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
이지은
언니, [경찰관 속으로]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나 너무 힘들었어. 문장마다 전부 나의 얘기더라.
내 끔찍했던 회사 생활이 떠올라서 몇 번이나 독서를 포기하고 싶었어. 그래서 언니, 우울한 얘기를 좀 풀어 놓을게. 알잖아,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한테 하기 어려운 거. 그러니깐 좀 참고 읽어줘.
동료들끼리 자주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어. “우리는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민원인들이 화풀이를 우리에게 한다고. ‘정말 인간이 싫다. 싫다 못해 질려버렸어.’ 라고 작가는 고백하는데, 나는 8년간 이 일을 하면서 정말 사람이라면 징글징글해. 환멸을 느낄 정도야. 그래서 퇴근 후에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었어. 주말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싫어 집에만 콕 박혀 있었고, 여행도 되도록 한국인을 거의 만날 일이 없는 곳만 찾아서 다녔어. 그래야만 좀 살 것 같았거든.
징수팀에서 일했어. 징수라 하면 말 그대로 돈을 걷는 일. 체납된 금액을 압류 등의 강제 조치로 걷어야 하는 것이 우리 팀의 주 업무야. 몇백 건의 은행 압류를 보낸 다음 날은 아침 9시부터 전화가 몰아쳐. 아침 9시부터 다짜고짜 “계좌 압류 문자를 봤다. 뭐냐!”라고, 큰소리치는 이들이 대부분. 매달 고지서가 나갔을 것이고, 체납 안내 문자 및 우편물도 최소 6개월은 넘게 나갔을 텐데 전혀 몰랐다는 거야. 몰랐다는 그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할 말이 없어. 고지서나 우편물은 확인조차 하지 않으면서 무얼 바라는 걸까? 오히려 먼저 전화주셔서 까먹고 내지 못했다면서 가상계좌를 달라는 민원 분들한테 고마운 마음마저 들어. 당연한 사실인데, 오히려 내가 황송한 마음이 드는 이 아이러니는 뭘까.
상식과 비상식, 몰상식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있다 보면 나조차도 인간성이 상실됨을 느껴. 너무 힘들다고 전화로 우시는 분들이 처음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이 또한 이 순간만을 면하기 위한 쇼라는 걸 이제는 너무나 잘 알지. 그래서 이제는 눈물을 흘리시면 오히려 나는 더 정색하게 된다. 그러게, 진작 좀 챙기시지. 압류 전에 전화라고 한 통 하시지. 아무것도 안 하다가 이제 와서 눈물을 흘리면 도저히 어쩌라는 건지. 답답하기만 해.
때로는 진정하라는 내 요청에도 고성과 쌍욕을 지르는 민원인 전화를 끊지 못해 수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 업무를 보기도 해. 물론 전화기 너머로 그의 고함은 아주 잘 들리긴 하지만, 그렇게 물리적인 거리라도 두어야 내가 살 것 같기에.
“지금 내가 돈이 없는데 그러면 나보고 죽으라는 거죠? 유서 쓰고 죽으면 되는 거죠?”라는 협박을 출근부터 퇴근까지 하루 8시간 듣는 나의 삶.
참다 참다 나도 한마디 하면 싹수가 없다며, 너 이름 뭐냐. 거기 높은 사람 당장 바꾸라고 해. 이건 모든 악성 민원의 단골 멘트야. 어쩜.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게 무슨 큰 무기라도 되는 양, 본인이 이제까지 나에게 한 행태는 까먹은 채, 내 대답 한마디를 물어뜯어.
왜 그럴까. 왜 서로가 서로한테 ‘갑질’을 하지 못한 야단일까? 본인이 다른 곳에서 받은 갑질을 이렇게 나한테 푸는 걸까? 처음에는 이런 생각들을 했었지.
“너희가 무슨 사채업자냐? 사채업자보다 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괴감까지 생겨.
