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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 연표
<삼국시대>
372 고구려 소수림왕 2 전진왕이 순도를 통해 불경,불상 전함.
384 백제 침류왕 1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함.
391 고구려 광개토왕 1 왕이 백성에게 불교를 숭봉하라 하교.
392 고구려 광개토왕 2 평양에 절 아홉군데를 지음.
392 백제 아신왕 1 왕이 백성에게 불교를 숭봉하라 하교.
417~458 신라 눌지왕 고구려 승 묵호자가 불교를 전함.
452 가야 질지왕 2 수로왕의 왕후 허왕후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를 세움.
479~500 신라 소지왕 고구려 승려 아도가 불교를 전함.
512 고구려 문자왕 21 고구려 승랑, 양무제가 보낸 고승 10명에게 삼론학을 가르침.
526 백제 성왕 4 겸익, 인도에서 율장을 가지고 귀국.
527 신라 법흥왕 14 박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 공인.
549 신라 진흥왕 10 신라 최초 유학승 각덕, 양나라에서 귀국.
551 신라 진흥왕 12 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혜랑 국통이 됨.
552 백제 성왕 30 일본에 금동불,불경,미륵석불을 보내 불교를 전함.
565 신라 진흥왕 26 유학승 명관, 진나라에서 불경 가지고 귀국.
576 고구려 평원왕 18 의연, 북제에 건너가 불교역사 질의.
577 백제 위덕왕 24 검단, 선운사를 세움.
577 백제 위덕왕 24 일본에 경론과 율사,기술자 등을 보내 일본불교 지원.
576~59 신라 진지왕 진자, 백제에서 미륵화신 미력랑을 맞이함.
595 고구려 영양왕 6 고구려 혜자와 백제 혜총, 일본 쇼오토쿠(백제 위덕왕 42) 태자의 스승이 됨.
601 백제 무왕 2 미륵사 세움.
608 신라 진평왕 30 원광, 수나라더러 고구려 쳐달라는 걸사표를 씀.
(612년,수나라 113만대군 고구려 침략)
610 고구려 영양왕 21 담징, 일본에 불교,유학,그림,제지법 등을 가르치고 법흥사 금당벽화 그림.
612 고구려 영양왕 23 살수대첩에 일곱 승려 공헌.
613 신라 진평왕 35 수나라 사신을 위해 황룡사에서 원광을 우두머리로 백고좌회 개최.
643 신라 선덕여왕 12 자장, 왕의 요청에 따라 당에서 귀국.
643 고구려 보장왕 2 당에 사신을 보내 도사,도덕경 들여와 도교 장려
645 신라 선덕여왕 14 황룡사 9층탑 세움.
650 고구려 보장왕 9 보덕, 백제에 망명.
660 백제멸망 후 도침, 복신과 함께 주류성에서 일어나 백제 국권회복투쟁을 벌임.
671 신라 문무왕 10 의상,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당군침략 정보를 알림. 명랑, 당군 침략 물리치는 밀교의식.
676 신라 문무왕 15 의상, 부석사 세움. 왕의 논,밭,노비 기부를 거절.
<남북국시대>
697 발해 고왕 1 당나라와 불교 외교.
713 발해 고왕 16 발해 사신, 당나라 사찰 참배 허용 요구.
740 신라 효성왕 4 심상, 일본에 화엄종을 일으킴.
751 신라 경덕왕 10 재상 김대성,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움.
753 신라 경덕왕 12 대현, 대궐에서 금강명경 강의.
754 신라 경덕왕 13 법해, 황룡사에서 왕을 위해 화엄경을 강의.
763 신라 경덕왕 22 신충, 왕을 위해 단속사 세우고 왕의 복을 기원함.
764 신라 경덕왕 23 진표, 금산사에서 미륵불 조성.
821 신라 헌덕왕 13 도의, 당에서 돌아와 선을 전함.
826 신라 흥덕왕 1 홍척, 당에서 돌아와 실상산파 개창.
845 신라 문성왕 7 무염, 당에서 돌아와 성주산파 개창.
847 신라 문성왕 9 범일, 당에서 돌아와 사굴산파 개창.
864 신라 경문왕 4 도선, 옥룡사 세움.
873 신라 경문왕 13 순지, 당에서 돌아와 오관산파 개창.
875 신라 헌강왕 1 도선, 송악지방 호족 왕륭과 친교.
891 신라 진성여왕 5 궁예, 기훤의 농민봉기군에 참가.
894 신라 진성여왕 8 최치원, 해인사에 은둔.
895 신라 진성여왕 9 궁예, 새 나라를 세움.
898 신라 효공왕 2 궁예, 팔관회 개시.
900 신라 효공왕 4 진훤, 후백제를 세움.
922 신라 경명왕 6 진훤, 미륵사탑 복구, 선운사에서 승려 지도자 선출.
<고려시대>
918 태조 1 왕건 즉위, 팔관회 개시.
921 태조 4 이엄을 왕사로 책봉.
927 태조 10 발해 승려 재웅 등 고려에 망명.
936 태조 19 후삼국 통합, 개태사 세움.
958 광종 9 승과 개시.
961 광종 12 체관을 중국에 보내 천태종 서적 전함.
964 광종 15 균여를 귀법사 주지에 임명.
982 성종 1 최승로, 시무책에서 부패 불교 비판.
987 성종 6 팔관회 폐지.
1010 현종 1 팔관회 재개.
1011 현종 2 거란 침략 물리치기를 기원하여 대장경 간행.
1067 문종 21 흥왕사 세움.
1070 문종 24 의천, 15세에 승통에 임명됨.
1085 선종 2 의천, 송나라에 몰래 건너가 다음해 귀국.
1086 선종 3 의천, 교장도감을 두어 속장경을 조판.
1090 선종 7 의천, 최초의 불교도서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작성.
1096 숙종 1 천태종을 열고 국청사를 세움.
1101 숙종 6 참사상 퍼뜨린 광기와 각진을 처벌.
1107 예종 2 여진 정벌, 옛땅 회복 투쟁에 승군 참전.
1107 예종 2 함경도 정복지에 호국인왕사, 진동보제사 세움.
1129 인종 7 묘청 등, 칭제건원, 금나라 정벌 건의.
1131 인종 9 묘청, 서경 대화궁에 팔성당 지음.
1135 인종 13 묘청, 서경에서 혁명. 새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함.
1170 의종 25 보현원에서 무신정변 폭발.
1174 명종 4 귀법사 승려 봉기, 개경 승려 반란, 왕정복고투쟁.
1176 명종 6 공주 명학소 민중봉기, 사찰습격.
1177 명종 7 서경 민중봉기, 담화사 근거로 투쟁, 승려들을 봉기군으로 징발함.
1181 명종 11 농민봉기군, 왕실 원찰 봉은사 습격.
1190 명종 20 지눌, 정혜결사 조직.
1202 신종 5 대구 동화사, 부인사 승려들, 농민봉기에 참가.
1217 고종 4 최충헌 타도를 위한 승군 반란.
1231 고종 18 충주 노비해방투쟁 지도자 우본이 몽고 침략군에 항쟁하여 물리침.
1232 고종 19 요세, 백련결사 조직.
1232 고종 19 우본이 이끄는 노비, 승군 2차 노비 해방 투쟁.
1232 고종 19 개경 노비, 승려 봉기.
1232 고종 19 김윤후, 처인성에서 몽고 원수 살리타이 사살.
1236 고종 23 강화도에서 대장경 새김. (1251년 완성)
1253 고종 40 김윤후, 노비군 이끌고 충주성 사수.
1275 충렬왕 1 일연, 삼국유사 저술.
1328 충숙왕 15 무기, 석가여래행적송 지음.
1348 충목왕 4 원 왕실의 장수,행복을 빌기 위해 경천사 대리석 탑 세움.
1356 공민왕 5 보우, 왕사가 되어 승직 임명 관장.
