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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의 생태 치유 인문학>고산 윤선도 조선 500년 가장 올곧은 선비, 병진소로 상소하여 첫 유배를 가다-
고산 윤선도는 해남 윤씨이다. 시조 윤 존부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인물이고, 해남 녹우당 가문은 12대 윤효정에 이르러 강진을 떠나 해남에 터를 잡고 가문의 부흥에 기초를 닦았다.
해남 윤씨의 득관조인 윤효정은 해남지역의 향리층이었던, 부잣집 정씨 귀영의 딸과 혼인하여, 강진의 덕천동을 떠나 해남 백련동 연동 마을(지금의 해남 고산 유적지 마을)로 옮겨 왔다
윤효정은 150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로 출사를 하는 것 보다는 스승인 최부(김종직의 제자)와 함께 해남지역의 학문과 예절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첫째 아들 윤구는 최산두(김굉필의 제자, 하서 김인후의 스승, 조광조와 기묘명헌, 화순 동북으로 유배,), 유성춘과 호남 3걸로 이름을 떨쳤으며 막내 아들인 윤복은 안동 부사, 사헌부 지평,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외 윤홍중, 윤의중, 윤유기 등도 중앙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윤효정은 점필재 김종직(밀양 출신,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양동마을의 손중돈의 스승)의 문인이자 처사촌 동서인 최부(김종직의 제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것이 곧 고산의 가문이 사림파(성리학)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윤효정 집안이 영남 사림파와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사림파의 전통 맥 :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의 아버지)-김굉필-조광조)
윤효정 이후로 윤구, 윤복, 윤홍중, 윤의중, 윤유기(고산의 양부) 윤선도에 이르기 까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정치에 진출하면서 해남 윤씨가 명문가로 부상하였고, 윤효정이 해남 연동의 갑부 정귀영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 재산을 물려받았기에, 고산윤선도 시대에 전국에서 5번째 들어가는 부자였다. 윤효정은 최부를 도와 해남 지역을 학문과 예절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600년을 이어 온 남도의 종가 해남 윤씨는 지금도 걸출한 인물이 나고 있다.(윤관 대법관 등-설씨 부인의 후손.)
윤선도는 강직한 성품과 해박한 지식으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고 효종인, 봉림대군의 사부(임금의 스승)를 지내면서, 효종의 총애를 받았고 많은 벼슬과 유배를 거치면서 가문의 명예를 높였고 전국적인 인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고산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뛰어난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드높였으며, 가문의 전통을 이어 실학의 선구자로 인정받았고, 외가의 가풍이 다산에게 이어져 다산의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공재 윤두서의 외 증손자가 다산 정약용이다.
고산의 집안이 다산 정약용의 친 외가이다.
다산의 유배지 강진, 다산 초당은 해남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에 다산이 500여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많은 자료 들은 고산 윤선도 및 공재 윤두서 집안에서 도움 받았다고 한다.
해남에서 중국을 더나드는 배편도 있어서 자료가 부족하면 중국에서도 책을 구해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책값이 얼마 아니지만, 옛날에는 사서삼경 한 질이면 지금의 고급 아파트 한 채 값도 넘었다고 한다. 다산은 외가가 아니었으면 그 많은 책을 유배지에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해남 윤씨는 어초은 윤효정 이래로 해남에 뿌리를 내리고 중앙 정치에 진출하면서 정치, 학문, 예술, 경제 등의 각 분야에서 조선 대표하는 면문가였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6월2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8살에 큰 집으로 양자를 가서 나중 양부(윤유기)가 관찰사라는 벼슬까지 하게 된다. 윗대 5명이 과거의 대과에 급제한 명문가문의 후손에다, 조선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드는 부자로 외노비가 200명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옛날 외 노비는 주로 밖의 농사일을 하였고, 내 노비는 집안일을 하였다. 해남 윤씨의 파조인 4대조의 어초은 윤효정은 큰 흉년이 들 때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여 옥에 갇히면 어초은 윤효정이 미곡을 관부에 대신 받쳐, 풀어 주었는데 3번까지 그렇게 하였다고 하여 “三開獄門積善之家(삼개옥문적선지가)”를 가문의 전통과 자랑으로 삼았다.
