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반정 자체를 역적질로 본다는 심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 세력은 과도한 공신 지정에 따른 폐해 수정이라는 명분과 중종의 지지를 믿고 이를 과감히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중종은 조광조 세력의 위와 같은 대규모 위훈삭제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조광조 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중종은 결국 본인의 의지와 달리,다른 신료들의 지지까지 입은 조광조의 주장을 본심에 반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환영하였지만 중종은 언제부터인가 조광조가 부담스러웠고,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세력이 임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과격한 노선을 추구한 조광조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세력을 내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입니다.
※ 4대사화 : 무오사화(연산, 조의제문), 갑자사화(연산, 어미 복수),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 중종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을 내친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인데, 이를 재구성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남곤은 성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 치하에서 벼슬을 하다 갑자사화 때 귀양을 갔던 사람으로서, 중종조에 이르러 탁월한 정치감각과 문장으로 신진세력의 리더로 꼽혔으나, 조광조의 출현으로 빛이 바랬고 급기야 이들로부터 구세력으로 몰려 입지를 잃고 말았습니다.
남곤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역시 조광조 세력으로부터 구세력, 소인배로 몰려 탄핵을 당한 동갑내기 심정, 그리고 정국공신의 상징으로서 조광조의 76인 위훈삭제로 인해 목에 칼이 들어왔다고 느낄 정도로 불안감을 갖고 있는 홍경주와 함께 의기투합하였습니다.
이들은 중종이 조광조 세력의 과도한 밀어붙이기식 개혁추진과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압박 그리고 조광조의 높은 인기에 불안감과 시기심을 갖고 있고, 아울러 위훈삭제로 밀려난 공신들이 작당하여 반정이라도 일으킬까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활용해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조광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조선시대 안타까운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조광조. 언제나 세상은 돌게 되어있고, 역사는 반복되고 오르긴 힘들지만 내려 가는 건 한순간, 씁쓸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과도한 칼질해 대다가 주인 입맛에 맞지 않아 짤린 요리사랄까~
중종~이 양반도 그릇이 간장종지~ 에휴~ 조광조가 10년만 더 살았어면, 조선이 훨씬 더 발전했을텐데~
명분이 서고 아무리 옳은 일이라해도 내가 최고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항상 반대세력과 분란을 키우게 되는 것~
이어서~~
<조선왕조실록(46)> 중종 5 - 기묘사화(己卯士禍)(2)
홍경주는 어느 날 밤 중종을 찾아가 조광조의 권세와 인기가 이미 임금을 능가하였고, 이에 공신들이 크게 걱정을 하고 있으며, 시중에는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을 하는 등 가뜩이나 불안해하는 중종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야사에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시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벌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쓰게 한 후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임금에게 들고 가 아뢰었다고 하나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인데다 이야기 자체가 선조 이후에 등장하는 것임에 비추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홍경주가 중종에게 주초위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의 참언을 입에 올려 중종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댄 것은 사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하튼, 조광조 세력의 과격하고 급격한 밀어붙이기식 일 추진에 가뜩이나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껴오던 중종은 홍경주의 말을 듣고, 사방이 조광조의 수족인데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고 하문하였고, 홍경주는 임금이 조광조를 치는데 뜻이 있다는 밀지를 내린다면 남곤, 심정 등 충신들과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답을 하였습니다.
이에 중종은 홍경주, 남곤, 심정 등에게 “정국공신을 모두 그냥 둔다면 경들은 어육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엔 과인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이미 간당(간사한 무리)이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되었으므로 함께 꾀하여 그들을 제거하고 종사를 안심시키도록 하라”는 취지의 밀지를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그 후 중종과 홍경주 등은 은밀히 조광조 제거 시나리오를 짜고, 신하들이 조광조의 죄를 청하는 글을 미리 지은 후 그 밑에 대신들의 이름을 마음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조광조 등은 저희끼리 붕당(저거끼리 짝짜궁)하여 권세 있는 요직을 모두 차지하였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며, 임금을 속이고 조정의 행사를 가리지 않고, 후진을 유인하여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방해토록 함으로써 국세가 전도되게 하였다.