1365 공민왕 14 신돈, 국정의 전권을 맡아 개혁정치.
1366 공민왕 15 신돈, 전민변정도감 설치, 권문세족이 강탈한 토지 환수, 노비해방.
1371 공민왕 20 신돈 처형후 보우를 국사로, 혜근을 왕사로 책봉.
1388 우왕 14 신조, 이성계의 참모로써 위화도 회군에 주요 역할.
1388 창왕 1 이성계 심복 조인옥, 불교배척 상소.
1391 공양왕 3 박초,김초 등 불교배척 상소 잇따름.
<조선왕조시대>
1392 태조 1 도첩제 강화로 승려 출가 억제. 무학을 왕사로 임명.
1402 태종 2 사찰 토지 몰수 시작.
1406 태종 6 사찰 수 제한 조치.
1406 태종 6 성민 등 탄압조치 시정 호소.
1406 태종 6 해선, 지붕개량사업 자청.
1424 세종 6 불교종파 통폐합 조치.
1427 세종 9 천우 등 온천치료 기금 설치 청원.
1433 세종 14 태평관 짓는 일에 승려 동원.
1461 세조 6 간경도감을 두어 주요 경전 번역,간행.
1464 세조 9 왕실 원찰 원각사 세움.
1471 성종 2 염불소 금지.
1492 성종 23 도첩제 폐지, 무단출가 승려 환속조치.
1503 연산군 10 승과 폐지.
1516 중종 11 사찰 토지,노비 몰수.
1535 중종 30 태안반도 운하 공사에 승려 동원.
1550 명종 5 보우 등용, 불교 부흥.
1552 명종 7 도첩제,승과 부활.
1559~ 명종 14~17 임꺽정의 봉기. 1562
1565 명종 20 보우, 제주도에 유배되어 살해됨.
1566 명종 21 도첩제,승과 폐지. 승려 출가 금지.
1589 선조 22 정여립의 혁명 모의에 구월산,지리산, 송광사 불교 세력 참가.
1592 선조 25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승군이 일어남. 공주 의승군의 청주성 탈환, 휴정의 전국 승군 조직.
1593 선조 26 의승군, 평양성 탈환,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
1593 선조 26 윤눌 등 의승군, 이순신의 수군에 참여
1597 선조 30 의승군, 울산,석주관 전투 참가.
1598 선조 31 의승군과 수군 협동작전으로 노량대첩.
1598 선조 31 이몽학의 민중봉기에 승려들 참가.
1604 선조 37 유정, 일본에 가서 강화회담, 포로 송환.
1623 인조 1 승려 도성 출입 금지.
1624 인조 2 평양성 재건에 승려들 동원.
1627 인조 5 후금이 침략하자 명조, 의승군 일으킴.
1636 인조 14 청이 침략하자 각성, 의승군 일으킴.
1669 현종 10 대흥사에 휴정의 사당 표충사세움.
1688 숙종 14 여환의 미륵혁명 운동.
1687~ 1697 숙종 13~23 장길산 유격대의 투쟁.
1696 숙종 22 뇌현 등,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 영토권 확인 소송.
1697 숙종 23 장길산과 연대한 민중불교혁명운동 발각.
1728 영조 4 이인좌의 반란에 지리산 승려들 참가.
1758 영조 34 황해도 농민들의 존경을 받던 `생불' 여인 처형 당함.
1763 영조 39 황해도 미륵신앙자 처형.
1785 정조 9 함경도 거사 집단과 미륵교도의 봉기모의.
1785 정조 9 용파, 관리들의 사찰 수탈 시정 호소.
1826 정조 26 백파, 선문수경 지음.초의,김정희와 논쟁.
1851 철종 2 성월, 구월산 봉기에 참가.
1867 고종 4 순성, 명화적을 조직하여 서울,경기의 양반 부호,관가 습격
1870 고종 7 이필제, 지리산 대원암을 근거로 혁명운동.
1892 고종 26 선운사 마애미륵불 비결사건.
1892 고종 26 승려출신 서장옥, 동학 삼례집회 주도.
1893 고종 27 서장옥, 서울에서 대자보 등으로 반외세운동 주도.
1893 고종 27 동학 보은집회 당시 남접진영에 호남 승려들 참가.
1894 고종 28 갑오농민전쟁에 민중불교세력 참가.
1895 고종 32 일련종 승려과 옴. 승려의 도성출입금지해제를 청함.
1897 고종 34 승려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함.
1899 고종 36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하여 각 사찰에 분배함. 동대문밖 원흥사를 세움.
1902 고종 39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삼고, 사찰령36조를 정함.
1908 순종 2 원종종무원을 건립함.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임명함.
1910 순종 4 승려들의 취처의 자유를 의논함. 임제종을 창설함.
<일제시대>
1911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 사찰령 시행규칙을 분류함. 30본사를 설정함.
1912 조선불교선교양종 종무원을 설치하고,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함.
1913 스리랑카승려 달마파라가 옴. 불교흥릉회를 발족함.
1917 불교진흥회를 설립.
1920 불교청년회를 설립.
1921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을 설립.
1922 불교유신회를 만듬. 사찰령 폐지 등을 조선총독부에 제출.
1924 불교 지 창간. 원종호법회를 설립.
1927 조선불교중흥회를 설립. 금강산 유점사에서 금강불교청년회를 설립.
1928 사법개정. 각사에 평의원회를 설치. 불교 시찰단을 일본으로 파견함.
1929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함.
1931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청년동맹의 발기대회를 개최함.
1936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함.
1942 조계종법을 발포.
1945 사찰회.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등의 폐지를 결의. 대한민국 불교신종단의 출발
1946 대한민국 성립.
<대한민국>
1947년 선학원에 조선불교 총본원설립(교정 장석상), 태고사 인도 요구.
1948년 5월 제헌국회에 승려 출신 유성갑. 최범술 당선.
1948년 6월 조선불교 제2대 교정에 방한암 추대.
1948년 12월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장에 박원찬 발령.
1949년 9월 유엽. 한보순. 장도환 등 총무원에 난입. 원장 박원찬 등을 감금. 사직 강요
1949년 10월 제3대 총무원장에 김구하 취임.
1950년 5월 제2대 국회에 승려 출신 이종욱. 허영호. 박성하 당선 진출.
1950년 6월 인민군을 따라서 남하한 김해진에 의해서 총무원이 점령당했으나 곧 수복. 불교계 주요인사 납북됨.
1952년 7월 제4대 총무원장에 이종욱 취임.
1954년 5월 이승만대통령 제1차 정화유시 발표.
1954년 6월 조선불교를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개칭
1954년 6월 불교정화운동 발기인대회 개최
1954년 11월 비구측 태고사 강제 점거. 대처승 축출
1955년 1월 종정 송만암, 비구승이 환부역조(換父易祖 : 보조종조론을 가리킴) 한다고 종정을 사퇴하고 대처승측에 가담.
1956년 6월 서울지방법원, 비구측의 종헌 무효 선고. 비구측 항소
1957년 9월 서울고등법원, 비구측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고 판시
1958년 12월 장성 백양사. 비구.대처승간 난투극 연출
1960년 11월 비구들 400여명 대법원 청사에 난입. 6명의 비구 할복 기도
1962년 1월 비구측 종정 하동산과 대처승측 종정 국성우 문교부에 출두하여 통일종단 구성에 서명 날인
1962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 제정 공포
1962년 9월 통합종단 결렬
1970년 4월 대처승측,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
1978년 3월 조계종 재야측,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 조계종 양분.
1980년 10월 개운사측, 조계사측 총무원을 강제 점거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 조계종 총무원 및 전국주요 사찰에 계엄군 투임. 10.27법란.
1983년 8월 설악산 신흥사 신임주지 부임 과정에서 폭력사태 발생. 사망 1명, 중경상 6명.
