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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렵게 1대간 9정맥을 마치고 조금 시간을 내어 봅니다..
*** 마이산 자료 *******************************
천천히 걸으며 답사 예정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늦게 피는 벚꽃으로도 유명한 마이산 벚꽃은 진안 고원의 독특한 기후로 인해 수천그루의 벚꽃이 일시에 개화하여 그 화려함은 전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한다. 수령 20~30년의 마이산 벚꽃은 재래종 산벚꽃으로 깨끗하면서 환상적인 꽃 색깔로 유명하다.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2.5km의 벚꽃 길이 핑크빛 장관을 이룬다. 마이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고여서 만들어진 탑영제에서는 마이산의 봉우리가 거울처럼 비춰지며 아늑한 풍광과 함께 벚꽃의 정취를 느껴볼수 있다.
드라마 <49일>에서는 벚꽃이 활짝 핀 마이산에서 주인공 이요원과 조현재가 처음 데이트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하나로 그 해 마이산에는 벚꽃이 핀 주말에만 관광객 4만명이 다녀가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송승헌이 신세경에게 프로포즈 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자료 : 진안군 문화관광 - 관광명소 > 드라마/영화 촬영지 > 마이산 벚꽃길과 탑영제
숫마이산 마령면 시작 진안읍 경계 (남) 가림리와 동촌리(마령면) 경계 시작
** 마령면馬靈面
진안군의 마령면(馬靈面)은 진안의 상징으로서 산의 형상이 말의 두 귀와 흡사해 붙여진 마이산을 마이영봉(馬耳靈峰)이라 한데서 유래됐다.
마령(馬靈)면은 신비로운 마이산의 혼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동촌리東村里 진안군 마령면... 지도의 동천리는 오기
마령면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이산 두 봉우리에서 발원한 물이 탑영제를 거쳐 금촌 마을에서 굽어 흘러나가면 화전 마을 앞에서 진안읍 가림리로 흘러내리는 서촌과 합수하여 원동촌 마을 앞을 흘러 강정리로 흘러나간다. 한편 남쪽 솝내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서천에 합수되는 지점에 서촌 마을이 위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촌리 [東村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마이산
『삼국사기』에 "서다산(西多山)이 백해군 난지가현(伯海郡 難知可縣)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진안)에 "본조 태종이 남행(南幸)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안지』에 태조가 속금산(束金山)이라 명명하였다고 수록되어 있다. 속금산(束金山)은 오행(五行)에서의 금행(金行)을 묶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속금산이라고 불리운 데에는 음운론적인 시각으로 보아 '솟았다'는 뜻인 '솟굼산'에서 유래하여 한자의 음을 빌려 '속금산(束金山)'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마이산을 진안읍 쪽에서 보면 동봉(숫마이봉)에 새끼처럼 보이는 작은 봉이 2개가 붙어 있고, 서봉(암마이봉)은 반대쪽으로 돌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馬耳山, Maisan]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馬耳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마이산은 '진안 마이산' 명칭으로 1979년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에는 국가 지정 명승 제12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수마이봉 기슭에 있는 은수사에는 진안 마이산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와 진안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이 있다.
마이산 남쪽에는 탑사가 있으며, 탑사에는 약 100여 년 전 이갑룡 처사가 쌓아 올린 80여 기의 마이산 탑[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이 있다. 그 남쪽에 있는 신라 시대의 고찰 금당사에는 금당사 목불 좌상[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8호]과 14위의 관음보살상을 그린 9m 길이의 금당사 괘불탱[보물 제1266호], 금당사 석탑[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馬耳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태조 이성계가 그 마이산을 보고 시를 남겼다.
「동으로 달리는 천마는 이미 지쳤는가 / 갈 길은 먼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 연인은 몸통만 가져가고 두 귀는 남겼는가 / 두 봉우리 이루고 하늘로 솟아있네」
훗날 태종이 진안을 지나가면서 태조의 시를 보게 된다. 그리고 해당 산의 이름을 지으니 '마이산'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말 마(馬)자와 귀 이(耳)자를 붙인 이름이다. 20m 간격으로 솟은 두 봉우리가 마치 말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동쪽의 봉우리는 수마이봉, 서쪽의 봉우리는 암마이봉이다. 신의 손을 거쳤을까. 봉우리의 실루엣이 깔끔한 선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영겁의 세월 동안 솟고, 쌓이고, 깎이는 과정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안 마이산 -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묘함 가득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안정수)
남부주차장 매표소
독립유공자 추모탑
진안 지역 출신으로 항일 의병전쟁, 3・1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해 1997년 8월 15일에 세워졌다.