고산 역시 자녀들에게 근검과 적선의 실천을 항상 가르쳤다. “ 옷이나 말의 안장의 치장을 간소하게 하라, 개인에게 받는 세금은 정해진 양만 받아야 한다. 노비들에게 잘 대하라.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무속에게 빌지 마라.
소학과 경전을 열심히 공부해라” 등 아들 윤인민에게 위의 가훈을 남겼을 정도다.
이는 사림파의 종조인 점필제 김종직 선생님의 제자 가르침의 최우선 철학인 소학을 최부에서 윤효정으로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김종직-최부-윤효정-윤선도-윤두서 등 가문의 첫째를 소학의 중요성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점필재 김종직은 영남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훌륭한 제자를 많이 키운 성리학의 종조였다.
고산의 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백성을 소중하게 생각 했다.
윤두서의 행장에 “마을 사람들 합동으로 나무를 벌채하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밀린 빚을 받으려 갔다가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보고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다는 미담도 있다.
추운 겨울에도 홑옷을 입고 병풍을 치지 않은 것은 백성을 사랑 한 마음과 근검한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
공재 윤두서는 조선의 3재로 불릴 만큰 그림을 잘 그렸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본 자화상 초상화는 국보로 지정 되어 있고, 특히 말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 3대가 그림을 잘 그려, 녹우당 고산 유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고산의 원림 설계, 문학, 음악, 복서, 의술, 풍수 지리 및 그의 후손들의 예술적 뛰어남을 볼 때 고산의 집안의 DNA는 예술적으로 천재의 집안이 분명하다. 다산 역시 외갓집 DNA를 받아 천재의 자질이 충분했다고 봐야 한다.
점필제 김종직 선생의 제자중 한훤당 김굉필 선생님이 소학의 최고봉이었다.
40세 까지 소학만 공부하여 본인을 “소학 동자”로 불렀다. 김굉필-조광조-양산보로 이어지는 사제지간도 집안의 가풍이 소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이었기에 담양 소쇄원도 양산보 집안에서 500년을 지켜오며 잘 보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소학은 유교적인 이상적 인간상에 이르기 위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실천 덕목이 수록 된 수신 교과서이다.
해남 윤씨 가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가 음식-비자 강정, 육 만두, 어만두, 감단자, 각색다식 등이 있고, 종부의 애환을 기록 한 규한록이 전한다.
규한록은, 종부 광주 이씨 부인이 1834년 3월4일 보성군 대곡(한실) 친정에 가 있으면서 해남 시어머니께 올린 “한글 궁체로 쓴 수기 체의 글”이다.
고산의 8대 종부인 광주 이씨는 17세에 결혼하였으나 신행 전에 홀로 되어 남편 없는 종가 시댁의 종부로서 집안의 중흥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부녀자가 쓴 가사를 <내방 가사>라고 한다.
주로 영남지방에서 작자 미상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 있지만, 호남에는 해남 윤씨가의 광주 이씨가 지은 <규한록>이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규한록은 1834년(순조34년3월)에 순 한글로 쓴 작품으로 광주 이씨가 잠시 친정집에 가있을 때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 편지 형식으로 쓴 것으로 두루마리처럼 말려져 있는 것을 펼치면 13m로,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에 이른다.
종가의 살림을 책임지는 종부의 삶이 빠짐없이 기록 되어 있어서 당시 양반들의 생활양식과 규범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회적으로 제약이 많은 여성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이다.
고산은 26살에 진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30세 12월에 “병진소”로 임금(광해군)께 상소하게 된다. 상소의 내용은 영의정 이이첨(광해군의 장인)이 권력의 핵심에서 나라에 잘못이 많다는 것을 낱낱이 밝히면서 이이첨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을 광해군께 올리기 전에 그 당시 관찰사(도지사)로 있던 양부(윤유기,양자 아버지)에게 보여 준다. 양부는 그 내용을 다 읽고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 내용이, 잘못 되면 집안이 멸문 될 수도 있고 윤선도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산은 일주일 뒤 한자도 고치지 않고 다시 양부에게 허락을 청하게 된다.
