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금요일) 맑음 무겁던 우리의 발걸음은 배리에 도착하여 그곳 실협 회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가벼워졌다. 배리 실협(회장 김영건) 회원들은 도시 입구의 맥도날드(Mcdonald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나와 아는 사이였고 친절히 대해주어 토론토를 떠났지만 아직까지도 고향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30여 교민들과 함께 시청까지 행진하여 간단한 기념 행사를 치룬 뒤 그곳 한인 식당에서 때늦은 점심을 마치고 다음도시 오릴리아(Orillia)로 출발하였다. 오릴리아 10km 전방의 관공서 주차장에 캠퍼를 세우고 저녁을 짓던 중 토론토 햄클럽 회장 이하용씨가 우리 캠퍼에 설치하라고 무선 장비를 가지고 왔다. 아마츄어 무선사 자격증이 있는 장승민씨가 우리 모금 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자비를 들여 주문해 준 것이었다. 이하용씨는 밤늦게까지 장비 설치를 마치고 토론토로 돌아갔고 장승민씨는 원하던 장비를 얻은 기쁨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했다. 7월 12일(토요일)맑음 우리가 가고 있는 길에서 5km쯤 옆길로 빠져 들어간 오릴리아의 시청을 방문하였다. 우리를 환영하며 맞아 준 시의원은 올 가을 바자행사때 북한돕기 모금 행사를 벌이도록 건의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오늘은 이곳 휴로니아(Huronia) 실협에서 회원들이 나와 함께 걸어 주었다. 특히 몇 년 전 북한에 있는 형제를 방문하고 돌아온 김근철씨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이 장거리를걸으며 나의 대륙횡단 성공을 빌어 주었다. 우리가 지나가는 교외의 도로부근에서 햄버거 식당을 경영하는 한 회원은 점심동안의 판매대금 전액을 성금으로 내놓았다. 해질 무렵에는 한국에서 오셨다는 목사님 한 분이 우리를 찿아와 500불을 성금으로 내었다. 오늘은 천여불이 걷혔다. 정부에서 받게 될 지원금까지 계산하면 5000불이 넘는 모금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 돈으로 곡식을 사서 북한주민에 전달하게 될 날을 생각해 보았다. 낮동안 겪었던 더위에 힘들었던 기억들이 얼음처럼 녹아 없어졌다. 그레이븐 허스트(Graven Hurst)에 도착, 김근철씨의 연락을 받고 우리를 기다리던 교민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분들 역시 우리를 위하여 정성을 다한 식탁을 마련하여 주었다. 교민이 없는 이런 곳에서 외롭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낚시하는 재미로 세월을 보낸다고 했다. 7월 13일(일요일) 아침 10시 경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근처의 침례 교회를 찿았다. 예배 후 12시경 우리는 169번 도로를 따라 페리사운드(Perry Sound-관광명소, 삼만섬이 있는 도시)로 향했다. 다시 생소해지는 풍경과 도시를 향하여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169번 하이웨이로 들어서자 포장된 노견(Shoulder)이 전혀 없어서 모래와 자갈이 덮여 있는 경사진 비포장노견을 걸어야 했다. 더우기 몇 Km씩 공사를 하는 구간을 지날 땐 차량들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흙먼지에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캠퍼를 앞으로 보내 미리 정차할 곳을 찾도록 했다. 이후부터 밴쿠버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캠퍼와 3km에서10Km씩 떨어져 걸어야했다. 힘들고 지친 날에는 더욱 자동차를 전방으로 멀리 보내어 걸었다.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캠퍼에 도착해야만 쉴 수 있고 식사할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캠퍼까지 걸을 수 밖에 없도록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그야말로 군에 입대하여 처음 받았던 논산훈련소 훈련과 군기 엄하던 내무반 생활, 일년에 한번씩 받았던 유격훈련 그 모든 것을 합친 것과 같이 힘들고 긴장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끊임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매일 전장에 나가는 병사와 같은 비장한 각오가 아니면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힘든 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산길에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곤 했지만 그때마다 요지부동의 결심이 앞을 향하여 나를 밀어 부치고 있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굶주리고 있는 북한동포들이 배고픔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내하리라. 69번 하이웨이는 지금 생각해도 악몽 같은 곳이었다. 해질 무렵 우리는 발라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은 여름 휴양지로서 댐이 있는 큰 강이 흐르고 주위의 전경이 수려해 나도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매년 찿아 오는 아름다운 곳이다. 댐의 공터에 주차하고 저녁 준비를 하던 중 배리와 오릴리아에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로 수고해 주셨던 김근철씨가 두 아들과 함께 우리를 찾아 왔다. 