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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김대현
오늘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선 가급적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이 없는 유모차를 끌고 동네의 폐지를 수거하러 다니던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게 된 사정이라든가, 며칠 전의 회식에서 회사의 발전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건배를 하던 반쯤 머리가 벗겨진 직장동료의 빈 책상 같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이제는 용도가 폐기되어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의 잉여로 전락한 사람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이 ‘우리’의 곁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물론 ‘우리’는 ‘그들’의 사라짐에 대해 어떠한 채무도 없다. 또한 ‘그들’의 존재 여부가 ‘우리’의 삶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그들’이 없어도 세상은 문제없이 돌아간다. 잉여는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할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것들이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떠오르곤 하는 사라진 ‘그들’에 대한 생각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우울하게 한다. 잉여로 전락한 ‘그들’의 모습이란 결국 언젠가는 도래할지도 모르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안락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사정을 은폐해야 한다. 타자의 고통은 온전히 타자의 것으로 그쳐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삶으로 틈입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환자들이 병원 앞뜰에서 볕을 쬐고 있다 청소부는 낙엽을 쓸고 노인들은 은행을 줍고 아이들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 환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공을 던지고 나뭇잎을 밟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다 우체부가 들어오고 피아노가 나가고 조문객이 들어오고 구름이 나간다 바보가 들어오고 백치가 나가고 오르간이 들어오고 딱정벌레가 나간다 쥐들은 쥐구멍으로 사라진다 병원 뒤편 숲에서 환자들이 나온다 잠든 채로 걸어 나온다 환자들이 버스틀 타고 멀리 멀리 간다 개가 짖는다 햇볕이 들어가고 그림자가 나온다
-강성은, 「병원」(『창작과비평』, 봄호) 전문
병원에 대해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고 있는 것은 병원이 오직 치료만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푸코는 병원이 사회 공동체가 더 이상 그 존재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배제하여 자신들의 시선 밖으로 격리하는 공간임을 밝힌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상태를 선별하여 분류하는 권한이 그것이다. 병원이 그에 수용된 사람들의 신체에 대한 처분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분류와 선별의 권한이 곧 처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병원이란 치료의 공간임과 동시에 격리의 공간이며 사람의 신체가 처분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병원이 가지는 이러한 은폐된 기능이 공공연히 외부로 밝혀지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합법적으로 대행해주는 공간을 잃는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 커다란 손실이 된다. 예컨대 일상에서 해결할 수 없는 처치 곤란한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도 그럴 것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자를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은 보호자 자신에게도 심적 고통으로 다가온다. 때문에 환자의 치료가능성과 무관하게 그를 병원으로 보냄으로써 보호자는 자신의 평온을 교란하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윤리적 위안을 얻는다. 이로써 병원은 환자와 사회와의 격리를 통해 환자를 처분하고 싶다는 내면의 욕망과 그의 이성을 감시하는 윤리적 관찰자를 동시에 만족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강성은의 시에 등장하는「병원」은 격리와 처분이라는 은폐된 기능으로서의 병원이 가지는 속성을 날카롭게 간파한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주어와 술어만으로 간략하게 구성된 문장들은 마치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인체의 장기를 보는 것처럼 병원의 일상을 건조하게 묘사한다. 주목할 점은 병원의 일상이 기술되는 동안 고통과 슬픔 같이 마땅히 병원에 속해야 하는 속성들은 전혀 표출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겪는 모든 슬픔과 고통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행간 속에서 외부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진실은 가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은 경우에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강성은의 시에서 병원의 일상이 마치 휴일의 공원 풍경처럼 평온한 이유도 이와 같다. 아니 평온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격리시킨 우리의 마음 또한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안에서 누군가는 아파하고 슬퍼하며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멀리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는 병원이 제공하는 윤리적 차단막을 통해 반드시 치러야할 어떤 부분을 면책 받는다. 병원이 그들의 마지막 처분을 대행하며 우리의 양심을 보전하는 것이다. 병원의 진짜 일상이란 기실 이런 것이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공원 벤치에 앉아 스윽스윽
일회용 면도기가 지워진다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린
버들개지들의 눈이 지워진다
백태 낀 눈알 몇 개가 눈치 없이 깜빡,
다시 나타났다 다급히 지워진다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일그러지는
바람의 입 뿌옇게 번져간다
왜 다들 말을 하려다 맙니까!