고산의 올곧은 고집을 꺽을 수 없어서 허락하게 된다.
고산의 올 곧은 선비 정신과 양부의 결단을 높이 평가 하고 싶다.
상소를 받아든 광해군은 이 상소문을 장인인 영의정 이이첨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고작 진사에 합격한 고산이 감히 임금의 장인인 영의정을 죽여야 된다고 했으니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상소로 다음해 1월에, 31세의 고산은 최북단인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유배지가 너무나 추워서 물이 전부 얼어 밥을 지을 때는 도끼로 얼음을 깨어서 솥에 녹여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명문가의 부잣집 자녀인 31살의 청년의 첫 유배지의 고생이 어떠했는지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32세에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죽성 초등학교 주변 두호 마을로 이배 된다, 유배지는 정확히 고증 되지 않으나 죽성초등학교 앞 바닷가에 황학대가 있는데, 고산이 자주 찾아서 유배의 설움을 달렸다는 표시판이 있다.
죽성 유배기간 중인 33세에 양부 윤유기가 별세하게 된다.
유배 기간 중에 낮에는 주변 야산에서 약초를 캐어서 마을 사람들을 치료 해주기도 하여 마을 사람들은 서울서 온 의원으로 불렀다고 한다.
죽성 유배 때 나라에서 “납전 해배”라는 제도가 생겨나 돈을 나라에 내면 죄를 감해 주는 제도로, 요즘의 병보석금과 같은 제도였다.
서울에서 동생 선영이가 형님을 납전 해배로 풀어내기 위하여 돈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납전해배”로 풀려 날 생각이 없다고 전한다.
동생이 기장 죽성 까지 직접 내려와 형을 설득하지만, 고산은 돈으로는 풀려나지 않겠다고 거절하며, 동생을 돌려보내면서 헤어진 곳이, 지금 기장군 일광면 삼성리 일광 해수욕장 중간지점에, 부산광역시에서 표시석을 세워 놓았다. 동생을 돌려보내면서 그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증별소제 2수”의 시가 표시석에 음각 되어 있다.
<贈別少弟(증별소제) 2수>
-운명이 북으로 가는 길을 가로 막아
세상 따라 산다면 얼굴 붉히겠지
헤어짐을 당하여 흐르는 눈물로
네 옷자락에 뿌려져 얼룩지겠다.
내 말은 제촉하고 네 말은 느릿느릿
이 길을 어찌 따르지 말라하느냐
너무나도 무정한 짧은 가을해는
이별하는 사람 위에 잠시도 머물지 않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쫒겨나고 대
사면령이 내려 고산은<의금부도사>로 임명 받아 상경하게
된다.
37세 3월12일에 유배에서 풀려난 날이다.
30대의 꽃다운 나이로 장장 8년에 걸처 6년 4개월을 첫유배
생활을 한 고산의 애증의 한이 어떠했을까?
본인에게는 고통과 통한의 시간이었지만 첫 한글 시<충효에
관한 순 한글시 6수>를 창작하는 등 대의명분을
지켰기에<고산 윤선도>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때부터 고산의 이름은 올 곧은 선비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 되어 유명해지기 시작 한다.
황학대 외는 고산 유적지의 발자취가 별로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이라도 부산시나 기장군에서 역사적으로 잘 고증하여 고산의 유배지를 복원하여 올 곧은 선비의 정신과 고산의 선행 등을 후세에 본보기로 남겨서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개인 생각이다.
42세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시험관 이조 판서 장유가 답안지를 보고 동국(조선) 제 1답안지라고 감탄하였다.
3월에 장유의 천거로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임금 아들의 스승)로 임명 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 후 한성서윤(서울시장), 예조정량 등 큰 벼슬을 받게 된다. 47세에 증강항해 별시에 또 장원급제 하게 된다.
그의 올곧은 성격으로 벼슬에 적응 하지 못하고 낙향하여
49세에 금계가 열쇠를 주는 꿈을 꾸고 해남의 “금쇄동”에 터를 잡아 은거하게 된다.