1986년 6월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창립
1986년 8월 조계종 제 25대 총무원장 서의현 취임.
1988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분종과 창종 사태(30개 가량의 신생 불교 종단 출현)
1993년 11월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 입적
1994년 3월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 3선
1994년 3월,4월 범종추, 구종법회
1994년 4월 13일 서의현 총무원장 전격 사퇴
1994년 4월 13일 조계종 개혁회의 출범.
1994년 11월 21일 송월주 스님 총무원장 당선
1998년 고산스님
1999년 정대스님
2003년 법장스님
* 한국불교사
1. 고구려의 불교수용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 4년 혹은 5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역사 기술론자들은 서기 4년으로 잡고 있다. 서기 4년으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후 약 4백여년이 흐른 뒤이다. 우리나라의 최초불상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금불상 53구를 신라 제 2대 남해왕 원년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땅에 이윤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신라의 영토였는데 얼마뒤 금불상을 금강산으로 이윤하여 지금의 금강산 유점사에 점안하여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왕은 그 사실을 고을 수령 노춘으로부터 전해 듣고 절을 지어 금불상을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일이 있은후 38년이 지난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임시 궁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오른지 6년 후, 서기 48년 7월에 서역 중인도의 옛나라 아유라국의 공주 허황옥이라는 여인이 석탑을 싣고 바다를 거너 가락국 해변에 도착하였다. 김수로왕은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으므로 아들 열을 낳았다.
장남인 거등은 대를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둘째 아들은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석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외 아들들은 가야산에 입산케 하여 불교와 선도를 수업케하였으니 이것이 불교포교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조선시대불교통사]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당시의 왕권은 민중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과 자기네 지위를 신성시 해주던 재래 신앙(자연신과 조상신 숭배)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이념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372년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를 정비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한편 전진왕이 불교를 전하게 되는 것은 당시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남방의 동진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인 동북방의 견제의 필요에서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교류의 한 방편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전진 불교는 도안의 새로운 불교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격의적 불교와 왕실을 통한 도안적 불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회에 토착화되어 민간 사회나 지방 사회의 신앙적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고 후자는 공식적인 불교가 왕실의 지원 아래 순도에 의해 포교되면서 중앙 왕실이나 지식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다른 삼국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고구려에서는 승려 학자 승랑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섭산의 고구려 승랑 대사'라고 불리었으며 그는 고구려 불교의 주체적인 수용에 앞장서면서 존재와 無의 변증법적인 지향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인식론도 관념론적 제약으로 인해 변혁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 지배자에게 봉사하는 한계를 극복치 못했다.
그 후 불교의 주류는 삼론종이라는 학문적인 경향으로 기울었고 그 당시 고구려의 불교가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다. 그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속에서 죽는 것은 백성들 뿐이었고 그런데도 계속 불교를 신봉하라는 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행복을 신앙의 위안과 복으로써 보상받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는 기복신앙적인 호국불교의 최초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호국불교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진리를 말하라.]는 석가모니불의 본 뜻과는 달리, 거짓말과 시기와 간첩을 하면서까지 철저히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배신하고 수탈에 일조하는 이른바 호국불교의 허구성과 모순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 침략시에 나타난 승려들의 반외세 투쟁으로, 최초 승군이 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정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중생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한 호국불교라는 말이 팔만대장경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말만 호국불교라 외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음미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말년에는 불교, 유교와 함께 도교가 당에서 전래되어 성행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말 영류왕( 榮留王 ), 보장왕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투어 도교의 일파였던 오두미도(五斗米道) 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기복을 위한 기도 불사로서 왕실에서 수용한 불교는 국민의 정신 통일의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말기에 이르러 특히 연개소문에 의해 배불정책이 일어났고 재차 당에서 도교가 들어오자 백성들은 다투어 오두미도( 五斗米道 )를 신봉하였고 결국 불교는 쇠약해지고 훌륭한 불교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삼국 시대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종래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무불교대(巫佛交代)라는 입장으로 단순화시켜 보아 왔다. 그것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불교의 전래와 수용을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외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것과 이것을 그 사회가 수용하는 것, 국가가 이를 공인한 것과는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종래 연구는 이를 간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불교가 전래된 것이 그렇게 많이 늦은 것이 아니다. 이미 눌지왕대에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사람 모례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양나라 사신이 왔을 때 왕실에 들어가 불교에 대해 이해를 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소지왕대에는 이미 내전에 분수승(焚修僧)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는 다만 국가적 공인 조치가 늦었을 뿐이다.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과 대립이 심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을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제장인 천경림에 사찰을 지으려다가 강력한 저지에 직면하였으며 그러한 경험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부진통을 겪게 됨으로써 독특한 신라의 불교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타협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신각과 장승이라 하겠다. 즉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게 되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공인 이후를 무불교대로 보아서는 안되며 무불융화의 입장에서 신라사상의 흐름을 파악하여야 한다.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을 빚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 이차돈의 순교설화이다. 이차돈의 순교설화는 [삼국사기] · [해동고승전] · [삼국유사] 및 금석문에 실려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법흥왕이 본디 불법을 존중하여 흥교(興敎)할 뜻이 있었으나 군신들의 반대가 두려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이차돈에 의해 창사의 결심을 하고 이차돈에게 왕명을 내리어 창사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군신들은 절을 지으라는 왕명에 대하여 내심으로 반발하였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창사가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창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알고 보니 이차돈이 왕의 허락도 없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왕은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려는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군신들의 의견을 도외시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자기와 장소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고 천경림에 창사한 이차돈을 왕의 입장에서 교명죄(矯命罪)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법의 온건파인 법흥왕은 흥법문제에 있어서 군신들이 촉각을 워낙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차돈이 군신들의 신경을 건드려 가며 천경림에 창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흥법의 강경파인 이차돈은 창사를 할 바에는 아예 토착 신앙의 본거지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흥법의 의지를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군신들의 반발이 거세게 나오고자 왕은 군신들의 반발을 일단 완화시키고 왕명의 준엄함을 보이기 위해 이차돈을 교명죄로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단 것이다. 즉 흥법에 대해 온건파인 법흥왕과 강경파인 이차돈의 의견 차이와, 흥법 자체에 대한 반대파인 군신들과의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아직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불교세력이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또한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지배 이데올로기화되어 가고 불교세력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무불교대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종래 토착신앙이 갖고 있던 위치를 차지하게 되
었지만 이것은 통치이념의 변화일 뿐 사상적으로는 두 개의 신앙이 마찰과 갈등을 겪으며 융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토착신앙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지속되어 오히려 불교에서 배워온 것도 있고, 반대로 불교가 토착신앙의 제요소와 융화하여 독특한 한국불교로 토착화되어 갔다. 불교는 지배층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토착신앙이 일반적 추세였다. 따라서 통치이념의 관점에서 지배층 위주로 볼 때는 무불교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대부분 기존의 토착신앙을 중요시하였으며, 또한 불교 자체도 토착신앙과 융화하여 토착화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2) 토착 신앙과 불교와의 융합
전국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뷸교 본연의 불사를 드리는 본당 이외에 토착신을 모시는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인도 ·중국 ·한국에 있어서 각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 나라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모습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또한 산문 근처나 사찰 입구에서 장승이나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산신각이나 사찰입구의 장승은 한국사찰의 특징이며, 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람의 배치에서뿐만 아니라 사찰연기설화 ·연등회·팔관회·탱화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토착신앙 내에도 무당의 무의 ·무구 ·무신도 ·무속용어 등에 불교적 요소가 융화되어 있다. 이렇게 토착신앙과 불교는 상호 영향을 끼치며 융화되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토착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환인천제가 불교의 제석천 곧 제석환인의 신앙으로 변화한 것과 국조 단군이 독성님이나 불교적 산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신앙이 토착신앙화 한 경우로는 불교의 미륵신앙이 화랑국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아도본비를 인용하여 신라는 그 서울 안에 일곱개의 가람의 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이)요,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요, 셋째는 용궁(龍宮)의 남쪽이요, 넷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요,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이요, 일곱째는 서청전(壻請田)이니 모두 전시에 가람의 터로 법수가 길게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여기서 천경림, 삼천기, 용궁 남, 용궁 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 등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들이다.