대학교 졸업반이던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도 들려줄 겸 저녁 시간에 맞추어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하고자 오신 것이었다. 근처의 호숫가 작은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식당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꼭 대륙 횡단 후 한국에 가서 남북 종단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빈다며 북한의 형제들을 그리는 듯 창 밖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식사 후 경찰서 주차장에 캠퍼를 세웠다. 경찰서 주차장에 가면 전기(캠퍼에는 전기를 꽂아 사용할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다.)와 식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가인데도 차안에는 통풍이 안되어 더위로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그래도 낮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북한을 돕기위해 내어 준 성금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잠을 청하였다. 7월 14일(월요일) 맑음 아침에 발라(Bala)를 떠나 북상했다. 점점 인가가 적어지고 울창한 숲과 호수로 이어지는 온타리오주의 전형적인 자연이 펼쳐졌다. 아침 안개가 호수 위에서 피어오르며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뜨면서 무더워지기 시작하고 정오 지나서는 아스팔트의 복사열로 인하여 온몸이 땀으로 젖어 갔다. 어제 저녁 잠을 설친 탓으로 몸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저녁 무렵 삼만 섬 관광지로 유명한 페리 싸운드(Perry Sound)에 도착하였다. 도시 입구에서 나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대륙횡단 고속 도로는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외곽으로 나있어 시내로 진입하는 길과 갈라지게 되어 있으므로 이곳에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면 당연히 시내를 통과해야만 하나 시내를 통과하면서 행인들과의 대화, 교통신호등 등의 장애로 인해 더욱 힘들어 질 것을 생각하니 오늘처럼 지치고 힘든 날이면 망설여지기가 일수였다. 망설임 끝에 우리는 시내로 향했다. 캠퍼가 비상등을 켠 채 나의 뒤에서 에스코트하며 시내로 들어서자 지나가는 차량들이 격려의 경적을 울려 주었고 지나가던 초등 학생들이 나의 뒤를 따르며 동행해주었다. 나의 대륙 횡단 모금에 관하여 들은 그들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1불, 2불 또는 25센트를 꺼내어 북한어린이 돕기에 써 달라고 나에게 내밀었다.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오직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돈을 내미는 그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이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그들이 내민 것이 그 아이들이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던 돈 전부임을 안 내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한 아이는 너무 적어서 그러냐며 좀 기다리면 집에 가서 더 가지고 오겠다고 하여 만류하고 7불쯤 되는 그 돈을 모금함에 넣었다. 이 돈의 4배를 정부로부터 받게되면 35달러가 되니 이 아이들이 북한의 굶고 있는 한 가구에게 한달 식량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낮에 뱅쿠버에 간다는 한국인 여행객을 포함, 여러 사람으로부터 100여 불이 모금함에 넣어졌다. 액수는 적었지만 이 성금들이야말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고귀한 돈들이다. 부자의 은행 구좌에 있는 수백만 달러보다도 값진 돈이라고 믿는다. 도시의 경계 지점에서 그 아이들과 작별을 하고 우리는 조그만 모텔에 방을 구했다. 더위로 인해 차안에서는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에어콘이 있는 시원한 방에서 잠을 청했다. 7월 15일(흐린 후 맑음) 화요일 새벽 빗소리에 잠을 깨었다. 오늘은 캠퍼의 지붕에 설치된 고장난 에어콘을 고치고 떠나기로 하였다. 날씨가 더워 운전을 맡은 미스터 장의 고생이 심했다. 나야 걷는데 정신을 집중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지만 고속도로 옆에 주차하고 더위 속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그의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에어콘 수리 센터로 가기위해 지나온 길을 50여 Km나 다시 돌아가야 했다. 앞으로 200km거리의 서드버리(Sudbury)까지 도시가 없으므로 여기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페리 싸운드로부터 20여 Km 쯤 북상했을 때 앞서 가 있던 장승민씨로부터 무전 연락이 왔다. 캠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불길한 소식이었다. 서둘러 도착하여 점검해 보니 자동트랜스미션의 고장이었다. 도시를 지날 때마다 저속으로 주행을 하여 마모가 심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 한적한 산중 어디에 가서 차량을 고쳐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대형 견인 차량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견인비용도 그렇고 수리비 또한 많이 들것으로 예상되었다. 