 백두들이 도착한다.
<부소산(扶蘇山 459.1m)> '부소'는 '솔(松)'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옛 직산현의 동쪽과 목천현의 북쪽 경계를 이루던 산이며, 백제 시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부터 북동 100리 땅을 봉토받아, 백제 첫 도읍지(하남 위례성)를 세운 곳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부소산이란 명칭이 무척 귀에 익다 싶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았더니 이태전 금남정맥 마지막 구간에서 올랐던 봉우리가 '부소산'이었다는 게 생각난다. 이곳도 백제와 관련이 있다는데 부여의 부소산과 천안의 부소산은 어떤 관계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천안 입장 방향 야경을 잠시 둘러보다가,
후미가 도착하여 부소산 인증을 하고 부소문이고개로 향한다.
우측으로 청룡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아침식사 예정지였던 전주최공 묘지를 오름길이 남았다며 그냥 지나치니,
이내 부수문이고개에 도착한다.
<부수문이고개/부소령(274m)> 부소문이고개라고도 하는데, 57번 지방도가 천안 입장면 양대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백제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는데서 연유한다. '부소'는 '솔(松)'이라는 뜻으로 소나무산 고개라는 뜻이라 한다. 부소문이고개는 부소산과 위례산성을 이어주며 부소령, 부소치, 부소문치 등으로 규장각 고지도에 전하며 일명 부수문이고개라 불린다. 비류와 온조가 첫 도읍지로 정한 부소는 솔(松)의 뜻이며 백제어로 '부소모'이었다. 백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한 위례성에 대하여는 광주위례성설과 직산위례성설이 있다. 이곳은 직산위례성설의 그 위례성과 가까운 곳으로써 온조왕이 처음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으므로 부소문이고개라 부른다고 한다.(펌) 돌아본 부수문이고개 날머리.
천안 성거산 위례성 안내문도 읽는 둥, 마는 둥.
위례산을 향한다.
돌아본 부소문이고개.
부소문이고개에서 위례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차량도 다닐 정도의 널찍한 임도가 닦여져 있다.
널찍한 임도는 잘 단장된 묘지까지만 이어지고, 다시 좁은 등로가 위례산을 향한다. 아마도 묘지 단장을 위해 임도를 개설한 듯하고, 묘지 위쪽에서 바라본 동쪽 북면 대평리 방향으로 만뢰지맥 능선이 조망된다.
돌아본 부소산 방향.
잘 단장된 소나무 쉼터를 연이어 통과하고,
디딜방아 모양의 통나무 벤치 쉼터도 지난다.
잠시 좌측 사면길로 우회 하는가 싶더니,
입장면 양대리 방향 갈림길에서 직좌틀하여 능선을 따라 오른다.
시간상 아침식사가 조금 지체되었고 위례산 정상에는 바람도 차가울 듯하여, 이곳 갈림길 공터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오붓한 추운 날의 아침식사! 늘 그렇지만 적게 준비해서 가도 주위분들의 권유와 나의 식탐으로 이것저것 얻어먹다 보면 아침부터 과식을 넘어 폭식이라는 느낌이 든다. 오늘의 주범은 김 사장님의 맛난 김밥의 유혹 땜시..ㅋㅋ
식사를 마치고 위례산을 향한 오름길을 이어간다.
위례산성쯤으로 짐작되는 위례산 전위봉에 도착한다.
산성 쌓는데 사용했음직한 돌로 쌓은 돌탑과 삼각점 사이에서 인증을 남기고,
완만한 오름길을 조금 진행하면 위례산성 정상에 도착한다.
위례산 정상 이정표.
<위례산(523m)> 위례산은 직산위례성, 검은산, 신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산줄기가 연봉을 이루고 있고 북쪽 비탈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천연 성벽 역할을 한다. 산 정상의 위례성터에는 둘레 550m, 높이 약 3m의 흙으로 쌓은 산성을 비롯하여 식수로 사용한 듯한 우물 '용샘'과 문받침돌로 여겨지는 큰 돌 반쪽이 남아 있다. 안성의 서운산성은 남향으로 축조되어 이 성과 마주하는데 일부 학자는 서운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쪽 끝 기지였고, 위례성은 백제 문주왕의 북쪽 끝 방어선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직산위례성이라 불려지고 있는 이곳은 그동안의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의 첫 도읍지가 아니라고 부정되었다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고 한다.(펌) 위례산 정상.