[출처] 6월은 호국보훈의 달 | 호국보훈의 산 마이산(馬耳山)|작성자 진안고원
** 비례물동(非禮勿動) 암각자 추모탑 우측 암각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으로, 1916년 고종이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을 되찾는 일은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는 분연히 일어나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의미로 항일 의병을 독려한 것이다.
[출처] 6월은 호국보훈의 달 | 호국보훈의 산 마이산(馬耳山)|작성자 진안고원
황단皇壇 터 1907년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의 집결지
** 호남창의동맹단 의병 위령비湖南義兵倡義同盟團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산 24
1907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서 창의한 의병 부대.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湖南 義兵 倡義 同盟團)은 1907년 9월 이석용(李錫庸)이 주도하여 진안 마이산에서 결성되었다. 이석용은 마이산에서 고천제를 거행한 후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은 이석용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결성 후 2년 동안 다양한 규모의 병력으로 진안·용담·장수·임실·전주·순창·광주·곡성·남원·운봉·함양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 [湖南義兵倡義同盟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 결성지비[ 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成址碑 ]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
개항기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이 결성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1998년 이산 향토 문화 연구회 회장 오귀현이 주도하여 건립한 비이다. 1907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이산묘 자리에서 이석용(李錫庸) 등 1,000여 명이 모여 창의 동맹단을 결성하고 하늘에 고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 결성지비는 현재 전라북도의 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는 이산묘의 경내에 온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이곳에는 대한 광복 기념비 외에 회덕전(懷德殿), 영광사(永光祠), 영모사(永慕祠) 등 진안의 주요 문화 유적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 강제 침탈을 전후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진안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서 이석용이 추진한 항일 의병 부대가 결성되었다. 즉 이석용의 항일 의병 부대 결성은 호남 의병 투쟁의 효시를 뜻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 결성지비 [湖南義兵倡義同盟團結成址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산묘駬山廟]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
진안군 일대의 유생들이 연제 송병선 선생과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1925년에 건립하였다. 1946년 회덕전(懷德殿)를 완공하였고 이어 영모사(永慕祠) 영광사(永光祠)를 차례로 세웠다. 회덕전에는 단군과 태조 이성계, 세종대왕, 고종황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영모사에는 조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유림 40위가 있다. 영광사에는 을사늑약 후의 순국 선열인 연제와 면암 등 33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2004년 7월 30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산묘 [駬山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마이산 아래 서쪽에 있는 이산묘(駬山廟)는 이성계(李成桂)가 등극 전에 임실 성수산에서 100일 기도 후 내려와 마이산에 들어설 때 말을 매어놓았던 자리로, 단군성조와 태조 · 세종 · 고종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懷德殿), 조선시대 명신과 거유를 모신 영모사(永慕祠), 한말의 지사(志士)와 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로 이루어져 있다.
마이산 용암일대 암각서군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마이산으로 들어가는 낮은 산봉우리인 용바위 중앙에 ‘龍岩’, ‘駐蹕臺’, ‘馬耳洞天’, ‘非禮勿動’, ‘靑丘日月 大韓乾坤’ 등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여러 글자 중에서 駐蹕臺(주필대)는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도성으로 개선하는 길에 머물렀다는 의미이며, 1909년에 호남에서 결성된 의병창의동맹단 702명의 이름을 새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용암일대 암각서군 (진안군 - 두산백과 두피디아)
** 마이동천馬耳洞天-刻石
1924년 진안 지방 사림(士林)이 이산 정사 창립을 결의하고, 마이산 금당동구(金塘洞口)[현재 이산묘] 옆 암벽에 큰 글씨로 ‘마이동천(馬耳洞天)’ ‘주필대(駐蹕臺)’ 일곱 자를 새기고, 왼쪽에는 나라의 석학과 위 계원 69명을 송병선(宋秉璿) 이름 옆에 새기고, ‘공부자 탄강 2475년(1924) 갑자(甲子)’라 각하고, 그 아래 ‘유사(有司) 송진환(宋振煥), 오채열(吳采烈), 전동권(全東權)’이라 새겼다.
