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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강해(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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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어도 잡지 못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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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 41:1-11//찬송 49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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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들어 더욱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 문명을 보면 참으로 감
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초능력까지 탐구하면서 과학의 힘을 구사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정말 만능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처럼 인간이 가진 지능은 이 땅을 엄청나게 변
모시켜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태까지 예전과는 천양의 차이
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또 앞으로 몇 세기가 지나면 후세대 사람들은 지
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
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만능에 가
까워지기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
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한계는 무엇들일까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 중 본 41장은 결론적인 예증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마지막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주로 하나님께서 묘사하신 악어
에 관한 것으로 악의 강포한 성격, 무서운 힘과 인간의 왜소함과 무능력
한 모습을 비교하며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도를 갖고 전개되
는 본장의 전반부(1-11절)에는 악어의 포획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주
고 후반부(12-34절)에는 악어의 지체와 구조와 큰 힘에 대한 사항이 자세
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의 위용에 대한 묘사를 다루고 있는 본 단락을 악어가 인간에 의해 길
들여지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악어가 인간
이 만든 도구에 의해 길들여 지지 않고(1,2절), 인간과의 계약으로 인간에
게 순종하지 않으며(4절) 애완 동물로 삼을 수 없음(5절)과 창과 작살로
위협해 보아도 동요하지 않음을 묘사하고 있다.(7절) 이러한 본 단락의
전반부에는 악어를 포획하는 문제를 후반부(5-11절)는 포획하여 이용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악어의 포획 가능성과 그 이용 가능성을 다루
고 있으나 사실 이는 가능성에 대한 반어적 표현으로 오히려 <악어의 포획
과 이용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악어의 포획 가능성(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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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일반 동물의 포획에 사용되는 낚시와 노끈과 줄과
갈고리를 제시하며 그와 같은 것으로는 절대적으로 악어를 잡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
과 하나님의 크고 넓은 의지를 비교하기 위한 것으로, 포획 도구는 마치
욥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변론하고자 한 자신의 의로움과 비교할 수 있다.
자신의 의로움으로 능히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욥의 교만을
꺽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욥이 악어를 낚을 수도 노끈으로 혀를 맬 수도,
코를 꿸 수도 아가미를 꿸 수도 없음을 반어적 질문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
니다.
2.악어의 의인화(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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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악어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악어가 포획 당할 일이 없겠지만
만일 악어를 포획하였다고 가정할지라도 악어가 자신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유순하게 말하고 계약을 통해 종의 관계를 유지하겠는지를 질문한
다. 특히 본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이전에 사용하지 않던 동물 의인화의
방법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본서 전체 내용의 극적인 전환(욥의 회개)를 유
도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즉 비록 악어가 포획된 상태에 있을지라도 결
코 욥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인화를 통해 나타내 욥에게
반어적으로 회개를 촉구한 듯하다.
3.악어의 불가항력적 힘(5-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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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획할 수도 없고 포획된다 할지라도 마음대로 순종케 할 수 없는 악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아어러니컬한 비교를 본
문을 통해서 사용하는데 즉 그것은 가장 부드럽고 아리따운 소녀와 포악하
기 이를 데 없는 악어와의 비교입니다. 이와 같은 부조화적인 비교는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듯한데 이런 거부감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기 위한 의
도의 강조를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녀의 애완동물로 악어를 생각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변론자로서 욥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여호와께서는 악어의 상품성에 대한 언급(6절)을 통
해 무가치한 욥의 의와 무능력을 밝힙니다. 어부에 의해 생포되었다 할지
라도 악어의 포확성 때문에 악어를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악어는 상
품적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어가 아무 데도 쓸데없는 것과 같이 무력한 자신의 의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욥은 타인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
다. 이처럼 악어를 통해 나타난 이미지들을 욥에게 연관시킴으로써 이런
무능력한 욥이 악어 하나 손가락으로 건드릴 용기 없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
당신을 판단하려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러
한 악어를 소유하시고 기르시는 분임을 암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소유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엄두도 낼 수 없는 악어의 포획, 악어의
길들임, 악어의 애완이 하나님 당신에게는 가능함을 강조하여 당신의 무한
한 능력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악어의 위용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당신이 어떤 분
이신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밀하게
당신 백성을 이해시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1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할 때만 분명히 그분의 속성과 그
분의 기뻐하심을 알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그리스도인
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경을 날마다
상고함으로써 하나님을 바로 알고 진정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화>// 어느 마을에 풍족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한 가
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11살짜리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
이는 학교에서 집에 오자마자 황급히 말했습니다 "엄마 내일까지 육성회비
가져가야 돼요." 어머니는 깜박 잊고 있다가 그 아이의 말을 듣고 "그래
내일 가져가거라.아이는 가방에 돈을 넣어 깊숙이 두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막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
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아이가 배탈이 나서 돈이 필요하니 꾸어달라고 했
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챙겨둔 육성회비를 먼저 그 아주머니에게
주자고 아이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싫다고 계속 버팁니다. 결국 어
머니께 꾸중을 듣고 그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님이 돈을 주
어 공부를 할 수 있고 또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부모님이 때를 따라 주신다
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그
아이는 잘 몰랐던 모양입니다.