<위례산성(慰醴山城)> 백제 시조 온조왕이 마한 목지국의 진왕으로부터 북동 100리 땅을 봉토받아 백제 첫 도읍지를 정하고, 해발 525.9m인 위례산 정상 주위에 산성을 쌓았다. 이 산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950m 정도이고, 성벽은 토.석혼축 공법과 석축공법의 2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부분을 자연암반을 평탄하게 고른 후 1.5m 너비로 2열로 돌을 평행으로 쌓고 그 위에 흙과 잡석 및 기와조각을 섞어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돌로 쌓은 성벽은 경사가 급한 40m 구간에만 남아 있는데, 주로 자연암석으로 쌓았는데, 현재 높이는 4m 정도이다. 이 성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으로 보기도하나 조사결과 도읍성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하 산성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가 위례성이라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직산의 구호가 바로 위례성이다. 따라서 이곳은 위례성의 백성들을 전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산성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만주지방의 고구려를 떠나 이곳 직산까지 와서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고 개국한 곳이 현재의 직산면과 성환읍, 입장면, 성거읍 지역이었고, 위례산성은 전시용으로 추정되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1,690척의 성과 우물이 하나 있고, 또 온조왕 13년(BC 5)에 이곳으로부터 경기도 광주 지방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펌)
남은 백두들만이 위례산 정상 인증을 남긴다!
북쪽 지능선 100m 거리에 위례산성 우물터가 있다.
위례산을 뒤로하고, 어~ 혹시 바닥에 있는 문받침 큰 돌 반쪽을 그냥 지나치셨어유~ !
돌아본 위례산성.(문받침 큰 돌이 보인다)
지나온 금북정맥이 나즈막이 앉아 있고,
동쪽 방향 히든벨리CC 뒤쪽 멀리 입장면 뱡향으로 만뢰지맥 능선이 희미하다.
위례산성을 뒤로하고,
멋진 소나무 쉼터를 지나,
군단이 갈림길 안부를 지난다.
<군단이> 부소산 아래 깊은골은 온조대왕이 맨 처음 이곳에서 머물며 정사를 살폈다 하였고, 북면 군단이는 백제시대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이었으며, 곡간리(曲干)는 군량미를 곳간처럼 저장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군단이 갈림길 이정표.
509봉 유성농장 갈림길 이정표. 이 봉우리에서 금북정맥은 직우틀하여 진행된다.
가야 할 성거산 방향.
당겨본 성거산 정상부에 군부대 건물이 선명하다.
입장면 풍년저수지 방향.
우회 갈림길에서 돌아본 위례산.
잠시 후 금북길은 급좌틀하여 진행되고,
임도와 만나 우측으로 잠시 진행하면,
우물목 고개에 도착한다.
<우물목고개> 북쪽 호당리 사리목골과 남쪽 호당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개 근처에 우물이 있어서 우물목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돌탑과 나무에 묵여 있는 오색천으로 미루어 보아 아직도 누군가 제(祭)를 올리는 성황당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북쪽 호당리 방향.
남쪽 납안리 방향.
송전탑 옆을 지나, 돌아본 위례산 방향.
가야 할 성거산 방향.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면, 성거산 아래 납안리 골짜기와 성거산으로 이어진 금북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리목삼거리가 내려다 보이고,
사리목 삼거리에 도착한다. 금북길은 11시 방향의 '성거산 성지' 방향의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사리목 삼거리> 북쪽 입장면 호당리 사리목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남쪽 북면 납안리에서 올라오는 길 그리고 성거산 군부대로 이어지는 도로가 만나는 삼거리다. 사리목삼거리 이정표.
혼자 뒤처져서 아무도 모델이 되어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놀기도 해 본다.
돌아본 사리목삼거리 날머리.