오른쪽에는 1928년 추가로 96명의 이름을 새기고 말미에 ‘76년(1925) 을축(乙丑) 4월’이라 각하고, 또 ‘무진(戊辰) 7월’이라 새긴 좌측에 ‘유사(有司) 오병렬(吳柄烈), 김용규(金容圭)’라 새겨져 있다. 무진(戊辰) 7월과 유사 이름은 1928(戊辰)년에 추가로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각 인명은 ‘마이동천 제명록(馬耳洞天題名錄)’이라 하여 『대한 이산 묘지(大韓駬山廟誌)』에도 실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동천」 각석 [-馬耳洞天-刻石]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주필대 각석駐蹕臺-刻石 이산묘 좌측 암벽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78-1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마이산에 30일간 머물며 건국의 대의를 품었는데 「주필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암벽에 새긴 각자라고 한다. 주필(駐蹕)이란 임금이 거둥길에 잠시 머무르거나 묵고 간 것을 뜻하는데 조선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1380년에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에 꿈속에서 받은 금척(金尺)을 묶어 놓은 듯한 마이산을 보고 머물며 시를 읊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24년 진안 지방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남쪽 기슭 바위에 “마이동천(馬耳洞天) 주필대(駐蹕臺)”를 새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필대」 각석 [-駐蹕臺-刻石]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주필대」가 새겨져 있는 암벽은 우뚝 솟은 큰 바위 밑에 갈라진 몇 개의 바위가 포개어져 있는 형상이다. 아래쪽 갈라진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에 “주필대(駐蹕臺)”가 각자되어 있다. “주필대” 각자 옆에는 “마이동천(馬耳洞天)”이라는 각자와 함께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현재 “마이동천”과 “주필대” 글자는 붉게 칠해져 있다. 암벽에 큰 글씨로 “마이동천(馬耳洞天) 주필대(駐蹕臺)” 일곱 자가 새겨져 있는데 서체는 예서체이다.
「주필대」는 전주 오목대와 함께 주필 유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진안 주필대 지역은 역사와 설화가 함께 공존하면서 진안 지역이 조선 건국의 상징성을 지닌 땅이며 일제 강점기 때 호남 의병의 효시가 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큰 곳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필대」 각석 [-駐蹕臺-刻石]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용암’의 ‘용(龍)’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상징한다고 추정된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각자 '대한건곤 청구일월'
이산묘를 지나 제2주차장으로 들어서면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각자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1분 정도 오르면 한자로 ‘대한건곤 청구일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벽이 나온다.
‘대한의 국운은 하늘과 땅처럼 무궁하고 민족의 장래는 해와 달처럼 밝다’는 의미로,
1948년에 김구 선생이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이산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윤봉길 의사 등 5위를 배향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격려금과 함께 내린 친필을 암벽에 새긴 것이다.
[출처] 6월은 호국보훈의 달 | 호국보훈의 산 마이산(馬耳山)|작성자 진안고원
** 비례물동(非禮勿動)
이 탑 바로 뒤 암벽에 고종의 친필인‘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본래 이산묘에 ‘비례물동’이라고 쓴 편액이 있었다.‘비례물동’은 『논어』에 나오는 것으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것인데, 역으로 예라면 행하라는 것으로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글귀라고 할 수 있다.
자료 : 특별기고 - 바위에 새겨진 각자(刻字)에서 역사를 배운다⑨전북 진안 항일 의병장 이석용을 비롯한 우국지사들 ‘호남의병 창의 동맹’ 최초 결성, 마이산 용암(龍岩)을 찾아서
조선 태조 고황제 시비 주필대 앞
마이산에는 재미있는 ‘조선 태조 고황제 시’가 함께 전해온다. 옛날 고려 장군 이성계가 신으로부터 금척을 하사받는 꿈을 꾼다. 마침 남원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 무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황산대첩의 승전고를 울리며 진안을 지나는데 현재의 마이산을 보는 순간 금척을 받은 꿈속의 장소와 일치하는 형상에 깜짝 놀라 말을 멈추게 한다. 금자(金尺)를 묶어 놓은 것 같은 생각에 속금산이라 명명하고 돌아가 12년후 조선을 건국 한다.이때 남긴 듯한 글이 남부주차장 매표소 쪽 이산묘 옆 용바위 앞에 ‘조선 태조 고황제 시비’가 건립됐다.