우리가 가진 돈이라곤 식료품 비로 현찰 천불, 연료비용으로 준비한 잔액 2천 불의 비자카드 뿐, 이 전 재산으로 뱅쿠버까지 가야 한다. 고치는 데는 며칠이 걸릴까? 예정상 지체할 시간 또한 없었다. 사실 출발 시 5개월간의 횡단 일정을 잡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4개월로 줄였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 여유가 없는 터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조금 전 지나오며 보았던 산 속의 대형 건설장비가 있는 큰 건물이 생각이 나서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건설장비 및 대형 트레일러 수리소(Hazardous Repair Center)였다. 집도 없는 이런 산중에 이런 시설이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더군나 나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주인 론(Ron)은 나의 모금횡단에 관해 TV에서 보았다며 모든 수리비용을 원가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트랜스미션을 떼어내 200여Km 남쪽 오릴리아의 수리소로 보냈는데 약 삼일간의 수리 기간이 필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궁리 끝에 그곳에 살고 있는 김근철씨에게 연락하여 조속한 조치를 부탁하였다. 그는 수리소에 찿아가 밤 동안 수리해줄 것을 부탁, 다음날 정오 경 트랜스 미션을 가지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연락해 주었다. 나와 장승민씨는 수리소 안에 세워둔 고장난 차 속에서 캠퍼의 다른 고장난 부분들을 수리하며 그날을 보냈다. 7월 16일(수요일) 맑음. 아침 일찍 나는 김밥 두개와 물 두 병을 배낭에 넣어 캠퍼와 미스터 장을 남겨두고 홀로 북상을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간간이 부는 바람은 흐르는 땀을 식혀 주기에 충분했다. 점심때가 지나 가지고온 물과 음식이 떨어지고 목이 매우 마를 즈음 인디안 보호구역내의 한 수퍼에 도착하였다. 허름한 수퍼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서 있던 퉁퉁한 인디언이 나의 가슴에 붙어있던 “캐나다횡단” “할리팍스부터 뱅쿠버 까지”라고 쓰여진 사인을 보고 갑자기 친절을 베풀었다. 수퍼안에 있던 다른 인디언들도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우리가 모두 한 몽골리안 핏줄이라는 것을 나의 모습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음료수를 마시고 가게를 나오려는데 그들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권했다. 좋은 인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토록 오랫동안 조상 대대로 내려오며 살던 땅에서 밀려나 이런 산 속에 갇혀 살게 되버린 그들의 처지에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의 영토 입구에 세워진 훠스트 내이션(First Nation)이라고 써놓은 표지판에선 아직까지도 꺾이지 않는 그들의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회복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온타리오주는 호수의 천국이다. 크고 작은 것을 모두 합치면 수만 개의 호수가 있다. 지표가 암반으로 이루어져 높낮이에 상관없이 물만 있으면 호수를 만들고 그것들이 연결되어 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도시를 떠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의 별장들이(Cattage)들이 호숫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얼마나 걸어 왔을까? 해가 서산마루에 가까워지는데 수리를 마친 차량은 나타나질 않는다. 어림잡아 60km정도는 지나온 것 같았다. 무전기는 너무 멀리 떨어져 통화가 안되고 겨우 공중전화를 찿아 수리소의 장승민씨와 통화를 했으나 아직도 수리중이라며 완료 되는대로 출발하겠다는 대답뿐이었다. 허기에 지친 나는 길옆의 간이 식당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대신하고 석양의 고속도로 옆에서 캠퍼를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모기떼의 습격이 격렬해졌다. 모기를 피해 불빛이 있는 밝은 곳으로 찿아 갔다. 시골 파출소였다. 그곳에서도 모기의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파출소 마당을 돌며 뛰었다. 그러기를 서너 시간, 무전기에서 미스터 장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전이 되는 걸 보니 그가 가까이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온 몸에 기름칠을 한 채 장승민씨가 도착하였다. 경찰서에 들어가 근무 중이던 경찰관(Officer)에게 허가를 얻어 캠퍼에 전기를 연결하고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대신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모기에 물려 몸 여기저기가 두드러기처럼 솟아올랐고 가려움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하루만에 차를 빨리 고칠 수 있게 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수백 km를 달려와 트랜스 미숀을 전달해준 김근철씨의 헌신을 또한 잊을 수 없다 7월 17일(목요일) 비온 후 맑음 어제 묵었던 길옆의 조그마한 마을을 지나자 사람의 흔적은 점점 더 드물어졌다. 