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꿈을 꾼다
예진당 / 황해숙
엊그제 입춘 절기를 맞이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봄이 왔다는 말이 무색하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우리나라 곳곳에 함박눈이 내렸다. 그러나 날씨가 아무리 얼었다 한들 문 앞에 와 있는 봄이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소복하게 쌓인 눈 밑 흙 속에서 새싹이 꼬물꼬물 자라고 있을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여기저기서 맡은 임무로 동분서주했다. 내가 원하지 않았으나 임무가 주어졌고 딱히 거절할 사유가 없었기에 억지춘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무엇 하나 만만치 않았다. 단체에서 해야 할 사무적인 일은 물론이거니와 회원들이 요청에 일일이 응대하면서 발단을 지나 맞춤 서비스를 하면서 전개를 넘어 호흡을 몰아쉬면서 절정과 위기에 다다르고 마지막 숨 고르기를 하면서 결말에 당도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어려운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생기면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일에 빠져드는 것이 내 강점인 동시 약점이다. 나는 늘 그렇게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양날의 칼날처럼 외줄 타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곤 했다. 어떤 날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위태위태했으며 어떤 날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등줄기가 흥건하게 땀에 젖곤 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짜릿한 환희의 순간도 있었다. 늦은 밤 산더미처럼 산적했던 일을 마무리 짓고 창문 너머 칠흑 같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본 순간은 천하를 품에 안은 듯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정산한 자료를 기관 담당자에게 전달했을 때 기준에 맞추어 꼼꼼하게 잘해서 손댈 곳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을 때 환호하며 전율했다. 어려운 임무를 맡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에 파묻혀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임기를 마칠 즈음이 되면서 홀가분한 기쁨과 품 안의 자식을 내려놓듯 허전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산더미 같은 일이 얽히고설킨 실마리를 푸는 것처럼 힘이 들고 고단하였지만 하나씩 해결하면서 자신이 굵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작은 나무가 햇살과 비바람을 교대로 받으면서 강하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크고 깊고 넓어지고 있었다.
두 손에 쥐고 있었던 이것과 저것을 내려놓았을 때 내 손이 텅 빈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손에서 하나를 내려놓았을 때 더 큰 다른 것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하여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내 손에 무엇을 잡을 수 있을까. 작고 이름 없는 들꽃을 만나게 되면 그 작은 몸짓의 빛깔과 향기에 어울리게 살포지 힘을 주어 잡으련다. 설령 내가 감당하기조차 힘든 큰 별을 손에 잡으라 한다면 그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어떠한 뒷담을 듣게 될지 모르겠으나 거머쥐고 그 빛과 향기를 감당하고자 혼신을 다할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꿈이 등대가 되어 주었고 그 꿈이 나를 살게 했다. 하여 다는 다시 고단하나 찬란한 꿈을 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