성거산 보라매농장. 농장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산 위 군부대가 공군으로 넘어간 게 분명하다..ㅋㅋ
사리목고개 도착. 옛날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곳이 사리목고개였었던 것 같다. 우측 숲 속 사리목골 방향으로 표지기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표지기를 따라 숲속 능선길을 따를까 잠시 고민하다가, 능선길과 아스팔트 길을 계속해서 들락거려야 하고, 날씨도 흐려 시야가 선명치 않고 하여 성거산 정상의 부대 앞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따르기로 한다.
좌측으로 공터 헬기장을 지난다.
돌아본 위례산 방향.
누구를 위한 시설인지 모를 체력단련장을 지난다. (군인 or 민간인, 종교인 or 정맥꾼)
성거산성지 제1줄무덤.
<천주교 성거산 순교성지> 사리목삼거리에서 성거산 군부대로 오르는 길에 천주교 성거산 정지가 있다.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가 끝날 때까지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특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 중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명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안내문 펌)
새벽에 출발한 배티고개에서 바로 아래의 배티성지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당시 산속에 은거하며 포교 활동을 하던 교도 30여 명이 관군에게 모두 학살을 당한 곳으로 무명의 묘소들이 즐비한데, 과연 다른 대간이나 정맥들과 달리 천주교가 금북정맥의 끝자락인 안흥진을 경유하여 유입되었기 때문인지 인근에 순교성지가 많은 듯하다.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 안내판.
성거산 성지 유래 비석.
성거산 성지 순례 안내판.
성거산성지 제1줄무덤 입구.
모처럼 우측으로 시야가 트이고, 성거읍과 천흥저수지가 조망된다.
돌아본 위례산 방향.
성거산 성지 제2줄무덤 입구도 지난다.
우측으로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우측으로 조망이 트인 공터가 있다.
동쪽 납안리 방향으로 만뢰지맥 능선이 가늠된다.
돌아본 위례산.
성거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계속 오르면,
성거산 정상 군부대 우회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직진 군부대 방향으로는 등산로가 폐쇄되어 있고 출입도 제한 한다고!
성거산 정상석이 있는 곳까지 600m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우회 등산로를 따르지 않고 조금 더 진행하면 군부대가 나타난다. 사리목 삼거리에서 거의 40여분 만에 도착했다.
성거산성 안내판을 지난다.
<성거산성(聖居山城)> 성거산성(聖居山城)은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성거산 1984년 5월 17일 대한민국의 충청남도 제263호로 지정되었다. 성거산(해발 579.1m)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50m이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었으나 뒤에 돌로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을 백제시대 쌓은 위례성의 위성으로 추정하여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 목천과 직산현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하나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다. 앞서 간 줄 알았던 백두들이 뒤에서 모습을 나타났다. 아마도 도로를 따르다가 표지기를 따라 한두번 숲길로 들어섰던 모양이다. 괜히 혼자 뒤처졌다고 허겁지겁 걸었는데..ㅉㅉ
성거산 정상 군부대 앞 좌측편에 주차장이 있고, 부대 좌측 울타리를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우회로를 개설하면서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고, 이를 다시 우회하여 지나간다.
돌아본 위례산 방향.
부대 좌측으로 우회하는 등로를 따르면,
새로 개설된 우회 등산로.
<인심의 변화> 아주 옛날 산행기에는 부대 울타리 옆으로라도 지나가게만 해 주었으면 했다. 보통 옛날 산행기에는 부대울타리 옆길이 잡목과 수풀로 좁고 위험하니 대민봉사 차원에서 풀이라도 베고 정비를 좀 해 주었으면 했다. 조금 옛날 산행기에는 부대는 있어야 하니 우회 등산로를 만들어 주었으면 했다. 최근 산행기는 자연을 망치고 정맥길을 훼손하고 있는 군부대를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게 인심이다!
사면에 개설된 우회 등산로는 나무다리 등으로 연결하여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위험한 곳에는 안전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이만하면 군부대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성거산 정상의 군부대를 우회하여 반대쪽 능선으로 복귀하는 백두들!
천흥리 임도 갈림길을 지나고,
잠시 능선을 따르면,
바닥에 비스듬히 박혀 있는 성거산 정상석이 눈에 들어온다. 정맥길은 직우틀이고, 직진하면 삼각점과 전망바위가 있고 송전리 방향으로 등로가 이어진다.