자료 : 새전북신문
고금당골(고금당)
용암동문 각자 금당사에서 서쪽
용암동문이라 새겨진 암벽 사이로 들어서면 기암괴석이 뒤엉켜 기기묘묘한 형상을 연출하며 절경을 펼쳐놓고 있다.
금당사金塘寺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
금당사의 선행 사찰이라는 혈암사(穴巖寺) 혹은 금동사(金洞寺)에 관해서는 현재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백제 말[650~700년]에 무상 화상과 그 제자 김취(金趣)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설과 통일 신라 시대[814년] 중국 승려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지금의 자리에 금당사를 새로 세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1682년(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는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는 알 수 없다. 현재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가장 큰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된 「금당사 괘불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 목불 좌상,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금당사 석탑 등이 있다. 「금당사 괘불탱」과 금당사 목불 좌상은 조선 후기의 것이고, 금당사 석탑은 고려 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당사 [金塘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금당사석탑 [金塘寺石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
금당사석탑의 제작 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으며, 조선 시대 숙종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소규모 고려 시대 탑으로 탑신부와 옥개부를 하나의 돌로 조각한 특징이 있어 이 지역의 탑 조성 양식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라고 판단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당사석탑 [金塘寺石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금당사목불좌상金塘寺木佛坐像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8호
금당사의 주존 불상이다. 아미타불은 대승 불교 특히 정토 신앙의 주존불로 무량광불, 무량수불이라고 의역한다. 즉 한량없는 광명을 지니고 중생의 번뇌로 일어나는 어둠을 밝히는 그리고 생멸 없는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부처이며 서방 극락 정토의 교주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교리의 불상으로 조성된 진안 금당사 아미타불상은 현재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당사목불좌상 [金塘寺木佛坐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금당사괘불金塘寺掛佛幀 보물 제1266호
1692년에 명원, 허헌, 치헌, 위청이 조성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은은한 무늬와 색상이 17세기 후반 불화의 모습을 잘 표현하여 「통도사 괘불 탱화」와 「무량사 미륵불 괘불 탱화」 등과 함께 장엄형 괘불 탱화의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라북도에는 4점의 괘불이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의 괘불은 「영산회 괘불」이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확인할 수 있지만 「금당사 괘불」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그 의미는 도상의 구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저 괘불탱이란 명칭을 쓰고 있는 「금당사 괘불」은 독존도를 이루고 있다.
입상의 독존상은 그 존상을 거대하고 웅장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보관을 비롯한 법의의 장식이 매우 호화롭고 그와 같은 불신의 장엄함이 보다 널리 시방에 미치는 것을 방광의 5색 무늬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당사 괘불탱 [金塘寺掛佛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탑영제 탑사와 두 암봉이 잘 보이도록 설계
남부주차장에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인공호수 탑영제를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마이산 봉우리와 500여m 떨어져 있는 탑사의 탑이 비쳤으면 하는 바람의 탑영제는 봉두봉과 그 뒤 암마이봉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봄이면 그 옆으로 늘어서 있는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자료 : 새로운 시작으로 성공시대를 열어가는 미래진안 : 마이산스토리텔링 > 탑영제와 부부시비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 씨를 기리는 부부 시비 탑영제 바로 옆
조선 중기 남원 서봉방 한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부부가 되었는데 두 분 다 몰락한 양반의 자손들로 조선 시대 유일한 부부 시인이다. 특히 부인 삼의당 김씨는 260여 편의 시를 남겨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부부 시비에는 부부가 결혼 첫날밤 서로 주고받은 초야 창화(初夜唱和)가 새겨져 있다.