사원 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으로 여기에 불교사찰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나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의 선도산 성모수희불사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선도산에 산신과 신모의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이들 산신과 신모의 도움으로 새로 불전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모가 불상과 더불어 벽상에 53불(佛)과 6류(類) 성중(聖衆) 제천신과 오악신군을 그려 받들며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풀어 이를 항규로 삼으라 하였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주기하였다. 진평왕대(579∼631)의 이 기록은 산신과 비구니, 신사와 불전, 불상과 천신, 산신탱화가 융화하고 있는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일연이 주기한 오악에 대해 살펴보면 산신과 불사와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일연은 여기의 오악을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으로 보았으나 안흥사의 비구니 지혜가 모신 오악신군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오악에 있는 산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 산천조에 의하면 선도산이 서악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의상이 전교활동을 하던 화엄십찰이 오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이미 이교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의 이교도는 바로 토착신앙을 믿는 무리들인 것이다. 결국 삼국시기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한 지역의 오악과 남북국시기의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 모두 토착신앙과 불교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종이 수용된 9세기 이후 산지가람으로 발전하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게 된다. 산신이 사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러한 산지의 가람건립 과정에서 보다 확대되어 갔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위치 상으로 보아 산신각이 상위, 불당이 중위, 장승이 하위에 위치하는 우리 나라 가람의 삼중구조는 상당으로 관념되는 산신당, 중당으로 관념되는 서낭당, 하당으로 관념되는 장승과 솟대의 동제당의 삼중구조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 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당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융화되어 토착신앙의 가람 건립화에 따라 사원내에 존재하며 현세구복, 기복불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3) 토착 신앙과 불교의 교대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하늘 ·땅 ·해 ·산 ·바람 ·비 ·동물 등 여러 자연신에 대한 신앙과 제의가 이루어졌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계급이 발생하고 정치체가 형성되면서 여러 신들의 위계화가 이루어져 자연신의 하나인 천신이 여러 자연신의 최고 정점에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사회의 지배자는 만신들의 하이어라키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 천신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천신을 지배이데올로기로하여 계급사회의 정당성을 사상적으로 보장받고자 하였다. 고대국 가가 발전하면서 시조묘를 세워 천신신앙과 조상숭배신앙을 결합시켜 다른 정치체보다 우월함을 보였으며,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지역신을 중앙집권적 구조 속에 재편성하면서 천지신을 신앙하고 제의를 받들었다.
노동력의 수취보다 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복전쟁이 확대되고 많은 군사력이 요구되어 양인화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체제의 변화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미 전래 수용된 불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였다. 이는 불교가 천신신앙보다 평등주의적이며 보편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는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지배충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피지배층은 현실적 어려움, 특히 전쟁에 참여하면서 현실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수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광범위하게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피지배층이 믿는 불교를 이용하여 전쟁에 승려들을 참여시키고 전몰장병을 위해서 팔관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불교를 국교로 하여 대승통을 임명하였고 국가사원인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하였다. 토착신앙에서 불교로의 변화는 보다 평등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의 변화라 할 수 있으며,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로의 변화는 중국적 예제로 편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백제의 불교수용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승려이거나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생각되는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통한 이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다. 이는 왕실이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하고 또한 재래신앙에 대신하여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이 봉건 지배층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의 착취를 은폐시키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왜곡된 불교 신앙으로 적극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하였다. 그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그 후 170여년간 백제는 대외적으로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약했다. 하지만 불교의 발전은 그 동안에도 계속 이루어 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으로 겸익의 `미륵 불광사 사적'의 편찬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 이것은 백제 율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그러한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불교 업적의 축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것은 당시 미륵 정토신앙과 결합하여 실천 불교로서 민중 속에 뿌리 내리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중에게는 미륵신앙이 뿌리 깊었고 왕실 측에서는 계율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로 인해 왕실의 지지아래 율종과 계율 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왕의 '살생 금지령'을 통한 국민적 계율 실천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1) 불교의 전래와 국가불교(國家佛敎)로의 발전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이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의를 갖추어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명을 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전해진지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에 절을 짓고 백제인을 출가(出家)시키고 또 성직자까지 배출했다는 것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류왕 이전에 백제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백제때에 불교가 성행(盛行)한 사실에 대해서는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塔)이 매우 많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신왕(阿莘王)이 백성들에게 "불법(佛法)을 믿어 복(福)을 구하라"라고 하교(下敎)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음을 짐작하겠다.
백제에 전해진 초창기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초창기인만큼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내용과 종교적(宗敎的) 신성(神性)을 강조한 신이적(神異的)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백제불교의 한 특성으로 국가불교(國家佛敎)로서의 발전을 들수 있다. 그것은 대단위 규모의 사찰을 조영(造榮)한다는 것이다.
왕흥사(王興寺)의 경우 법왕(法王) 2년(600)에 일단 준공되었다가 그 뒤 35년간이라는 세월을 걸친 증측공사 끝에 무왕(武王) 35년(634)에 완성었다. 이 절은 무왕의 대외적인 웅략(雄略)의 웅지(雄志)가 어린 호국의 도량(道場)이었던 것이다. 왕이 이를 예불(禮佛)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인근의 바위에서 부처를 경배할 정도로 신성시하였으며, 국왕의 임석하에 자주 행향의식(行香儀式)이 베풀어졌다.
2) 계율의 성행과 승직제도(僧職制度)
계율(戒律)이란 몸(身)과 입(口)과 뜻(意)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일체의 악(惡)을 방지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歸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또한 계율은 성불(成佛)의 길에 들어가는 기본바탕이 되는 것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있어서는 자신의 도덕적 자비의 방향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계(戒)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불교도덕이며, 율(律)은 출가자(出家者)만을 위한 통제규칙으로 정의된다.
