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혜명 류동학의 東洋學산책 .16] 남사고의 예언과 선거
미래를 엿보고 싶은 욕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그 어떤 욕망보다도 강력하고 근원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종 통계자료를 통하여 예측하거나 동양학의 예측학술인 주역이나 명리학, 풍수, 관상, 점 등으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다. 아직 오지 않았고, 경험하지 못한 ‘미래’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강렬한 호기심과 지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행위 또는 그 말’로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초심리학에서는 예지라고 정의하며, 초감각적 인지(認知)의 구성요소로 과학적 연구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 개인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자평명리학에서는 예지력이 발달한 인자를 상관(傷官)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북한을 지배했던 김정일의 사망을 미리 예측했던 역술인이 많았다. 즉 한 개인의 생년월일이 정확하다면 자평명리학(子平命理學)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많은 이론과 임상실험으로 예측력을 높여야 한다.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1503∼66)나 한국의 토정 이지함, 격암 남사고는 전반적인 상황을 예측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확실히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남사고는 천문, 지리, 역학과 상수(象數)에 뛰어나 ‘해동의 소강절(邵康節)’이라 불려 당대의 인물에게도 이인(異人)으로 통했다. 4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신비로움이 더해져 많은 사람 사이에 더욱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수많은 예언 때문이다. 남사고는 중종 10년(1509)에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서 태어나 선조 4년(1571)에 63세로 서울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이율곡의‘경연일기’에 의하면 퇴계와 더불어 당대의 석학이었던 남명 조식의 죽음을 예언하고, 서울 서쪽 인왕산의 사직동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 대원군의 터가 왕기임을 읽고, 조선역사상 최초로 방계로 왕통을 이은 선조의 등극을 예언했다.
남사고는 명종 말년에 서울에 와 판서 권극례(1531~90)와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언젠가 그에게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조정에 분당(分黨) 현상이 일어날 것이고,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왜변(倭變)이 있을 것인데 진년(辰年:1592)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겠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1575년에 일어난 붕당인 을해당론(乙亥黨論)과 임진왜란을 예측한 내용이다.
이 기록은 남사고 사후 얼마되지 않아 기록된 것이라 남사고의 예언 능력이 과장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조선초부터 인조 때까지의 야사, 일화, 소화(笑話), 만록(漫錄), 수필 등을 모은 책인 ‘대동야승’에 의하면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모반사건을 예측한 것도 있다.
남사고가 썼다고 하여 널리 알려진 ‘격암유록’은 남사고와는 무관한 책이다. 한말에 와서 남사고의 뛰어난 예언능력을 차용하여 ‘격암유록(格庵遺錄)’ ‘격암비록(格庵秘錄)’ 등 수많은 거짓 문서를 만들어 세인을 현혹하여 남사고 선생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본다. 남사고가 예언한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이 되는 내년에는 대선과 총선이 있다. 남사고 선생의 맥을 계승하는 수많은 예언가가 누구를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예측할 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