자료 : 새로운 시작으로 성공시대를 열어가는 미래진안 : 마이산스토리텔링 > 탑영제와 부부시비
‘天馬東來勢已窮 천마가 동쪽으로 와 형세가 이미 궁하니/
霜蹄未步蹶途中 흰털 말발굽 더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네/
涓人買骨遺其耳 내시는 뼈만 사 가고 그 귀만 남기니/
化作雙峰屹半空 변하여 두 봉우리가 되어 반공중에 솟았네’
명마인 천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일까? 이곳에서 쓰러져 죽으니 내시는 천마를 귀히 여겨 뼈 일망정 남김없이 사가고 두 귀만 남기니 이것이 마이산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마이산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마이산 탑사’다. 이곳의 독특한 돌탑들이 있는데 이갑용 처사가 1885년부터 30여년간 쌓았고 비바람에도 100여년간 무너지지 않았다 하여 신비감을 준다. 탑사 경내에도 문학관련 비들이 저마다 사연을 담고있다. 먼저 국가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건립되었음을 표기한 허호석 시인의 ‘마이산’시비가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자료 : 새전북신문
봉두봉(535) - 봉두굴鳳頭窟..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쌍봉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저점에 위치하는 봉우리로 전체적인 모양이 둥근 형상이기 때문에 봉두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등산로를 따라 봉두봉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암봉의 봉우리지만 정상에는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봉두봉 (진안군 - 두산백과 두피디아)
** 봉두굴鳳頭窟..
탑영제에서 봉두봉의 남사면을 바라보면 봉우리 아래의 절벽에 수많은 바위 동굴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봉두굴이다. 봉두굴은 봉두봉 남사면의 절벽 면에 파인 바위 동굴들을 말한다. 이 동굴들은 마이산의 형성 과정에서 역암층이 타포니의 발달로 풍화·침식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의 사면에 크고 작은 굴이 수십여 개 분포한다. 굴은 직경이 10m가 넘는 것에서부터 1m가 채 넘지 않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두굴 [鳳頭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봉두봉의 남사면에 굴[타포니]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은 온도의 변화로 인한 암석의 팽창과 수축으로 역암층의 자갈이 이탈하면서 그 주변부까지 영향력을 미쳐 중력에 의한 암반의 붕괴 현상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특히 봉두봉의 남쪽 사면에 바위 동굴들이 발달한 것은 햇볕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타포니에 의해 생긴 이러한 바위 동굴은 봉두봉 뿐만 아니라, 수마이봉과 암마이봉을 비롯한 마이산 역암층 남사면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이러한 환경에도 마이산에는 줄사철나무와 같은 희귀 관목들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봉두굴 [鳳頭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마이산은 수성암(퇴적 작용으로 생긴 암석)이 기반암이다. 그 내용물이 자갈, 진흙, 모래 등으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와 비슷하다. 정확한 명칭은 '역암'이라 하며 '천연 콘크리트'라고 불린다. 마이산의 역암은 백악기에 생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게다가 마이산 역암에서 조개 화석이 발견되기도 해 1억년 전 이곳은 바다 또는 호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면 위로 땅이 솟고 그 위로 여러 물질이 쌓이고 굳은 것이다. 또 오랜 세월 풍화, 침식되면서 말의 귀 형상을 띄게 되는 놀라운 자연현상을 마주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안 마이산 -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묘함 가득 (한국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안정수)
탑사[塔寺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 서봉 절벽 아래에 있는 사찰로 태고종단 소속이다. 탑사(塔寺)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마이산 석탑에서 유래한다. 1920년경 이갑룡(李甲龍)[1860~1957]이 마이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거주하면서 점차적으로 탑사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으며, 그 후 그의 손자인 이왕선(李旺善)이 한국 불교 태고종에 사찰 등록을 하고, ‘한국 불교 태고종 탑사’로 이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탑사 [塔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마이산 탑 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