백제에서 계율이 성행(盛行)하게 된 것에는 불교가 전래되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본격적인 전파는 승려 겸익(謙益)의 활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도에 유학하여 율부(律部)를 깊이 연구한 다음 성왕(聖王) 4년(526)에 귀국한 뒤, 왕명에 따라 국내의 승려 18인과 함께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종사하였다. 이때 번역된 것이 율부 72권으로서 승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볼 때 백제에서는 계율학이 일찍부터 발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왕 스스로도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같이 전래된 백제의 계율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 가서 경전(經典)을 직접 구해와 번역 보급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백제의 계율이 중국과 고구려 신라에 전래된 것과는 다른 내용이기 떄문이다. 백제가 중국에 전래된 율전(律典)을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백제불교는 율종(律宗)을 중심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계율의 학문적 발전과 더불어 실천도 강조되었다. 법왕(法王)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고기잡이와 사냥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없애게 하고 나아가서는 민가에서 기르는 날짐승까지도 놓아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실천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계율의 실천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같은 불교계율의 강조는 백제에서 승직제도(僧職制度)가 일찍부터 발달하게 되었음을 생각케 해준다. 백성들이 계율을 생활화하고 있었으므로, 성직자인 승려들은 더할나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려들을 감독하는 승직제도가 만들어져 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승직제도에 대해서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일본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추고천황(推古天皇)이 백제 승려 관륵(觀勒)을 승정(僧正)으로 삼아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들을 검교(檢校)토록 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3) 미륵신앙(彌勒信仰)
경전(經典)에 따르면, 미래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미륵불(彌勒佛)이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하생(下生)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난뒤 출가하고 수행하여 성불(成佛)한 뒤에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들을 교화(敎化)하여 이상사회(理想社會)로 이끌게 된다고 한다. 미륵신앙이란 미륵불이 이끄는 그러한 이상사회에 살 것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경전에 설명된 미륵이상세계는
온 세상이 오직 평화로워 도둑의 근심이 없고, 도시나 시골이나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 또 늙고 병드는 데 대한 걱정이나 물, 불로 인한 재앙이 없으며 전쟁과 가난이 없고, 짐승이나 식물로 인한 독(毒)과 해(害)가 없느니라. 또 서로 자비스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듯, 어미가 아들을 사랑하듯, 언어와 행동이 지극히 겸손하니, 이는 다 미륵 부처님이 자비하신 마음으로 깨우치고 이끌어주시는 까닭이니라. 살생하지 않는 계행(戒行)을 지켜, 고기를 먹지 않으니 저 세상 사람들의 감관은 조용하고 평온하다({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라고 한 바와 같이, 중생들에게 있어 모든 걱정이 없는 사회다. 그러므로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에게 있어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공경효애(恭敬孝愛)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불교의 계율(戒律)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이 계율을 잘 지켜서 평화로운 세상이 전개될 때에 비로서 가능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훌륭한 왕이 다스리는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미륵이상사회는 중생들의 계율수지(戒律受持)와 국왕의 통치 모두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백제의 불교에서 계율이 성행하게 된 것이 미륵신앙의 발전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백제때에 미륵신앙이 유행한 것은 일찍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무왕(武王)의 미륵사(彌勒寺) 창건 설화는 그것이 번성하였던 사실을 잘 알려준다.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연못가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출현하였다. 이에 왕과 왕비는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고, 이때 왕비가 그 곳에 큰 절을 지을 것을 소원한다. 왕이 이를 들어주기로 하였으나, 연못을 메워야 하는 큰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사자사에 있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의논한 바,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 밤사이에 산 한쪽을 허물어 연못을 메워 주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조영하고는 미륵사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미륵사의 창건에 얽힌 설화의 대략이다. 당시에 건립된 미륵사는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옛날의 모습을 잘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설화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화산 중턱에는 지금도 사자암이 남아 있어서 미륵사 창건 설화에 얽힌 연기(緣起)를 실감할 수 있다.
이같은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용화산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으며, 세 개의 건물을 세웠다는 것 또한 미륵불이 3회에 걸친 설법(說法)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는 사례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자사는 미륵이 하생하기 전 도솔천에 있을 때 앉았다는 사자상좌(獅子床座)를 상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왕이 용화산 아래를 지나다가 미륵불의 출현을 목도하게 된 것은 전륜성왕이 미륵불의 처소에 나아가 설법을 듣는다고 한 경전의 기록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은 바로 경전에 나오는 전륜성왕에 비길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미륵사창건 설화를 통해 볼 때에 백제인들은 신앙공덕(信仰功德)으로 미륵불이 하생하고, 그래서 머지 않아 미륵이상사회가 도래(到來)할 것이라고 믿어왔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보아 백제인들은 매우 현실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4) 관음신앙(觀音信仰)과 [법화경(法華經)] 신봉(信奉)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일심(一心)으로 염불(念佛)하여 그 원력(願力)으로 현세(現世)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靈驗)을 얻고자 하는 신앙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로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經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화재나 홍수의 위험에서도 이를 벗어나며, 칼과 몽둥이는 부서져 없어지고, 또한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사례들을 살펴 볼 때 백제의 관음신앙은 대부분이 {법화경}의 내용에서 비롯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승려 현광(玄光)은 지금의 공주(公州) 사람으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혜사(慧思)에게서 {법화경}의 내용을 수업 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證得)하였으며, 스승으로부터 귀국해서 불법을 베풀으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귀국도중 용궁(龍宮)에 들어가 설법하였으며, 고향 공주에 들어와 절을 짓고 교화(敎化)를 펼쳤는데, 제자들은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승려 혜현(惠現)은 어려서 출가한 뒤 {법화경} 독송을 한결같이 하였는데, 그가 기도함에 영험이 많았다고 한다. 만년에 그가 산 속에서 수도하다가 입적(入寂)하였는데, 그의 시신을 호랑이가 먹어버렸으나, 오직 혀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승려 발정(發正)은 중국에 유학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참배하였다고 전한다. 무왕(武王)이 세운 제석사(帝釋寺)에 화재가 나서 법당과 부속 건물들을 불태웠을 때에 그 탑 속에 넣어 두었던 사리(舍利)와 {금강경(金剛經)}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에 있는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으로 불에도 능히 타지 않는다고 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에 따르면, 효녀 홍장(洪莊)이 중국의 황후가 되어 많은 불사(佛事)의 공덕(功德)을 지었는데 이로 인해 장님인 아버지의 눈이 뜨이게 되었다.
또 관음상(觀音像)을 조성하여 고국 땅으로 보낸 것이 옥과(玉果) 지방의 처녀 성덕(聖德)을 통하여 성덕산 관음사를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이 때의 효녀 홍장과 옥과 처녀 성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의 내용은 {법화경} 보문품에 설명된 내용 즉, 관세음보살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고 해탈케 할 때에는 많은 방편력(方便力)으로 몸을 변화시켜 나타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백제에서 믿어진 관음신앙은 {법화경} 보문품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천을 위주로 하는 현세이익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5) 미타신앙(彌陀信仰)
불교에서 정토(淨土)란 부처나 보살(菩薩)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 수많은 정토 가운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신 곳을 미타정토(彌陀淨土)라고 부르는데, 서방정토(西方淨土) 혹은 극락(極樂)이라고도 한다. 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정토에 가서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미타신앙이 행해진 사례로, 먼저 27대 위덕왕(威德王)이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해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하기를 원한다."고 하여 이를 신하들이 말리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위덕왕은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 따라 백명의 백성들을 출가(出家)시키고 갖가지의 불사공덕(佛事功德)을 지어 그것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억울하게 전사하여 원혼(寃魂)이 된 부왕을 위해 출가 수도하고자 함은 부왕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왕생기원(往生祈願)의 신앙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선광사연기(善光寺緣起)}에 따르면, 선광사의 생신아미타여래(生身阿彌陀如來; 일광삼존(一光三尊) 형식의 아미타불상을 가리킴)는 옛날 인도의 월개(月蓋)라는 장자(長者)의 청(請)으로 이 세상에 와서 출현한 본존불(本尊佛)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대림정사(大林精舍)에 계실 때에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월개장자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마침 그 지역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의 딸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월개장자가 부처님을 찾아가 참회하며 자비(慈悲)를 구하였고, 부처님은 그에게 서방(西方)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있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명호(名號)를 부르면서 간청하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에 월개장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서방을 향해 온갖 정성을 갖추고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불하였다. 그의 정성이 감응(感應)되어 월개의 딸은 물론 모든 환자들의 병이 낳게 되었다. 그후 1300년(혹은 500년)이 지난 뒤 월개장자는 환생(還生)하여 백제의 왕이 되었으나 다시 악업(惡業)을 짓고 있었다. 이에 생신미타여래가 다시금 그를 구제하고자 백제에 날아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백제왕은 지난 날을 생각해내고 참회(懺悔)하여 나라 안에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이 설화를 통해 생각해 볼 때 백제인들은 미타정토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바로 정토임을 믿으려 했다고 하겠다. 이것은 백제인들의 미타신앙이 매우 현세위주로 현실이익적인 신앙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 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傳授)
백제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그들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여러가지 문헌에 전하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성왕(聖王) 때에 전래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후 백제는 일본에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등을 파견하면서 여러 경전(經典)과 론소(論疏)들을 보내었고 또한 공장(工匠)들을 보내어 사원건축을 전수(傳授)해 주었던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전수에 힘입어 추고천황(推古天皇)때에는 사원 46개소 승려 860인 비구니 569인에 이르게 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백제 승려 혜총(慧聰)도 일본으로 건너가 대신 소아마자(蘇我馬子)에게 계법(戒法)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위덕왕(威德王)때에는 선신니(善神尼) 등 3인의 비구니가 백제에 와서 계학(戒學)을 공부하고 3년만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와 일본 사이에서 불교의 전수는 양국이 서로 오가며 이루어졌음도 알겠다.
