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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2: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 히 12: 10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2. 인내해야 할 이유 ( 12: 4 – 13 )
④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⑥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⑦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⑧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⑨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⑩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⑪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⑫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⑬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예수께서는 위선적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다. 옛날부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실한 종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와 고난은 아직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12: 5).
본 절은 앞 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비교이다.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 것과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1] 너희가 죄와 싸우되
'죄와 싸우되'는 수신자들의 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는 1절에서 언급한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절의 '죄인들'과 같이 악의 무리를 가리킨다(Lane).
2]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수신자들이 죄에 대항하여 당한 고난이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 때 자신들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히 12: 5-6 - 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⑥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도 있다. '징계하심(파이데이아)'은 징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 엡 6: 4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 딤후 3: 16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낙심치도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다.
* 사 1: 5 -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는 더욱 엄한 징벌과 단련을 주실 것이다.
히 12: 5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1]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본문은 '아들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의문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2]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본문은 잠 3: 11-12의 인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하심을 시사한다.
'징계하심'(파이데이아스)은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 신 8: 5 -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히 12: 6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그의) 받아들이시는(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 됨'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한다(Bruce, Hewitt, Morris).
본문의 '내 아들들아'(휘에 무)는 인용문인 70인 역 잠 3: 11에는 '휘에'(아들아)로 되어 있어 본문에 인칭대명사 '무'(나의)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무'가 없는 '휘에'는 잠언 전체에서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Lane, E. Ahlborn).
저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70인 역에 '무'를 삽입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됨을 강조하고 있다(Bertram, Bornkamm).
히 12: 7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 하신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1]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너희가 참음은'(휘포메네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직설법으로 이해하여 개역성경 본문처럼 해석한다(Hewitt).
(2)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너희는 징계를 참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 됨의 증거임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히 12: 8 징계는 다 받는 것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표이며 증거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에 대해 충실히 징계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1]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저자는 본 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 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자'(노도이)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들을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나 우리의 불신앙에 대해 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징계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징계의 도구로서 악한 자들이나 개인적인 역경의 방식을 사용하실 수 있다. 징계는 채찍질처럼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며 정신적 번뇌가 수반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징계를 받았다.
* 민 14: 34 -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바울 사도도 육체의 가시를 받았다.
* 고후 12: 7 -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어떠한 형태의 징계이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모든 징계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징게와 같이 최종적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10, 11 절)
2] 친아들이(참 아들이) 아니니라.
'참 아들이 아니니라'(우크 휘오이)는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히 12: 9 육신의 아버지가 징계하여도 -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녀는 그를 징계하는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공의의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그를 징계하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1] 또 우리 육신(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고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영의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Kuss, Lane).
'살려'(제소멘)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10: 38, 39, Peterson).
* 신 30: 11-20 - ⑪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⑫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⑬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⑭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⑮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⑯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⑰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⑱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⑲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⑳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야만 한다.
히 12: 10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
본 절은 '호이 멘 가르...호 데'(저희는 ...오직 하나님은)라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그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즉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즉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받아야 한다.
1] 그들은(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자기의 뜻대로'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자녀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징계하였거니와'(에파이듀온)은 미완료시상으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불완전하여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저희' 곧 육신의 아버지가 행한 징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유익을 끼치는지조차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였다(9 절).
2]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시사한다.
'거룩하심'(하기오테토스)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진다(Bruce, Lan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다(Lane, 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