대부분 평지였던 도로가 끝나고 굴곡이 커지며 산중으로 접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는 새로운 손님들이 있었다. 블랙 플라이(Black Fly)라는 파리가 하루종일 나의 주위를 맴돌며 공격해 왔다. 나는 파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두 팔을 휘두르며 뜨거운 아스팔트위를 땀을 흘리며 걸어야 했다. 오후에는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 오더니 급기야 비를 쏟아 부었다. 때 마침 앞에 갔던 미 캠퍼가 되돌아와 차안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비가 그치자 캠퍼는 떠나고 나는 비로 인해 열기가 가신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시간쯤 지나서 다시 순식간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져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나가는 대형 차량이 뿌려대는 물보라로 전진이 힘들었다. 반시간 정도 비가 내린 후 구름이 걷히며 다시 뜨겁게 햇빛이 쏟아졌다. 거기다 차선은 왕복 일 차선으로 변하면서 차도 외에는 여분의 길이 없어 자갈이 깔린 비탈길을 걸어야했다. 말로만 듣던 진퇴 양난이 이런 것이었다. 축지법이라도 써서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뿐이었다. 저녁이 되자 서드버리(Sudbury)시가 30Km 정도 남은 길가의 주유소 옆 공터에 캠퍼를 세우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한밤중이 되어서 그곳이 화물차의 간이 집합소인 것을 알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들은 잠을 자면서 밤새 트럭의 시동을 걸어놓아 사방에서 들려오는 엔진소리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7월 18일(금요일) 흐린 후 맑음 엊그제 차량을 고친 후에도 여전히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장승민씨의 말에 따라 아침에 서드버리의 훠드(Ford)딜러에 수리을 위해 캠퍼를 먼저 보내고 나는 또다시 김밥 두 개와 물 한 병을 갖고 길을 떠났다. 오후 2시경 약속 장소인 서드버리 입구에 도착하였으나 캠퍼는 보이지 않았다. 길옆 약속장소에서 한시간을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질 않았다. 김밥 두 개와 물은 먹어버린 지 오래였고 주위에는 무엇을 사 먹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그 도시에는 들르지 않으려 했던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캠퍼를 찿아 시내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반쯤 갔을까? 무전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반가웠다. 오후 네시 경 늦은 점심식사 후 다시 17번 대륙 횡단 도로에 합류하였다. 나는 서쪽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 있는 왕복 4차선 도로를 보자 반가움마저 들었다. 캐나다 수도 오따와를 지나 토론토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17번 대륙 횡단 도로와 이별 한 후 20여일 만에 토톤토를 돌아 올라와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의 대륙 횡단 거리는 약 800km가 늘어나게 되었다. 서드버리의 신문과 TV에서 우리를 찿아와 모금 횡단에 대하여 취재를 하였다. 래리(Larry) 라는 TV 앵커는 대륙 횡단 중 가장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취재해 주었던 언론인으로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는 3시간동안 도로 위에서 우리를 찿아 헤매었다고 했다. 캠퍼가 수리소에 가 있어혼자 걷고 있던 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저녁 뉴스에서 우리들의 일정이 성공리에 끝나기를 빈다는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17번 대륙 횡단 도로에 들어서자 이제까지의 도로에서와는 달리 캠퍼를 주차시킬 장소가 없었다. 오늘의 마지막 구간에서 인터뷰와 차량 수리로 인해 예상거리를 걷지 못한 나는 장승민씨에게 10km전방에 잠자리를 알아보도록 부탁했다. 그는 떠나고 나는 길을 재촉했으나 장거리를 걸은 후 걷는 저녁때의 1km는 아침에 걷는 2-3km보다 힘들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약 30cm정도의 포장된 노견이 있어 그나마 걷기가 수월했으나 이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까지 경사진 노면에서 적응이 되도록 오른쪽 다리가 약간 길어지고 굵어 졌는데 17번 하이웨이는 노견에 경사가 없어 반대로 몸무게가 쏠리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왼발이 아프기 시작했다. 아픈 발을 절룩이며 와잇 휘쉬(white fish)라는 마을까지 12km를 걷던 그날의 기억은 지울 수가 없다. 캠퍼는 적당한 주차 장소를 찾지 못하고 도로 옆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우리는 차량의 소음을 피해 무작정 산 속으로 들어가다 빈터를 발견하고 캠퍼를 세웠다. 휘영청 달이 밝게 떠 있는 밤 하늘아래서 쏟아 질 것 같은 별을 세며 잠을 청했다. 