그리고 추고천황때에는 한 승려가 조부(祖父)를 때리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승정(僧正)과 승도(僧都)를 두어 사찰과 승려들을 감찰(監察)토록 하고 있다. 이 때의 초대 승정에 임명된 승려가 바로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었다.
이상에서 살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에 있어서 불교는 초기의 전파과정뿐만 아니라 교학(敎學)의 발전 승직제도(僧職制度)의 수립 등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겠다. 이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바 그것은 현존하는 유물들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자세히 알 수 있다.
3. 신라의 불교수용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 온지 40 - 80년 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 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의 전래를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는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 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신라의 불교-전래와 공인
1. 불교의 전래
신라불교 전래에 관한 원 사료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이다. 눌지왕(417∼58년) 때 고구려로부터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 모례(毛禮)의 집에 와 있었는데, 양(梁)나라(502∼57년) 사신이 가져온 향(香)의 용도를 왕실에서 모르자 이를 일러주었으며 왕녀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4세기 말 이래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긴밀히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눌지왕대에 처음 불교가 전해졌다는 기사는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위 기사는 고구려와의 접경을 통하여 민간에 전해진 것이 잘 남아 있는 경우일 뿐이며, 유물·유적을 통해 보면 고구려와 통하는 또 다른 경로인 영주(榮州)·안동(安東) 쪽으로도 불교는 전해졌다.
그리고 신라왕실이 불교를 접한 시기가 고구려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았음은 5세기 초엽의 신라왕릉 유물에서 연꽃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왕족이 직접 가져왔거나 신라왕실에 보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묵호자를 통하여 신라왕실이 처음 불교에 접했다는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제동맹(羅濟同盟)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외교나 군사면에서 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밀접하였다. 신라가 선진(先進) 불교문화를 어느 한 경로로만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 사실(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이다. 지방에 숨어 있던 묵호자가 왕실에까지 불교를 포교하였다거나, 이때 시대상으로도 맞지 않는 양나라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계통의 불교가 전래된 사실이 하나로 중첩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라는 521년(법흥왕 8)에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양나라에 처음 조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볼 때, 신라는 백제를 통해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것은 외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북조불교의 성격으로 추정되는 초전불교(初傳佛敎)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사적에 대한 아도비(阿道碑 혹은 我道碑)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263년(미추왕 2)에 아도가 고구려에서 왔는데, 그는 조위인(曺魏人) 아굴마(我掘摩)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아도를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보고,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이 주장은 고구려에 온 아도가 위(魏)나라에서 왔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데, 일연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의 설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각훈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아도비로서, 각훈은 고구려·신라의 두 아도를 동일인으로 본 것이다.
아도비는 시대 착오가 심하며 설화의 인위적 구성이 짙은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아도는 진(晋)나라에서 왔다는 고려본기(高麗本記)의 기사가 있으므로,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두 나라의 전도승 아도를 동일시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생존연대로 보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말년 무렵 신라에 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신라 초전승이 아도라고 하는 사료는 아도비 밖에 없는데, 고기(古記)에 의하면 아도는 정방(正方)과 멸구비(滅垢批) 다음에 세 번 째로 왔으며, 「고득상시사」(高得相詩史)에는 아도가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하고 다시 온 승려였다고 하였다. 아도는 신라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으므로, 아도를 반드시 초전승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소지왕대(479∼500년)에 모례의 집에는 몇 명의 승려가 신도들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하였는데, 이러한 교세(敎勢)는 왕경(王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는 내불당(內佛堂)이 있고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이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인다. 이 사건은 불교를 비방하는 세력의 모함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들이 처형을 받은 사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왕실에서 불교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 종래의 주장과 위배된다. 이것은 국가적인 불교수용에 대해 정치적인 선입견이 일률적으로 통용될 수 없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법흥왕 이전의 불교실태는 불교전래 사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백에 가까운 듯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소재가 많은데, 피장자(被葬者)의 활동연대는 불교공인의 해(527년) 전후가 된다. 이것은 법흥왕 자신이 불교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신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도 불교가 공공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볼 때 막연히 사용되는 ‘공인’(公認)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2. 불교공인의 실상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527년(법흥왕 14, 丁未年)이라 하지만, 이해에 이차돈은 처형당하고 흥륜사(興輪寺) 창건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법흥왕 정미년은 공인의 해가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은 해이며, 실질적 불교공인은 법흥왕 22년(乙卯年) 즉 흥륜사 공사가 재개되던 해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차돈에 얽힌 이야기는 그것이 비록 종교사화(宗敎史話)라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흥륜사는 을묘년에 공사를 재개하여 544년(진흥왕 5)에 초창(初創)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둘째, 이차돈 설화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법흥왕의 신행(信行), 즉 잠시 정사(政事)를 멈추고 삼보(佛·法·僧)의 노예가 되어 입사수도(入寺修道)한 사신(捨身)의 행적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왕사신(帝王捨身)의 예는 진흥왕 말년의 행적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셋째, 법흥왕이 사신한 장소는 을묘전 이전부터 있었던 흥륜사이며 이 때문에 흥륜사는 대왕사(大王寺)라고도 불렸다.
법흥왕의 사신은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고, 이에 귀족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법흥왕이 주재(主宰)하였지만 그도 귀족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이차돈의 순교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차돈의 죄목은 흥륜사 창건 명령을 전한 것이므로, 법흥왕의 사신에 대한 비난은 왕의 신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왕의 사신을 도왔던 이차돈이 처형되고 왕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즈음은 아직 왕호(王號)를 매금(寐錦)이라 칭하던 시절로서, 왕이 명실공히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현재의 사료상으로는 대왕(大王)을 칭하기 시작했던 갑인년(甲寅年, 534년) 이후가 된다.
왕 자신의 사신은 국가의 불교정책과 직결된다. 순교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던 법흥왕의 의욕은 일단 꺾였지만, 왕권의 신장에 따라 그것은 부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간과할 때 을묘년의 흥륜사 중창(重創)을 실질적 공인의 연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미년은 왕이 불교에 대한 태도를 천명한 해이며, 이해에 조정에서 불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정미년은 신라불교사에서 하나의 기원이 되는 해이며, 『삼국사기』에서 이해에 “처음 불법을 행했다”(肇行佛法)고 한 기사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3. 진흥왕대의 불교
진흥왕(540∼76년)의 불교정책은 정치와 불교 양면을 관장하여 집권적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남조, 특히 양무제(梁武帝)의 정책을 본받은 바가 많다. 그는 재위중 몇 번의 사신을 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진흥왕은 영토확장을 감행하여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수(巡狩)할 때 승려를 대동하였는데, ‘사문도인 법장 혜인’(沙門道人法藏慧忍)이 진흥왕순수비문에 보인다. 수행(隨行)한 신하들 가운데 이들 승려의 이름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할 때에는 새로 정복한 곳의 지역민으로부터 충성을 약속 받고 왕과 신하는 이들을 보살필 것을 맹세하는데, 여기에 승려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맹(會盟)의 정신이 불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제 불교는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의 새로운 지도이념이 되어 가는 것이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창건하여 전국의 불교계를 통제하였고, 국가적인 불교의식이 이곳에서 베풀어짐으로써 황룡사는 신라사회의 정신적 중추가 되었다.