능선 직진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면,
성거산 정상 삼각점이 있고,
바위 전망대에 도착한다.
목천읍 방향을 조망하고,
다시 성거산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나와,
배낭털이에 동참한다.
<성거산(聖居山 579.1m)>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입장면, 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천안 시가지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을 때, 천안시 직산면 산헐원을 지나다가 동쪽의 이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면서 성거산이라고 부르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상에는 성거산성(충남문화재자료 263)이 있는데, 지금은 군사 기지가 들어서 있다.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성곽이 많이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백제 도읍지였던 위례산의 위례산성에 이른다. 서쪽 산중턱에 만일사(晩日寺)가 있으며, 경내에는 오층석탑과 마애불 등 문화재가 여러 점 있다. 산자락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흥사지(天興寺址)가 있는데, 현재 절터는 마을로 변하였지만 오층석탑(보물 354), 당간지주(보물 99) 등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 정상석 뒷면에는 성거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성서산 정상 인증을 남간다. 사실 이때만 해도 앞서간 선두팀들이 성거산에서 직진의 알바를 하러 간 줄 모르고 우리가 후미라고 생각했었다. '8대 8로 잘 나눴다'라며..ㅉㅉ
성거산을 뒤로하고 직우틀하여 급경사 내림길을 따르니,
만일고개에 도착한다.
<만일고개(晩日嶺)> 만일고개는 '만일령', '매일골고개'라고도 한다. 송전리 매일골에서 금북정맥을 넘어 천흥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아마도 성거산 서쪽 골짜기에 만일사란 절이 있어서 만일고개라 부르는 듯하다. 만일고개 이정표.
소나무 숲길로 봉우리를 우회하다가,
KB은행 고졸 신입사원 연수팀과 조우하고,
주능선으로 복귀하여,
399봉 영인지맥 분기봉을 지난다.
영인지맥은 우측 '은행연수원' 방향으로 이어진다.
<영인지맥> 영인지맥은 칠장산에서 태안의 안흥진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성거산과 걸마고개 사이의 분기점(충남 천안시 안서동과 목천읍 송전동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봉우리임)에서, 서쪽으로 가지를 쳐 천안시 북부 시가지를 지나서 노태산(141m), 천안 제3,4공단을 지난다. 아산땅으로 들어선 후 용와산(238.3m), 연암산(292.7m), 둔덕산(225m), 국사봉(222.5m), 금산을 넘어 영인산(363.9m)을 일군 후, 입암산(207.4m)에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44.8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공세리에서 그 맥을 아산만에 넘기고 있다. 아울러 이 산줄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안성천으로 흘러들고, 이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곡교천으로 흘러들며, 두 물줄기는 모두 서해로 흘러간다.
잠시 호젓한 능선을 따르면,
걸마고개에 도착한다.
<걸마고개> 예전에 칡이 많이 나서 '갈(葛)뫼'가 갈마고개가 되고, 다시 걸마고개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등산로가 반질반질하여 칡은 구경도 할 수없다. 걸마고개에는 이정표가 두 개 있는데 역사의 고장 천안답게 하나는 만일사와 삼뱅이(메일골)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계성군의 묘'와 '숙의하씨 묘'를 가리키고 있다.
숙의하씨는 영의정 '하연'의 딸로, 부인을 열둘이나 두었다는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후궁 중 한 분이고, 계성군은 숙의하씨 소생이라고 한다. 조선 성종(9대) 시대의 모자(母子)로 성거산 방향에는 계성군의 묘가, 태조산 방향에는 숙의하씨의 묘가 10분 거리를 두고 있다. 계성군(桂城君)은 조선 성종의 2남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26세로 조졸하여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 이류를 계자로 삼아 후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묘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을좌에 있었는데, 1971년 서울시의 도시 확장 계획으로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 신대동 메일골 신좌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걸마고개 이정표.
계성군과 숙의하씨의 묘를 가리키는 안내판도 있다.
잠시 등로를 진행하면 우측으로 시야가 트이며 목천읍 송전리 방향이 조망된다.