다시 왼쪽 다리가 아파 왔다. 7월 19일(토요일)맑음 길옆의 산자락에는 잎이 활짝 핀 고사리들이 바람에 잎을 흔들며 나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나를 괴롭히는 왼쪽 발의 고통으로 인해 나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해질 무렵 잠자리를 찿기 위해 먼저 갔던 캠퍼로부터 좋은 장소를 찿았다는 무전 연락이 왔다. 사실 저녁이 되면 지칠 대로 지쳐 잠자리 구했다는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한참 후 도착한 곳은 길가 양옆으로 고사리 숲이 한키만큼이나 자라있는 휴양지처럼 꾸며진 조그만 마을이었다. 우리의 캠퍼는 어느 집 앞에 서있었고 한 서양 할머니와 장승민씨가 의아해 하는 나를 활짝 웃으며 맞이해 줬다. 그는 잠자리를 찿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던 중 마리아라는 할머니가 우리 캠퍼를 알아보고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여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벌써 커피를 얻어 마시고 할머니와 친해져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차려놓은 저녁 식탁으로 안내하며 우리에게 식사를 권했다. 팔순이 다 된 마리아는 잘 구어진 빵과 치즈, 손수 담았다는 피클(Pickle) 등을 내왔다. 50여 년 전에 폴란드에서 이민왔다는 할머니는 우리를 오랜만에 찿아 온 자기의 손자인 냥 대접했다. 식사 후에는 이미 사별한 남편과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 줬다. 오랜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빨래까지 끝내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밤 10시경 한국일보 김운영 부사장일행이 토론토에서 800km를 운전하여 우리를 찿아 왔다. 그는 보급품과 토론토 소식을 전하고 취재 후 자정쯤 모텔을 찿아 떠났다. 이 무렵(약 3000km를 걸은 후)더위와 왼쪽 발의 고통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몰골이 말이 아니던 나에게 보급품으로 온 밑반찬은 은 더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7월 20일(일요일)흐리고 비 주일 아침 교회에 가기 위해 할머니의 큰딸이 우리를 픽업(Pickup) 하기로 약속까지 했으나 캠퍼의 고장으로 인해 갈 수가 없었다. 시동이 걸리질 않았다. 고장은 이미 알고 있던 연료 계통의 여과기에 있었다. 마침 우리의 소식을 듣고 찿아 온 키스(Kieth)라는 그녀의 사위는 사방에 수소문하여 유사부품을 구입, 고무호스로 연결하여 아주 쉽게 고쳐 주었다. 우리는 이제까지 순정품 만을 찿느라 시간을 보냈으나 오래된 대형차라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내가 그때까지 생각하지 못한 한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상황에 맞게 항상 융통성있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고마움에 약간의 사례를 주자 그는 무슨 소리냐며 받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온 정수기를 하나 주었다. 여름에는 지붕수리를 해주고 가을부터는 사냥을 다닌다는 전문 사냥꾼인 그는 지금까지 3마리의 곰과 소정도 크기의 사슴종류인 무스(Moose) 30여 마리, 그리고 수백 여 마리의 사슴과 여우등을 잡았다고 했다. 사냥에 따라가고 싶으면 추수감사절 무렵 자기를 찿아 오라고 했다. 점심때 어디서 우리의 소식을 듣고 왔는지 한 그룹의 고등 학생들이 찾아와 성금을 내며 우리의 싸인을 받아 갔다. 수리 후 마리아 할머니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길을 재촉했다. 차려놓은 점심을 내가 시간 관계상 거절하고 떠난 것 때문에 마리아 할머니가 너무 서운해하더라는 장승민씨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안좋았다. 마리아 할머니가 살던 매시(Massy)마을을 지나자 다시 산길이 시작되었다. 한참 산중을 걷고 있는데 오래된 구형 대형 승용차가 내 옆에 다가와 섰다. 돌아다보니 두명의 인디언 할머니가 타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오 불 짜리 지폐를 나에게 내밀며 걷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므로 그들을 돕고자 모금하며 가고 있다고 대답하자 다시 오 불을 더 주머니에서 꺼내 주고는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아마도 첩첩 산중의 어느 산중턱에서 걷고있는 나를 보고 있다가 궁금하여 쫓아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저녁에는 공원 한옆에 잠자리를 잡고 있던 우리에게 한인들이 없는 줄로 알았던 엘리옷(Elliot)에서 한 교민이 푸짐한 음식과 성금을 가지고 왔다.. TV를 통해 우리의 소식을 듣고 무작정 우리를 찿아 나선 끝에 다행히 우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왼 쪽 발의 고통이 점점 심해져 또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번에는 왼쪽 종아리 옆 근육이 굳어지는 증세(Shin Sprint)였다. 이러다 이상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큰 도시에 가야 병원이 있으니 100km떨어진 수셋마리(Sault Ste. Marie) 까지는 가야 의사의 진단을 받을 수 있다. 그때까지 참고 걷는 길밖에 없었다. 7월 21일(월요일) 흐림 어제까지 찌는 듯 하던 더위가 오늘은 좀 수그러졌다. 길은 강을 따라 함께 구불구불 나 있었다. 강물에 뛰어들어 물장구라도 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갈 길이 멀어 그럴 여유가 없다. 