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
광주·전남 지역의 독립운동은 크게 한말 의병 전쟁에서 시작된다. 광주·전남의 전기 의병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1895년 겨울부터 준비되었다. 아관파천(1896)을 전후한 시기에 봉기하였는데 장성과 나주가 중심지였다. 장성에서는 기우만 등 유생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고, 나주에서는 향리 등이 중심이 되었다. 장성 의병과 나주 의병은 일본 구축(驅逐), 개화 정책 반대, 옛 제도 복구, 국왕의 환국을 요구하는 등 왕권을 지키고자 하는 근왕(勤王) 의병이었다. 장성 의병은 나주로 가 나주 의병과 합류한 후 다른 지역의 의병을 모으기 위해 광주에 있던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으로 이동하였는데, 선유사 신기선이 내려와 해산을 촉구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광주·전남 지역의 후기 의병은 1907년 10월 말 장성 출신인 기삼연의 주도 아래 봉기한 ‘호남창의회맹소’부터 시작된다. 1908년 2월 2일 설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이 체포되고 다음 날 광주천에서 총살형에 처해지자, 김준(김태원)·김율·전해산·심남일·안규홍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김준 의병부대는 나주·함평·광주 등지에서, 전해산은 영광·함평·나주 등 전남 서부지역에서, 심남일은 김율 의병장 순국 후 함평·강진·화순 등 전남 남부 지역에서, 안규홍은 보성·순천·광양 등 전남 동부지역에서 각각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일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머슴(담살이) 출신 안규홍이 이끈 의병들은 파청·대원사·동복 운월치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광주·전남 지역 의병들은 이른바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 불린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 때까지 불굴의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 광주·전남을 포함한 전라도는 최대 의병 항쟁지였다. 이는 1909년 전라도의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수가 47.2%와 60.0%를 차지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으로 전라도 의병장 103명이 체포 혹은 피살되었고, 약 2천여 명의 의병이 체포되었는데, 붙잡힌 의병들은 해남~하동 간 도로공사(현 국도 2호선)를 위한 강제 노역에 투입되었다.
의병들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였다. 주권을 상실한 10년 후인 1919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3·1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주·전남에서는 3월 10일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장성·화순 등 인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광주·전남에서의 만세 시위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주로 기독교계, 유생층, 청년·학생층, 천도교계, 행정기관 하부 관리에 의해 주도되었다.
광주 3·1운동의 주도 세력은 김복현(김철)·김강·최병준 등으로 대표되는 양림동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김용규·강석봉·최한영 등 ‘신문잡지종람소’ 소속의 청년들이 모의하고 준비하였으며, 광주 시민들과 숭일·수피아·농업학교와 광주보통학교 학생들이 앞장서 참여하였다. 3월 10일 만세 시위로 주동자 대부분이 검거되자, 황상호 등은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광주 만세 시위는 인근 기독교 세력에 영향을 미쳐 3월 21일 장성 삼서면과 4월 8일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다.
유생층의 주도로 시위가 전개된 곳은 순천·낙안·벌교·광양·보성·장성·구례 등지였으며, 청년·학생들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전개된 곳은 영암·해남·곡성·영광·함평·여수 등이었다. 천도교 세력에 의해 운동이 전개된 지역도 있었는데, 장흥이 대표적이었다. 장흥에서는 3월 15일 천도교 세력에 의해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의 하부 행정기관의 관리들이 주도한 지역은 영암 구림과 담양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행정기관의 공직자가 운동에 간접적으로 동조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운동의 지도부에서 직접 참가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사례다.
광주·전남 지역의 3·1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다소 약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894년 동학 농민전쟁과 한말 의병전쟁의 치열한 전투지로 투쟁역량이 크게 손실되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29년 광주고보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어난 광주여고보 여학생 희롱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11월 3일 오전 ‘우발적 충돌’은 오후의 ‘조직적 시위’로 변화되었다. 이후 항일 학생운동은 전국 각지로 파급·확산 되었는데, 이때의 학생 시위는 대부분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이 중심이 된 광주에서의 1차 시위에 이어 12일 2차 시위가 일어났고, 19일에는 목포상고생들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광주의 각 중등학교에는 비밀결사인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그 회원들이 1929년 11월 3일부터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광주학생독립운동에는 사회단체나 사상단체 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의 시위에는 독서회 중앙부 책임 비서를 맡고 있던 장재성이 관여하였으며, 11월 12일의 시위에는 장재성뿐 아닌 장석천 등 전남 청년연맹의 지도가 있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는 전라도를 넘어 전국으로, 해외로 확산되었다. 1930년 3월까지 전문학교, 중등학교, 보통학교 등 320개교, 54,000여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582명이 퇴학, 2,300명이 무기정학, 1,462명이 검거당하였다.
광주·전남에서 일어난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청년·학생들 중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는데 2·8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국내에 들어온 후 광주 3·1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정광호가 대표적이다. 해외 대신 고향으로 낙향하여 농민·노동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대항한 분들도 많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앞장서 참여하다 퇴학당한 이기홍이 고향인 완도 고금면에 낙향한 후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그 예다.
이처럼 광주·전남은 의병 항쟁에 이어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광주·전남인들이 앞장서 실천한 시대정신인 독립운동은 해방 후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첫댓글 광주 · 전남의 독립운동 약사(略史)를 잘 설명한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