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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대단히 내성적입니다. 일단 사귀게 되면 속을 다 털어놓을 정도로 깊이 사귀지만, 처음에는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편입니다. 지인들에게는 동의를 거의 얻지 못하지만, 가족들만큼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 저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청년들은 물론 교회 재직까지 많은 성도들이 어린 저를 찾아주었습니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고민과 문제들을 털어놓았습니다. 금요 철야를 끝내고 시작해서 날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밤을 꼬박세우면서 들어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는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고민이 생겼습니다. 상담이라고 할 수 없는 상담을 시작했을 때나 시간이 지나서나 여전히 성경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찾아온 분들에게 주어져 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헤아릴 수 없는 저의 입장에서는 답을 줄 수 없을 때가 허다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내놓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척척 말해주는 동료들을 볼 때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들어주라는 상담의 기본원칙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문제는, 저에게 상담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정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저도 모르게 정답을 말해주어야 한다는 강박强迫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로 시간을 때울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불현듯, “상담하는 성도들의 입장은 과연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성도들을 기만하는 한심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가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아는 체 하지 말자, 모르고 있는 정답을 굳이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자, 부끄럽지만 모를 때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해주자,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자. 특히,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시켜서 상담자에게 강제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라고 결단했습니다. 이후, 상담을 위해서 저를 찾는 분들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당연히,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담을 할 때마다 저를 힘들게 만들었던 강박强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이부지知而不知, 부지이지不知而知”는 많이 알고 있지만 다 안다고 하지 않고,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老子는 “(충분히) 알면서도 (겸손하게 다)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우러러 존경할 만큼이나) 높고知而不知 尚矣, (쥐뿔도) 알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큰) 흠 또는 병이다不知而知 病也!”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아무리 해박該博하다 할지라도 세상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다 헤아릴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지으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더욱 그렇습니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사55: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개역 개정 성경에는 “접속사כִּי־(키)”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또 본 절은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풍성히 용서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구심疑懼心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악인의 행실과 불의한 자의 생각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은 용서받을 악인이나 불의한 자의 상태나 정도에 따라서 좌우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지극히 주권적입니다. 의지적입니다. 풍성합니다. 악인이나 불의한 자들의 상태나 정도 곧 조건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제한 없이, 일방적으로, 값없이, 은혜로,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집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사55:9)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저와 여러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만큼이나, 아니 아예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것만큼이나 아득하게 높습니다.
시인 역시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57:10),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하게 하시리라.”(시89:2).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1)라고 노래했습니다. 제자Peter는 예수 그리스도께 “형제 하나가 저에게 죄를 범했을 때 몇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대단히 의기양양했습니다. 당당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두 번은 용서해주라는 전통과 세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랍비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일곱 번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제자가 충분히 그런 태도를 취할 만해 보였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제안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라.”(마18:22b)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격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단번에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는 횟수에 제한 받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준과 생각과 정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 기준은 물론 실제로 용서해 줄 수 있는 한계와 범위를 초월합니다.
끝없이 넓습니다.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큽니다. 무제한적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신 성민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진멸하여 흔적까지 지워버리시는 목적과 관련해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니라.”(렘29:11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장 민족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절대 위기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힘과 능력만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대 절망이 성민 이스라엘 전역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습니다.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지옥의 땔감처럼 여기고 있었던 가증스러운 이방인들의 창칼과 말발굽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기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온갖 도구들은 남김없이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창칼에 목숨을 잃은 백성들의 시신이 거리마다 즐비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재앙이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히려 희망으로 가득 채워진 밝고 환한 미래를 주기 위해서라고, 상황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중근동의 유일한 패자覇者로 떠오르던 신흥강국 바벨론에 의해서 완벽한 진멸의 길을 걷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믿기 어려웠습니다. 당연히 성민 이스라엘이 바라던 미래는 없었습니다.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무리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설득하고 또 설득해도 변하지 않았던 그들이 완전한 진멸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후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저질렀었던 파렴치한 죄들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잃고 난 후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여겨졌던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약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전무후무한 강국으로서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대제국 바벨론이 쇠락衰落했습니다. 급락急落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잘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동시에, 성민 이스라엘에게는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던 미래였습니다. 대망하던 미래였습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였습니다. 누구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미래였습니다. “야곱아, 내가 기어이 너희를 다시 모으리라.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을 기어이 모아오리라. 사람만 보여도 어슬렁거리는 양떼들을 한 돌담 안으로 모으듯 하리라. 한 목장에서 풀 뜯기듯 하리라...왕 여호와께서 적을 쳐부수시며 앞장서 나오시리라. 백성들도 여호와의 뒤를 따라서 적을 짓부수며 성문으로 빠져나오리라.”(미2:112-13)라는 증거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성민 이스라엘을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진멸하셨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대 절망의 한 복판으로 몰아붙이셨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없어서 아예 포기한 채 손을 내려놓고 있었던 그들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셨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창세전부터 작정하셨던 인류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과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목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수히 많은 영혼들을 거룩한 교회로 이끌어내시고야 말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과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과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 완성은 저와 여러분의 수고와 희생과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거룩한 뜻과 강력한 의지와 쉬지 않는 열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무엇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평안,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과는 전혀 다른 내일 곧 미래, 저와 여러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미래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완전히 찌들어 있었던 세상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하기는 값없이 부어진 은혜 안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이후 여호와와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설명하고 또 설명해 주셨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교 장사꾼으로 변질된 타락한 제사장, 선지자, 방백 등의 농간에 놀아났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보내진 선지자들을 죽이는 만행까지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그David는 양치기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원치 않는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황소들이 떼 지어 에워쌌습니다...들소들이 에워쌌습니다.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시22:12-13), “개들이 떼 지어 나를 에워싸고 악당들이 무리지어 돌아갑니다.”(시22:16)라는 고백대로, 짐승 같은 사람들에게 짐승처럼 쫓겼습니다. 맥이 빠졌습니다. 뼈마디들이 어그러졌습니다. 마음은 촛농처럼 흘러내렸습니다. 목은 깨진 옹기 조각처럼 타올랐습니다.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입니다.”(시22:6), “주께서는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버려두셨습니다.”(시22:15b)라는 고백이 튀어나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습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한번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왜 모르는 체하십니까?”(시22:1-2)라고 부르짖어도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의 한 복판에 아무렇게나 버려두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Joseph는 순식간에 존재 의미를 완전히 부정당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차가운 현실과 맞닥뜨렸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길게 늘어진 소매가 손등을 간지럽게 하는 채색 옷도 입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던 형들이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던 어리광도 부릴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베냐민과의 애틋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습니다. 종들과 주고받았던 실없는 농담도 사라졌습니다.
