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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8:1-29) 단심가와 하여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단심가와 하여가>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
여러분들이 다 아십니다. 하여가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창 나라의 창업에 몰두해야 될 때에,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거두어들이고 새 나라의 개국의 공신이 되어달라는 유혹의 손길과 권유의 손길을 뻗을 때 불렀던 시조 아닙니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만수산은 아시다시피 개성에 있는 송악산의 다른 이름으로 칡넝쿨이 막 엉켜 있는 것처럼, 너와 나도 생각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입장이 다르지만 우리 서로 함께 한 가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위해 우리 한 번 잘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네 생각과 세계관과 네가 추구하는 것이 다 나와 다를지라도 우리가 공통적으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냥 잘살아보자. 고려가 썩지 않았느냐? 철저하게 밑동부터 썩은 고려를 버리고 새 시대를 열어서 한 번 잘 살아보세."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의 시조를 지었는데 그에 대해서 정몽주가 이제 답변을 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임 향한 일편단심’
그저 한 조각 마음, 내 마음 별것 아니다. 어디 여러 군데 조선의 창업이라든지 그런 여러 가지 일에 쓸 만한 큰마음이 아니고 조각마음이라는 겁니다.
"너무 작아서 쓸데가 없다. 그런데 일편, 한 편 조각과 같은 마음을, 그 붉은 마음을 임을 향하여 드리는 것 외에 내 마음의 여지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일에 신경 쓰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작은 것 같아서, 작은 내 마음을 임을 향해 고려 임금을 향하여 다 드리기에도 너무 작게 느껴지는데 "내가 무슨 새로운 나라를 창업을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답변을 하게 됩니다.
이 하여가와 단심가는 정말 인류역사의 두 줄기 강물의 특성을 아주 잘 드러내는 시조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단심가와 하여가에서 소재로 등장하는 ‘만수산 드렁 칡, 임 향한 일편단심’ 이러한 말 자체가 신앙 상에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오늘 또 다시 열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수넴 여인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한 아낙네의 이야기가 이렇게 열 왕들에 대한 이야기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장황하게 반복되면서 이야기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이 수넴 여인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여인이 단심가로 대표되는 강줄기를 대변하고 있고, 왕들의 흐름, 북 왕국의 왕, 남 왕국 유다의 왕, 그 왕들의 흐름이 나타내는 것이 하여가로 강물의 두 줄기를 대비시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 잘 살아보자. 풍요하게 되자. 많아지자."라는 내 의견과 본능적 욕망을 죽이고,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의견을 따라가는 한 쪽의 강물 줄기와, 바알과 아세라 숭배로 대표되는 내 욕망의 소리를 따라 "많아져야 된다. 풍요로워져야 된다."라고 하는 본능을 쫓아가는 또 하나의 강줄기가 나란히 대비되고 있는 것인데 너무 미약하지요. 엘리야, 엘리사, 수넴 여인으로 이어져 가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쫓아가는 강줄기가 너무너무 연약해 보이고 미약해 보입니다.
여러분! '만수산 드렁 칡'이 우리 신앙에 어떤 교훈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줄 아십니까?
칡넝쿨과 뿌리들이 얽혀 있는 그 모습을 연상해 보시지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 사람의 모습 ‘나’라고 하는 것이 바로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의 계통을 이어가는 남 왕국 유다의 여호람 왕이 등장을 하는데, 그래도 제법 하나님을 섬긴 몇 안 되는 여호사밧 왕의 아들인데 이 여호람 왕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그 유명한 아합과 이세벨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달랴라는 딸과 결혼을 합니다. 남 왕국 유다에 적어도 믿음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그렇게 결혼을 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이 누굽니까? 이세벨이 누굽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만연시킨 장본인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 믿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고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예를 들어 어느 이단종파라든지 아니면 다른 종교를 건성으로 믿는 사람들은 상관이 없는데,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믿는 사람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이라든지, 문선명의 통일교라든지, 요새 또 신천지라든지 이런 것들을 아예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투철하게 믿고 나가는 사람은 절대 안 됩니다. 그건 안 돼요. 그냥 믿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건성건성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그 사람들을 다 전도해야 되는 것이니 괜찮지만, 이러한 다른 종파 다른 이단종파에 빠져 있는 상태는 이건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만연시킨 장본인인 그 직속 딸을 그대로 데려 오는 것은 도대체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만연했던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왕의 왕실로 마치 독가스가 새어 들어오듯이 새어들어 와서 결국 남 왕국 유다조차도 나라 안의 평강이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6절까지 읽었는데 7절부터는 난데없이 아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직속 부하 하사엘에게 암살을 당하는데 지금은 엘리사 시절인데, 엘리야 때 이미 하사엘이 벤하닷 왕을 죽이고 왕으로 등극할 것을 예언하고 그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하사엘이 엘리사를 뵈는데 어떤 말이 있는가 하면요? 엘리사가 아람에 갔다가 하사엘을 만납니다. 벤하닷 왕이 아파서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하사엘을 보냅니다.