욥 41:1-34
악어의 위용
여기 악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리워야단' 은 본래 여러 가지 무서운 동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악어는 인도, 아프리카, 중국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그 길이가 10M에 이를만큼 몸집이 크고 전체가 각질의 비늘로 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길다란 아가미 부분의 무서운 이빨들, 앞뒤 네 발의 날카로운 물갈퀴 등은 사람들의 눈을 제압시기키고도 남습니다. 그 생김새가 거대하고 무서운 파충류이기 때문에 악을 상징할 때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장 전체에 걸쳐 악어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그 위용이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난 악어의 위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살펴봅시다.
##### 1.모습이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욥을 향하여 악어의 두려운 모습을 들려주었습니다. 비늘로 덮인 껍질과 아가미 사이의 이빨도 그렇지만 재채기할 때 발하는 광채,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은 눈,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는 입, 마치 갈대가 타는 것처럼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콧구멍, 게다가 그 입에서 숯불을 피우듯 하는 불꽃 등의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12-21절)
이런 말씀은 악어의 모습을 들려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신화 가운데 나오는 거대한 용의 자태를 연상시켜 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실제의 악어가 불똥을 튀기고 연기를 뿜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위용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피조물 가운데 악어만큼 그 모습이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이야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0:31절에는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사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피조물 하나만 보아도 하나님이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는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도 큰 문제이지만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온갖 방종이 바로 이런 태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각별히 하나님의 두려우신 위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2.체력이 엄청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어가 갖추고 있는 엄청난 체력을 들려 주셨습니다. 목에 뭉킨 힘, 맷돌 아래짝처럼 견고하고 단단한 비늘조각들, 칼로 쳐도 쓸데없고 창을 던지고 살을 쏘아도 끄떡하지 않으며, 작살을 던져도 소용없는 몸집, 철과 놋 무기를 한낱 지푸라기와 썩은 나무처럼 여겨 버리는 괴력, 물매 돌과 몽둥이 따위는 더 우습게 여겨버리는 의젓함 등을 표현한 것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22-29절)
물론 이런 표현들이 상당히 과장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악어가 지닌 체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점에서 그 과장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인간의 유약성은 가히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속히 베임을 당하는 풀잎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악어는 같은 피조물이면서도 인간에 비하여 엄청난 힘을 과시하는 동물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힘이야 더 말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능력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갈라 버리신 것만 보아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설령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손상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모든 것을 그분의 힘에 맡기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3.몸짓이 굉장합니다
악어의 몸짓은 날카로운 와륵같은 배로 진흙 위에 타작 기계처럼 자취를 내는 일, 깊은 물을 솥 물 꿇듯 만드는 일, 바닷물을 백발처럼 살을 가르며 길을 내는 일 등의 표현이 그것입니다.(30-32절)
하나님께서는 악어를 가리켜 교만의 왕이 된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악어는 그 생김새와 힘도 그렇지만 움직이는 자태도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피조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위용이야 말로 더 말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한 호텔에서 투숙객이 수속을 마치고 6층의 방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갔습니다. 조금 기다리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타자 6층이라 표시된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올라가야 할 엘리베이터가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잘못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호텔은 산의 한 쪽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호텔 로비가 다른 일반 호텔처럼 1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맨 꼭대기 층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악인이 땅에서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가? 왜 의롭게 살아온 내가 이유없이 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욥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로써 욥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인간이 품고 있는 문제들은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여러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 호텔의 체제를 알고 난 뒤 엘리베이터 속에서 평온을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순리와 섭리를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의 힘과 비교하여 보고 나의 좁은 생각으로 비추어 보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러기에 소리도 없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 곁에서 힘차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소리와 모습을 듣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밀림의 늪지대에 살고 있는 악어는 그 모습이 두렵고 체력이 엄청나며 몸짓도 굉장합니다. 하지만 그 위용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손수 지으신 하나님의 위용이야 더 말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고 불신하면 안되고 그런 위용 앞에 늘 겸양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