마이산 탑은 지방기념물 제35호로서 탑사에는 천지탑, 오방탑을 비롯하여 80여 기의 자연석 돌탑들이 있다. 천지탑은 기단부에서는 한 몸통으로 축조되어 올라가다가 탑의 중간부터 남북으로 나뉘어 두개의 탑으로 쌓여졌으며 탑의 상륜부는 편편한 돌을 뾰쪽하게 쌓아 올린 첨두 원추형으로 높이가 13.5m에 이른다. 탑사에는 그 외에도 미륵불, 관음보살 석조 입상과 이갑룡 생애비, 이갑룡 사적비, 이 처사 화상 등의 조형물이 있다. 대웅전 앞으로 월광탑·일광탑·중앙탑이, 대웅전 뒤의 절벽 쪽으로 오방탑·천지탑 등이 조성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탑사 [塔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나도산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에서 전해오는 「나도 큰다는 나도산의 유래」는 솟금산 주변의 작은 산들이 큰 산을 따라서 같이 크다가 여자의 발설로 부정이 타서 크기를 멈추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나도산’이 솟금산 가까이 있으면서 생김새도 비슷하므로 산의 형성 과정도 유사할 것이라는 유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느 보살이 쌀을 씻다가 마이산 쪽을 바라보니 마이산이 커 올라가는데 그 옆에 있던 산이 “나도 큰다”라며 자꾸 커 올라갔다. 이를 본 보살이 “저 산도 큰다”라고 외치자 몰래 커 올라가던 산이 여자가 방정맞게 그런다고 돌아서서 더 이상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진안군 부귀면 황금리의 솟금산 밑에 있는 산들이 “나도 큰다! 나도 큰다” 하면서 큰 산을 따라서 컸다고 해서 ‘나도산’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도 암마이산 바로 옆에 마이산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산을 ‘나도산’이라고 한다. 산이 커 오르는데 새벽에 물을 길러 나온 여자가 그것을 보고 산이 솟아오른다고 외쳤더니 크고 있던 산이 그만 멈추었고, 그때 함께 크던 나도산도 더 클 수 있었는데 크지 못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도 큰다는 나도산의 유래」 [-由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안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 암마이봉 은수사 참조
천왕문과 은수사 갈림길
** 마이산 용궁(용샘) 또 다른 섬진강의 발원샘 은수사 아래
탑사 대웅전 바로 아래에 섬진강 발원지인 용궁이 있으며, 이 물은 탑영제에서 잠시 머물다가 은천을 이루며, 데미샘에서 흘러 온 물과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만나 옥정호로 흘러갑니다. 전설에는 지금의 탑사 자리가 용궁이 있었던 곳 이라고 한다. 실제로 마이산 정상 부근에는 7000만 년 전의 민물고기와 조개류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어, 마이산 자리가 먼 옛날에는 호수나 강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ㅋㅋ
** 은천隱川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에서 발원하여 마령면 강정리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 하천의 이름은 처음에는 냇물이 그늘진 곳으로 흐른다하여 음천(陰川)이라 하였다가 조선 말엽에 은천이라 개칭되었고, 개칭된 이름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천 유역 내 마이산도립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은수사 銀水寺 마이산남로 406
원래 개인 사찰이었다. 은수사는 1920년 마이산 아래 진안읍 단양리 사양동에 살던 이규헌(李圭憲)[1853~?]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정명암(正明庵)’이라 이름 하였다. 1970년경 조계종에 전통 사찰로 등록되었으나, 조계종단과 성격이 맞지 않아 1985년경 당시 주지인 황혜수가 태고종으로 종적(宗籍)을 변경하였다. 은수사란 이름은 이성계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한 것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은수사에는 천연기념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이고, 또 하나는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이다. 줄사철나무 군락은 마이산이 이 군락의 북방 한계 지역인데 은수사 뒤쪽 가파른 벼랑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과 삼신할머니상이 상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은수사에는 1982년 제작된 국내 최대 크기인 법고가 소장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수사 [銀水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몽금척도(夢金尺圖)」 태극전內 조선 이태조(李太朝)와 마이산에 얽힌 설화들에 관한 자료
고즈넉한 풍경이 탑사와 사뭇 다른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기도를 올린 장소로 알려졌다. 기도 중에 마신 샘물이 은같이 맑아 이름도 은수사(銀水寺)가 됐다. 실제로 이 사찰의 태극전에는 이성계가 꿈에서 금척을 받는 몽금척도(夢金尺圖)와 금척의 복제품이 있다. 또 그가 백일기도 후 심었다는 수령 650여 년의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도 여전하다.