51세 때인 1637년 인조 15년 1월에 병자호란으로 강화도에 피란 중인 원손 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가복 100여명을 배에 태워 서해를 따라 강화도에 가서나 왕자 등은 이미 붙잡혀 간 뒤라 회선하던 중 선상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의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주도로 가서 은거 할 결심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수려한 보길도를 발견, 보길도 황원포에 내려 터를 닦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거주 집을 지어 낙서재라 부르면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52세 봄에 대동찰방 사도시정(정 2품)에 임명 되어서나 병을 이유로 벼슬을 받지 아니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벼슬을 받지 않고,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 임금을 뵈려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북 영덕으로 유배 되어 약 9개월간 두 번째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56세 때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속에 포함 된 유명한 오우가를 짓게 된다.
<오우가>
(서수)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물)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 매라
맑고도 거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바위)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히 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솔)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은 그것으로 아노라
(대)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달)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게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벚인가 하노라
<여초생태인문학-고산윤선도 이야기, 후반부>
57세 때에 금쇄동에 있으면서 거문고를 잘 타는 반금이라는 호를 가진 권해와 지은 시가 있다.
<贈伴琴(증반금)>
“소리가 있은들 마음이 이러하랴
마음이 있은들 그 소리를 누가하랴
마음이 소리에 나니 그를 좋아하노라“
고산은 이 시조의 발문에서 권해의 건문고 연주가 너무나 뛰어나서 “밥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즐겨 듣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권해와는 음악을 통한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고산은 일찍부터 건문고를 가까이 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엿 볼 수 있다. 25세에 쓴 南歸紀行(남귀기행)에 거문고를 수선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봐서 20대에 이미 거문고를 휴대하고 먼 여행을 떠날 정도로 거문고를 가까이 했음을 짐작 할 수 있으며 고산이 직접 거문고를 만든 실물을 복원하여 해남 고산 유물관에 전시 되어 있기도 하다. 고산의 음악적 성향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어부사시사>이다. 어부사시사 40수는 歌唱(가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부사시사 발문에 “맑은 연못이나 넓은 호수에서 조각배를 띄우고 즐길 때 사람들로 하여금 목청을 같이하여 노래 부르게 하고서는 노를 젓게 한다면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가창의 의도를 분명히 할 정도로 음악적 예술성이 뛰어 났다.
어부사시사는, 시와 경 그리고 흥의 노래이다.
마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게 한다.
<춘사 제 1수>
-앞 개에 안개 걷고 뒷 뫼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밤 물은 거의 지고 낮 물이 밀려 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추사 제3수>
-흰 구름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흐느낀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 서호 가고 썰물에 동호 가자
찌거덩 찌거덩 어사와
흰마름 붉은 여뀌는 곳마다 아름답다
어부사시사는 <세연정>에서 지었다. 일기가 청아하면
학관(고산의 6째 아들)의 어머니가 오찬을 갖추어 그의 뒤를
따랐다.
세연정에 도착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배를 띄웠다
남자 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어부사시사를 노래 부르게 하였다. 세연정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은 동,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
때로는 옥소대에서도 춤을 추게 하여 그 그림자가 세연정
연못에 비추는 것을 보며 즐겼다. 세연정, 7암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해가 저물면 무민당에 들어와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하였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 할 일이 없으면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과 춤이 없으면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곧 고산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인물임을 스스로 알았지만, 그의 올곧은 성품으로 관직이 맞지 않아 그 욕망을 때론 시로, 음악으로, 조형으로 표현하면서 자연을 벗 삼은 위대한 선비였다.
세연정에서 옥소대로 오르는 산에서 굴러 내린 7개의 큰 바위를 7암으로 이름 붙이고, 그 대표적 바위인 혹약(惑躍)암있다. 뜻은 "뛸듯하면서 뛰지 못하고 있다"는 이름이다. 고산의 마음을 잘 표현한 바위로 보인다.
63세에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인 효종이 등극하여 66세부터 여러 높은 벼슬을 내리나, 반대파와의 극심한 대립으로 여러 핑계로 벼슬을 받지 아니하거나 받아도 곧 사직을 반복한다.