내가 낫겠는가? 죽겠는가를 알아보라고.
그러니까 "낫겠다고 합니다. 낫겠는데 죽는다고 합니다."라고 합니다.
계속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병에서는 낫는데 하사엘이 죽입니다. 결국 질식을 시켜서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하사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하사엘이 "왜 우느냐?"고 합니다.
네가 이스라엘을 진멸할 모습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하니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이것을 붙잡으면 어떻고, 저것을 붙잡으면 어때. 잘 살면 되는 것이지. 아니 병 낫게 해준다면 되는 것이고, 돈 벌게 해준다면 되는 것이지, 자식 일들 잘 되게 해준다면 되는 것이지, 뭘 더 바래? 뭘 믿으면 어때? 하나님을 믿는데 우상처럼 믿으면 어떻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여가를 부르는 선민들은 심판입니다.
여러분! 수넴 여인의 믿음을 다 알아요. 그 당시에 자식이 없었어요. 자식이 없는 절대 절명의 결핍상태, 치명적인 부족의 상태, 그 자체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참된 복의 현실로 믿고 몇 십 년을 살았기 때문에, 엘리사가 자식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속인다고 합니다. 속인다는 게 거짓으로 이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짓이라는 말을 한 이유는, 세상을 주관하시고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자식이 없는 현실을 허락하셨다는 것으로 그게 참 행복의 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엘리사가 자식을 준다고 했을 때 거짓이라는 말을 한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수넴 여인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이 가르쳐 준 가치관 ‘자식이 있어야 된다. 아니야. 하나님은 내게 자식을 안 주실 수도 있어. / 사지가 건강하고 멀쩡해야지. 무슨 말이냐? 아니야. 하나님은 내게 병을 주실 수도 있고 장애를 주실 수도 있어. 나는 이해 못하지만 이게 참이야. 내가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금 주신 이 현실이 올바른 것이야.’라고 이게 참이고, 부족한 게 아니고, 결핍이 아니고,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에 자꾸 다른 얘기를 하니까 거짓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수넴 여인의 믿음이 '이 몸이 죽고 죽어'라는 단심가입니다.
자식이 없는 절대 절명의 부족함을 매일 느낄 때마다 죽고 또 죽는 겁니다.
‘아니야. 세상 사람들은 나를 부족하게 봐도 자식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여인이라고 보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면 이게 온전한 것이야.’라고 또 죽습니다.
세상이 가르쳐 준 가치관대로 생각하는 것에서 죽고, 자식에 대한 그리움, 자식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도 죽고 그 자식에 대한 모든 열망을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바꿔 갑니다.
‘자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다가 '아, 아니야. 자식 없는 이 상태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하나님! 자식을 위해 쏟을 내 모든 마음, 한 조각 마음, 얼마 되지도 않는 이 작은 마음을 하나님게 다 드리게 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살다 보니 엘리사를 만났어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엘리사에게 표현이 되고, 방을 하나 만들고 책상을 놓고 침대를 놓고 먹을 것으로 공궤하고 필요한 것이 없는가를 늘 챙기고 엘리사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엘리사에게 다 표현하면서 삽니다.