자료 : [Dear My Walking] 전북 진안 마이산, 사계절 내내 절경, 그 중 겨울 설경이 으뜸 - 매일경제
** 마이산신 제단(馬耳山神祭壇) 진안군 마령면 은수사에 있는 제사 유적.
마이산은 여러 기록을 통해 조선 시대까지 소사(小祀)의 대상으로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서다산(西多山)이 백해군(伯海郡) 난지가현(難知可縣)에 있다고 했으며, 『고려사』에서도 진안현의 마령에 “마이산이 있는데 신라에서는 서다산이라 불렀으며 소사에 실었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마이산의 옛 이름이 서다산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서다[立]산’ 또는 ‘솟다[聳]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마이산 제단 신라 사전에 ‘서다산이 백해군에 있는데 고을의 명산이지만 소사에 들었다.’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쫓았다. 본조에서는 태종 13년 남행하였을 때 이 산 밑을 가게 되었는데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고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지금도 본읍에서는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통해 적어도 18세기까지 마이산에서 제사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마이산 은수사에 있는 마이산 제단은 1990년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진안군이 복원·축조한 것이다. 마이산 제단은 태조 이성계의 건국 설화인 「몽금척(夢金尺)」과 관련이 있는 마이산 은수사(銀水寺)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제단 [馬耳山祭壇]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줄사철나무 군락 [천연기념물 제380호]
1910년 마이산 탑의 축조자인 이갑룡이 식수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줄사철나무 군락으로 마이산 절벽에 다 자란 줄사철나무와 어린 줄사철나무가 함께 모여 자라고 있다. 오래된 나무는 직경 8~12㎝, 높이 3~7m이다. 줄사철나무는 노박 덩굴과에 속한 덩굴 식물로서 줄기에서 나는 뿌리가 나무나 바위에 붙어서 기어오르는 습성을 갖고 있다. 5~6월에 피는 꽃은 연한 녹색이고 열매는 10월에 연한 홍색으로 익는다.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은 우리나라 내륙 지방에서 줄사철나무 생육의 북쪽 한계선이 되고, 또한 다 자란 줄사철나무와 어린 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있어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관상용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자라며 일본 오키나와 및 중국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안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 [鎭安馬耳山-群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은수사 청실배나무 [천연기념물 제386호] 은수사 옆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마이산을 찾아 기도를 마친 후 증표로 심은 씨앗으로부터 자랐다고 알려져 있다. 청실배나무는 그 수량이 희소한 한국 재래종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의 수령은 64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18m이고 지름은 2.48m이며, 가지 길이는 동서 12.7m이고 남북 13.4m 정도로 큰 나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 [鎭安銀水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 나무로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형의 특성상 산 밑에서 위로 바람이 불면 청실배나무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 마찰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 청실배나무 밑동 옆에 물을 담아두면 가지 끝을 향해 역(逆) 고드름이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안 은수사 청실배나무 [鎭安銀水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역고드름 현상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곳은 마이산 은수사의 본당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5m 지점에 있는 취수단으로부터 동쪽 7m 지점의 오래된 청실 배나무가 있는 지점이다. 겨울철 기온이 영하 5~6℃ 되는 날 정화수를 떠 놓으면 얼음 기둥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역고드름 현상이 일어나는데, 길이가 10㎝ 안팎의 것이 많고 가장 긴 것은 30㎝를 넘기도 한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이산만의 신비한 현상이며 이 같은 현상은 풍향, 풍속, 기온, 기압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역(逆)고드름 혹은 솟는 고드름이라고도 불린다. 마이산 역고드름이 소원을 성취시킨다고 알려지자 해마다 1월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산 역고드름 [馬耳山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마이산 천황문天皇門 ㅇㅇ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 안부인 이곳은 은수사와 탑사로 통하는 관문이라 건물이 없어도 천왕문이라 불린다. 천황문(天皇門)이라 부른다.
천황문은 물을 가르는 분수령으로 암마이봉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 수마이봉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의 원류가 된다.