등로 주변 쉼터에는 등산객들이 자주 눈에 띄고,
좌측으로 잣나무 조림지를 지난다.
상명대 갈림길 봉우리에서 우틀하여 진행하면,
이내 유왕골고개에 도착한다.
<유왕골 고개> 천안시 목천읍 덕진리 자연부락으로 이곳 고개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유왕골이 나오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각원사가 나온다. 유왕골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천하를 살피고 머무른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 입구에는 유왕골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은 대부분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 유왕골도 왕건(王)이 머물렀던(留) 골짜기란 뜻이다. 유왕골 고개엔 정자가 있어 지역 등산객들이 많이 쉬고 있다.
유왕골 고개 표지목.
유왕골 안내판.
마지막 배낭털이에 동참하여 귤 하나를 맛나게 꿀꺽하고,
유왕골 고개를 뒤로하고 태조산을 향한다.
정자를 지나고,
또 다른 각원사 갈림길도 지난다.
각원사 안내판.
유왕골 약수터 갈림길.
단국대 천안캠퍼스 방향.
천안시에서 설치해 놓은 119 긴급구조 안내목.
도라지고개(청소년수련원 갈림길) 도착.
태조산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소나무 숲으로 이어져 있어서 산림욕이나 산책로로 이용하기 좋은 곳이며, 산책이나 등산을 나온 시민들이 많은 곳이다. 등로에는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고, 체육시설이나 쉼터도 다수 꾸며져 있다. 청소년수련원 갈림길 이정목.
<도라지고개(조라지고개)>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꼬불꼬불 굽어진 고갯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하여 조라지 고개라 불리다가 지금은 도라지고개로 불리우고 있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목천 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안에 이르렀던 대로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 되었다.
잠시 오름길을 따라 오르면,
시멘트로 만든 목책을 통과하게 된다.
목책을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면,
태조산 정상 정자에 도착한다.
태조산유래 안내판.
<태조산(太祖山 422m)> 멀리에서 바라보면 둔각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 곁에 있었던 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천안의 지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 고려 태조가 오른 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천안시 조망 안내판.
천안시(天安市)는 '天下大安'에서 생겨난 지명으로 '하늘 아래 크게 편안한 곳'이란 의미이다. 과연 태조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천안은 편안해 보인다. 천안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대록군과 감매현.순치현이었다. 천안이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고려 태조는 930년에 '동서도솔'을 합쳐 천안도독부를 설치하였다. 태조 왕건은 술사 예방으로부터 삼국의 중앙에 해당하는 천안은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지세이므로 이곳에 큰 관부를 설치하면 후백제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천안은 고려 남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중앙군이 파견되어 주둔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왕건은 왕자성에 성을 쌓고 군사훈련소를 설치하였다. 천안시 조망.
단국대 천안캠퍼스 방향.
팔각정에서 잠시 쉼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백두들의 말미를 부여잡고 겨우 남긴 태조산 인증.
교보생명 연수원 갈림길을 지나,
계속해서 목책을 따라 진행한다.
돌아본 태조산.
제2포스트라 적힌 365봉에 도착하여,
제3포스트 방향으로 목책을 통과여 좌틀하여 진행한다.
'전망 좋은곳' 이정표 봉우리에서는,
우측 아래로 우정공무원교육원과 천안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당겨본 우정공무원교육원.
경계로 갈림길 이정표를 지난다.
이어서 362봉쯤을 지나고,
또 다른 경계로 갈림길 이정표를 지난다.
경계로는 읍이나 면.동의 경계를 의미하는 듯하다.
아홉싸리고개.
아홉싸리고개 이정표.
<아홉사리고개(九曲峙)>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크게 아홉 번 구비처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라고 해서 아홉사리 고개라고 불렀단다. 아홉싸리고개를 지나면,
우측으로 흑성산이 조망된다.