- 이에 조정이 모두 속으로는 분개하였으나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조심하기에 급급했다.
중종은 어느 날 밤 조광조의 측근인 승지(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쯤 됩니다)를 전격 교체하고 조광조 세력 대부분을 금부에 하옥하도록 하는 어명을 내린 후 입시한 중신들에게 위와 같이 미리 작성해 놓은 문안을 보여주었고, 이어서 대신들과 성균관 생원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광조 등을 모두 외방에 유배조치하기로 하였습니다.
옥에 갇힌 조광조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중종의 돌변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천문이 멀어서 생각을 다 아뢸 길이 없사오나 잠자코 죽는 것은 참으로 결딜 수 없사오니 한 번만 친히 국문해 주옵시면 만 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사옵니다”라는 옥중상소를 올렸습니다.
조광조는 자신이 직접 임금에게 조목조목 해명을 하고 설득을 하면 오해가 풀릴 것으로 기대를 하였겠으나, 본질은 임금의 오해가 아니라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세력을 쳐 냄으로써 왕권을 온전히 유지하겠다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므로, 결국 조광조의 기대는 허망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광조는 중종의 그릇을 보고, 아랫것이 너무 잘나면 안되고, 오히려 웃전의 사랑이 독이 되는 날이 온다는 것과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시시콜콜 보고도 했으면 최소한 죽임은 당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일을 도모함에, 너무 앞서가거나, 급진적이거나 하면 중생들의 이해는 뒤에 오고~ 결국 험한 일을 당하나봅니다.
조광조도 이런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으니, 또 한번 조정의 기운이~~
이어서~
<조선왕조실록(47)> 중종 6
- 조광조의 죽음
조광조는 임금과 대면할 기회 한 번 갖지 못한 채 그대로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조광조는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사람으로서, 반듯하고 사심이 없었으며 온화한 성품에 인재라면 천민이라도 등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누구라도 공부하고 수양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었다고 믿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임금을 끝없이 계도하여 군자가 이끄는 나라를 만들고자 성심을 다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현실정치의 냉엄함을 잘 알지 못한 치명적 실수, 군왕제 하에서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중종의 개인적 자질 부족 등 (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지도자는 쇠퇴의 길을 걸을수 밖에 없는데, 쪼다 중종이 복을 찼네~ )여러 이유로 그 꿈을 접은 채 정치 개혁의 길에 들어선지 4년 만에 유배지에서 사사당하니, 그의 나이 겨우 38세였습니다. 그래서 가수 조광조의 '연인이여' 가사중에 "(중종)눈에서 멀어지면 (중종)마음마저 멀어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하나요~"가 히트를 친건 아니겠지요~ㅋ
중종은 조광조를 아들과 같이 아끼다가 느닷없이 그와 그를 따르는 무수한 신료들과 선비들을 납득할 만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은 채 모두 죽이니, 오죽하면 사관들조차 그 임금이 그 임금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취지의 촌평을 하였을까요
암튼 기묘사화와 함께 조광조와 그의 개혁동지들은 모두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살아남은 정국공신들은 끝없이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 나갔으며, 그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민심은 늘 흉흉하여 각종 고변과 익명서가 난무하였으며, 임금에게 직언해야 할 대간마저 건강성을 잃고 권력을 쫒으니, 결국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였고, 곧 중종의 실패였습니다.