도로사정으로 캠퍼가 휴식지를 자꾸 멀리 잡다보니 무리가 따르고 왼발의 증상은 급격히 악화되어갔다. 걸은 거리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간을 보면 거의 정확한 거리가 계산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한 거리에 캠퍼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걸어갈 용기가 나질 않는다. 거리계산을 하며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다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걷다가 약속한 거리에 캠퍼가 없으면 갑자기 걷기가 지루해지고 힘이 빠진다. 지금 현재의 나는 오로지 가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러다 약간만 더 무리를 한다거나 이상이 생기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인간의 육체를 이런 거리를 가도록 설계하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용도 변경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나의 좀 고집스러운 주문이기는 하나 8km전방에 정차를 주문하면 그 지역의 +- 1km이내에 정차해 주면 되는데 그 범위가 프러스 쪽으로 넘으면 이런 장황한 불평이 생긴다. 아마 나는 거리를 주문하면서 그만큼만 갈 마음의 자세를 준비하는 지도 모른다. 거리 문제로 인해 미스터 장과 자꾸 마찰이 빚어졌다. 미스터 장은 도로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주문한 거리보다 좀 더 멀리 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나의 좁은 생각으로는 그래도 사람보다는 기계가 움직이는게 더 쉬울 텐데 꼭 그렇게 멀리 세워야 하나 싶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힘들어 보이는 나를 위로 하고자 그는 무전으로 어린아이처럼 농담을 걸어왔다. 무료해 하는 그의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사실 하루 50km이상 걸은 후엔 정말 입을 벌려 이야기 할 힘조차 없다. 그런데 내가 대꾸를 안하면 그는 내가 자기에 대한 무관심하거나 화가 난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 둘의 관계는 더욱 불편해 지곤 했다. 해질 무렵 앞서 간 그로부터 길옆 농가에 잠자리를 정했다는 무전이 왔다. 도착해 보니 산중에 하나밖에 없는 외딴 집이었다. 주인은 벌써 술에 거나히 취해 있었다. 아내는 가출하여 없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와 여름 방학동안 토론토에서 방문 왔다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었다. 내가 나타났을 때. 아이들은 네 발 달린 MTV(Multi Terrain Vehicle)를 타고 키가 무릎만큼이나 자란 풀숲을 이리저리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니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시골 생각이 떠올라 삼십 여 년 전의 나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시골 아이들의 순수함이 물씬 느껴졌다. 우리는 비디오 카메라와 사진기로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열심히 찍어 대었다. 7월 22일(화요일) 맑음 오늘도 강 옆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 이어졌다. 강가의 아침은 참으로 상쾌하다. 이곳처럼 공해라고는 찿아 볼 수 없는 대자연의 한 가운데에서는 나의 존재조차 망각하게 된다. 그저 나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아침 햇살이 나의 그림자를 키의 이분의 일 정도로 줄여 놓았을 무렵 문득 앞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조깅옷 차림으로 내 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인가가 없는 이곳에서 웬 사람이, 더군다나 이 아침에 뛰고 있을까? 혹시 나처럼 대륙횡단을 하고 있는 중일까. 나의 궁금증은 그녀가 나의 앞에 멈추어 섰을 때 풀릴 수 있었다. 나타샤(Natasha)라는 그녀는 한달 전 킹스톤(Kingston)을 지날 때 TV에서 우리를 보았다고 했다. 지금 뱅쿠버로 이사하는 중에 다시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를 응원하기 위해 저 앞에 차를 세우고 뛰어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와 함께 2km 정도를 걸어 자기 차에 도착한 후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젊은 여자가 혼자 오천km의 길을 이웃집 가듯 운전하여가는 모습에서 그들이 가진 대륙인의 기질을 엿 볼 수 있었다. 오후에 미시사가라는 인디안 보호구역을 지나고 있었는데 길 반대편에 차 한 대가 멈추어 서더니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하고 웬 서양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마크(Mark)라는 그 청년이 다가 오더니 자기 소개를 했다. 그는 주한 카나다 대사관에 십여년 근무 한일이 있는 외교관이었다. 록키를 여행하고 돌아오던 중 나와 캠퍼를 보고 가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다. 그는 기운 내라는 말과 함께 이십 불을 나에게 주고는 오던 길로 다시 떠났다. 20불을 주기 위해 가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다. 계속 가다보니 평지가 나오고 대륙 횡단 도로와 철도가 평행으로 나란히 뻗어나 있었다. 