순식간에 지워진다
다이어리에 꽂아둔 애인의 입김이
벙어리장갑 속 잘려나간 손마디가
지워진다 새벽마다 공중변기의 목에 걸려 꿈틀대는 알약들이 하앟게 새하얗게
어라, 붓을 쥔 손이 지워진다
붓이 제멋대로 뛰어다니며
공원을 지워버린다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하늘에서 깡마른 손이 뻗어나와
내 입을 스윽 지웠다
-김희정, 「망각화법」 (『작가들』, 봄호) 전문
도시는 기묘한 공간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도시를 생성하고 도시가 다시 그들의 욕망을 소비한다. 상상할 수 있는 가능한 욕망들이 물화되어 가는 곳. 도시는 그렇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확장한다. 그래서 도시는 욕망의 산물임과 동시에 욕망의 소비자라는 이중의 지위를 가진다.
김희정의 「망각화법」은 도시가 생산하는 욕망을 소비하기 위해 도시에 거주하지만 도시에게 자신의 용도를 입증할 수 없어 더 이상 어떤 욕망도 소비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도시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도시 내부에 자리한 게토에 격리되어 결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수요일 오후 2시”는 전후를 통틀어 휴일의 나른함에서 가장 멀어진 시간이다. 자본이 가동할 수 있는 표준 노동시간으로 규정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이 시간은 자본의 활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도시의 활력과는 가장 먼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이란 도시에 머무를 자격이 없는 잉여라는 말과 동의어에 해당한다. 하지만 실업자가 된 그는 아직 미련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손마디”가 잘려나간(아마도 공장일 테지만) 그는 자신이 아직도 도시에 용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일회용 면도기”로 자신의 수염을 자른다. 하지만 도시의 판단은 냉정하다. 한번 낙오된 자를 다시 받아들이기엔 이미 대체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도시의 문을 두드리고 그 안에 들어가려 하지만 도시는 결코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배제의 공포에 의해 불면의 새벽을 달래는 고통의 시간. 입에서 토해낸 약물은 “공중변기”에 걸려 내려가지도 않는다. 그렇게 더 이상 어떤 생산에 기여하지 못해 용도 폐기된 그는 세상에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려 하지만 이전에 사라졌던 다른 사람들처럼 도시 내부에 구획된 추방공간에 격리되어 지워져 간다.
뭐야. 어지러워 내 인격, 좀 전까지 뛰어내릴 듯 나 흔들렸지, 사람들 다 퇴근한 사무실, 혼자서 일하다가 15층 창문을 내다보다, 신물이 올라왔었지 그냥 사는 거야 평생 이렇게, 소금 맛 생각 맛 치즈 맛 몽땅 섞인 이상한 쓴물이, 흔들린다! 떨어진다!