왜 난 누굴 위해, 아니 무엇을 위해 징수를 해야 하며,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나 처음 입사하고 수습 기간에 있었던 일이야. 나 바로 민원실 배치되었던 거 말했던가? 민원실은 다들 기피하는 곳이라 신입이나 타 지사에서 이제 막 발령 난 사람들이 배치된 곳이야. 여기가 순환 근무 체계지만, 민원실은 최대 1년 이상 하지 않아. 왜 그런지 알아? 1년 이상 되면 천사 같은 사람도 악마로 변하는 곳이라고 다들 여기거든. 말단 직원부터 저 위에 계신 분들까지도 민원실 근무는 최대 1년이라는 걸 불문율처럼 여기지. 물론, 그 전에 다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민원실 탈출을 도모하지만 말이야.
암튼, 막 입사한 내 책상에 ‘옆 창구를 이용해 주세요.’라는 팻말을 붙이고, 옆에 계신 과장님 자리에서 업무를 배우고 있는 나에게 “왜 일도 할 줄 모르는 애를 여기에다가 데려놓았어!”라고 윽박질도 당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아니야. 오히려 더 잘 뱉더라. 웃는 얼굴이 더 민원인을 열받게 한다는 걸 알고 나는 무표정을 온종일 유지하고자 노력했어. 복잡한 업무 내용에 한숨을 쉬고 일을 해결하고 있는데, 지금 본인 일 처리 하면서 한숨을 쉬는 거냐고 화를 내는 사람한테 죄송하고 했어. 한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내 팔자가 너무 하찮게 느껴졌어. 습관처럼 볼펜을 손으로 굴렸더니 지금 내 업무하면서 장난이나 하고 앉아 있냐고 하더라. 사사건건 다 트집 거지인 거지.
이런 욕지거리나 먹자고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 갔나. 이런 죄책감과 허무감을 나를 집어삼켰다. 경우 없는 민원인에게 목소리를 당당히 내던 나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어. 되받아칠 기력조차 없어서 험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그 기운이 그냥 내 몸으로 받아들였어. 그렇게 내가 나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하는 시간은 결국 나 자신이 만신창이가 돼서야 일단락이 되더라.
언니, 나는 아직 병으로 인해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어. 아직도 이렇게 회사 관련된 일이 생각나거나 길거리에서 큰소리만 나도 여전히 내 몸은 격렬히 반응해. 그리고 다시 내 마음과 몸은 무너져 내려. 이 작가처럼 나는 아직 맞설 용기가 없어서 백기 들고, 항복이야. 더 일어날 수가 없고 사실 일어나야 할 이유도 모르겠어.
이 모든 일이 과연 나와 이 작가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경찰관, 소방관, 공무원 등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은행에 일하는 은행원분들, 자영업자분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 각 기업의 콜센터 직원분들 등.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해.
언니, 서로가 좀 더 다정하길 바라는 건 무리일까.
첫댓글 아! 지은님!!! 엄청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는 것이 글에서 충분히 느껴집니다. [경찰관속으로]를 읽을 때처럼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위의 책을 쓰신 작가가 다른 직업의 이야기를 쓰신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다른 버전의 책을 읽는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지은님께서도 이 책을 통해 자기가 겪은 직업적 딜레마를 풀어 주셔서 고통스러움을 짐작하게 됩니다.
독서와 쓰기, 합평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치유되는 시간이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부지런하신 지은님! 힘든 글 풀어 내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도 연필을 감고, 과제글 다듬어야 겠습니다. 월요일에 뵐게요~ 감사합니다~
조금 더 단단해지는 과정입니다. 무조건 친절함의 일관됨이 정상이라는 비정상이 사회가 누구에겐
병들고 힘든 세월을 담보합니다. 솔직한 글 입니다. 이 또한 지나갑니다.
막말 민원인 분들에게 왜 내가 상처를 받아야 하나 하는 강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동일한 환경에서 일해본 사람으로 백 이십 프로 공감하고 토닥이고 싶습니다.
을박질을 갑질로 표현해도 좋을 듯 합니다.
대민원의 시대라 대민 접점에 있는 분들의 어려움에 공감이 갑니다.
조금씩 변하는 것 같긴 한데, 그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네요. 강약약강의 태도도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