지나가던 기차(대부분 화물차)의 기관사들이 손을 흔들며 길게 경적을 울려 주었다. 그 경적 소리는 나의 마음을 후련하게 씻어 주었다. 기관차의 경적과 대형 수송차량들의 경적은 고요한 자연의 적막에 젖어 무료히 걷고 있는 나에게 일종의 청량제와 같은 작용을 해주었다. 또한 정기노선 화물운송트럭은 나의 곁을 지날 때 꼭 경적을 울려주었다. 정기 노선이기 때문에 나와 하루에도 몇 번씩 조우하며 자연히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루스(Bruce Mine) 마인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서쪽으로 4km 쯤 떨어진 농가를 잠자리로 정했다. 도로에서 1km 쯤 들어간 곳에 있는 농가에 내가 도착하였을 때 장승민씨는 주인 집 세 딸들과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마당에서 농기계를 고치는 중이던 주인집 아낙과 할아버지, 이웃집사람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이곳에서 사십 여 년을 살면서 목축업을 하고 있다는 농가였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많은지 나에게 연신 질문을 퍼부어 댔으나 피로에 지친 나는 샤워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캠퍼에 들어와 우선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샤워를 했다. 그사이 세 딸들은 말 두 마리를 끌고 와 우리를 태워 주겠다고 나를 기다렸다.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그들은 한 마리에 장승민씨만을 태우고 다른 한말은 빈 채로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벌판을 한 바퀴 돌았다. 말을 타본 경험이 없는 그를 위해 주인이 손수 고삐를 잡은 것이다. 돌아오는 그를 보고 나는 내 자신이 실수하였음을 깨닫고 그들의 성의를 무시한 것을 후회하였다. 장승민씨는 너무 기분이 좋은 지 저녁도 거르고 말았다. 캠퍼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나에게 세 딸들은 궁금한 것을 이리저리 묻다가 11시경이나 되어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한다는 나의 강박 관념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질문에 계속 대답하고 있을 수 없는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고 양해를 구한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횡단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철처히 내 자신을 콘트롤하지 않으면 내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7월23일(수요일) 맑음 오늘도 아픈 왼쪽 다리를 끌며 수센마리 근교의 벨 포인트(Bell Point)라는 캠핑장에 22불을 내고 묵기로 했다. 길옆에서 자면 공짜인데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곳엔 전기와 더운물 샤워 시설이 있어서(우리 캠퍼에도 찬물 샤워는 있지만) 며칠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웃에는 미국 위스콘신에서 왔다는 노부부가 머무르고 있었다. 장승민씨를 통해 우리의 캠페인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노부부는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주며 20불을 성금으로 주기까지 하였다. 오늘도 예상 장소보다 먼 거리에 자리를 잡은 미스터 장에게 불평을 하였다. 내가 바라는 정확성과 가능한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느낀다. 몇 km더 걸은 것으로 인해 말다툼을 하다니.... 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겉에서 보기에는 멀쩡한데 아프다는게 아마 그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순히 듀라셀(DuraCell) 밧데리 선전의 토끼인형처럼 쉬지 않고 걷는 내가 걷는 기계처럼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 7000km대륙 횡단을 무사히 마치려면 나는 기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감정 표현도, 무리한 행동도 자제하며 철저히 나 자신을 관리해야만 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행인 것이다. 그도 애처롭게 나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 정오에는 수센마리 시청에서 시장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게 되어 있다. 시청까지 10여km정도밖에 안 남았으니 오늘은 늦잠을 자도 될 것 같다. 7월24일(목요일) 맑음 나는 아침 9시 30분 캠프장을 출발하여 캠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수센마리(현지에선 “수”-Soo라고부름) 시내로 행진하여 갔다. 입구부터 20여 교민들이 마중 나와 우리와 합류하여 시가행진을 했다. 10여km 남짓한 길이었으나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정오경이나 되서야 시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와 교민들은 시장 스티브(Steve)의 안내로 간단한 점심을 대접받았다. 교민 모두 이 지역에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교수 연구원도 있었고 제법 큰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오늘의 점심 초대도 시장의 이웃집에 산다는 유호익씨가 주선한 것이었다. 