나한테만 서빙되는 샌드위치랑 체코식 과일차랑, 그런 게 먹고 싶었지 블타바의 섬에 도착해서 나룻배가 지나가는 것도 보고 껴안은 연인들 그림자도 엿보고 싶었는데, 그래야 살 것도 같았는데
여긴 어디일까, 먼지 잘 떼어주는 끈끈한 아이, 그 아이만 데리러 온 건데, 이게 뭐야. 벌써 바구니에 가득 든 아이들이
색색깔로 잘 지우고 싶었습니다 컬러 지우개
활자로 쾅쾅 박힌 것도 지울 수 있겠죠 수정 테이프
근데 목공 풀은 왜 들어 있는 걸까? 그래, 떨어지지 마 내 발아! 네 자리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그래도 설득 안 되는 건 스탬프 잉크패드, 놀라지마, 내가 도장을 파서 내가 도장을 찍어주고 싶은 것, 못 살아, 이유를 대자면 못 댈 것도 없지만, 이렇게 모노드라마를 찍어도 좋은 걸까? 누구세요, 내 안에 누가 있는가요? 걱정 마 너한테 자유를 허락할게, 여기서도 네 맘대로 못하면 대체 네가 뭘 할 수 있겠니? 이 서류를 들고 세상 끝까지 가보렴
파스텔 토드 고깔모자, 마늘다지기, 응원용 막대 풍선, 눈 스프레이, 에코 마이크, 초콜릿 중탕기, 삐에로 코 안경, 펑크 가렌드, 눈썹용 칼, 양념통 가방 세트, 황금 복고양이, 아, 아,
내 손이 빨라져서, 누가 좀 말려줘요! 내 새끼들이 나를 잡고 놓아주질 않네, 그래, 난 너희들의 가련한 희생양, 얘들아, 아련한 조명 아래서 우리 지금 조촐한 티타임을 갖는 거지, 그냥 잠시 눈만 마주친 거지 너희들이 이렇게 나한테 웃어주니까 내가 누구한테 웃어줄 필요가 없는 곳
여긴 어디일까
그냥 비행기표 끊기 전에 잠깐 들른 곳
-박상순 「천 원 숍」 (『문예중앙』, 봄호) 전문
현대 자본주의가 근대의 생산자 위주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 전환된 이후 소비하지 않는 것은 거대한 중죄에 해당한다. 바우만은 소비할 의사만 있고 소비할 능력을 상실한 미완의 소비자는 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을 상실한다고 한다. 사회는 정상적 소비를 지속할 능력이 없는 결함 있는 소비자들을 선별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거주할 수 있는 시민권을 박탈한다.
박상순의「천 원 숍」에는 소비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이 붕괴될지도 모르는 “신물”나는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에 관여한다. 하지만 자신이 현재 생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잉여로 전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안전한 소비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나한테만 서빙되는 샌드위치랑 체코식 과일차랑”과 깉은 화려한 소비를 꿈꾼다. “그래야 살 것도 같”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지속될 수 없는 일회성의 소비는 언젠가 반드시 파탄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결국 소비사회의 상층부로 올라가길 체념한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격리된 소비의 장소로 향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도 네맘대로 못하면 대체 네가 뭘 할 수 있겠니?”라는 바람과 달리 그들은 그곳에서도 자기 맘대로 소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승은커녕 언제 소비사회의 잉여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삶에 대한 공포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목공 풀”을 들어 올리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행기표를 끊기 위해 잠깐 들른 곳”이라며 필사적으로 부인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헤어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자신이 격리되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자를 위한 사다리는 없다. 물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특별히 없을 테지만.
목 없는 울음이 저 혼자 우리들 사이를 빠져나갑니다 잠든 사이
우리의, 어깨에
누군가가 깃발을 꽂고 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쓸모 없어졌습니다 고민하는 사이
또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어깨를 찢고 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워졌습니다 울음도 없이 베어질 목도 없이
우리의 국적을 기억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우리는 때때로 유쾌해집니다
우리를 보고 웃어줄 수 있습니까?
서로를 보고 왜 웃고 있습니까?
그리고, 웃는 사이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알지 못한 채 서로를 미워합니다
그렇게
망각된 마음의 국가를 상상합니다
우리는
소변기 바닥에 떨어진 음모들처럼
지금 여기로 와야 할 사람들의 목록처럼
-김안. 「불가촉천민」 (『문학동네』. 봄호) 전문
소비사회에 거주하는 것이 부적격으로 판정된 자들의 “어깨에”는 누군가가” 새기고 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남는다. 실패자라는 낙인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격리하여 배제한 공동체를 향한 재진입의 욕망 자체를 금지한다. 잉여인간으로 확정된 자들은 더 이상 사회로부터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할 어떠한 소임도 부여받지 못한다. 동시에 그들은 사회에 자신의 역할이 부재한 자로서 그들이 사회로부터 어떠한 구제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함께 확인받는다.