조광조가 죽고 난 후 조정은 남곤이 제일 실력자가 되어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존의 훈구파와는 다른 이질적인 인물이 급성장하고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김안로입니다. 김안로는 똑똑하고 이빨이 세고 매사에 해결책을 잘 제시해서 차기 또는 차차기를 이끌 인물로 주목을 받았고, 급기야 자기 아들을 중종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중종의 총애까지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남곤은 김안로를 위험인물로 보고 김안로를 소인배로 몰아 귀향을 보내버렸으나, 그도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권력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남곤은 죽으면서 조광조를 죽도록 한 것을 후회하고 자식들에게 자신의 시호를 청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도록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다행이라 할까요
중종, 인종, 명종 시대는 조광조의 등장과 퇴조, 김안로, 문정왕후, 윤원형, 윤임 등의 피 터지는 권력싸움이 벌어지던 시대인데 (“여인천하”의 소재), 그러한 권력싸움의 정점이 눈앞입니다.
15여년 전 (2001~2002년) 전인화 강수연 주연의 "여인 천하" 참 재미 있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서~~
<조선왕조실록(48)> 중종 7 - 중종의 죽음
남곤이 죽고 며칠 후인 세자의 생일날 해괴한 일이 궁궐에서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꼬리가 반쯤 잘리고 사지가 불로 지져진 쥐가 동궁 숙소 근방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자(13세)는 쥐띠였습니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灼鼠의 變)”이라 합니다.
조정에서는 이 일이 누군가 세자를 저주하여 벌인 일로 보고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대왕대비가 당시 세도를 부리던 경빈 박씨(박원종의 수양 딸)를 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별다른 증거도 없이 경빈 박씨는 그 아들인 복성군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음모와 모함의 달인인 문정왕후와 김안로가 있었는데, 이 중 누군가 벌인 일을 비교적 순진한 경빈 박씨가 뒤집어 쓴 것입니다.
한편, 귀양 가 있던 김안로는 남곤의 죽음과 작서의 변, 그리고 새로운 후원자를 원하는 중종의 뜻에 따라 조정으로 복귀했고, 타고난 재주를 발휘해 중종의 신임을 얻은 후 곧 조종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김안로는 심정 등 반대파들을 누명을 씌워 모두 사사하고, 새로운 저주 사건을 만들어 귀양 가 있는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까지 사사해 버리는 등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안로에게도 신경이 쓰이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이는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전인화)와 그의 친동생들인 윤원로, 윤원형(이덕화)였습니다.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야심이 두려운 나머지 문정을 폐위하고 윤원형 등을 해치우려다 자식의 혼인 잔치를 벌이던 중 체포되어 사사되고 맙니다(작서의 변이 경빈 박씨가 아닌 김안로와 그의 자식, 며느리가 일으킨 것으로 밝혀짐)
중종은 어린 시절,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연산이 대신들에 의해 끌려 내려가는 것을 직접 목도한 사람으로서, 평생을 왕권 유지를 위해 왕 노릇을 했고(왕노릇을 위한 왕노릇에 의한 왕노릇~~ ) 이를 위해 항상 강력한 후원자를 두었습니다.
다만, 그 후원자가 지나치게 컸다 싶으면 다른 신하들과 모의해 그 후원자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방법이 중종의 전매특허 (중종의 용인술은 한마디로 '以夷制夷' , ) 였고 이 방법으로 중종은 39년 왕위를 지킨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왕위를 지키면서 업적이 없다니~ 그러기도 쉽지 않을듯~)
중종은 박원종 그늘 뒤에서 초기 시절을 보냈고, 조광조에게 힘을 몰아주면서 왕위를 보존하다가 조광조를 내쳤으며, 다시 김안로에게 힘을 몰아주는 방법으로 왕위를 지키다가 다시 김안로를 내쳤는데, 이 때 죽은 사람이 오히려 연산 때보다 많았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중종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왕위를 지킨 것 외에 백성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이 재위 39년만인 1544년 향년 57세에 병으로 죽으니, 조선의 백성이 참으로 불쌍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첫댓글 아까운 조광조...늘 때가 있지요...나아갈때와 멈추어야 할 때..심어야 할 때와 거두어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