<흑성산(黑城山 504m)> 흑성산은 천안시 목천면 남회리의 뒷산이다. 북쪽으로는 태조봉, 남쪽으로 백운산과 취암산 등이 있다. 북쪽은 태조봉에 연속되며 서쪽은 아홉싸리고개·유랑리고개·장고개 등이 있다. 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儉銀城)'이다. 산정에는 둘레 739보(步)인 흑성산성터가 있으며 성 안에는지지(地址)가 있다. 6·25전쟁 때 6개 면의 주민을 동원하여 목천면 서리에서 산정까지 군용도로를 개설한 이래 산정에는 공군 항로보안단의 지대(地隊)와 미 극동공군의 통신대를 비롯한 군사시설과 방송시설, 텔레비전 중계소 등이 들어서 있다. 흑성산성은 천안시 안의 고대산성 중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산성으로서 옛 기록에 의하면 이 산성은 목천현의 서쪽 11리, 험하고 가파른 흑성산 위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북동쪽으로 산맥이 계속 이어져 성거산성·의례산성과 이어지고 남쪽으로 남화리토성과 세성산성으로 연계된다. 산성 바로 아래 기슭에는 1983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곳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동쪽의 병천면에 3·1운동의 한 본거지였던 유관순기념사당이 있어 독립운동과 관계된 곳이라는 것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지형이 평탄한 넓은 땅이 있다는 입지조건 때문이다. 산 서쪽 기슭의 보문사에는 50년 전 지리산 승천사에 있던 불상 3위를 옮겨와 모시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고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널리 알려져 최근에는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펌)
호젓한 내림길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군데군데 우측으로 흑성산을 조망할 수 있고,
등로는 임도처럼 널찍하게 이어지더니,
유량리고개에 도착하는데,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보았던 이정표는 간데없다.
<유량동> 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 명 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 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우측 지산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유량리고개 갈림길.
유량리고개 우측 유량리 방향 조망.
좌측 지산리 방향 조망.
유량리고개 날머리를 나서며 오늘의 산행을 마친다.
목천읍 지산리에 위치한 '국제뇌교육대학원' 모습.
돌아본 유량리고개 방향.
목천읍 지산리 방향.
뒤쪽 흑성산 너머에 독립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유량리고개 인증을 남겨본다.
도착한 버스에 올라,
천안시 두정동에 위치한 골드스파에서 땀을 씻고,
두정동에 있는 양꼬치 전문점에서,
산행의 피로를 푼다.
맛난 음식 베풀어 주신 김 사장님께 감사드리며, 12명 손주들 데리고 산행에 나서시는 날에, 저희 백두들 모두 손잡고 동참하겠습니다!
<천안삼거리> 천안시는 옛날 우리나라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전설과 민요를 낳기도 하였던 유서깊은 천안삼거리가 있는 곳으로, 서울에서 대로를 따라 내려와 천안에 이르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 길은 병천을 거처 청주로 들어가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 김천을 지나 대구, 경주, 동래로 통하는 길이요, 또 한 길은 공주를 거처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등지로 통하는 길이다. 즉 천안삼거리는 충청과 호남, 영남이 만나는 삼남의 요로로, 어사 박현수와 기생 능소의 애틋한 사랑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 전설은 옛날 홀아비 한 사람이 '능소'라는 어린 딸과 어렵게 살다가 변방의 수자리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변방으로 떠나던 그는 천안삼거리에서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고 "이 지팡이에 잎이 필 때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며 딸을 주막에 맡겼다. 능소는 이곳에서 기생이 되어 아비를 기다리다가, 과거 보러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는다. 선비 박현수는 장원급제 후 어사가 되어 내려오다가 능소와 재회한다. 이때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하는 흥타령을 불렀다고 한다. 이 지팡이가 자라고 퍼져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전해진다. 천안삼거리에서 가지를 휘휘 늘어뜨리고 있는 수양버드나무는 이래서 능소버들이나 능수버들이라고 따로 불리어지고 있다. 서울로!
다음 산행에서 뵙겠습니다. 편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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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산행기는 기억이 많이 납니다.
알바한거며, 등로에 사람들이 많아 다음구간에도 사람들이 많을거라 기대하고 땜방을 갔었는데 사람구경 전혀 구했음.
참 세월이 빠르네요. 벌써 7월달도 중순을 넘어가고 있어요.
한구간씩 하다보면 정말 1대간 9정맥을 마무리 하는 날이 오겠네요.
대장님!!!! 산행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