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5년 4월 12일
장소: 대구 일원[대구간송미술관-점심-이상화고택-계산성당-청라언덕-옛 대구감옥(형무소)터-김광석거리]
인원: 43명
대구간송미술관-대구간송미술관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선생의 "문화보국 정신"으로 지켜온 문화 유산과 그 의미를 다양한 전시와 교육,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소통과 융합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설립하였다. 미술관 입구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시대적 비극을 이겨낸 굳건한 정신과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아름드리나무 기둥을 세우고 동선 곳곳에 소나무를 배치하였다고 한다.
간송미술관에서 답사는 시작되고...
흐름(The Flow)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다양한 그림들을 고화질 디지털 영상을 통해 소개하는 '실감영상전시(Immersive Digital Art Exhibition)로 반원형의 커다란 스크린에 조선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유려한 필치가 펼쳐진다. 흘러가는 하루, 변화무쌍한 날씨 속 인간의 삶과 자연의 모습을 담았다. 작품에 대한일체의 설명 없이, 작품 "자리(Jari)"에 기대어 영상 자체의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껴보고 있는 회원님들의 모습...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에서 굽까지 내려오는 유려한 S자 곡선을 지닌 전형적인 고려식 매병이다. 흑백으로 상감한 이중원문 안과 밖에 구름 사이를 오르내리는 학을 장식적 효과와 상서로운 분위기로 연출하였다. 완벽한 형태미와 정교한 문양으로 현존하는 고려청자 매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간송 선생이 1935년 일본인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당시 기와집 20채 가격에 해당하는 2만원을 주고 구입하였다. 국보68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蘭菊文甁)- 긴 목에 둥근몸체를 가진 당당하고 세련된 기형에 국화, 난초와 어우러진 나비를 장식했다. 문양은 양각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꽃잎은 별도로 만들어 붙여 입체감을 살렸고 청색, 갈색, 홍색으로 색을 올려 장식성을 높였다. 조선 백자에서 사용되는 모든 안료와 다양한 조각 기법이 이처럼 완벽하게 구현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 후기 문화 절정기의 절제된 화려함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조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1936년 간송이 일본인 수장가들과 치열한 경합 끝에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사상 최고가인 1만4,580원에 낙찰 받아 인수했다. 국보294호
백매(白梅)-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 는 풍속화가로 유명하지만 산수, 인물, 화조 등 다른 분야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 그림은 그의 사군자 그림이 지닌 개성과 시대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등걸(줄기를 잘라낸 나무의 밑동)과 가지를 그린 먹선은 굵기와 농도가 자유분방하고, 작은 꽃봉우리는 하얀 호분(胡粉-물감)을 둥글게 찍어 암시적이지만 뚜렷하게 표현했다. 나무 뒤로 조용히 펼쳐진 여백은 제시(題詩) "獨立漱寒淸曉時"의 표현처럼 '춥고 맑은 새벽에 홀로선' 백매의 분위기를 한층 살리고 있다. 굳은 절개나 강인한 생명력을 강조한 조선 중기의 묵매화와도 다르고,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중시했던 조선 후기 사군자와도 차이가 있다. 강인한 기세나 고아한 품격보다는 시적 흥취와 감각적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은 김홍도 개인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18세기 말의 시대적 지향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해례본에 담았고, 훈민정음을 함께 만든 신하들은 자음과 모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처음 만들어진 한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해례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국보 70호
전시물에 집중하는 회원님들!
조선후기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작품에 대한 노성태 원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회원님들!!
이상화 고택(古宅)-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한때 일본에 유학했고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동인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고 의열단 관련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초기의 시에서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과 도전이 드러난다. 1925년과 1926년은 작품 활동의 절정기로 작품의 3분의 2를 발표한다. 이 중에서도 1926년에 <개벽70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작가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나라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식민지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주된 흐름으로 하고 있다.
대구 계산동(桂山洞)성당-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에 주교좌(主敎座)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히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 2개를 대칭 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조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구 3·1운동길-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곳이 바로 그 현장이다. 계단이 90개라 '90계단'이라고도 불린다. 계단 옆에는 당시 현장과 생활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다.
대구 3·1운동길에서 그날의 함성을 느껴보다...
청라언덕에서 가곡 '동무생각'을 합창하다...청라(靑蘿)라는 이름의 유래는 언덕 위 선교사 주택들의 벽면에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어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 '푸른 담쟁이 덩굴'이란 뜻의 청라언덕이라 불리게 되었다. '동무생각'은 대구가 고향인 작곡가 박태준(朴泰俊-1901~1986)이 곡을 짓고 노산(鴑山) 이은상(李銀相-1903~1982)이 노랫말을 붙인 가곡이다. 청라언덕에는 선교사 주택, 3·1운동기념계단, 대구제일교회 등이 위치해 있고, 각종 근대건축물의 밀집지역이다.
선교사 블레어 주택
선교박물관(선교사 마사 스윗즈 주택)
대구감옥(형무소)에서 순국한 광주·전남인 독립운동가는 45명이나 된다. 45명은 대구감옥 독립운동자 순국자 206명의 21.8%에 해당한다.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45명 중 43명은 1908년~1912에 순국한 한말 의병(장)들이고, 나머지 두 분은 3·1운동과 관련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된 후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한 경우다. 왜 광주·전남의 독립운동가들은 광주 감옥이 아닌 대구 감옥에서 45명이나 순국했을까? 이는 당시의 사법제도와 관련이 깊다. 대구 복심법원(현 고등법원)의 관할 구역이 경상도뿐만 아닌 전라도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노성태원장의 설명중에서....)
대구형무소는 일제강점기 서울 서대문, 평양 형무소와 함께 ‘3대 감옥’으로 불렸다. 1907년 대구감옥서, 1908년 대구감옥, 1923년 대구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구형무소에는 영남권은 물론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까지 한강 이남 대부분의 형사 피고인들이 수감됐다. 당시 1만244㎡(약 3099평) 규모로 조성된 대구형무소는 증축을 거듭해 2만5785㎡(약 7800평)으로 커졌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5000여명이 수용되기도 했다. 정부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애국지사 가운데 이곳에서 옥고를 치른 이들만 2386명에 이른다.
대구감옥(형무소)에서 순국한 애국지사들에 대한 묵념!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광주·전남인은 45명이다. 추후 더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 45명 중 43명이 의병(장)이다.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심남일·안규홍·오성술·김원국이 있으며,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도 있다. 일제가 이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내란, 폭동, 강도살인 및 방화, 모살(謀殺) 등이었다. 지역별로는 함평이 심남일 등 8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 등 7명인 광주다. 보성이 안규홍 등 6명, 나주가 조정인 등 5명이다. 이는 함평·광주·보성·나주가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였음과 관련이 있다.(자료집에서..)
이육사(李陸史-1904~1944)는 일제강점기의 문학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이활(李活)이다. 이원록(李源祿)으로도 불리운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어 받은 수인번호(囚人番號) '264'의 음을 따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독립운동활동을 보면 의열단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을 졸업 (1931년~1933년)하였고,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3년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喪)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후,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 및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뚱(東廠胡同, 일제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女)가 시신을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대구감옥(형무소) 역사관에서 수감된 독립운동가에 대해 설명하는 이건상 연구실장
김광석거리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회원님들....
"길영Cafe"에서의 차(茶)시간
나도 한때는 양말좀 빵꾸(?)냈지 ㅋㅋ ㅋ
"님을위한 행진곡"으로 답사를 마무리하며....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편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선생님들! 멋집니다^^
첫댓글 답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가지 못하신 분들께도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역사기행과 여행의 기쁨이 선생님 덕분에 배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