1653년 67세에 금쇄동에서 부용동(보길도)으로 들어가 세연정을 증축하고 동천석실을 구축 회수당, 무민당, 정성당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친다.
동천석실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꾸몄다, 설씨 부인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1500년대 후반에, 고산 할아버지 윤의중(1524~1590) 선생에 의해 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 마을 간척 사업을 시작하여, 오랫동안 완공하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1640년에 고산이 완공하게 된다.
무려 198Ha의 바다가 농경지로 변하였다.
굴포마을에서는 ‘윤선도의 갯벌 간척’을 기리는 당제와 감사
제가 350여 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섬사람들이 엄청난 농지를 갖게 되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완공 후 마을에 대표가,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고산에게 내 딸을 데리다가 집안에 잔일을 시켜도록 권했다. 이곳 섬에 두면 밥도 제대로 못얻어 먹을 텐데, 그래도 고산 집에 가면 밥은 제대로 먹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따한 사정을 듣고 13살 정도의 딸을 데리고 왔다. 그 딸이 고산의 애첩으로 설씨 부인이었다.
본 부인이 낙서재에 살았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고, 낙서재가 올라다 보이는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란 거처를 마련하여 설씨 부인과 신선처럼 살고자 했다.
설씨 부인의 후손이 윤관 대법관이라고 전해 들었다. 얼마전에 세연정 해설사에게 들은 이야기로 설씨 부인이 노화도섬 산에 묘가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이장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설씨 부인의 후손들이 당당히 살아 있다는 것은 반증하는 것이다.
효종은 “윤선도는 아첨을 해서 뜻을 이루는 자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청탁하고 끌어주고 하는 꼴을 본받지 아니하고 시골에서 본분을 지켰다”고 말하면서 멀리 해남에 있지 말고 내 가까이서 나를 충고 보좌하라고 하면서 화성(수원)에 집을 지어 주시고, 그 곳에 살도록 하였다.
73세인 1659년5월 4일에 효종 재임 10년 효종 나이 41세에 그를 극진히 배려 해 주던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된다. 효종이 승하 한 후 효종의 능 자리를 놓고, 우암 송시열 파와 심한 갈등을 일으키나 힘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가 본 능 자리는 후에 정조의 아버지 세도세자의 이장 한 묏자리가 되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자, 여러 좋은 일을 맞이하게 되어, 그 감사의 뜻으로, 정조는 고산을 두고 조선에서 무학 대사 다음으로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칭찬하면서 전라도 관찰사를 시켜 “고산 유고집”을 만들라고 명하여 이 덕분에 지금 고산의 기록들이 자세히 남아있게 되었다.
74세 때 효종에 대한 예를 논하고 산릉, 상복, 왕권에 관한 논쟁이 “예송논쟁”이다.
효종이 차자였기 때문에 우암 송시열 파는 차자로 1년 상레를 치루야 한다고 하고, 고산은 차자지만 임금을 지냈기 때문에 3년상을 치루야 된다는 것이 예송 논쟁의 핵심이다.
예송 논쟁이 반대파와의 큰 논쟁으로 비화 되어, 고산 윤선도는 관직이 삭탈되고 현부와 관원이 고산을 매도하고, 배척하여 죽이기를 원하나, 권시 등이 선왕(효종)의 사부를 가볍게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간신이 목숨을 부지하고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첫 유배지였던 함경도 경원 이웃인 삼수로 유배 길에 오른다.
고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30대 초에 병진소 상소로 유배 길을 갔던 그 길을 따라 74세의 나이로 다시 가는 유배자의 마음은 만감이 교차 했을 것이다. 30대에 유배 길에서 중간에 주막집에 들려서 하룻밤을 쉬면서 주막집 노파의 처마 자락에 그림을 그려 준 적이 있었다. 74세 때 그 주막집에 다시 들려 그 노파를 찾으니 노파는 죽고 딸이 있었다. 딸이 어머니가 보관한 처마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삼수에서 유배로, 6년에 걸처 4년 10개월을 보내게 된다. 삼수에서 지은 三房記事(삼방기사))의 시가 유배 생활의 애환과 고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산이 가두고 있는데 왜 가시 울타리를 치나
세 계절은 얼음단지 여름은 시루의 찜통
지옥을 누가 말 했나 믿지를 않았는데
사마공은 보지도 않고 잘도 알았네“
유배를 따라온 하인의 어미가 바느질하고 밥 짓는 여가에 거문고를 뜯게 하여 울적한 마음의 위안을 받기도 하였다.