들판을 뛰어다니던 양떼와의 경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도무지 벗어버릴 수 없는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한밤의 차가운 바람에 아무렇게나 노출되었습니다. 노예시장에 상품처럼 진열되었습니다.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태양은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거나 바라지 않아도 변함없이 떠오르고 새로운 아침이 오게 되어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과 슬픔이 엄습했습니다.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밥 한 술 떠서 삼키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무기력했습니다. 자신의 의도나 계획과는 전혀 관계없는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주어지는 대로 살아 내야하는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낯선 세상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관계를 맺어야했습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낯선 인생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원하지 않던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지만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요즘 같은 추세라고 한다면 다시는 재기하기 힘들 정도로 더러운 누명이었습니다. 달리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었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거기서도 매사에 성실했지만 이번에는 아주 잊혀 졌습니다. 끝없는 추락이 이어졌습니다. 지독하게도 힘든 하루하루를 주어지는 대로 의미도 없이 살아 내야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영적인 꿈을 꾸게 해주셨던, 그를 향한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왜 그렇게까지 처참한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지 어떤 이유나 설명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해를 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예 말씀을 못하는 분 같았습니다.
절대 절망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의 형편과 사정을 아예 모르고 있는 분처럼 그야말로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가 사람 하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곧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다.”(시105:17)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그를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대 절망의 한 복판으로 던져 넣으신 분이 당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위로나 격려의 말조차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만 더 참으면 마침내 당신이 계획했던 놀라운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질 테니까 용기를 내서 살아내 보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셔도 될 것 같은데, 그 한마디조차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처사였습니다.
반면, 그Noah는 죄악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계획이 항상 악한 세상에서 흠이 없었습니다. 매사에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했습니다. 은혜까지 입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6:13b)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주를 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방주를 짓되 어떤 크기로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는 힘에 겨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그Abraham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장차 당신이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면,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복을 주어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복을 흘려보내는 복된 삶을 살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가 축복하면 복을 내리고,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부어지는 은혜를 맛보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가 흔들릴 때마다 지켜주셨습니다. 대적의 손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와 횃불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자손에게 주겠다.”(창15:18b)라는 약속까지 해주셨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서 그를 향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 곧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설명해 주지 않은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반복해서 설명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쉽게 깨달아 알게 해주십니다. 한편, 개인의 지식과 경험은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없습니다. 처해 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따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아 보일 수 있고 또 실제로 같을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갖게 되는 정서적인 부분까지 완전히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알고 있어도 다 안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모르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척하지는 말아야합니다. “부지이지不知而知”는 던져버리고, “지이부지知而不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서구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그Socrates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똑똑하다...나는 나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국 최초의 민간 사상가요 교육자로 유교의 시조인 그孔子는 “내가 아는 게 있겠소? 나는 아는 게 없소吾有知乎哉? 無知也!”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그렇다’라고 할 때만 ‘예’하고,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하라. ‘예나 아니오.’ 이상의 말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구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은 진실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하고도 진솔하게 또 단호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자세로 답변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실로 아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알고 있는 만큼만 말하고 있습니까?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분명하고도 진솔하며, 단호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다.”(전8:14a)라는 지혜의 외침대로, 세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할 악인이 복을 받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됩니다. 인정과 칭찬까지 받습니다. 의인이 누려야할 복을 받습니다. 반면, 마땅히 복을 받아야할 의인은 징계를 받습니다. 벌여놓은 일마다 되지 않습니다. 인정과 칭찬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비웃음과 조롱을 받습니다. 철저히 소외당할 때도 있습니다.
악인에게 돌아가야 할 징계를 받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8:17)라는 지혜의 외침대로, 하나님이 하는 일은 누구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모르고,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알고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입니다.
평안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진 더할 나위 없이 밝은 미래입니다. 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증거에 따르면,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들의 궁극적인 결과는 선입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당하게 되어 있는 고난Tribulation, 박해Persecution, 고통Affliction, 괴로움Distress 곧 환난θλῖψις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평안과 밝은 미래와 선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조금 더 알고 있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많이 심지어 완벽하게 다 알고 있다고 이루어지는 일도 아닙니다. 모르고 있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아닙니다. 심지어 아예 모른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아닙니다.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이 가진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반드시, 무조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사9:7b, 37:32b)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거룩한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수밖에 없는 여호와의 거룩한 열심을 통해서만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겸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잘 몰라도 그것 때문에 기죽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반드시, 무조건 평안과 밝은 미래와 선으로 귀결될 모든 일들과 사람들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얼마나 알고 있든지 그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복된 삶, 허락하신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평안과 밝은 내일과 선을 창조해주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