마이산 화엄굴馬耳山 華嚴窟 천왕문에서 수마이봉으로 150m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화엄굴은 마이산의 중턱 천황문에서 수마이봉 쪽으로 100m가량 올라간 곳에 암벽의 침식 활동으로 형성된 자연 동굴이다. 마이산에는 예로부터 서낭당 또는 서낭신앙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화엄굴이 만약 탑사와 관련이 있다면 불탑의 기능을 할 수도 있으나, 화엄굴은 민간 신앙과 불교 신앙이 만나는 장소라는 데 더 의의를 두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화엄굴에 설치된 입간판을 보면 “화엄굴 내에서는 사시사철 약수가 흘러나오며 24절기 중 춘분과 추분에만 약수까지 햇빛이 비치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고 이 약수를 마시고 치성을 드리면 수마이봉의 정기를 받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적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엄굴 [華嚴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암마이산
암마이봉을 자세히 살펴보면 윗부분에 구멍이 뚫린 듯 크고 작은 홈을 볼 수 있다. 이를 타포니(Taphony)라 한다. 마이산 바위는 거대한 역암덩어리다. 역암이란 자갈이 진흙이나 모래에 섞인 퇴적암을 말한다. 약 1억 년 전 이 일대가 거대한 호수였을 때 상류에서 자갈이 흘러들어 차곡차곡 쌓였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흙, 모래와 뒤섞여 퇴적됐다. 거대한 퇴적덩어리는 수천 년에 걸친 지층의 융기 현상, 단층 현상으로 지금 같은 암봉을 이뤘다
흰 코끼리(영어: white elephant)는 불교에서 대단히 귀중한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는 석가모니의 모친인 마야부인이 태몽으로 6개의 상아가 달린 흰 코끼리가 옆구리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흰 코끼리는 어떠한 일도 시키지 않고 신성시되고 있는데, 특히 불교국가인 태국의 경우 국가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일반적인 코끼리도 신성하게 여겨진다.
자료 : 흰 코끼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양제 진안군 진안읍 마이산로 228-10
1962년 10월 농업용수 공급을 위하여 준공되었다. 이 저수지는 사양동 방죽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여기서 사양이란 단양리가 마이산 자락에 형성되어 있어 북쪽이 트여 있고 마을로 햇볕이 비켜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양제의 표면 위로 마이산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출사지로도 유명하다. 사양제에는 산책 데크로, 부유 분수 등이 있는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자료 : 사양제 > 상세 | 관광지·명소 | 열린관광 모두의 여행
마이사馬耳寺
도립 공원 마이산 북부의 입구에 위치한 대한 불교 태고종 말사로 1965년 혜일(慧日)이 창건한 사찰이다. 북부 마이산 입구에 위치하며 약 700m 정도에 천황문(天皇門)과 화엄굴(華嚴窟)이 있다. 천황문은 마이산 두 봉우리 사이의 오목 부분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고, 화엄굴은 마이산 천황문에 위치하였는데 이승(異僧)이 이곳에서 화엄경을 얻었다는 데서 이름하였다. 건물 뒤편에 혜일의 행적을 기록한 혜일 창건 사적비 1기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이사 [馬耳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마이산관광단지 주차장
연인의 길 진안읍 단양리 814
연인의 길은 마이산 북부 주차장에 들어가기 전 진안 역사 박물관 옆으로 나 있는 길로, 전망대로 향하는 산책길이다. 과거 ‘마이산 구 도로’라 불렸던 이 길은 2002년 경 ‘연인의 길’로 개칭되고, 북부 진입로 중 한 구간이 되었다. 연인의 길은 과거 마이산 중턱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차량을 통제하여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연인의 길은 마이산 도립 공원 북부 주차장 인근부터 정상에 이르는 1.9㎞의 산책길이다. 이 길은 마이산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천황문까지 연결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인의 길 [戀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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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축하드립니다.
반갑게 뵙겠습니다.
초보산꾼님
1대간 9정맥 완주 하심을 너무너무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함께 해주신다니 더없이 감사드려요~
참석 댓글과 함께 입금까지 확인하였습니다~^^
반갑게 뵙겠습니다~^^
축하드립니.
열정에 박수 👏
멋진 초보산꾼님
초보산꾼님 1대간 9정맥 완주 하심을 축하드립니다 더군다나 4월 정산 마이산까지 함께해주시니 넘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