김안은 “쓸모 없어”짐으로 해서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고민”할 시간도 없이 사회에서 “지워진” 사람들인「불가촉천민」에 대해 말한다. 카스트의 최하층에 위치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이들은 가끔 그 비참한 신세를 위로하기 위해 '신의 아이들[Harijan]'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그들이 신에게 조차 버림받은 사람들이란 진실을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물신에 의해 처절하게 버려진 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부정의 대상으로 낙인 지워진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소비사회를 교란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소비사회의 무결성을 해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격리되어야 한다. 기만의 윤리학이 작동하는 시간이다. 단지 소비할 능력이 부족한 뿐일 그들은 이제 게으름과 무능력이라는 사유로 인한 윤리적 결격자로 전화한다. 아감벤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사회의 예외적 형태로서 언제 버려져도 괜찮은 채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알지 못하게” 되며 격리된 장소에서 “알지 못한 채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분화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망각”하며 서로의 고통 또한 망각하는 것이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두 손을 씻으면
위로할 수 없는 손이 자란다
고통은 유일하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젖은 배를 끌고 황금의 도시로 가는 자들아
나의 인간과 당신의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울면 지는 것이다
홀로 남겨진 것은 우리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물속은 폭풍우와 풍랑이다
소년과 소녀는 물의 안쪽 높은 곳에서
비루한 지상을 위로한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쓴다
물에 찔리고 물에 부딪히고 물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소년과 소녀들, 나는 한 잔의 물을 마신다
물에 젖은 눈과 손을 청춘을
물에 젖은 눈과 손과 청춘으로 닦아주마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바다나 읽는 나는 무력한 배경이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견고한 악몽이다
-서안나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애지』, 봄호) 전문
인간이 해석의 근본이던 시절의 인간의 존재는 해석의 기준점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자본이 주도하는 시대에서 인간은 해석의 대상의 될 뿐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해석의 기준을 결정하는 자가 시대정신을 규정한다. 자본의 시대에 소비하지 못하는 인간이란 부정의 대상으로 기술될 뿐이다. 하지만 가끔 시대가 행하는 공식적인 해석에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 중심에서 밀려난 자들의 기억을 추출하여 시대가 축적한 견고한 해석에 균열을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들. 역사는 아주 가끔 그들의 노력에 의해 바뀌곤 한다.
서안나의「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또한 구조의 변화를 위해 그들이 행하는 끈질긴 노력의 일환이다. 시에서 “물”은 현상에 대한 고정된 해석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고통은 유일하지 않으며 인간은 다른 인간과 다르므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들이 그렇다. 그때마다 시인은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그가 겪는 “고통은 유일”한 것이므로 그의 고통은 공감되어야 하며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므로” 인간은 다른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그러므로 격리되어 “홀로 남겨”진 자들은 절대 울지 않아야 한다. 우는 것은 우리들을 버린 세상에 투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우는 대신 서로에게 다가가 서로의 “젖은 눈과 손과 청춘을” 서로가 가진 “젖은 눈과 손과 청춘으로 닦아”주어야 한다. 사회라는 무대에서 배제되어 “무력한 배경”으로 남은 사람들이 “끝나지 않는 견고한 악몽”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배제당한 자들을 홀로 남겨두지 말고 함께 하는 것뿐이다.
지난봄의 잔인한 기억은 언제라도 나와 당신이 아무도 구조하러 오지 않는 고통의 자리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잔혹한 시대가 주도하는 포함과 배제의 게임에서 나는 포함되고 당신은 배제될 것이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이제 다시 “물”을 이렇게 고쳐 쓰도록 하자. 우리의 마음이 조금은 불편해지더라도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 오늘 밤에라도 함께 생각하자는 것이다.
김대현. 문학평론가. 2012년『실천문학』으로 등단. 현 『리얼리스트』『삶이 보이는 창』편집위원. nobodadd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