79세 4월에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 길에 오른다.
고희를 넘긴 3차 유배는 고산으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인생길이었다.
80세를 바라보면서 다시 광양으로 이배 되어가는 고산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삼수 등의 3차 유배는 8년에 걸처 7년 4개월이었다.
81세 7월21일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해배 1년 후, 82세 때 효종이 수원에 지어 준 집을 서해의 배로 운반하여 해남 녹우당 사랑채에 옮겨 짓는다. 녹우당의 뜻은 “푸른 비로 사람 마음을 흠씬 적셔 주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는 해남 윤씨의 종택을 일컸는 대명사가 되었다.
녹우는 녹음이 우거진 때 비가 내린다는 뜻과 동시에 선비의 변치 않는 절개와 기상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녹우당 사랑채는 효종 임금이 세자 시절 자신의 사부(스승)이었던 윤선도가 수원에 있을 때 하사한 집이다. 고산이 82세 때(1668) 배를 이용하여 해남으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
왕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82세 노구에 대역사를 한 열정과 정성을 높이 평가 하고 싶다.
오늘날 녹우당이 없는 종갓집을 생각해 보면 고산의 혜안에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녹우당의 현판 글씨는 윤두서의 절친한 친구 “옥동 이서의 유필”이다. 이서가 쓴 현판은 남도의 대표적 명문가의 전통을 꿋꿋하게 지켜온 녹우당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고산은 돌아가시기 1년 전 84세에 친척중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義穀(의곡)을 설치하여 마지막 까지 적선을 베풀었다.
고산은 85세인, 1671년 현종 21년 신해년 6월1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영욕과 파란만장 했던 한 세대를 마감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산의 시호는 忠憲(충헌) 뜻은
忠-몸을 받쳐 왕에 충성하고
憲-많이 들어 여러 가지에 능한 시조 문학의 대가란 뜻이다
고산 윤선도는 용모가 단정하고 안색이 엄숙하고 굳세어 대하는 사람이 바로 볼 수가 없고, 쏘아 보는 눈빛이 선영했다고 한다.
효종 실록의 기록을 보면, 효종이, “윤선도는 세상 사람들이 청탁하고 끌어 주고 하는 꼴을 본받지 아니하고 시골에서 본분을 지켰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얼마나 올곧고 청렴했는 지를 보여주는 실록의 글이다.
풍수지리에 해박해 정조가 “윤선도는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대사라고 불렀다. 풍수지리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의 실력을 갖추었다”라도 칭찬했다고 전한다.
고산의 예술적 가치를 다시 요약하면,
고산의 가사 문학으로, 우리가 잘 아는 오우가는 금쇄동에서 쓴 글이다.
손수 엮은 <산중신곡>의 작품에 실린 대표작이다.
글 머리 서수에 이어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 등의 오우(五友)를 차례로 읊은 6수의 연 시조이다.
어부사시사는, 시, 경 그리고 흥의 노래이다.
세연정에서 쓴 글이다.
순 국어체이며 춘사, 하사, 추사, 동사 등 네편의 노래이며, 각 편은 각각 10수로서 총 40수의 연작형으로 구성 되어 있다.
윤서도는 원림(조경)의 최고의 설계자이면서 감독자이다.
고산은 자연을 사랑하면서 손수 정원을 설계하여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종합 천재 예술가로 평가하고 싶다..
그 대표적 원림이 보길도 부용동의 세연정, 해남의 금쇄동과 수정동이다.
풍부한 자연 사랑의 마음과 예술적인 심미안이 있었고, 은둔과 세상을 피해 살고자 했다.
현실 정치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정원을 만들고 연못을 조성하면서 갖가지 도학적 사상을 갖고 이름을 붙였다.