오후에 시가 행진을 계속 할 예정이었으나 왼쪽 발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 일정을 바꾸어 병원을 찿았다. 나의 발을 진찰한 인도네시아에서 자원의료봉사를 하고 돌아 왔다는 젊은 여의사 캐시(Cathie)는 나에게 절망적인 진찰 결과를 통보하였다. 증상은 근육이 경직되는 “신 스프린트”(Shin Sprint)라는 것으로 내 왼발은 움직일 때 소리가 날 정도로 근육이 굳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나에게 지금부터 10일간 걷기를 중단하고 쉬면서 좀더 자세한 검사를 위해 X-Ray촬영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일정상 쉬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느냐고 내가 사정을 하자 그녀는 심해지면 못 걸을 지도 모르며 또 앞으로 시작되는 800km구간의 오대호 중 가장 큰 레이크 수피어리어를 끼고 도는 길은 매우 험해 대륙 횡단 중 가장 힘든 구간이라는 설명과 함께 나를 만류했다. 그래도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녀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 뿐 이라며 최고단위 진통제 처방과 얼음찜질을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진통제를 한 통 사들고 바짝 긴장한 채 오후 햇살을 뒤로 받으며 도시를 떠났다. 그 험하다는 길을 따라 진통제를 먹어가며 북상을 시작했다. “수”만 지나면 갑자기 절벽과 같은 길들이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아직 걱정할 정도로 험하지 않았다. 신문과 TV에서 우리의 캠페인에 대하여 취재를 해 갔다. 어렵긴 하지만 오가는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며 격려해 줄 때마다 다시 기운을 내어 걷곤 했다. 오늘도 아픈 다리를 끌고 64km를 걸었다. 그러나 하루 4알 이상 먹지 말라던 진통제의 효과도 시간이 가면서 짧아 졌다. 걱정이 되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계속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겨우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왼쪽발의 고통으로 인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엊저녁 아픈 왼쪽 발에 전기 찜질을 하다 잠이 드는 바람에 입게 된 화상때문에 쓰라림까지 겹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의사의 권유에 따라 얼음찜질을 한 것이 근육의 경직을 심화 시켰다. 나도 근육이 굳으면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고 그녀의 말대로 한 것이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7월25일(금요일)맑음 이제 발을 땅에 대면 저린 느낌이 들며 엉덩이까지 아파서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라서인지 지도에 위치조차 제대로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힘들게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서더니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성금을 내려는 줄 알고 다가가니 수영복차림의 웬 백인 여자가 나에게 자기의 개인 비치가 저 밑 호숫가에 있는데 원하면 같이 가서 수영을 하자고 했다. 이 더위에 끙끙거리며 걷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니면 더위에 내가 헛것을 본 것일까? 거절하고 돌아선 나의 머리에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여운이 남았다. 레이크 수피어리어(Lake Superior) 주위의 전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호수의 물로 인해 대기 온도가 한 5도쯤 낮아져 걷기에도 좋았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한국 동해안의 바다와 육지의 위치가 바뀌어진 것으로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잠자리에 도착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거대한 호수위로 잠겨 가는 타원형의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다리를 고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7월26일(토요일) 맑음 왼쪽 발을 끌다시피하며 40여 km를 걸은 오후 네 시경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장승민씨와 의논하여 팬케익 베이(Pancake Bay) 주립공원에 들어가 하루를 쉬기로 했다. 거대한 호숫가옆에 캠퍼를 세우고 쉬기로 결정하고 더위에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아파하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그도 나의 반만큼은 아팠는지도 모른다. 장승민씨는 금새 주위의 아이들과 친해져 호숫가에 나가 맨발로 조개껍질이며 모양 좋은 돌들을 줍고 있었다. 나는 샤워 후 잠을 청하려 했으나 그는 이 좋은데 와서 왜 벌써 잠을 자느냐고 성화를 해 대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고 물놀이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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