반면에 나머지 세상사람 모두가 다 왕들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만수산 드렁 칡이 얽히면 어때?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이면 어때? 북 왕국 이스라엘과 편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풍요와 다산의 밑바탕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냐?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가계를 형성하는 다윗의 후손조차도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있는 것처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꿩 잡는 게 매라고, 돈 벌면 되는 것이지. 뭐. 돈 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하면 되는 것이지.'라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주일 예배를 중단하면서 저도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 주일은 청소년들만 모여서 예배를 드린 후에 청소년 영성강좌에 대한 논의를 하는 바람에 그랬고, 지난주는 다른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렸어요. 예배가 은혜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예배자의 마음가짐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참 마음의 성심을 다해서 예배에 임해도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시간 동안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 예배 자들의 ‘나’ 그 '나'가 조금도 부정되고 훼파되고 깨어지고 끊어지면서 다시 부활하는 역사가 없더라는 것이에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는’ 역사가 없더라는 겁니다.
내 마음 한 조각이 자식, 남편, 아내, 내 사업, 내 건강, 내 미래의 온갖 생각으로 만수산 드렁 칡처럼 얽혀 있는 그 상태가 그대로 보존되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한 말씀도 ‘나’라고 하는 그 껍데기 안에 들어있고 얽혀 있는 칡넝쿨을 끊어내는 말씀이 없고 오히려 더 조장합니다.
자식이라고 하는 걱정을 칡넝쿨처럼 붙잡고 있는데, 그것을 강조하고 잘 되게 조장을 하는데, 결국 목적과 목표가 다산과 풍요에 두고 세상적인 형통에 두고 모든 말씀을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갑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해가면서.
그래, 제가 속으로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구할 것이면 좀 더 성경을 읽어볼 것이지. 성경에 다 나와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옵니다. 진정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아버지의 아들다운 아들이 되었느냐는 겁니다.
아들의 신분과 본연의 자세에서 다 떠나서,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으면서 돼지의 심정과 돼지의 모습으로 구하는 대로 주시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아버지의 아들답게 되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들인 것처럼, 너희도 나와 같은 아들이 되었을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돼지 같은 형상이 된 것에 대해서는 건드리지를 않고 그대로 보존해 두고 돼지의 형상과 돼지의 심성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구하라는 겁니다. 두드리며 찾으라는 겁니다.
사업 때문에 걱정하는 것, 자식 때문에 걱정하는 것, 이웃과의 자존심,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 기분 나쁘다. 이런 것들 다 미세한 실뿌리까지 다 엉겨 붙어서 이 ‘나’라는 것이 이 걱정 저 걱정, 이 욕심 저 욕심, 이 계획 저 계획, 이 생각 저 생각이 완전히 얽혀 만수산 드렁 칡처럼 되어 있어도 잘 되면 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겁니다. 아니지요. 아닙니다.
수넴 여인이 지팡이 신앙을 버려 버립니다.
지팡이 신앙이 뭐예요? 아들 살려준다는 겁니다. 지팡이 보내면 살아날 수 있는데 수넴 여인이 거절하니까 지팡이를 놨어도 살아나지 않지요. 게하시가 죽은 아들에게 지팡이를 놓았는데 살아나지 않았잖아요? 수넴 여인이 거부합니다.
‘그렇게 살아날 것이면 나는 싫다.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 문제라면 나 원치 않는다.’라는 것이고
내 아들이라는 삶의 영역에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접촉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살아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 잘 나가고, 대학 들어가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대학에 못 들어가고 다리가 부러져도 좋으니 아들이라는 영역에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접촉을 해달라는 겁니다. 수넴 여인이 또 죽는 겁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현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죽는 겁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과 다시 한 번 접촉하고 싶은 겁니다. 계속.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넋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내가 정신이 있는 놈인지 없는 놈인지 모를 정도로, 세상에서 얽혀 있는 모든 칡뿌리들을 다 끊어내고 마지막 일편단심 남을 때, 마음자체가 남을 때, 그 작은 마음, 한 조각과 같이 작은 마음을 하나님께, 임을 향하여 다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다 드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단심가의 물줄기가 흐르고 하여가의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강물에 생을 띄워놓고 흘러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게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에서 얽혀 있는 모든 마음의 줄들을 다 끊어 버리고 마음 자체가 남아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있는 내 마음의 소원, 바람, 열망, 세상 가치관들... 십자가 칼로 다 끊어내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현실에 감사하며 하여가의 강에서 단심가의 강으로 바꿔 타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계속해서 임을 향한 일편단심이 여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