박준규 교수는 <유배지에서 부르는 노래>에서 “모양과 색깔과 향기가 3박자로 갖추어진 값진 꽃이다”.
위당 전인보 <조선 고정 해설>에서 “호남 산수간의 야경을 귀신같이 그려 놓았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의 묘는 금쇄동에 안장 되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것처럼, 자기가 잘 아는 지인이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찾아가서 뫼자리를 하나 봐 달라고 하니 없다고 하여, 지인에게 술을 그나하게 사주어 깊이 잠들게 하고선 그 사람의 말을 타고 나서니 그 말이 어느 산언덕에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워낙 주인과 자주 찾아온 묏자리였다. 지인의 잠을 깨워 그 묏자리를 자기에게 양보하라고 해서 얻은 묏자리에 본인이 안장 되게 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여름에, 폭우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를 무시하고 금쇄동을 찾았다. 자동차로 산길을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내려 오는 길 계곡 옆 길섶에 피어 있는 노란 원추리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최근에 해남군에서 고산의 금쇄동 유적지를 예쁘게 복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무척 궁금하다.
헤세는 일생동안 여러 차례 이사를 하면서 가는 집 마다 정원을 만들어 즐겼다. 그는 정원을 영혼의 안식처라 정의하였다.
고산 역시 18년에 걸친 유배 생활에서 그의 예술적 감성이 있었기에 참고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고, 독서를 하고, 글을 짓고, 유배 길에서 돌아오면 정원을 만들었다.
곧 정원이 그의 마음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고산은 조선의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선비이자,
불의에 목숨도 주저하지 않고 맞서 싸운 올곧은 참 선비였다.
그가 현실에 타협하는 선비였다면 그 많은 유배 생활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유배 생활이 없었다면 “오우가나 어부사시사”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유배를 통한 초아적인 삶이 있었기에 본인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후세에 우리는 그를 문학, 음악, 복서, 의술, 풍수 지리에 해박한 종합천재예술가로 평가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예술적 집안의 혈통을 대 물림하여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당대에 삼재로 불릴 만큼 뛰어난 화가였다. 공재의 아들, 손자도 휼륭한 화가였다. 공재의 외손자 다산은 세계문화 인물로 등재 된 자랑스러운 대한의 인물이다.
고산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보길도 부용동 세연정에 정워으로 잘 표현 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 정원인 세연정은 51세에 보길도에 들어가 85세 돌아가실 때 까지 13년간 살면서 종합 조형예술이 살아 숨쉬는 불후의 명작 별서 정원이다.
세계 조경인들이 세연정의 과학적 설계와 시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에 토사로 세연정 뒷 연못을 메울까봐, 계곡위에 몇 개의 둔덕을 만들어 물살을 약하게 해서 토사를 막았다. 과학적 토목 건축 방식이다.
뒤 연못에는 7개의 7암이 연못의 조형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큰 바위는 옥소대를 오르는 산에서 굴러 내려서 고산의 조형 안목으로 치석했다.
연못 끝자락에는 판석보가 있다. 비가 올 때면 보의 역할을 하고, 가물 때는 세연정에서 옥소대로 오르는 길 역할을 한다
판석보 아래에 석판을 판자 모양(구둘장)으로 가공하여, 횟가루, 조개 껍질 등으로 붙여서, 가운데는 빈 진공 상태로 만들어 비가 오면 빗물이 판석보를 폭포처럼 넘쳐 흐르면서 폭포소리를 크게 듣기 위함의 과학적 건축이었다.
세연적 건축 앞 연못은, 5입3출 이라고 하여 들어가는 물이 5곳, 나가는 물이 3곳으로 설계해서 시공하여 항상 물의 높이가 일정하도록 시공 되어 있다.
지금은 세연정 앞은 초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세연정 정원 터에 초등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고산이 세연정을 처음 만들 때는 8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고 한다.
세연정을 통한 고산의 초아적 삶을 반추해보면서 2번 째 유배지인 기장 죽성의 역사적인 고산의 발자취를 복원하는 것이 올 곧은 선비 정신을 시민정신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모우는 것이 부산 예술인의 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여초 윤철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