진흥왕은 전몰사졸(戰沒士卒)을 위하여 팔관회를 베풀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팔관회가 호국적 성격을 띠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가신도(在家信徒)가 경전에 입각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교수행의 하나로서 남조에서 유행·발전한 것이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유학갔던 승려가 속속 돌아왔다. 이들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진신(眞身)을 모시게 되어 신앙면에서 차원을 한 단계 높이게 되었고, 함께 가지고 온 경전은 교학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진(陳)나라에서 명관(明觀)을 시켜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오게 됨으로써(565년) 신라는 한역경전(漢譯經典)의 대다수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수용의 단계를 지나 독자적 발전을 이루어나갔고 또한 자국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 시기의 승려 중에는 학덕면에서 중국의 고승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그들 중 『고승전』에 실린 이가 몇 있다.
4. 고승과 국가
1) 원광
원광(圓光, 541∼630년 추정)이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승려의 신분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섭취하기 위한 유학생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 황제의 칙허를 얻어 승려가 된 그는 양무제의 사우(師友) 장엄사(莊嚴寺) 승민(僧旻)의 제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속고승전』 혜민전(慧旻傳)에 의하면 “혜민이 15세(587년) 때 회향사의 신라 광법사에게서 성(실)론을 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 상으로 보아 ‘광법사’는 원광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이름을 날리던 원광은 수나라의 서울 장안으로 가서(589년)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하고, 본국의 요청에 의해 600년(진평왕 22)에 조빙사(朝聘使) 2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진평왕 30년,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쓰라고 하자 원광은 그것이 사문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신라의 신민임을 이유로 명령을 받들었다. 세속법과 불법을 이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원광의 고민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원광 이후 승려들의 적극적인 호국활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세속오계를 가르칠 때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다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즉 신라의 청소년들에게 살생유택(殺生有擇)과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가르쳤지만 자신에게는 불법의 길이 따로 있었다. 진평왕 35년에 황룡사에서 1백 명의 승려를 모시는 법회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었을 때, 원광은 거기서 경전을 강의하였다. 백고좌회는 『인왕경』 호국품(護國品)에 근거한 것인데, 이 경전을 강의함으로써 나라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수·당대 이후의 호국, 즉 밀교적 주술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법력(法力)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남조불교의 한 특징으로서, 『인왕경』은 호국경전사상(護國經典史上) 정법치국사상(正法治國思想)과 밀교적 치국(治國)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왕은 원광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참회하였다. 계율과 참회의 병행은 중국적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의 특징으로서, 그 목적은 계행(戒行)에 있다기보다 참회에 의한 죄의 소멸과 현세에서 복을 받는 데 있다. 계를 받은 왕, 즉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왕이 원광에게 의식을 손수 마련해드렸다는 일화는 과장이나 꾸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국가와 국왕에 대한 원광의 태도는 양무제 때의 숭불 태도와 흡사한 것으로서, 원광의 초기 유학시절의 견문은 귀국 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에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와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가 있다.
2) 안홍
안함(安含)으로도 알려진 안홍(安弘, 579∼640년 추정)은 601년(진평왕 23)에 수나라에 유학가서 5년 만에 호승(胡僧)과 함께 돌아왔다. 안홍의 저서에는 참서(讖書)라고 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한 권이 있다. 『해동고승전』에 이 책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원문과 후대의 해석문이 섞여 있어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원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머지않아 이웃나라로부터 침공을 받을 것이며, 이에 대비하여 중국에 적극적인 외교를 펼칠 것, 그리고 비록 이러한 시련이 있더라도 희망찬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까닭은 선덕왕이 도리천녀(悼利天女)이므로 신라는 곧 불국토(佛國土)로서 불력(佛力)의 가피(加被)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안홍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구한(九韓)의 침공을 막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유학시절에 보았던 수나라 서울의 국찰(國刹) 대흥선사탑(大興善寺塔)의 건립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수문제(隋文帝)는 새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빌고 아홉 오랑캐(九服)가 평정되었음을 스스로 칭송하는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당시 수나라에는 천하통일의 당위성을 논하는 참서가 유행하였다. 즉 수문제는 사천왕(四天王)의 보살핌과 도리천 덕분에 천자가 되었다고 하는 불국토설 등이 그 내용인데, 안홍은 이러한 견문을 그대로 신라에 원용하였다. 신라 불국토설은 자장(慈藏)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지만, 자장의 이 사상은 안홍의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9층탑 건립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의해서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그뒤 통일이 되자 이 모든 것을 예언했던 안홍과 그의 참서가 새삼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비록 불교계측의 예언이기는 하지만, 신라인은 자신들의 나라가 불국토이기 때문에 외적방어의 차원을 넘어 성역(聖域)의 보전, 더 나아가 신라를 중심으로 욕계(欲界)의 인간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수문제 때의 참문(讖文)은 이미 성취된 것에 대한 당위적 설명이지만, 신라의 불국토설은 미래상의 제시로서 이것은 전적으로 안홍의 공적이다.
3) 자장
자장의 아버지 소판(蘇判, 제3관등) 무림(武林)은 진덕왕대(647∼54년)까지도 국사(國事)를 논의하였던 진골귀족이다. 자장은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재상의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출가하였다. 638년(선덕왕 7) 당나라에 유학 갔을 때 자장의 나이는 25세를 조금 지난 때였다. 당나라에 갔을 때나 귀국할 때 당태종(唐太宗)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자장이 유학한 데에는 국가적으로 대당(對唐) 외교사절의 일면도 있었을 것이다. 자장은 먼저 법상(法常)을 찾아뵙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종남산(終南山)에서 3년 간 수도하였다. 당시 종남산에는 중국 계율종의 종주(宗主)인 도선(道宣)이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자장이 도선과 상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자장의 저서에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 磨私記)·『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등이 있다는 사실로 보아 도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장과 도선과의 법맥(法脈)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자장전에 나오는 설화를 그대로 믿어 자장의 나이가 도선보다 훨씬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장은 귀국하여(643년) 궁중에서 『섭대승론』을 강의하였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승려의 규범을 바로잡고, 지방사찰을 다니며 계율을 지키도록 일깨워주었다. 이즈음에 이르러 나라사람으로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자가 10명 중 8,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계율존숭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승단(僧團)에는 출가득도나 의식에 있어 일정한 규범이 필요하였고, 동시에 그러한 계율이 만들어진 의의를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나 사회적으로는 계율을 일상적인 행동규범, 즉 예나 율로 인식하여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도덕가인 승려에게서 그러한 지침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다. 원광에게 세속의 계율을 얻어듣고자 한 것도 그러한 예이지만,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많은 백성이 계를 받도록 한 것도 예속(禮俗)의 진작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자장의 저서에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와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가 있는 것을 볼 때, 정토교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을 화엄사상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후대에 점차 나타나고 있는데, 어떻든 그를 어느 한 종파로 국한시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교종파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활동면을 함께 보면 ‘율사’(律師)라는 전통적 호칭은 타당하다.
자장은 불국토인 신라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고자 태백산·오대산 등지를 순례하였다. 이것은 감통(感通)을 중시하는 자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절대적인 신앙에 귀의함이 없이는 계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도선의 태도와 서로 통한다. 자장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았다. 그리고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고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건의하는 등 구체적인 사대(事大)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5. 불교의 대중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전도승을 후원했던 모례를 모례장자(毛禮長者)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처음 포교의 주요 대상은 지방유력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왕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점에서 왕이나 귀족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민중에게도 불교는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불교의 평등주의 이념, 구원(救援)이라는 종교적 이상은 피지배계급의 신앙심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다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나라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고등종교에 의해 공통된 도덕률을 가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을 것이므로 계율 등 일부 교설(敎說)의 전파에는 적극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광이 대중포교를 위해 점찰법회를 연 것은 길흉을 점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참회를 시킴으로써 중생의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무한한 공덕을 갖춘 여래장(如來藏)임을 깨달아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에 의해 죄를 소멸시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진평왕대(579∼632년)에 안흥사의 비구니 지혜(智惠)도 점찰법회를 열었다. 지장보살은 땅속에 감추어진 것을 인격화한 보살이라는 점에서 여래장 교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혜가 지은 불전(佛殿)의 지장보살상은 선도성모(仙桃聖母), 즉 산신의 신사(神祠) 밑에서 캐낸 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불교의 보살과 재래신앙의 산신이 이렇게 맺어짐으로써 지장보살이 어떻게 친근하고 쉽게 이해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설화이다.
그렇지만 원광의 대중법회는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는 측면이었지 민중 속에 살면서 그들과 같은 길을 가는 보살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왕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국가의 여망(輿望)을 받았던 고승들이 민중을 멀리하였던 것은 자장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 거사(居士)가 자장을 보고자 하였으나 문전에서 쫓겨나자, 그 거사는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사자보좌(獅子寶座)를 타고 가버렸다. 이 거사는 문수보살의 진신이었다.
진평왕대의 승려 혜숙(惠宿)은 국선(國仙) 구참공(瞿○公)이 사냥을 즐기는 것을 나무랐으며, 왕의 부름도 거절하였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 하녀의 아들이었는데, 천진공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이름 없는 절에서 살았던 혜공은 거리와 골목을 누비면서 민중교화에 힘썼다. 대안(大安)은 언제나 시장바닥에서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외쳤다. 왕이 대안으로 하여금 흐트러진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꿰어맞추라고 궁궐로 불렀으나, 그는 이것을 시장에 벌여놓고 정리하였다. 이와 같이 대중교화에 힘을 쓴 승려들은 권력을 멀리하였고, 쉬운 말로 불교의 뜻을 풀이해주었으며, 간단한 의식(儀式)을 통해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몸소 모범을 보였다.
4. 신라불교의 전래
1>신라 왕실의 호국 불교
법흥왕에 이은 진흥왕은 왕권의 확립 및 신장과 국토 확장에 힘쓰면서 불교의 국교화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 예로
① 법흥왕이 착공했던 홍륜사 완성(554년)
② 사람들의 출가 공인(544년)
③ 고구려 침략 때 귀화해 온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삼음(551)
④ 부족적 축제를 팔관회의 형식으로 계승 발전
⑤ 승관제를 확립하여 불교의 국교화,제도화에 주력
⑥ 황룡사의 건립으로 용으로 상징되는 신라 왕권의 신장을 반영하며 왕권 신성화의 도구 구실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정신적인 면을 통합하여 신라가 삼국 통일의 주체가 되게 하는데 기여한 면도 없지 않다.
삼국 통일에 이바지 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원광이 있다. 그는 불교적인 여러 측면에서 보았을때 큰 획을 긋고 간 사람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도 신라의 지배 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승려 귀족으로서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원광뿐만 아니라 자장에게서도 나타난다. 자장의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원광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우리들이 원광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세속5계] 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세째,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 의 내용이다. 언뜻 보면 둘째, 세째 계명이 유교적인 사고인것 같으나,이는 육방례경(六方禮經)과 같은 초기 경전에도 나오는 세속인에 대한 불교의 핵심적인 교훈이다. 그리고 다섯째 계명은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적 의식이 불교와 혼용된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첫째, 넷째 계명은 불교적인 윤리와 무관한 왕실 옹호의 윤리이며, 당시 귀족들의 요구에 규합하는 윤리이다. 이러한 원광의 임전무퇴의 계율이 고구려, 백제와의 싸움에 큰 힘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힘이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도 왕실 호국불교를 이끈 한 사람이었다.
다음으로 자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박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와 같이 신라 땅이 결코 불교와 무관한 낯선 땅이 아니라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자장이었다.
그는 선덕 여왕 때 활약한 승려로서 원광에 이어 신라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층 왕실과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엄격한 계율과 의식을 갖추고 대국통으로서 전국의 승려들을 감찰하고 포살, 자자의 의식을 시행했으나, 거대한 절이나 탑등을 건설하는데 민중을 동원하여 혹사시켰다. 그러니, 당연히 민중들도 그러한 귀족 불교의 위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당시 지배층의 억압과 전쟁과 노역의 시달림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결국 귀족의 편에 서서 그들의 민중에 대한 억압이나 수탈을 합리화 시켜 주던 자장은 더 이상 민중의 스승이 되지 못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불 불교는 계급적 권위를 타파하고 억압받는 민중에게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중국 불교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 결국 왕권이나 신성화하고, 지배층을 위해 일하는 귀족 불교로 되어 민중을 무시하는 종교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렇듯 신라 불교가 귀족 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세속민중과 살면서 자기의 삶과 진리를 중생에게 바치면서 진정한 불교를 실천하는 승려 - 혜숙, 혜공, 대안, 사복 - 들도 있었다.
2>신라 불교학의 발전-의상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한국 화엄의 기초를 닦은 승려이다. 그는 학문을 대성함과 동시에 제자를 양성하고 대중 교화에 힘쓰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도 힘쓴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 사상과, 상호 연관성을 중시 하는 - 홀로 존재 할 수 없다.-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에 고려의 화엄종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적 실천이 관음 신앙을 대중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토 및 동해 용왕 신앙과 결합시킨 의상의 민족적 관음 신앙에 힙 입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장의 문수 보살, 불국토 신앙이 사대주의적 요소로 인해 민중에게 외면 받은 것과 대조된다. 그는 권력을 멀리하고 완고한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직접 요구하는 등 지행일치의 실천에 앞섰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3>신라의 통불교적 발전-원효
통일 신라 초기에 불교계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한 사람 중 특히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자였다.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학은 원효에 의해 불교 각 경전의 이론이 통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불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정토신앙] 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속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최대의 고승으로 자리잡았다. 원효의 정토 구원관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하였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효가 비록 지배 계급의 소유물이었던 귀족 불교를 타파하고 민중 불교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의 제도적 왕권 불교에 대응하고 정토 실현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민중 불교 결사와 같은 조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미타불 타력 신앙에 의해 숙명적이고 체념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신앙으로 오도될 가능성을 남겼다.
우리 나라에서 주체적 연구를 통해 발전된 신라 불교학으로서의 원효의 불교학은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불교의 존숭(尊嵩)을 받고, 그의 실천적 불교 대중화 운동은 일본의 불교 민중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화엄학, 대현(大賢)등도 외국에 영향을 끼치는 데, 이는 신라 불교의 자주적인 발전과 대외적인 영향력을 반영한다.)
5. 통일 신라의 불교
신라불교의 타락과 선종의 수용
이 시기의 불교는 대규모의 사찰, 불상, 탑, 종을 지어 호사한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 대가로 승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러한 행위가 너무 심해져 한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이 생기는 한편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는 지방의 새로운 불교 종파로 선종이 성장해 왔다.
이 당시 9세기의 신라는 골품제가 신분체재의 모순을 드러내 봉건 체제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면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한 방법과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당시 귀족 불교인 교종이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지배자의 복을 비는 일만 일삼던 때에 비하여, 상당히 지방민중에게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선종도 하나의 착취자였던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했다. 호족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어 유랑하였고 마침내, 그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도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산간에 은둔하며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 잡는다.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민중 봉기가 극에 달한 9세기에는 미륵 신앙과 도참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았다.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지방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써 민중속에 파고들기 쉬웠다. (( 그리고 삼국 시대에는 비록 왕실과 귀족층의 주도하에 전개되었으나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원, 민중 구제를 위한 집단적인 신앙이었다.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방에서 -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라 - 미륵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참고 : 5교 9산
신라불교는 열반종(무열왕때 보덕), 율종(선덕왕때 자장), 법성종(경덕왕때 진표율사), 화엄종(원효와 의상),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구산은 신라말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왔는데 고려초기까지 대표적인 9개의 선문이 개창되었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합니다.
9산선문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 지리산 실상사. 곡성군 죽곡동 동리산 태안사.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사. 강릉군 구정면의 사굴산 사굴사. 영월군 수주면의 사자산 흥녕사.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 봉암사. 창원군 상남면 봉림산 봉림사. 해주군 금산면 수미산 광조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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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